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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沙鉢通文),
사기 밥 그릇을 통칭 사발이라 한다.
사발은 둥글다.
통문이란 통지문 아닌가.
사발통문은 발기인 대표가 누군지 모르도록
발기인들의 이름을 빙둘러 적었다.
지금은 이메일이 유행하고 있는 것 처럼,
사발통문은 조선 철종대에 크게 유행했단다.
사발통문, 주동자가 누군지 모르도록 했다지만,
지금의 감각으로 볼때 의미가 커보인다.
원탁형 서명양식이 민주적이라는 점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할 일이 많을것 같다.
우선 9시 방향 틈새에 내 이름을 널일이다.
말목장터 오리주물럭이 맵디매웠다.
녹두나물을 찾았다.
조정미
통문(通文)이란 조선시대에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이다. 일반적인 편지와 다른 점은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사실이나 주장을 다수에게 공개적으로 전달하려는 데에 있으며, 백성이 억울한 사정을 관청에 올리는 소지(所志)나 국왕에게 의견을 올리는 상소(上訴)와 다른 점은 백성들 간에 서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여론을 형성시키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통문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미디어라는 측면에서 최근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와 유사성을 지닌다. 통문의 활용방법은 다양하였는데, 가장 많이 통용된 것은 서원·향교·유림에서 보낸 ‘유통(儒通)’이다. 유통은 이들 공동체 소속원간의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분강서원창원일기”에 의하면, 이현보(李賢輔) 선생의 144주기를 맞이하여 영천이씨(永川李氏) 문중 사람들은 서원을 건립하기로 결의를 한 후, 분강서원 건립을 마무리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통문을 이용하여 진행한다. 문중 사람들에게 통문을 보내 서원건립을 위한 재정적 분담금을 공지하며, 서원 건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우리 집안은 자손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또한 한미(寒微)하여 제각각 생업을 제대로 꾸려가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아무 것도 없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어찌 크게 걱정하고 염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먼저 상의를 해서 다음과 같이 분담하기로 하고 감히 알려 드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집안사람 모두가 한 마음으로 호응하여 기한 내에 거두어 본소로 보내주셔서 큰 일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1699년 6월 2일 분강서원창원일기(汾江書院創院日記) 중
정치여론을 형성하거나 의병을 일으키는 데에도 통문이 사용되었다. 1621년 김령(金坽)은 예천 선비들로부터 통문을 받는데, 그 내용은 이이첨(李爾瞻)을 죽일 것을 청하기 위해 안동에서 모여 상소문을 가지고 대궐로 출발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사소통이 통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권방(權訪)의 “천휘록(闡揮錄)”에 의하면 만인소를 올리는 과정에서도 통문이 사용되고 있다. 1792년 정조가 경연에 나오지 않고 유흥을 즐기자 유성한(柳星漢)이 상소를 올리게 되었는데, 이 내용을 성균관에 머물던 영남출신유생들이 영남으로 통문을 보내자, 영남의 사림들이 즉시 천리 길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십여 명이 상소문을 필사하였는데 명단에 오른 인물이 무려 만여 명에 이르렀다.
사림(士林)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통문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김령의 “계암일록(溪巖日錄)”에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1622년 선산(善山)의 황익기(黃益奇) 등 40명이 도내에 통문을 돌렸는데, 청렴하고 고지식한 신임감사 김지남(金止男)이 통치를 매우 잘하니 그의 임기를 연장해달라는 간청을 비변사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흐뭇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방의 토호들인 사림들과 중앙에서 부임한 지방관 사이에는 갈등이 빚어지게 마련이었는데, 이때 사림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통문을 돌려 지방관의 진퇴문제를 논의하는 미디어로서 활용하였다.
천휘록에 기록된 정조 16년 만인소.
힘없는 유생들은 통문으로 연락하고 결집하여 만인소로 여론을 만들어냈다. (출처 : EBS 역사채널e)
조선왕조실록에도 통문에 대한 기록이 226건 남겨져 있는데, 태종 1건, 세종 2건, 문종 1건, 성종 3건, 중종 5건 정도로 조선 초기에는 드물게 나타나던 것이 숙종 36건, 영조 15건, 정조 26건 등 조선 후기에 급증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발통문(肆發通文)이라고 하여 ‘방자하게 멋대로 통문을 돌렸다’는 표현으로 심한 비판을 하는 사례가 2건 남아 있다.
조상본(趙常本)은 본래 교활한 성품으로 남모르게 고을의 권력을 잡고 어리석은 백성의 소장(訴狀)을 대신 지어 전 수령을 모함하였고, 관리를 모욕하는 토착민을 편들어 멋대로 통문(通文)을 돌렸습니다. 아전 한 명의 죄를 다스리지 못한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인데도 이로 인해 노여움을 품고 권위에게 붙어 서로 동조하여 서울과 지방 각지에 전파하였으니, 지극히 음흉합니다.
- 정조실록 34권, 정조 16년 3월 14일 癸未 4번째 기사
정조 16년(1792) 3월 14일, 평택 현감 이승훈(李承薰)이 조상본(趙常本) 등 지역의 토호들에게 모함을 받은 것을 평택 안핵 어사 김희채(金熙采)가 조사하여 보고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수령을 모함하기 위하여 토착민을 편들어 통문을 멋대로 돌렸다고 하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통문을 돌려 감사를 비방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었다. 세종 2년(1470)부터 시행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란 법령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관은 국왕을 대리하여 정사를 행하는 사람이고, 백성들의 부모와 같은 존재이므로, 아무리 지방관들이 탐오하고 무도하여도 직접 이들의 부패상을 고발하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역죄와 불법살인죄를 제외하고는 수령을 고소하는 행위는 허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윗사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만들기 위해 통문을 돌리는 행위, 그 자체가 임금에 대한 반역과 같은 수준으로 여겨지는 현상은, 조선시대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성균관 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아! 통분합니다. 인심이 못된 데로 빠져 변괴가 거듭 발생하였는데, 형조의 두 죄수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낮은 신분으로 감히 흉측한 마음을 품고 함부로 통문을 만들어 성균관에 돌렸는데, 말이 알쏭달쏭하고 인용한 바가 매우 어긋나 글자마다 간특하고 구절마다 흉악하였으므로, 이목을 가리기 어렵고 손발이 다 드러났으니, 듣는 자는 머리카락이 치솟고 본 자는 간담이 뒤흔들렸습니다.
-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3월 20일 乙丑 1번째 기사
여기서 이야기하는 두 죄수는 신정조와 한정진을 가리킨다. 신정조(申鼎朝)는 1822년(순조 22) 2월에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강세귀(姜世龜), 이광좌(李光佐)를 성토하는 통문(通文)을 돌렸다가 죄를 받아 진도군 의신면 금갑도에 정배하여 노비가 되었으며 10년 만에 방면되었다.
전형적인 봉건주의 국가였던 조선사회에서 일반 백성들로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단체행동을 한다는 것은 반역에 이르는 행위였지만, 통문을 돌려 여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위험성이 있는 사안에 대해 통문을 돌리는 경우 연명(連名) 방식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일렬로 이름을 기록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둥글게 이름을 돌려씀으로써 누가 주도자인지 알 수 없게 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고 부른다. 방자하게 제멋대로 통문을 돌린다는 뜻의 “사발통문(肆發通文)”과 동음이의어인 것이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사발통문은 18세기 초엽부터 보부상들이 사용하던 독특한 연락방식이다. 당시 보부상들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를 받는 존재들이었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상단(商團)은 강한 단결력과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한 절대적인 것이었다. 특히 혼자 활동하는 보부상들의 연합체인 상단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발통문이었다. 보발과 마발을 통해 사발통문을 돌렸으며, 비용은 발송 주체가 모두 부담하였다. 그만큼 불요불급한 일에 사발통문을 돌렸는데 전쟁 또는 부역 등 나라에 일이 있거나 나라가 위급하여 보부상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경우, 산에 관한 소유권이나 산소 사용권 등으로 크게 시비가 벌어진 경우, 보부상이 아내를 잃어버리거나 상처를 했을 때, 시장에서 보부상간에 또는 보부상과 관원이나 일반인 간에 시비가 있는 경우였다고 한다.
보부상 (권용정, 19세기 후반)
(출처 : 한식아카이브)
이렇게 시작된 사발통문은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민중저항이나 임오군란과 같은 대관항쟁(對官抗爭)에 등장하게 된다. 임오군란은 고종 19년(1882) 6월 9일에 시작되어 7월 13일에 종결되었는데, 사건 종결 후 8월 21일의 실록에는 “군인이나 장사치들이 사발통문을 도당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여 패악한 짓을 하고 난을 일으키고 있으니 엄히 금하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고종이 “법을 만들어 엄히 금하겠다.”고 허락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1893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들이 작성한 사발통문
(출처 : 우리역사넷 contents.history.go.kr)
그렇다면 사발통문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행히도 사발통문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사례가 남아 있다. 동학군의 제1호 통문으로서 1893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 명이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탐관오리들을 제거하며,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곧장 올라가자는 것을 결의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송준섭(宋俊燮)의 집 마루 밑에 7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족보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20명의 이름이 둥글게 쓰여 있는데, 한문 이름과 함께 한글 이름이 쓰여 있다. 한자 옆에 한글을 병기하는 것은 본문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시에 한글 이름이 널리 통용되었다는 것과 함께 한문을 모르는 자들도 쉽게 읽게 하려는 배려가 담겨 있다. 앞부분의 내용을 현대어로 풀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격문을 사방에 날려 보내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솥 안의 탕이 끓는 것처럼 요란하였다. 매일 난리가 벌어지기만을 바라왔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살아남겠나」 라 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더라.”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고소하는 것 자체가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라는 법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봉건적 사회구조 속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난리”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은 상하 소통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는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수평적인 소통방식을 선택한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사발통문이다.
서양에도 사발통문이 존재하는데, 라운드 로빈(round robin)이 그것이다. 서명자의 순서를 감추기 위한 사발통문(沙鉢通文)식 청원서(탄원서), 원탁회의를 의미한다. 라운드 로빈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는데 왕에게 어떤 청원을 올릴 때에 주모자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와 같은 서명방식을 택하였다.
17세기 프랑스에서부터 쓰여진 서양판 사발통문 라운드 로빈(round robin)
(출처 : 위키피디아)
사발통문은 주모자를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실질적인 목적과 함께, 참여자들이 모두 평등한 관계이며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아더왕과 기사들이 함께 원탁에 둘러앉음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상하관계에 얽매여 있던 봉건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택한 횡적 연대인 커뮤니티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사발통문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6년도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시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2016년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측의 일방적인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미래라이프 대학) 참여 철회를 위해 점거시위를 시작하자, 최경희 총장은 직접 1,600명의 경찰을 투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학생들을 소환하고 주동자를 지목하려 하자, 2016년 8월 31일 “우리 모두가 주동자”라며 이화사발통문이란 대자보를 게시하였다.
성명서 내용에 의하면 5일간 5,595명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참여하였으며, 학생들 가운데에 주동자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단체행동 참여자들의 이름을 원형으로 작성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기존의 상명하달식 의사 전달 체계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시위체계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2016년 이화여대의 시위는 정유라 부정입학 문제와 함께 최순실 게이트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민심은 어떻게 해야 하늘의 마음을 움직일까? 혼자만의 생각이나 행동으로는 천심이 될 수가 없다. 서로의 마음이 합쳐져야 하고 하늘의 뜻에 합하는 행동을 함께 해야 좋은 세상으로 변화하는 첫 발자국을 디딜 수 있다. 우리는 지난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였다. 일천만의 시민이 모였던 촛불의 현장이 가르쳐준 소중한 가르침은 “역사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흔들리지 흔들리잖게” 둥글게 스크럼을 짠 자발적인 참여자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처럼, “우리 모두가 주동자입니다”라고 함께 외치는 사발통문의 메시지가 하늘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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