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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 제 8장 성전 봉헌식
마침내 솔로몬 성전이 완공되었고 그 성전의 낙성식으로 그려지는 봉헌 제사가 거행되었다. 이 봉헌 제사는 전 국민적 행사였으며 이스라엘의 관심이 봉헌식이 거행되는 성전 앞뜰에 모아졌다. 이는 성전을 중심하여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봉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 내소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가 안치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야말로 신인일체의 참된 연합 상태를 보여 주는 절정인 것이다.
1. 법궤의 안치 (8:1-11절)
법궤가 안치되자 하나님께서 성전을 가납하셨음을 의미하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이는 성전 건축에 화룡점정과 같은 순서였다. 왜냐하면 성전을 성전이도록 하는 것은 바로 법궤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언약의 돌판 때문이다. 솔로몬은 장로들과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소집했는데 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였느냐 하는 것이다. 2절에 에다님 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소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6:38절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친 시기가 솔로몬 즉위 11년 ‘불 월’ 곧 8월이다. 그렇다면 8월에 끝난 건축의 낙성식이 어떻게 7월에 거행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성전이 완공된 해 7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거족적인 대 절기인 초막절에 맞추어 한 달 앞당겨 봉헌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둘째, 성전을 완공한 후 그 다음 해 7월이라는 견해인데 성전의 기구를 만드는데 1년을 걸렸을 것이므로 봉헌식은 그 다음 해 7월에 거행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모두 완공한 후라는 견해인데 7장의 순서를 따라 모든 공사를 완공한 후 봉헌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대개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나 두 번째 견해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견해는 성전이 완공된 후 13년이나 건물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무리한 해석이라고 본다.
다시 정리해 보면 8:1절에 ‘이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즈’라는 이 말은 상당히 폭 넓은 말이기 때문에 ‘성전 완공 한 달 전에’ 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6:38절에 ‘팔 월’은 봉헌식이 다 끝난 시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마무리가 팔월에 끝났을지라도 성전의 봉헌식은 전통적인 절기인 칠월의 장막절에 맞추는 것이 의의가 깊으므로 앞당겨 봉헌했을 수도 있다. 오랜 숙원 사업이자 거국적 최대 관심사인 성전 봉헌식을 해를 달리할 정도로 미루었을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기구 제작 기간을 고려해 본다면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다음 해에 치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성전의 건물은 7년 만에 준공을 마치고 봉헌식은 모든 기구가 다 제작된 그 다음 해에 드렸을 것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견해라고 본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렸다. ‘시온’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구릉의 이름인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다윗 성’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이곳 다윗성에 장막을 설치하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임시로 안치했던 것이다. 이제 성전이 완공되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봉헌식은 이스라엘 민족의 뜻 깊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장로와 족장들은 중앙의 관료들이 아니라 인격이나 지혜나 무용 등으로 인해 혈연과 지파 중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지나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성전을 건축하려 했을 때에도 다윗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건축 재료를 위해 자신들의 보물을 기꺼이 바치기도 했다. 그러므로 백성의 대표자인 이들을 소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이 다 모인 것은 백성들이 다 모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에다님 월’은 ‘시내에 물이 흐른다.’는 뜻으로 유대 종교력으로 7월이며 양력으로는 9-10월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며 이른 비가 내리는 때로 이때 시내기 흘러내리기 때문에 명명된 월명이다. ‘일곱째 달’이라는 말이 첨가된 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티스리 월’로 바꾸어졌기 때문이다. 7월이 절기라는 말은 그 자체로 ‘초막절’을 의미하며 초막절은 7월15일부터 시작하여 7일간 거행되는 절기로 수확의 절기이며 장막절이라고도 부른다. 초막절은 그 순서에 있어서 계약 율법이 낭독되었는데 이것은 초막절이 계약 갱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기에 율법이 기록된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것을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초막절 절기는 광야 40년 동안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풍성한 수확을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던 언약궤를 영구한 안식의 장소인 성전에 안치하는 일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절에 제사장들이 궤를 메었다고 했는데 민수기 규례에 따르면 법궤는 레위인들이 메어야 하고 그 중에 고라 자손이 메어야 했으나 고라 자손들도 그 궤를 손으로 만질 수는 없었다. 율법을 몰랐던 다윗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회수할 때 그것을 수레에 싣게 하였고, 웃사는 언약궤에 손을 대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었던 것이다. 이제 솔로몬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법궤를 메게 한 것이다. 솔로몬이 언약궤의 운반을 고핫 자손에게 맡기지 않고 상위 직위인 제사장들에게 직접 맡긴 것은 성전 봉헌식을 더욱 경건하고 비중 있게 거행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직접 멘 실례는 두 번 있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 도하 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강물에 발을 먼저 딛었으며, 여리고 성을 돌 때에도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을 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했을 때에는 고핫 자손들이 언약궤를 메었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언약궤는 제사장들이 메었고 다윗 시대에도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라 피난길에 나섰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 언약궤는 다윗이 장막을 친 시온 산 성막에서 근 40년 간 머물러 있었다가 이제 솔로몬 성전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기브온 산당에 있던 회막과 모든 기구들 즉 놋제단, 향단, 떡상, 촛대, 물두멍, 등도 모두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메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 솔로몬 성전에는 새로운 기구들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모세가 만든 옛 기구들은 언약궤를 제외하고는 이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운반된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기 전에 제단이 있는 안뜰에 우선 놓여 졌고 왕과 백성들은 법궤 앞에서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성대하게 베풀었다. 이 제사는 정결만을 위한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잔치와도 같은 기쁨과 화목의 제사였던 것이다. 제사장들은 모든 순서가 끝나자 법궤를 메고 지성소 안에 모셨는데 법궤가 제 위치에 안치됨으로써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모세 성막의 다른 기물들은 솔로몬 성전의 규모에 맞추어 다시 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법궤는 시내 산에서 만들어진 바로 그것을 그대로 옮겨와서 지성소에 안치한 것이다. 법궤는 금으로 만들어진 그룹들의 날개 아래 안치되었기 때문에 설혹 지성소 문을 열었다고 해도 항상 어두운 상태로 있게 하였다. 출25:15절의 규정에 의하면 채를 법궤의 고리에 꿴 채로 두어야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야에서 언제나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지만 지금은 영구적인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의 채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광야 생활 동안 나그네로 지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과 동시에 지금도 역시 하늘 가나안을 바라보며 나그네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본서가 기록될 당시 솔로몬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고 법궤나 그에 딸린 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그곳에 있으며’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법궤 안에는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십계명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 시대와 사사시대, 사울과 다윗 시대를 거치는 근 500년 동안 나머지 물건들은 없어진 듯하다. 아마도 엘리 제사장 당시 법궤가 블레셋에게 일시 탈취 당했을 때 유실되었을 것이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하고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다. 이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영광스러운 ‘그 구름’이다. 이 구름은 호렙 산 아래에서 회막의 봉헌식에도 나타났고 지금 성전 봉헌식에도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모세의 성막을 승인하셨던 하나님께서 솔로몬 성전을 자신의 임재 처소로 승인하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는데 이 역시 모세가 회막의 구름으로 인하여 회막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과 같다. 즉 그 당시의 일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구름이 성전에 가득한 것이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것이라는 것은 구름과 영광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강렬해서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름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외피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구름은 곧 영광 그 자체라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빽빽한 구름으로 당신의 임재의 가견적 표식을 삼으신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당신의 임재를 알리시고 교회를 시작하셨다.
2. 솔로몬의 봉헌사 (8:12-21절)
성전에 가득한 구름과 여호와의 영광을 본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열납하셨음을 확신하고 감격한 나머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봉헌사이다. 하나님께서 언제 솔로몬에게 자신이 캄캄한 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구름과 흑암 속에 계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출19: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아뢰었으므로..
여기 ‘캄캄함’이라는 것은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 또는 인간의 사고가 불가능한 곳을 의미하기 때문에 ‘캄캄한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지존하심을 시인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계실 성전을 건축했다고 한다. 솔로몬은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라고 했는데 그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광야를 유랑하던 성막이 갖는 이동성과 임시성에 비해 정착과 안정이 있는 성전의 영구성에 근거한다.
둘째,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구한 왕위를 세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에 구름이 나타나는 장면을 응시하면서 성전을 건축했음을 고한 후에 그는 몸을 돌이켜 백성들을 바라보며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였다. 축복은 제사장만이 하는 고유 권한이지만 ‘바라크’라는 말의 의미는 다양하여 때로는 백성이 왕을 축복하였을 때에도 이 말이 사용되었다. 또한 축도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축복은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경축사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한 것이다. 솔로몬의 경축사는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다는 것을 주재로 하고 있다.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왕위와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 언약’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아들 솔로몬을 세워 다윗의 위에 앉도록 하시고 나라를 견고하게 하셨으며, 솔로몬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난 후 자신의 이름을 둘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중에 그 어떤 지파나 성읍이나 택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주권자로 삼으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의 백성들 사이에 계시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집,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집을 짓도록 명령하지 않았지만 다만 수많은 나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중에서 다윗을 택하여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78:70-72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다윗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는데 단지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심장을 비롯하여 감정, 의지를 통틀어 열렬히 희망했던 것이다.
*대상17:1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다윗이 품은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고 그 자체를 기쁘게 받으셨다. 그러나 그 성전은 다윗이 건축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삼하7:5-7절에 하나님은 지금 당장은 백향목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국내외 정세가 불안정했으며 백성들이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대상22:8절에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전은 평화의 사람이 평화로운 시대에 건축해야 함으로 다윗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나 바울이 스바나로 가지 못한 것과 비견할 수 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부여 받은 사명이 있으며 그 다음의 사명은 다음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열심은 성전 건축을 위한 소원으로 불타올랐으며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다윗은 간축 자재를 마련하고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으며 그에게 성전의 양식까지 소상히 계시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건축 사업은 솔로몬에게 위임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 개념이 여실히 드러났으며 다윗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를 흔쾌히 순복하였고 솔로몬은 그의 아비의 대를 이어 건축 사업을 완공시킨 것이다. 솔로몬은 출애굽 사건과 성전 건축 사건을 긴밀히 연관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는 4가지이다.
첫째, 성전의 핵심적 가치를 결정짓는 요체는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장소라는 데 있다.
둘째, 이 임재를 보증, 또는 표징하는 것은 바로 언약궤이다.
셋째, 이 언약궤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사실에 기인한다.
넷째, 성전 건축의 의의 및 가치는 출애굽을 기점으로 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성전의 가장 은밀한 지성소에 안치했던 것이다.
3. 솔로몬의 중보기도 (8:22-53절)
봉헌사를 마친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먼저 왕실의 번영과 존속을 위해 기도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다윗 언약에 의거한 간구이다. 그리고 나서 백성들을 위한 특별 기도를 한다. 서원, 전쟁, 재해, 포로생활, 등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겪어 왔거나 앞으로 겪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달라고 간구했다.
솔로몬은 번제단 앞에 마련된 연단 위에서 온 회중과 마주 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했는데 대하6;13절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한다. 하늘을 향하여,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편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백성의 대표자로서 공적 예배를 인도하는 목자 혹은 중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공중 기도의 하나이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23절에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많은 신들 중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제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천지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말이다. 비록 다른 민족의 눈에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신으로 비쳤지만 여호와는 온 세계 중에 오로지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시86: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이어서 여호와는 온 마음으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다. 이는 솔로몬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신앙고백인 동시에 백성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란 불가능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시는 권능을 함께 하는 것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우리를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목전의 환난에 좌지우지하지 아니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데 24절에 허락하신 말씀을 지키시고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이루어주심에 감사했던 것이다. 여호와는 천지만물을 홀로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입으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주권자의 크신 능력의 손으로 반드시 이행하시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다.’는 말 ‘카욤 하제’는 눈앞에 전개된 일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성에 감사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25절-26절에 다윗 왕가를 위한 간구를 하고 있는데 이 기도의 핵심은 삼하7:8-16절에 나오는 다윗 언약에 근거한다. 다윗은 향후 이스라엘 열왕들의 행적을 가치 판단하는 표준과 척도가 된다. 다윗이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라는 조건이 붙게 된 것이다. 이는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곧 인격적 관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제로 성전이든지, 언약궤든지, 제사든지, 그 안에서 인간과 만나시는 분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언약에 있어서도 언약을 매개로 인간과 대면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의 주인이시지 결코 언약에 속박된 분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성전도 완공되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윗의 가계를 통하여 영원토록 왕위에 오를 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뿐이었다. 솔로몬은 이러한 약속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물론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솔로몬은 그 약속을 확실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확실하게 하다’라는 말로 번역된 ‘예아멘’은 ‘아멘’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네 번째로, 지극히 크시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은 성전에 거하시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면서 27절에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이방의 무수한 신들은 땅이나 산 즉 제한된 지역의 신으로 숭배 받았으나 솔로몬은 올바른 신,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의 하늘’이라는 말은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관이다. 이 말은 겹쳐진 하늘 중에 최상층이라는 표현이다. 즉 우주 전체로도 담아낼 수 없는 무한한 하늘을 말하고 있다. 그 하늘도 하나님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개 건물에 지나지 않는 땅에 있는 작은 성전이 하나님의 처소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은총으로 성전을 인간을 만나시는 당신의 처소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나 후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류에 빠져 자주 불순종과 불신에 빠지면서도 무조건 성전을 마치 하나님을 묶어 놓은 장소처럼 생각하는 개념을 가졌던 것이다.
*렘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나님은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대주제이시지만 당신의 백성을 향한 사랑으로 거하실 처소를 마련토록 하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비하와 크신 긍휼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드린 기도 즉 ‘테필라’는 ‘중재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솔로몬은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그의 기도를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라 하였는데 하나님의 자비와 동정을 필요로 하는 어떤 슬픈 처지를 전제로 하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다섯 번째로, 29-30절에 성전에서, 혹은 성전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전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주의 눈이 주야로 성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기도를 매개해 주는 장소인 것이다.
*시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이러한 성전의 핵심적 특성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사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성전을 인간과 만나는 장소로 정하셨기 때문에 솔로몬은 이 점을 상기시키면서 성전을 향해 비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정한 처소는 ‘하늘’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 하늘에서 들으시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처소를 하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이 내포된 말로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31절부터 53절까지는 솔로몬의 특별 간구 내용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주기도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약의 수인 ‘일곱 가지’의 간구로 되어 있다.
첫째, 맹세에 대한 간구이다.
31-32절에 맹세에 관한 규례는 모세의 율법에도 규정되어 있으며 맹세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사실성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바를 이행하지 않거나 거짓 맹세를 일삼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게 됨을 물론 공동체 내에서 불신과 불의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이 일곱 가지 서원중에서 맹세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맹세를 강조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보존되기를 바랐으며 동시에 신정 국가에 공의와 의리가 확립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간구는 주기도문의 첫째 부분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와 그 내용이 일치한다.
어떤 사건의 재판에 있어 도저히 판결을 내릴 수 없거나 증인들을 내세울 수가 없게 되면 판결을 종결하기 위하여 맹세를 시켰다. 즉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맹세를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오직 맹세의 대상자가 되시는 진리의 하나님께서 판결하실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맹세하는 자는 성전 안뜰에 있는 번제단 앞에서 맹세했는데 이 제단을 ‘평민의 제단’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선악에 대해 보응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주요 주제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 여하에 따라 저주와 축복의 보응이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정 국가의 공의를 올바로 세우는 목표인 것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의 맹세에 대한 올바른 보응이 임하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이다.
두 번째 간구는 33-34절에 범죄의 결과 이스라엘이 적국에 패배할 경우 그에 대한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은 그 설립 기원이나 존속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 이후에 수차례나 경험했던 것으로 그 때마다 백성들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로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솔로몬은 후일 다시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패배와 포로됨의 징계를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하나님의 사죄와 회복의 조건을 전제로 내세운 것이다. 즉 진정한 회개와 주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조상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단순히 군사적 점령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업이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기업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시금 언약의 충실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번째 간구는 35-36절에 가뭄 즉 한재를 당할 때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비가 하나님의 귀한 선물로 간주되었듯이 ‘가뭄’은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가뭄이 닥칠 경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 주실 것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한 것이다. 가뭄의 원인은 ‘주께 범죄함’이라고 했으며 그 대가는 ‘주께 벌을 받는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는 것을 조건부로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고 저들에게 필요한 비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을 인정한다는 것을 그 이름을 가진 이의 권위 및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그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 숭배를 떠나 유일신 여호와 신앙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에서 ‘떠나다’라는 말 ‘슈브’는 죄에서 돌아서서, 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소극적 행위이지만 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적극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선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가르치다’라는 말 ‘야라’는 어떤 주체의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로 재난을 당했을 때 불현듯 임하는 깨우침 같은 것이다. 즉 자신들이 원하지 않던 가르침이 복병이 쏜 화살처럼 예기치 않게 날아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내적 소질의 개발과 같은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무자격자에게 고통을 통해 강권적으로 임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네 번째 간구는 37-40절에 불순종과 배교의 결과 하나님의 징벌로 닥칠 수 있는 온갖 재앙들 즉 기근, 온역, 황충, 난리, 질병 등이 임할 때 이스라엘이 그러한 징벌의 원인을 깨닫고 회개하면 용서와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고 그러한 재난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내용이다. ‘온역’은 전염병, 악성 유행병을 의미한다. ‘메뚜기나 황충’은 농작물을 헤치는 곤충이다. 솔로몬 당시는 애굽이나 앗수르가 쇠퇴 일로에 있었기 때문에 강대국 이스라엘은 적국의 침입에 대해 별로 염려할 바가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후대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모든 재앙을 예견하고 미리 기도한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각각 자기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기도하거든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솔로몬이 강조하는 바는 죄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과 회개, 어떤 종교적 의식보다는 마음의 상태 즉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의 진실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온전히 분별하시고 그에 따른 판결을 내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주를 경외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인 것이다.
다섯 번째 간구는 41-43절에 특별히 이방인들을 위한 중보기도였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할 때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베풀어질 수 있도록 간구했다. ‘이방인’이라는 말 ‘노크리’는 이스라엘에 귀화한 자들을 일컫는 체류자 ‘게르’와는 구별된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일시적으로 방문한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이다. 예를 들면 스바 여왕이나 나아만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또 정치적 목적으로 입국하는 각국의 사절단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대해 개방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세상 만민’을 향한 개방성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 우주적 통치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이름과 크신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성전에 와서 기도할 때에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대로 이루어 달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게 되고 주를 경외하게 되고 솔로몬 성전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다. 후일에 바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 열려진 구원을 말하였을 때 그것은 구약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옳게 증언한 것이다.
여섯 번째 간구는 44-45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곳에서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그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은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로 믿었다. 그러므로 전쟁터에 종군하는 것은 ‘주의 보내신 길’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고 그 전쟁에 관한 모든 일을 돌아보시고 결코 전쟁에서 패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일곱 번째 간구는 46-51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죄 값으로 적국에 포로로 잡혀갔을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나타났고 다니엘의 기도가 대표적인 것이며 그 후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관습처럼 굳어졌다. 바벨론 포로생활의 애환과 회복의 염원을 노래한 시편 137편은 솔로몬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솔로몬은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고 실토하고 결국 그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발생할 것을 전제로 하여 기도를 드린 것이다. 솔로몬은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포로가 되는 것은 범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적에게 패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때 그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 주께 간구하면,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주께서는 그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라는 것이다. 솔로몬의 이 말은 후일 바벨론 포로 시절에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죄를 깊이 통회하였을 때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것은 가나안 땅-택하신 성읍-성전으로 점점 좁혀져 가고 있다. 이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사모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이스라엘의 적들로 하여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분이 아니라 이방의 통치자로서 당신의 뜻대로 이방을 지배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솔로몬은 철풀무 같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셨다고 했다.
52-53절은 솔로몬의 일곱 가지 간구 내용을 두 가지로 결론적으로 요약한 부분이다.
첫째, 과거에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회상하며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확신하고 있다.
둘째, 확신의 유력한 역사적 근거로서 출애굽 사건을 상기했다. 진정 애굽은 이스라엘을 연단하게 하는 풀무였을지언정 궁극적 심판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눈을 든다는 표현은 인간을 살피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며, 반면에 하나님이 눈을 가린다는 것은 인간의 기도와 요청을 무시함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기도를 시작할 때 29절에 ‘종의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라고 했고 30절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라고 했으며 이제 기도를 마칠 때에도 52절에 ‘주께 부르짖는 대로 들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가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주의 산업이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며 동시에 ‘거룩한 백성’이다. 이렇게 세상 만민 가운데서 구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타민족과 구별된 선민이요, 열방 중에서 제사장 나라로 봉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4. 솔로몬의 축사 (8:54-61절)
백성들을 위한 기도를 마친 솔로몬이 이제 백성들에게 축복과 권면의 말을 주고 있다. 이 장면은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백성들을 축복했던 모세를 방불하게 한다. 그 내용도 모세의 연설의 요약판이다.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솔로몬이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는 부분과 백성들을 축사하고 당부하는 부분이다.
56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에게 태평을 주셨다고 하였다. ‘태평’이라는 말 ‘메누하’는 ‘안식’이라는 뜻인데 이 안식의 약속은 신명기 12:9-10절에서 주어졌다. 이 안식은 여호수아에 의해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다윗 시대를 거처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성전이 건축됨으로 비로소 성취되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호리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격스럽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57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라는 말 중에 ‘함께’라는 말 ‘임’은 친교와 교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고난이든 번영이든 같이 경험하는 관계를 의미하는데 이 관계는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함께 동참하는 관계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셔서 수치든 실패든 공동으로 겪으시는 은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떠나다’라는 말 ‘아자브’는 ‘버리다.’ ‘포기하다’라는 의미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을 때 ‘사박’이라는 말이 ‘아자브’에 해당하는 아람어이다.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가 ‘아자브’인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연단을 위하여 징계로 곤경에 일시 처하게 하시는 경우와, 인간의 심중을 알아보기 위하여 떠나시는 경우가 있다. ‘버리다’에 해당하는 말 ‘나타쉬’는 ‘배척하다’ ‘거절하다’라는 의미로 ‘아자브’에 비해 좀 더 거부의 뜻이 강한 말이다.
58절은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간청하고 있다. 인간이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께로 마음을 향하여 주의 모든 길로 행하게 하시며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여기 언급한 세 가지 규례들을 지킨다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까이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일과 백성들의 일을 하나님께서 관심해 달라는 것이다. 마치 아린아이가 부모의 지극한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간곡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매일의 풍성한 은혜를 받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세상 만민이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솔로몬은 자신의 뜻을 밝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서 하나님과 화합하며 온전하게 되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즉 성전 봉헌으로 왕과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순종과 헌신으로 불타오르고 있듯이 언제나 이와 같은 마음, 이와 같은 신앙으로 순종을 삶을 삶으로써 번영과 평화를 누리라고 한 것이다.
5. 화목제의 희생 (8:62-66절)
봉헌식의 모든 순서가 끝난 후 솔로몬이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거대한 규모의 화목제를 드리고 있다. 이 화목제로서 성전의 낙성식은 그 절정에 달했는데 화목제는 즐거움과 감사를 표현하는 일종의 축제였다. 대하7:4-10절에 의하면 백성들은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을 불렀다. 또한 전국에서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와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하나님 앞에 혼연일체가 되어 왕과 백성들이 즐거운 잔치를 벌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함께 제사를 드리는 왕과 백성들의 모습은 진정 신정 통치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화목제의 희생’이라는 말 ‘제바흐 쉘라밈’은 제사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소가 이만 이천 마리, 양이 십이만 마리였다. ‘낙성식’이란 가옥이나 성전을 완공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식을 의미한다. 후에 유대인들은 ‘하눅카’라는 절기를 지켰는데 이는 ‘수전절’이라는 의미로 곧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여 더럽힌 것을 재건하고 성결하게 하여 재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전 앞뜰 곧 제사장의 뜰을 거룩히 구별하여 임시적인 제단을 삼았는데 이는 본래 번제단 만으로는 봉헌식 때의 많은 제물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룩히 구별하다’라는 말은 ‘카다쉬’를 번역한 것인데 거룩의 기본 의미가 구별이기 때문에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카다쉬’의 반대말은 ‘홀’인데 ‘속된 것’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 절기 7일과 초막절 7일을 합하여 십사일을 절기로 지켰다. 이때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강까지 온 이스라엘의 큰 회중이 왕과 함께 하였으며 초막절 절기가 끝난 날 7월 22일에 폐회 축제가 있었으며 그 다음 날 백성들이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은 다윗과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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