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다음자료는 작년 자료를 몇군데 수정을 해서 올려본다. 장월 대보름날을 그냥 보내려니 섭섭해서이다.
산자수려(山紫秀麗)한 우리 고장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사는 농촌이었다. 명절 중에 설과 정월 대보름 그리고 2월 연등, 추석을 큰 명절로 삼아 여러 가지 민속행사를 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정월 대보름의 추억들을 회상해 기록해 본다.
1.우리 고장의 정월 대보름 풍속
1)오곡밥 먹기
대보름 절식(節食)의 하나로 찹쌀, 보리, 조, 콩, 기장의 다섯 가지 곡식을 넣어 오곡밥을 짓고, 묵은 나물(산나물과 들나물)과 청어, 조기 등의 생선을 차려 온 식구가 모여앉아 먹는다. 소에게도 일 년에 한 번 생선을 빼고 아침에 소죽 대신 오곡밥과 나물과 목화 씨앗을 주었다. 그러나 개에게는 하루 종일 밥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밥을 먹으면 개 몸에 피부병이 생긴다는 속설 때문이였다.
‘자료화면’은 대보름날의 음식들 임
자료하면' 대보름 음식을 짚에 싸서 담 위에 얹어놓아 까마귀밥이 되게 하였다.
2)부럼 깨물기
다른 말로 ‘부스럼(또는 부럼) 깨물기’라고도 하고 ‘부럼먹는다’고도 한다. 또한 그러한 견과류를 일반적으로 ‘부럼’ 또는 ‘부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부럼의 한자 표기는 다양하다. 보름날 아침에 자두나 여문 열매를 깨무는 일을 한다. 부럼을 깨면 1년 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가 단단해진다고 한다. 부럼 깨무는 풍습은 지방에 따라 이박기[齒打] 또는 고치지방(固齒之方)[이를 단단히 한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부럼으로 쓰는 견과류
3)귀밝이 술 마시기
영천 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 세시 풍속의 하나로 귀밝이술을 마신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나오는데,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오곡밥을 지어 먹을 때 데우지 않은 청주 한 잔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그해 일 년 동안 즐거운 소식을 듣는다고 하여 남녀노소 모두가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 시절은 집집마다 명절 때나 제사 때는 술을 담구어 썼다. 일제 말에는 양곡절약을 위해 정부에서는 개인의 술 제조는 금했다.
귀밝기 술로 마시는 청주들
4)줄다리기
설을 지나면 동내 어린이들이 집 집마다 벼 집단을 모아 줄을 만든다. 그 줄을 어깨에 매고 “어화” “어화” 소리 내며 동내를 돌아다닌다. 어른들께서는 잘 한다고 격려를 해 주셨다.
보름날이 지나면 청년들이 인구, 월연 마을 줄다리기를 옛날부터 해왔기에 청년들 중심으로 짚을 모아 굵은 줄을 만들어 행사에 대비했다.
조국 해방 후인 1946년께 대보름을 쇠고 인구, 월연 양 마을 줄다리기 행사가 크게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인구마을에 사셨고, 중숙부께서는 귀국하셔 신용산 경찰지서 옆에 사셨기에 월연마을에 속하셨다. 그래서 두 형제분께서 그 마을 대장이 되셔 줄다리기를 계획하고 추진하셨다.
편 가르기는 ‘앞 거랑’을 중심으로 동편마을인 삼귀리, 충효리, 보현리는 인구 편이고, 서편은 성곡리 용화리는 월연마을 편이였다. 그래서 면 단위 큰 줄다리기가 되었다. 승리는 동편인 인구마을이 인구수가 많고 타동내 사람들도 많아 이겼다.
‘자료화면’ 옛 줄다리기의 풍속도
1990년대 초 대봉교 위에서 대구시가 주관하여 신천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줄다리기 행사를 하였다. 우리 집에서 내려다보고 촬영한 사진 임
5)윷놀이
윷놀이는 29개의 점으로 구성된 윷판 위에서 네 개의 윷가락을 던져, 각각 네 개의 말을 이동시키고, 말이 말판을 모두 빠져나왔을 때 승부가 나는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그 시대에는 딴 놀이가 없어 윷가락만 있으면 어느 곳에나 놀 수 있고 단체경기이기 때문에 단합하여 이기려고 노력하는 재미있는 놀이이다.
기억나는 우리 고장의 큰 행사는 내가 어릴 때 자호정사(강호정)에서 귀미마을과 인구마을의 윷놀이이다. 나는 어려서 참가는 못하고 구경만 했지만 우리집에서는 경산형님, 양동형님, 군위형님 삼 형제분이 참가하셨다. 양편이 이기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대단했다. 모나 윷이 나고 또는 상대편의 말을 잡으면 대청이 떠나갈 듯 춤을 추고 환호했다.
그리고 내가 자라서의 윷놀이는 ‘산대댁’ 사랑채 두 간 대청에서 우리 마을 청년, 딸래, 며느리들이 모여 크게 윷놀이판이 벌어졌고, 푸짐한 음식도 마련하여 즐거운 행사를 한 기억이 난다.
옛날에는 윷판이 없고 ‘겅궁윷말’(윷말과 말판 없이 말로만 쓰는 윷말)을 쓰기 때문에 속이는 수가 많아 다툼이 많았고 그것이 재미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때 삼체계 모임 때 계회 후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여 대소가의 남녀노소 가 어울리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옛 추억을 더듬어보는 우리 삼체계 윷놀이.장면들
6)널뛰기
널뛰기는 정초에 여자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긴 널판지의 중간에 둥근 짚단을 받치고 양쪽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서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놀이이다.
우리 집은 새로 지으면서 널판지가 많았다. 마당가 채전밭에 흙을 고르고 집단을 밭임하여 그위에 널판지를 올려 널뛰기를 하였다. 내가 어릴 때 누님들 또래가 우리 집에서 긴 머리 댕기를 휘날리며 힘차게 널뛰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도 자라면서 잘 뛰는 편이었다.
‘자료화면‘ 널뛰기 풍속도
7)달집 태우기(달불 놓기)
(1)달불 놓기
보름날 오후가 되면 인구마을 청년들은 마당지산에 올라간다. 동쪽 하늘에 뜨는 달을 먼저 보려고 높은 곳인 마당지산 정상에 올라 동쪽 하늘을 응시하다 달이 뜨면 “달 떴다”고 큰소리로 외치면 그 소리가 인구마을 까지 들린다. 그러면 마당가에 꽂어 둔 수수깡으로 만든 여러 잡곡 모형을 모아 타작을 하여 그릇에 담으며 “한섬” “두 섬”하고 큰소리로 외치며 담는다.
산에서는 달집태우기의 일환으로 달 보러 모인 사람들이 소나무 가지 등으로 달불을 놓아 풍년과 안녕을 빌었다. 달불의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간다. 연기 나는 순서는 인구마을 마당지산이 1등이고, 월연 마을은 노적산이 낮아 언제나 2등이고, 아랫귀미 마을은 마을 앞 문필봉이 낮아 3등을 했다.
인구마을 사람들이 달 보러 오르던 마당지산
월연 마을 사람들이 노적산에 올라 달불을 놓았다.
아랫귀미 마을 사람들이 문필봉에 올라 달불을 놓았다.
자료화면‘ 수수깡으로 곡식을 만들어 세워두었다가 달이 뜨면 타작을 한다.
(2)대구의 달집태우기
달집태우기의 유래와 역사는 분명치 않다. 다만 달집태우기가 예축적(豫祝的) 의미를 지닌 기풍의례(祈豊儀禮)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보아 오랜 농경문화의 터전에서 생성되고 전승되어 온 풍속의 하나로 생각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대사회 이래로 달은 물·여성과 연결되어 농경의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질서와 시절의 운행, 자연의 섭리까지도 아울러 상징한다.
이처럼 생산력과 생활력의 기준이 되는 달은 농경 및 어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새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상원(上元)은 그 주술력이 정점에 달하는 시기이므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독 정월 대보름에 달과 관련된 세시풍속, 곧 용알뜨기· 달맞이· 달점· 삼신달받기· 달불음 등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구시도 신천둔치에 중구청 주최로 해마다 달집을 지어 달이 뜨면 불을 놓아 옛풍속을 이어 왔으나 코로나19로 2년째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전에는 해마다 대구시 중구청 주최로 신천둔치에 달집을 만들어 놓고 달 뜨기를 기다렸다
달이 뜨면 달집에 불을 놓아 주민들이 환호하였다. 우리 집에서 본 달집 타는 모습
첫댓글 오늘이 정월 대보름
형님께서 우리의 고유한 유래를 많은 자료를 모으시고 편집하여 올리신 노고에 큰 박수를 드립니다
우리들의 뜻 깊고 아름다운 풍습이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까울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