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구한말, 조선의 운명과 함께 걷다 (1891~1900년) - 1 언더우드 타자기 서울에서 제물포항까지 45km나 되는 거리를 릴리어스는 들것에 실려 갔다. 가마에 앉아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 릴리어스는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고, 고베와 요코하마에 잠시 기착했을 때는 확실히 차도가 느껴질 정도로 몸이 회복되어 갔다. 그런데 요코하마에서 태평양 횡단 증기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언더우드는 큰형에게 뜻밖의 슬픈 소식이 담긴 전보를 받는다. 작은형 프레드 언더우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1891년 3월 25일, 언더우드가 7년 만에 그리운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 작은형 프레드는 동생을 다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언더우드와 가장 우애가 좋았던 형제가 프레드였다. 함께 프랑스의 기숙사 학교에 보내져 열 살, 열한 살에 불과했던 어린 시절, 3년 가까이 꼭 붙어 다니며 서로 의지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경건했으며, 언더우드도 프레드의 권유로 어린 시절 성경의 시편 중 가장 긴 119편을 외운 일화도 있다. 그러나 프레드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폐가 좋지 않아 간유를 먹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아버지와 형을 도와 잉크공장에서 일했으며, 아버지 사후 형과 함께 1882년 브루클린으로 공장을 옮기고, 1885년에는 형과 타자기 부품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해왔다. 그 뒤 점차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국 땅 조선에 나가 있는 동생의 선교를 뒷바라지하는 꿈을 꾸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프레드는 꿈을 채 이루지 못한 33세의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부음을 들은 언더우드는 요코하마의 여관방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흐느끼며 눈물을 쏟았다. 좀처럼 슬픔을 내보이지 않는 언더우드였던 터라, 릴리어스는 무너지는 언더우드의 모습에 놀랐고,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렸다. 미국에 도착한 후 다행히 릴리어스는 곧 호전되기 시작했다. 큰형인 존 T. 언더우드(좌)와 존 T. 언더우드 회사의 잉크 리본지 특허 관련 자료(1888년)(우) ⓒ《언더우드 내한관련 자료집》 브루클린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난 언더우드는, 그사이 형의 회사가 굉장히 번창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설립한 ‘존 언더우드 앤드 컴퍼니’는 타자기용 잉크와 리본, 먹지 등으로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사업의 실패로 언더우드 가족은 가난한 생활을 이어나갔음은 앞서 살펴본 대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형인 존 T. 언더우드가 회사를 이어나갔는데, 그는 아버지와 같은 화학자이자 사업가였지만,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1891년 언더우드가 미국에 귀국했을 때에는 아직 타자기를 자체 생산하기 전이었고, 잉크와 리본지 등을 납품하는 공장이었지만 이미 시장점유율이 다른 회사를 크게 앞질러 존 T. 언더우드는 대단히 성공한 부호가 되어 있었다. 이후 존 T. 언더우드의 회사는 잉크와 리본 납품 회사에 만족하지 않고 확장을 모색하다가, 1895년 독일 출신 발명가 바그너(Franz Xaver Wagner)가 개발한 타자 기계의 특허를 구입하여 개량했고, 1896년부터 ‘언더우드 타자기’라는 이름을 달고 직접 타자기를 생산 하기 시작했다. 1901년 발표된 ‘언더우드 5호 모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후 20년간 200만 대가 팔렸는데, 이것은 같은 기간 다른 모든 타자기 회사의 판매량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수였다. 언더우드 5호는 전무후무한 타자기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어 있다. 언더우드 타자기 공장을 코네티컷으로 옮긴 뒤 코네티컷은 ‘세계 타자기의 수도’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존 T. 언더우드 사후 (1937)의 일이지만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언더우드 타자기는 ‘미래 세계를 대표하는 제품’으로 선정되었다. 한편 언더우드 타자기는 일본어(가타카나) 타자기를 개발해 1923년부터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1949년 공병우(公炳禹) 박사가 개발한 한글 타자기의 생산을 맡아 1950년 초부터 공급했다.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는 최초로 상용화된 한글 타자기로서, 한국전쟁 때 우리 군의 군수물품으로 보급되어 정전 협상문을 써 내려간 바로 그 타자기다. 이렇게 타자기 하나로 글로벌 기업을 일군 존 T. 언더우드는 아직 납품 공장에 머무르고 있던 1891년, 동생이 미국에 돌아왔을 때 고향에 남아 함께 사업을 확장해나가자고 제안했다. 바로 아래 동생 프레드가 떠난 빈자리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 언더우드는 형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존 T. 언더우드는 대신 동생의 조선 선교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됨으로 써 동생의 사역을 돕는 동반자가 된다. 한국전쟁 당시 UN대표 통역장교로 임무를 수행 중인 언더우드 3세 원일한과 원득한. 원일한이 사용하고 있는 한글 타자기에 ‘공병우 Underwood 타자기’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인다.
미국에서의 조선 선교 지원 요청 미국에서 언더우드는 릴리어스와 아기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임시 거처를 마련한 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곧바로 시작했다. 바로 조선에 파송할 새로운 선교사와 선교기금을 모으는 일이었다. 비록 1888년 4월 금교령이 한 차례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전에도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을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다. 정동의 교회에 50명, 100명이 모여 큰 소리로 찬송을 드리고 예배를 드려도 포졸들이 뛰어와 해산시키기는커녕, 교인 중에는 관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 왕실에서도 선교사들에게 여러 호의를 베푸는 등 오히려 왕실에서 미국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선교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졌다고 믿고 있었으며, 이제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도 선교기지를 세울 차례라고 생각했다. 몇 차례 선교 여행에서 언더우드는 지방에 이미 기독교가 확산되고 있다는 확실한 표징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우선 뉴욕의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가서 조선인 들의 열정적인 믿음과 성경에 대한 사랑, 토착 전도자들의 뛰어난 자질 등 그간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면서 이제는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 한 때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선교본부는 지금 새로 선교사를 파송할 예산이 없으며 선교사 후보도 없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다만, 언더우드가 만약 후원금과 선교사 지원자를 구해오면, 선교부에서 그들을 임명해 조선으로 파송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언더우드에게 남은 임무는 ‘돈’과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돈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곁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존 T. 언더우드가 ‘사람’을 구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선교사 중 여섯 명 분의 선교비를 매달 자신이 후원해주겠다고 약정한 것이다. 정말이지 든든한 형이 아닐 수 없다. 언더우드는 그 뒤 교회, 대학, 신학교, 학생자원운동 집회, 면려회 총회 등 기독 청년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조선 선교에 대해 연설하며 선교사로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빠른 시간 안에 여섯 명의 자원자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신학생과 청년들에게 해외 선교에 대해 비전을 심어주는 ‘학생자원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결과다. 30대의 언더우드 생각보다 빠르게 돈과 사람을 확보한 언더우드는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후원을 모으기 위해 보스턴, 시카고, 필라델피아, 워싱턴 등 미국 전역으로 강연을 하러 다녔다. 장로회 총회에서 20분간 발표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뉴욕과는 미 대륙 정반대편 서쪽 끝에 있는 오리건주 포틀랜드까지 한달음에 다녀 왔다. 물론 포틀랜드까지 가는 길과 오는 길에 위치한 도시의 교회들에 미리 연락하여 촘촘한 강연 계획을 세워 왕복에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Robert E. Speer) 박사는 “언더우드가 미국에 올 때마다 마치 타오르는 횃불이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인내력도 놀라운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차 안식년 기간에 언더우드가 미국에 머문 기간은 총 2년이었는 데, 그중 가장 큰 수확을 거둔 곳은 미국 남부 내슈빌과 캐나다의 토론토였다. 1891년 10월 테네시의 내슈빌에서 과거 언더우드도 신학생 시절 참가한 바 있던 ‘해외 선교를 위한 신학교 동맹’의 제12차 집회가 열렸다. 이때 언더우드는 조선 선교에 대해 강연할 연사의 자격으로, 당시 에모리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윤치호와 함께 참석했다. 개화당 일원이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남감리회가 설립한 중서서원에서 공부하면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888년 9월부터 1891년 6월까지는 밴더 빌트대학에서 신학을, 1891년 7월부터 1893년 10월까지는 에모리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바 있는데, 에모리대학에서 수학하던 당시 내슈빌 집회에 가게 된 것이다. 에모리대학 유학 시절의 윤치호 (1892년경) 내슈빌 집회에서 언더우드는 환등기를 보여주며 조선에 대해 소개했고, 지금 조선의 문이 활짝 열려 있으며 사람들이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임을 강조했다. 윤치호도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로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연설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의 신학생이 조선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그중 매코믹신학교의 테이트(L. B. Tate) 는 대회가 끝난 뒤 곧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고, 버지니아 유니언신학교의 레이놀즈(W. D. Reynolds)와 존슨(C. Johnson)은 조선에 대한 책을 구입하여 같은 신학교의 절친한 전킨 (W. M. Junkin)까지 불러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레이놀즈, 존슨, 전킨 3인방은 이후 언더우드가 유니언신학교에 강연하러 오게 되자 준비위원회를 맡고, 또 근처 남부지역의 주요 교회에서 언더우드가 강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하는 등 언더우드를 따라다니며 열성적으로 조선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1891년 12월 그 셋은 함께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조선 선교를 희망한다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남장로회는 “조선과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음은 물론이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실망스러운 답장을 보내왔다. 그러나 3 인방은 이에 굴하지 않고 남장로회 선교 잡지에 조선 선교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글을 기고하고, 교회를 돌아다니며 후원금을 모금하는 등의 노력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3인방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존 T. 언더우드가 남장로회에 조선 선교 기금으로 2000달러를, 언더우드 자신도 500달러를 기부하면서 남장로회의 조선 선교는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인 1892년 여름,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를 비롯한 총 7명이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로서 조선에 파송되었다. 남장로회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 지역에 차례로 선교기지를 세우면서 교회와 학교, 병원을 개척해나갔는데, 이것은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펼친 선교사 모집 활동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큰 수확을 거둔 곳은 토론토였는데, 언더우드는 여기에서 평생의 동역자인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박사를 만나 그를 조선으로 향하게 했다. 에비슨은 영국 태생으로 여섯 살 때 캐나다 온타리오로 이주한 뒤 성장했다. 온타리오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약물학과 식물학을 강의하게 되었지만, 학장의 권유로 다시 토론토 의과대학에 진학 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1887년부터 토론토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약리학과 치료학을 강의했다. 에비슨은 이후 대학교수이자 개업의,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 토론토 중앙 YMCA 이사, 셔본가 감리교회 평의회 회원이자 평신도, 빈민구제사업단인 ‘희망단’의 지도자 등으로 토론토에서 명성을 날리며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장로회의 개척 선교사 7인 YMCA를 통해 해외 선교사를 지망하는 청년들을 후원하는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던 에비슨은, 1892년에 언더우드라는 조선 선교사 가 안식년으로 뉴욕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그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했다. 에비슨의 주선으로 언더우드는 토론토의 여러 집회와 교회에서 강연을 할 수 있었는데, 에비슨이 자신의 집에 초대 해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언더우드는 에비슨에게 조선에 선교사로 나올 생각이 없느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언젠가는 일본 쪽으로 선교하러 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에비슨 부부였지만,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 에비슨 부부에게 언더우드가 엄청난 제안을 하고 간 셈이다. 몇 날을 고심한 에비슨 부부는 그 ‘언제’가 ‘지금’이라는 결단을 내리고 캐나다 감리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가 조선 선교사 파송 가능 여부를 물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거부당하고 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서 에비슨에게 연락을 취했다. 언더우드가 뉴욕에 돌아가서 에비슨을 벌써 조선의 의료 선교사로 추천해놓은 것이다. 세브란스에서 수술 중인 에비슨(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러한 부름에 에비슨 부부가 순순히 응하면서 에비슨은 의과대 학 교수직과 토론토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모두 버리고 어린아이 셋과 임신 중인 아내를 데리고 1893년 6월 미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서 조선에 부임했다. 에비슨은 그때까지 조선에 온 그 어느 의료 선교사보다 의사로서의 학력과 경력이 뛰어났다. 약학대학과 의과대학의 교수를 역임했고, 개업의로서도 시장의 주치의로 임명되는 등 수년간 명성을 쌓았다. 에비슨의 권위와 성품, 노련함에 조선에 나와 있던 모든 의료 선 교사들은 그를 따랐다. 입국 후 고종의 시의로도 임명되었는데, 뛰어난 의술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올리버 R. 에비슨 당시 제중원은 3대 원장을 맡은 빈턴(C. C. Vinton)이 병원에 파견된 정부 관리들의 횡포에 질려 따로 진료소를 차리고 나가면서 빈사 상태에 빠진 상황이었다. 에비슨은 부임 직후 제중원을 다시 본 궤도에 올린 뒤, 정부와 협상하여 1894년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북장로회가 단독으로 넘겨받도록 했다. 1900년 뉴욕에서 열린 초교파 선교회의에서 석유 재벌 루이스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로부터 기부금을 이끌어내 1904년 남대문에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을 세운 것도 에비슨의 업적이었다. 언더우드와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서로의 선교를 지원했고, 연희 전문학교 설립 당시 부교장으로 취임한 에비슨은 언더우드가 사망한 뒤 연희전문의 교장이 되어 장장 18년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직과 더불어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직도 맡아 언더우드의 교육 정신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남장로회 선교사들과 에비슨이라는 귀한 일꾼들을 확보하고, 모교인 뉴욕대학교에서 1891년 명예신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언더우드는 2년여의 미국 일정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릴리어스의 관절염은 그간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의사들은 조선의 집 안에 고이는 습기를 뺄 수 없다면 돌아가서 관절염이 다시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비쳤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존 T. 언더우드는 언더우드 부부의 조선 집에 스팀 난방기구를 설치해 습기를 빼고 더운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파이프, 연관 공사 부품, 배관, 이중 창문 등의 자재를 모두 사서 들려 보냈다. 이후 형의 배려로 언더우드 부부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을 거쳐 홍해를 돌아 성지를 여행하고 중국 상하이와 일본 나가사키를 들러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때 영국에서 언더우드의 사촌인 레드패스(Miss Redpath)가 언더우드 부부의 어린 아들 원한경을 돌봐주기 위해 함께 조선으로 동행하여 왔다. 이로써 언더우드 부부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얻어 언더우드도 릴리어스도 다시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고, 스팀 난방을 설치하여 릴리어스의 병이 악화되지 않을 만한 환경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개척자 언더우드" 내용입니다. #풀가스펠뉴스 #언더우드 #선교사 #세브란스 #에비슨 #윤치호 #한교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