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 W.E. - 국내 군종 창설
윌리엄 E. 쇼(Shaw, William Earl)는 미 감리회 선교사로 1921년 내한하여 서위렴(徐偉廉)이라는 이름으로 평양, 서울, 대전 등에서 1960년까지 선교와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90년 8월 22일 시카고에서 출생하여,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원(1921)을 졸업하였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대원을 졸업(1927)하였다.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1921-1926)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1927-1937)에 몰두하였다. 1938년 무어(J. Z. Moore) 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하였다. 194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되었다가 1947년 다시 내한하였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제1차 세계대전 때도 군목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함) 외아들 쇼 해밀턴이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자 5,925명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하였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천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 관장으로 봉직하였다. 감리교대전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하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제2묘역 라-6)에 안장되었다.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 1895-1971) 선교사는 1895년 7월 2일 출생하여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하고, 1921년 내한하여 남편을 내조하면서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시카고에서 태어나서 한국에 선교사로 찾아온 사람이 윌리암 얼 쇼(William Earl Shaw)이다.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한국 전쟁에도 참여하며 군목제도를 처음 도입한 분이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헌신하였다. 또한 대전 목원대의 전신, 감리교 신학원이 설립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하며, 신학 교수로 재직하여 한국의 신학 교육발전에 큰 기여를 해 왔다. 윌리암 얼 쇼( William Earl Shaw, 1890~1967)는 한국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서위렴이란 한국 이름을 가지고 백성들을 섬겼다. 그는 1890년 8월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서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와 보스턴 신학대학원,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중에는 YMCA에서 활동하며, 후에 미육군에 입대하여 군목으로 임명받고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1년 그의 아내 아델린 쇼와 딸 메리 제인과 함께 중국 우편 운반선을 타고 내한하여 평양에 거주하면서 선교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때 외아들 해밀턴 쇼가 출생하게 된다. 윌리엄 쇼 선교사는 1926년까지 광성 고등 보통 학교에서 사역 하다가 미일 관계 악화로 서울주재 미 영사관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고 잠시 철수를 하고 1947년 다시 내한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미 육군 군목 신분으로 참전하게 된다. 그는 군종 제도의 창설을 처음으로 정부에 건의 하였고 각교단 대표들 중심으로 군종제도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1951년 2월 한국 정부로부터 군종 제도를 승인받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에는 감리교 대전 신학교 이사 및 신약학 교수로 봉직하며 목회자 재교육 기관이었던 목자관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부인 아델린 쇼는 대전에서 모자관 시설이었던 성화장을 건립하여 전쟁 미망인을 위한 사역을 해왔다. 그의 사역은 자신들 세대에 멈춘 것이 아니고 아들 해밀턴 쇼가 그대로 이어갔다.
아들인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1922~1950, 서위렴 2세)는 맥아더 장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다. 미국의 해군 장교로 노르망디상륙작전 등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한국에서 해군사관학교(해안경비대) 초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또 해방 후 한국 정부 수립 전 미 군정청(점령지 군사정치 기관) 경제협력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내가 태어난 곳인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돕겠다”며 1950년 미국 해군에 재입대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한국 지리에 밝고 한국말을 잘했던 덕에 해군 소속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수복작전에서 정탐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50년 9월22일 오전 정찰을 위해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접근하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28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현재 윌리엄 쇼 부자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해밀턴의 아들 로빈슨 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뒤를 이어 한국에서 장학사업과 법률연구센타등 한국 대학생들을 위한 많은 교류 활동에 이바지 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 가정은 3대에 걸쳐, 한국을 자기 민족처럼 진정으로 사랑하며 헌신했던 가문이다.]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외아들, 윌리엄 해밀튼 쇼(1922-1950)
윌리엄 해밀튼 쇼(Shaw, William Hamilton)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 장교로 참전 후, 미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내한하여,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였다. 해군에서 제대 후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하버드대학에서 연구하다가 6·25가 발발하자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서울 수복 진두 지휘 중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어린이공원'에는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1956년 9월 22일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옮겨 놓았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이 새겨져 있다. 2001년 10월 20일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하여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이 추가로 놓여졌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Shaw,Juanita Robinson)는 1943년 해밀턴 쇼와 결혼하였으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사업실(Medical-social)을 개설하였다.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68년 귀국하여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하버드 엔칭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1952년에 출판된 김말봉의 ‘찔레꽃’ 같은 책들이 있는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한국전쟁중에 나와 우리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책들이기 때문이다.한국전쟁 중에 서울근교에서 전사한 하버드대 중국학 전공 대학원생 ‘윌리엄 쇼 기념도서’라고 찍혀 있다. 쇼의 가족과 친구 5925명이 2-3달러씩 모은 추모기금으로 사들여 기증한 책들이다.
불멸의 한국사랑 '서위렴'을 아세요?
한겨레 기사 등록 : 2008. 9. 18. 19:11
[한겨레] 한국이름 쓴 미 선교사 아들…'한국전 순직' 추모공원 조성
1922년 당시 평양에 머물던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쇼 1세와 부인인 애들린 사이에서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아버지의 영어 이름과 함께 서위렴이라는 한국 이름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소년은 미국 오하이오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다. 대학 졸업 뒤 해군에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그에게 한국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고심 끝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성경 말씀을 따라 미국 해군 대위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측근 보좌관으로 활약했고, 이후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서울 입성 약 1주일을 앞두고 서위렴2세는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6년 뒤인 1956년 9월 22일, 그의 친지 등이 성금을 모아 그가 쓰러진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건립했다. 그의 부인인 후아니타 로빈슨은 그때 두 아들을 데리고 아예 서울로 와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면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사회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남편이 묻혀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역의 한 자리를 이미 예약해 놓았다.
한국과 그 가족의 특별한 인연은 3대째 이어졌다. 그의 큰아들 로빈슨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학 박사로, 며느리 캐럴은 한국 근대사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그의 행적은 잊혀져 있다. 그의 추모비도 어느새 옮겨져서 은평구 응암동 85-41, 응암어린이공원 마당의 구석에 쓸쓸히 서 있다.
3대에 걸친 윌리엄 가족의 한국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최근 은평구가 추모공원 건립에 나섰다. 은평구는 녹번동 153-1번지 일대 5700㎡ 터에 350억원을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18일 밝혔다. 구는 이곳에 추모비를 옮겨 오고, 수변 공간, 휴게시설 등을 만들어서 잊혀진 이름을 시민들이 기억하도록 할 계획이다. 공원은 한국전쟁 60돌을 맞는 2010년 6월에 완공된다.
김기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