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림자가 뭔지나 알고 이야기하나?
노병철
“이 사람이 누고? 이름이 낯설다. 우리 팀이 아닌 것 같다.”
외국 여행 가는 길에 벌어진 헤프닝이다. 스님도 외국 갈 땐 법명이 아닌 속세의 이름 즉 속명을 사용해야 한다. 법정 스님은 박재철이고 한용운 스님은 한정옥이다. 법명(法名)은 승려의 이름이고 불명(佛名)은 재가불자들이 수계를 통해 받는 이름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요즘은 법명이나 불명이나 똑같다고 한다. 법명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한국 불교에는 재가불자에게 주는 법명을 남성 2글자, 여성 3글자로 짓는다. 한번 받은 법명은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 자주 바꾸는 것을 막고자 조계종에선 딱 2번까지 바꿀 수 있다. 필명으로 알고 있던 분이 본명이 나오면 누구인지 몰라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참고로 부처와 보살의 이름은 명호(名號)라고 하고 무당은 신명(神名)으로 불린다.”
요즘 손주 이름 짓는답시고 작명소에 달려가 피 같은 돈 몇십만 원을 갖다주고 온다. 손주의 명이 달려있고 출세 운이 달려있다고 하니 돈을 아낄 수가 없다. 달라는 대로 줘야 한다. 이상하게 작명하는 지인이 주위에 제법 있다. 어떤 이는 그럴듯하게 이름이 괜찮다는 표현을 문학적 예술적으로 멋지게 써달라고 청탁받아 몇 푼 받아먹은 적도 있다. 아버지는 돈이 아까우셨던지 헌책방에 낡은 작명 책 하나 사와서 3일 밤낮을 끙끙거리시곤 겨우 내놓은 이름이 흔하디흔한 여식이 이름이었다. 획수가 시집 잘 갈 획수이고 복을 받는 숫자로 구성되었다고 내 입을 막는다. 둘째 이름은 장인에게 부탁드렸더니 당시 돈 30만을 들여 이름을 지어왔다. 평범하기 그지없다. 돈 들인 흔적도 없이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정말 우연하게도 첫째와 둘째이름에 생각지도 않은 돌림자가 생겼다. “은‘자가 중간자로 들어갔다. 그러자 동생들도 마치 ’은‘자가 돌림자도 되는 마냥 다들 중간이름을 ’은‘자를 넣어 버렸다. 집안 친척들이 이름만 들어도 우리 가족인 것을 다 알게 된다. 아마도 동생들은 ’은‘을 중간에 깔고 나머지 한글자만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집안 피가 아버지를 닮아서 너무 게으르고 단순하다. 획수나 사주 같은 것을 복잡하게 이야기하면 머리가 터질 듯 아파오는 게 집안 유전병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충지은 이름으로 다들 건강하게 잘 자랐고 시집도 갔으니 이름가지고 입댈 이유는 없다. 이런 것을 ’돌림자‘라고 굳이 억지스럽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중국 불교에서는 같은 스님의 제자들은 법명에 돌림자를 사용했다. 손오공(孫悟空), 저오능(猪悟能 저팔계), 사오정(沙悟淨)은 ‘깨달을 오(悟)’ 자 돌림이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성철 스님 제자들은 ‘원’자 돌림이다. 원택, 원영. 일타 스님 제자들은 ‘혜’자 돌림이다. 혜인, 혜국. 이렇게 돌림자가 정해지면 누구 제자인지 한 번에 알 수 있다. 이걸 ‘항렬자’라고 하지 않는다.
“아제요. 우리 자식대 돌림자가 우째 됩니까?”
“항렬자 말이가?”
“여기 작명소인데 돌림지가 뭔지 알아보라고 해서 전화했습니다.”
“항렬자 말이가?”
“아제요. 요즘 귀가 어두운교? 말끼를 못 알아 묵소.”
무식한 놈. 작명소를 한다는 그놈도 만만찮게 무식한 모양이다. 돌림자와 항렬자를 구분 못 하고 있다. 돌림자는 형제 항렬에 돌리는 이름이고 항렬은 수직계층으로 내려가는 이름이다. 농사짓던 시절 대가족제도에서 위계질서를 위해 항렬이 존재할 필요가 있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같은 성씨를 만나면 항렬자를 묻게 된다. 항렬자만 봐도 몇 대손인지 알게 되고 서열이 정리된다. 나이가 많아도 손자가 되는 경우를 자주 보지 않는가. 이제 이런 이야기도 무의미하다. 솔직히 몰라도 그만이다. 이제 돌림자나 항렬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요즘 작명소에 가면 그저 예쁜 이름이 대세이지 항렬은 그냥 물어보고는 들은 척 만 척 뒷전이다. 유명한 작명가인 지인에게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묻기는 왜 묻느냐고 했더니 그래야 그럴듯하고 있어 보인다나. 대묘사(大墓祀)가서 항렬자 묻는 시절은 이번 대(代)에서 끝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