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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화요일. - 영의 식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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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영의 식별
스테파노에게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적대자들에게
스테파노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먼저 목이 뻣뻣하다고 하는데 어떤 뜻입니까?
우리말에는 목에 힘을 준다는 말이 있는데
목이 뻣뻣해서 숙일 줄 모르고 겸손할 줄 모른다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숙이고 들어간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숙일 줄 알아야 큰 사람인데 그러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럽니까?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숙이는 것은 지는 것이고 죽는 것인 줄로만 아는 사람,
그래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
그래서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머리를 숙일 줄 모르는 교만의 한 측면이라면
조금 다른 측면의 머리를 숙일 줄 모름도 있습니다.
한 번도 잘못했다고 머리를 숙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자신은 아예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못이 없기에 자기와 다른 사람은 늘 잘못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데 늘 거침이 없습니다.
오늘도 천사처럼 보이는 스테파노를 거침없이 단죄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에 할례는 구약의 세례이고,
세례는 신약의 할례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과 귀가
주님 자녀의 마음과 귀로 새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럴 겁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마음과 귀가 되어있지 않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새 시대가 열렸는데도
여전히 새 술을 옛 부대 또는 헌 부대에 담으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이 줄곧 성령을 거역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령을 거역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분이라고 요한복음의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그렇긴 하지만 문이 닫혀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요.
이때의 거역은 그래서 성령의 강림을 거부하는 것이 되겠지요.
다음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분인데
그 이끄시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거부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거역한다면 왜 거역할까요?
우리의 경우 그것이 성령의 이끄심인 줄 안다면
알면서도 거부하거나 거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제 베드로 사도가 백성들에게 말했듯이
무지(無知), 곧 성령에 대한 무지 때문일 겁니다.
성령 무지.
이렇게 얘기해도 될지 모르지만
성령 무지가 우리에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저는 의식 성찰에 관해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성령 무지와 영의 식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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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도에서 기도를 배우는 한 수련자가 스승에게 달려와 외쳤습니다.
“스승님! 제가 드디어 물 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온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래, 몇 년이나 수련했나?”라고 물었고, 제자는 18년이 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스승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갠지스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는 이 질문에 18루피(한화 300원) 정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를 벌었군.”
물 위를 걷게 해 달라는 기도는 과연 필요한 기도였을까요? 배를 타고 가면 그만이니 필요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족만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성취를 위한 기도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자기 성취에 도달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자기 기도를 세상 기준에 맞춰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 하느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셨던 하느님의 사랑에 기준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기준에 맞추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절망도 또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순간만 바라보면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행복의 길이 아닐까요?
군중이 예수님께서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성취,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청하기만 할 것입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채워야 진정한 하느님이라면서 엉뚱한 곳에서만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갖 불평과 원망 속에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과거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나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시면서,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추는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그래야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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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주거지를 선택할 때는 그 마을 사람의 따뜻한 인정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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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에 대한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의 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곧 당신 말씀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요한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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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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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 것은 ‘이것, 저것 다 해봐도 결국은 싫증이 납니다. 물론 취미생활로 한 곳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신비롭고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세상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결국 그의 혼을 유혹할 뿐입니다.’천상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만을 갈망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하자,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몸소 음식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양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성녀 체칠리아). 그러므로 현세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상 것을 바라며 영원한 것을 미리 준비하며 투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농사 준비를 하더라도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 봄부터 씨를 뿌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흘리는데 영생을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 이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하자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군중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했듯이 그리고 여인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듯이 우리도 영원의 빵을, 생명의 물을 갈망해야 합니다.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16,9). 그러므로 ‘우리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희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사참례를 통하여 충만한 영양을 공급받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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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임 신부님이 후원금을 주었고, 교우들이 직접 나서서 ‘창고’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외벽을 칠하고, 전기를 끌어들이면 창고는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 창고를 만들면서 그 밭에서 많은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봉사자들이 제게는 보물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창고에 재화를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아야 한다.” 창고를 만들면서 수고해 주신 분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재화를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을 마치고 삼겹살에 맥주 한잔 마시는 것은 가뭄 끝에 단비와 같이 정겨운 시간입니다. 저는 그 시간에 교우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본당에 대한 사랑과 본당에 대한 열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새로 온 사제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남은 공간에 어떤 건물을 세워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사제관과 수녀원’이었습니다. 예전에 사제관과 수녀원을 지으려고 했지만 성당이 너무 외진 곳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중단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성당 주변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학교도 들어섰으니 사제관과 수녀원을 짓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당 밖에 있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매각하면 건축비도 마련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당 내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으면 교우 분들과 소통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매일 성당까지 출근해야 하는 시간도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상 치 못한 일이 발생 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제님은 ‘추모공원’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도 만들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교우들이 돌아가시면 모실 수 있는 추모의 공간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추모 공원은 미리 신청을 받아서 재원을 마련할 수 있고, 성당에 그런 공간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고인을 위한 묵상과 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우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그림을 그려야할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평화롭게 가진 것을 나누었고, 특히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돌보았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페스탈로치는 신앙의 원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이 없다. 인류의 순수한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그리고 감사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 이것이 신앙의 원천이다.”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 시인,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축복이 있을 지어다.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을 지어다.”
삶은 사름의 준말이고, 사름은 사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사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삶은 고난의 순간에도, 죽음에 이를지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피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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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생명이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생명도 태어날 수 없다.’
이것은 꽃도 마찬가지요. 동물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허락 없이 태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곳 갑곶순교성지에도 수없이 많은 꽃이 피어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심이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주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만나는 모세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생명의 빵’은 무엇일까요? 빵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생명 연장의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빵’은 우리가 말하는 빵과 다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생명의 빵’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생명의 빵으로 태어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고자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빵은 죽음으로서 우리를 살립니다. 주님도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를 천국이라는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빵이 아닙니다. 잠깐의 생명력을 주는 빵이 아닙니다. 성체는 우리를 영원히 하느님 안에서 살게 하는 생명의 빵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심은 우리를 살리고자 죽음을 받아들이신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희생임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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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우신 분을 만납니다.
이곳 갑곶순교성지는 북한과 가깝습니다.
근처 평화 전망대에서는 북한을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점심을 먹은 후 지금은 자전거 도로로만 사용하는
옛날 강화대교를 걷습니다.
걷다 보면 자연스레 다리 밑으로 흐리는 물을 보게 됩니다.
겨울을 지나 얼었던 모든 것이 녹아내린 지금은
얼음에 갇혔던 물이 자유롭게 흐릅니다.
어느 때는 위로 흐르고 어느 때는 밑으로 흐릅니다.
어느 때는 북으로 흘러 들어가고 어느 때는 남으로 흘러내립니다.
이곳을 지나는 바닷물은 그렇게 우리 민족을 위로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흐르는 바다를 보며 그분의 사랑을 느낍니다. 막힘없이 자유롭게 사랑하는 모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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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예수님을 늘 삶의 중심에 모신 삶-
4월16일이 되니 304명 희생자를 낸 10년전 4.16세월호 참사 사건이 생각납니다. 이날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먹먹해지며 말문을 잃게 됩니다. 오마이뉴스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염원 3645일, 고 박수현 군의 아버지 박종대씨>의 글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10년전 2014년은 제가 원장직을 내려 놓고 장충동 수도원에서 안식년을 지내던 중이었고 당시 이날은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 성주간에 맞이했던 상상을 초월한 비극적 재앙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상규명은 되지 않은 상태로 피해 가족들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성주간 이었고, 오늘은 부활 제3주간 화요일입니다. 부활의 기쁨, 신록의 기쁨중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10년전 세월호 참사요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심기일전 노력해야 할 것이며, 언젠가 반드시 가급적 빨리 진상규명도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현재의 난국을 생각할 때 저절로 떠오르는 주제입니다. 국내 상황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길을, 방향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입니다. 끊임없는 전쟁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입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희망을, 꿈을, 빛을 잃고 방황중이라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을 찾아야, 잡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제가 피정지도시 늘 강조하던 내용도 생각납니다.
1.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절대로 이 우선순위가 바꿔져선 안된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날로 가치관 부재의 혼돈 시기에 하느님 믿음의 중요성은 날로 증대해 갑니다. 참으로 단절의 불행과 비극의 시대, 무엇보다 신앙유산의 전수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삶의 뿌리, 믿음의 뿌리가 우선적으로 건강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에 대한 답도 하느님 믿음, 파스카 예수님 중심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돈을 필요 이상으로 쌓다가는 돈에게 사로잡힐 수 있다. 진정 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작은 일상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다산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명심보감
작은 일상에 만족하는 일, 재물에서 초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일치를 이루기 까지는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 뿐입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의 주제는 생명의 빵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은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 절정의 말씀이 오늘 복음 후반에 나옵니다. 주님은 어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라 힘쓰라 하신후,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의 주님께 대한 청은 구도자들인 우리 모두의 궁극적 소망이요 이에 대한 주님의 통쾌한 응답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늘 이런 생명의 빵을 모셔야 비로소 충만한 삶,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뿐 답이 없습니다. 바로 얼마전 교황청 사순시기 첫째 강론 주제도 이 성서 구절이었습니다. 일부 핵심적 내용을 나눕니다.
“우리는 어디서 이 빵을 발견할 수 있나? 미사와 성서이다. 고대 교회는 성사와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인정했다. 오직 후대에 서방에서 그리스도교의 분리가 있었다: 가톨릭 측에서 성체성사적 해석이 우세함으로 끝나자, 루터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명의 빵인 하느님의 말씀편에 섰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성사간의 원래적 종합으로 회귀해야 한다. 바로 최근 일어나는 종교일치 운동도 이런 분위기다. 때로 성서와 성사가 신학에서 대립될지라도 그들은 전례 안에서 늘 ‘평화로이’ 공존해 왔다. 교회의 맨처음부터, 미사(Mass)는 ‘말씀과 성체(the Word and the Eucharist)’ 둘을 포함해 왔다.”
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싸 추기경의 명쾌한 설명이 참 고맙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날마다 미사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도행전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순교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스테파노의 임종어를 보십시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대로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예닮의 여정에 완성에 이른 스테파노입니다. 과연 우리는 몇% 예수님을 닮아있는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스테파노의 대를 잇는 사도 바오로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순교시 그의 겉옷을 곁에 놓고 스테파노의 순교장면을 보면서 충격과 더불어 깊이 배우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새삼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임을 깨닫습니다.
잘 살고 싶습니까? 유한한 인생 여정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일년사계로 내 인생여정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지요? 이를 생각하면 잠자는 시간도 때로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회개하기도, 기도하기도, 공부하기도 턱없이 짧은 세월,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예닮의 여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임종어나 묘비명을 좌우명 삼아 써놓고 이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있습니다. 예전 써놨던 “내 묘비명은”이란 글도 생각납니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평생 하느님만을 그리워했으며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의 깊이와 넓이, 맑음만을
어둔밤 빛나는 별, 깨어 있음만을
하늘 떠도는 흰구름 자유만을
산의 한결같은 인내와 침묵만을 부러워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또 하나 그의 종교였다”-2005. 5
수도원이 한참 어려움을 겪던 시기 자신을 정리해봤던 묘비명이 생각나 나눴습니다. 어제 문득 수도원 방문시 집무실을 찾아 강복을 받던 수녀님에게 수도명을 물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의 이름 앞에 말마디 라이너 수녀입니다. 독일어로 라이너 뜻은 ‘맑은’이라합니다.”
맑은 수녀 모습대로 조촐하고 맑아보였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예닮의 여정중 날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맑고 향기로운, 충만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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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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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부활 제3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요한 6,30)
사람들이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다
판단을 흐리게 하고 욕구를 채움으로써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탐식보다 더 나쁘고 더 수치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 이 일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마치 지금까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합니다.
이보다 터무니없는 일은 있을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선택권이 주님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자기네 조상들에게 내렸던 것과 같은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이집트에서, 갈대 바다에서, 광야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지만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만나의 기적이었습니다. 식욕의 힘은 이 정도입니다. … 그들은 이 기적을 하느님께서 일으키셨다는 말도 모세가 일으켰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높이지도, 예수님을 낮추어 모세에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중도 입장을 취하여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라고 만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중세의 전형적인 관심사가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호 관계였던 만큼, 액카르트는 우주적인 경향을 띠는 자연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연은 선한 우주를 본받는다. 자연은 발생을 위해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꾀한다. 자연의 일차적인 목적은 우주의 보존이다." 이처럼 엑카르트의 영적인 자각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것으로 보건대, 쉬르만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엑카르트는 신학과 인간학과 우주론의 방법론적 구분을 폐지한다.” 엑카르트의 시각은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통전적인 시각이다. 이런 이유로,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이 통전적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가득 부어준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정답게 대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을 정답게 대하라고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촉구한다.(154)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이 세상에 당신의 교회를 세워주시어 평화의 계획을 이어가며 모든 이가 선의를 지닌 사람이 되도록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교회가 평화와 하늘나리를 선포하기 위해 행한 모든 것을 축복해 주소서! 예수님, 스스로 당신께 속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음을 당신은 아시나이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소란과 충돌 그리고 여러 다른 교회와 공동체 사이에 이해가 부족함을 또한 당신은 아시나이다.
당신은 사도들에게 이 세상의 힘있는 사람들처럼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해선 안 되며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길을 걷도록 초대받은 많은 사람이 평화의 길을 잊고 었습니다. 예수님,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의 많은 갈등이 당신께서 주신 평화의 사명을 가리고 있나이다. 오직 당신의 능력 안에서만 모든 것을 선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아오니 저희를 도와주소서.
0 당신 교회를 정화하여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47)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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