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오는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공경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을 한데 모아서 다소 산만한 형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들에 대하여 어떤 권위를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독하고 한적한 독수 생활을 오랫 동안 계속하였다.
그는 20세 때부터 남부 에집트의 고향 근처 산을 찾아다니면서 고독한 생활을 즐겨하면서, 기도와 연구 및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을 해왔다. 그러다가 그는 맹렬한 영적 육적인 유혹으로 한 동안 고생하였으나, 끝내 이를 극족한 뒤에, 그 주위에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고 전한다.
312년에 그는 좀더 멀리 갔는데, 콜짐 산의 동굴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이 산은 홍해의 북서해안에 있는데, 이곳이 그의 여생을 보낸 장소였다.
여러가지 소망을 지닌 사람들이 성 안토니오를 찾아와서 충고를 청하고, 또 어떻게 사는지를 살피러 왔다.
말년에 그는 아리우스파의 반대를 촉구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만일 전승이 옳다고 한다면, 그가 사망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100세가 넘었다.
성 안토니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진 이유는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던 성 아타나시오가 기록한 전기가 전하여 내려오기 때문이다.
수도 생활의 탁월한 사부인 안또니오는 250년경 에집트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회개 생활을 시작했고 많은 제자들을 얻었다.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아리우스 이단자들을 거슬러 싸우던 성 아타나시오를 후원해 주면서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356년 세상을 떠났다.
성 안토니오는 생전이나 사후나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공경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도 불린다. 그의 휘장으로 묘사되는 그림은 돼지와 종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안토니오의 생애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매우 비슷하다.
20세에 그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복음의 메시지에 깊이 감동되어 자기가 상속받은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프란치스코와 다른 점은 생애의 대부분을 광야에서 보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세상이 완전히 유혹에 덮인 것을 보고 세상과 교회에 광야의 은수 생활을 통해 크나큰 자기 희생과 기도의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어떠한 성인도 반사회적인 인물은 없듯이 안토니오도 영적 치유와 인도로써 많은 사람을 자기에게 끌어들였다.
그는 54세에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은수자들의 거처를 바탕으로 일종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311년에 다시 시작된 로마 박해 때 순교하고 싶은 열망에서 두려움 없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 도움을 베풀었다. 그는 88세에 수세기가 지나서야 교회가 그 소용돌이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커다란 비극인 아리우스 이단과 싸웠다.
안토니오는 예술에서 T형의 십자가, 돼지 그리고 책으로 표현된다.
돼지와 십자가는 마귀의 무서운 투쟁을 상징한다.
십자가는 계속해서 악령을 제어하는 힘을 주는 방법이고, 돼지는 마귀의 상징이다.
책은 ?인쇄된 말마디보다는 ’정신의 책’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안토니오는 105세에 광야에서 죽었다.
우리는 안토니오의 놀라운 극기 생활에 잘못 인도되지 않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의미와 결과를 강조하고자 한 안토니오 성인전을 쓴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초면인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을 보고 제자들 가운데서 그를 알아보았다."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도 그에게 기도를 청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안토니오는 그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황제가 나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해서 놀라지 말 것이다.
그도 나와 같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글을 써 보내셨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에 놀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