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인간관계
1. 개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인간 관계를 정리한 문서.
1.1. 베토벤의 부친 요한과 모친 마리아
베토벤의 부친 요한 판 베토벤과
모친 마리아 판 베토벤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39 또는 1740~1792)은
위대한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부친이라는 엄청난 명예를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영 좋지 못하다.
현재에도 베토벤의 부친이라고 하면
바로 '주정뱅이에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가장'의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
다만 후술하는 것처럼
이런 평가는 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요한은 현재 벨기에 영토에 있는
메켈렌(Mechelen)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뛰어난 노래솜씨를 갖고 있어서
성악가로 유명세를 탔다.
이런 재능은 자신의 부친
(즉 베토벤의 할아버지)으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것인데,
부친 루트비히 판 베토벤
(맏손자와 이름이 똑같다.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역시 뛰어난 성악가였으며
콜로뉴의 대주교이자
선제후(Archbishop of Cologne) 왕실의
각광받는 궁정악장(Kapellmeister)이었다.
바로 이 콜로뉴 선제후의 왕궁이
본(Bonn)에 있었기 때문에
베토벤 가문은 대를 이어
본에 살게 된다.
요한은 부친의 뒤를 이어
21살의 어린 나이에
본 왕궁의 궁정악장이 되었다.
이처럼 요한은 촉망받는 성악가이자
음악가였으나
술 때문에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끼게 된다.
그는 결혼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부친(베토벤의 할아버지)이
1774년에 사망한 후에는
알코올 의존 증상이 더 심해졌고,
결국 술 때문에 목을 망쳐서
40살경부터는
가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게다가 술버릇도 고약해서
자주 사고를 쳤기 때문에
인간관계 측면에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술을 먹고
자주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당연히 자식들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그가 맏아들 루트비히를
학대 수준으로
음악을 가르치려 했던 것은 유명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동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이
큰 이슈가 되고 있었는데,
요한은 루트비히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들을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포장해서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루트비히를 그야말로
완전 쥐잡듯이 엄격하고 가혹하게
피아노를 연습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받은 충격 때문에
베토벤이 괴팍하고 비뚤어진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
하지만 요한이 아들에게 강압적으로
피아노연습을 시킨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이런 주장들은 모두 소문에 의존한 것들로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이미 5살경부터
오르간 주자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토비아스 파이퍼
(Tobias Friedrich Pfeiffer)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친척으로부터는
현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는 등
일찌감치 여러 사람에게 음악을 배웠다.
또 당시에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놀면서
골목대장 노릇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이야기는
완전 거짓말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음악을 어떻게 가르쳤 건
그가 아들의 재능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생애 항목 참조).
사실 요한이 술만 마시고
자식을 팔아서 돈벌이나 하려는
비루한 속물이라는 평가는
지나친 측면이 있다.
그는 놀랍게도 죽을 때까지
본의 궁정악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선제후가 그를 해고하지 않은 것을 보면
비록 술을 많이 마시긴 했어도
정상적으로 직업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의 부인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나름 집안에 월급을 가져다 주었고
그 덕분에 베토벤 가족은
풍족하지는 못해도
크게 쪼들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즉, 요한은 괴팍한 성격과
술버릇 때문에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직업인 가장의 범주를 크
게 벗어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장남 루트비히가 성장해서
피아노교습, 연주회, 후원금 등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1787년
부인이 사망한 후부터
요한은 진짜로 집안일을 완전히 팽개치고
술만 퍼마셔 댔다.
그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는 바로
이 생애 말년에 벌어진
흑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죽하면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주교
(이자 선제후)가
'그간 요한이 세금(주세)을
무척 많이 내줘서 참 고마왔는데
아쉽게 됐네.'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
졸지에 소년가장으로
집안을 꾸려나가야 했던 루트비히는
1789년 선제후에게
부친이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고
술값으로 월급을 탕진한다며
요한의 월급 절반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술값의 일부를 생활비에
보탤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맏아들 루트비히가
1792년 청운의 꿈을 품고
빈으로 떠난 직후에 사망한다.
루트비히도 요한의 장례식에
참석은 했으나
삼형제 모두 부친 때문에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베토벤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조카 칼을 강압적으로 대했고
생애 말년에는 술에 쩔어 살았다.
부친을 그토록 미워했지만
결국 본인도 부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베토벤의 모친
마리아 막달레나 판 베토벤
(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
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마리아의 부친은 트리어의
선제후의 집사로
꽤 유복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리아는 자신보다 6살 많은
촉망받는 성악가 요한 판 베토벤이
여행중일 때 처음 만났으며
1767년 그녀의 나이 21살때
그와 결혼했다.
이후 요한과 마리아 부부는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4명은 일찍 죽고
3명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남았다.
1. 루트비히 마리아 판 베토벤
(Ludwig Maria van Beethoven,
1769년, 며칠만에 사망)
2. 루트비히 판 베토벤(The Beethoven)
3. 카스파 판 베토벤(1774 – 1815).
4. 요한 판 베토벤(1776 – 1848).
5. 안나 마리아 판 베토벤
(Anna Maria Franziska van Beethoven,
1778, 며칠만에 사망)
6. 프란츠 게오르그 판 베토벤
(Franz Georg van Beethoven,
1781, 3살에 사망).
7. 마리아 마가렛 요제파 판 베토벤
(Maria Margarete Josepha van Beethoven,
1786, 이듬해 사망)
그녀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으로
남편을 묵묵하게 뒷바라지 했으며
베토벤가 3형제의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1786년 7번째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
결핵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으며
결국 이듬해 맏아들 루트비히가
선제후의 배려로 빈 여행을
하는 도중에 사망했다.
루트비히는 부친과 달리
모친에 대해서는
상당히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2. 베토벤의 두 동생 카스파와 요한
1.2.1. 첫째 동생 카스파 판 베토벤
베토벤의 첫 번째 동생이자
아래 언급할 칼 판 베토벤의 아버지
카스파 판 베토벤
(Kaspar van Beethoven, 1774~1815)은
원래 형을 따라
음악가가 되려고 피아노를 배웠다.
형이 빈으로 떠난지 2년 뒤인 1794년에
카스파도 형을 따라 빈에 와서
음악활동을 한다.
베토벤은 카스파가
빈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도와주었고
카스파는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좀 벌었다.
하지만 형만한
재능을 갖지 못했던 카스파는
피아니스트로도 작곡가로도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결국 음악가로의 길을 접고
1800년 경에 빈 재무국의 직원으로 취직한다.
한편 베토벤은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카스파를 비서로 삼아서
악보 출판이나
연주회 섭외와 같은 업무를 맡겼다.
그런데 카스파는 돈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형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형이 출판을 꺼렸던 초기 작품이나
습작을 허락없이 출판사에 팔아먹다가
형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형이 지정한 출판사를 배제하고
멋대로 다른 출판사에 악보를 팔아먹었다가
들켜서 얻어맞기도 했다.
카스파는 결정적으로
결혼 때문에
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리는데,
1806년 평판이 좋지 않았던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ß,
1786~1869)라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것이다.
형은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으나
문제는 결혼이야기가 오갈 당시
이미 요한나는 카스파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
속도위반에 걸려 있던 카스파와 요한나는
루트비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할 수밖에 없었으며
얼마 후에 베토벤의 후반기 인생을
지배한(?) 칼이 태어났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요한나의 부친이
부유한 포도주제조업자였기 때문에
요한나는 결혼하면서
꽤 많은 지참금과 부동산을 가져왔으며
카스파는 이 돈과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입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카스파는 1812년 결핵에 걸렸으며
이듬해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재무국 일도 그만뒀다.
게다가 아내 요한나의 낭비벽과
카스파 본인의 치료비로 인해
살림은 빚더미가 되어
치료비와 생활비를
형 루트비히로부터
원조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카스파는 죽기 2년 전에
형 루트비히를
아들 칼의 후견인으로 삼겠다는
문서에 서명했고
죽기 직전에는 삼촌과 친모가 같이
칼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칼 판 베토벤 항목에 나와 있다시피
이 유언은 오히려 칼을 둘러싼
삼촌과 친모의 처절한 양육권 싸움의
시발점이 되어 버린다.
1.2.2. 둘째 동생 요한 판 베토벤
요한 판 베토벤(1776-1848)
베토벤의 두번째 아우인
요한(본명은 Nicolas Johann van Beethoven)은
20살 전후에 돈벌이를 찾아
형이 있던 빈으로 왔으며
여기서 제약법을 배워
약국의 조수로 들어간 후
얼마 후 린츠(Lintz)에 있는
약국을 사서 독립했으나
장사가 안되서 빚만 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했고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의 철강이 들어오지 못하자
창문틀이나 자기 집에 있던
쇠붙이를 팔아 적자를 메꿨다.
이후 나폴레옹 군대가 주둔하면서
린츠에 부상병동이 세워졌고
그는 이 부상병동에 약을 팔아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이때 번 돈으로
꽤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으며
1848년에 74살로 죽을 때까지
약국을 운영하면서 돈걱정 없이 살았다.
그런데 돈은 벌었지만
그에 걸맞는 교양이나
인성을 갖추지 못한 요한은
적군에게 약을 팔다가
엄청 욕먹은 것을 비롯해서
이래저래 평판이 좋지 않았다.
비뚤어진 얼굴에
음흉한 표정으로 그려진 그의 초상화만 봐도
당시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졸부였는데,
이런 속물적인 태도는
형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한 때 생활이 어려워진 루트비히가
요한에게 도와 달라고 했더니
요한은 '형도 돈버는 능력좀 기르세요'라는
식으로 비웃는 투의 거절편지를 쓰면서
편지 말미에는
'땅의 소유자 요한 판 베토벤'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칭호까지 붙여서 보냈다.
이를 읽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루트비히는
동생에게 '네 돈은 필요 없다.
네 충고는 더욱 필요 없다.
두뇌의 소유자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이렇게 답장하기도 했다.
카스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결혼문제로 형과 사이가 더욱 나빠졌다.
요한은 1812년 자신의 하녀였던
테레제 오베르마이어
(Therese Obermeyer)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베토벤은 근본도 없는 천한 여자가
'베토벤'이라는 성을 갖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이 결혼에 결사 반대했다.
물론 요한은 형이 결혼까지
상관하지 말라며 무시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휴양차 머무르고 있었던 테플리츠를 급히 떠나
린츠까지 찾아와 결혼을 뜯어말렸다.
요한의 집에서 둘은 격렬하게 언쟁하다가
급기야 베토벤이 요한을 때리는 바람에
주먹싸움까지 벌이게 되었으며
테레제가 신고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분을 삭이지 못한 형 베토벤은
결국 경찰에 의해 요한의 집에서 쫓겨나
빈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끝내 요한은 테레제와 결혼을 강행하였고,
이 일로 형제간에는 평생 앙금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카스파 못지 않게
요한도 이 결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나마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요한의 아내 테레제는
아이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드세서 평생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래저래 베토벤가의 3형제들은
모두 결혼과는 인연이 없었던 셈.
게다가 요한은 형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자신이 대작곡가 베토벤의 아우라는 점을
사업에 자주 써먹었고
가끔 형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형의 악보를 챙겨서
멋대로 처분하는 짓도 저질렀다.
당연히 베토벤과 베토벤의 주변 사람들은
이런 요한의 속물근성을 거세게 비난했으며
그의 평판은 점점 떨어지다 못해
나중에는 베토벤의 제자와 지인들의 분노가
무서워 형의 장례식 참석조차
포기해야 하는 수준까지 내려갔다.
요한이 만약 참석을 강행했다면
진짜 뭇매를 맞았을 지 모를 정도로
당시 분위기가 험악했다.
하지만 베토벤과 요한은 평
생 으르렁댔으면서도
절연까지 하지는 않았으며
베토벤이 조카 칼의 양육권을 획득한 후에는
종종 요한의 별장에서
칼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특히 루트비히가 죽기 얼마 전에는
동생과 오래된 앙금을 털고
화해했다고도 한다.
지인들이 인정을 안해줘서 문제였지.
한편 카스파나 요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과
루트비히와의 불편한 관계는
베토벤의 자칭 비서였던
쉰들러가 과장, 왜곡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쉰들러가 베토벤 일가에게 푸대접 받은 원한으로
조카 칼과 베토벤의 동생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증언했다는 것.
후술하는 쉰들러라는
인간의 수준을 보면 이게
결코 과언이 아니다.
1.3. 베토벤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
카를 판 베토벤
카를 판 베토벤
(Karl van Beethoven,1806-58)
베토벤의 인생 후반기에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1815년 자신의 첫째 동생인
카스파 판 베토벤이 결핵으로
41세에 사망하자
카스파의 아들이자 자신의 유일한 조카인
카를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획득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 이유는 첫째, 베토벤 본인이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으며
카스파가 죽었을 당시
둘째 동생인 요한마저 자식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베토벤 가문을 이어갈 유일한 후손은
카스파의 아들 카를 판 베토벤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둘째 이유는 베토벤은 카스파의 아내이자
칼의 엄마였던 요한나 판 베토벤을
거의 창녀 수준으로 멸시했으며
칼이 그녀 밑에서 자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편지에서
자주 요한나를 사악한 여자로 비난하면서
밤의 여왕
(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배역을 빗댄)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물론 베토벤의 생각이
다소 극단적이긴 했지만
이게 과언만은 아닌 게,
실제로 요한나는 바람둥이라는
평판이 자자했으며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몰래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기 때문에
카를이 카스파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요한나는 아들의 양육권을 놓고
법정 다툼을 하는 와중에도
종 주조업자와 눈이 맞아
그의 사생아(여아)를 낳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베토벤이 보기엔
당연히 요한나가 베토벤 가문의
유일한 후손을 제대로 키울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베토벤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카를을 보호하기 위해
요한나를 상대로
카를의 양육권을 찾는데 주력하게 된다.
당연히 요한나는 반발하였고
결국 베토벤과 요한나는
카를의 양육권을 두고
치열한 소송전을 벌이게 되는데,
베토벤의 카를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져서
거의 편집증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 소송은 카를이 대략 10대 초반일
때부터 시작해서 거의 4년이나 끌었으며
이 때 카를은
어머니의 부정한 행동에 대한 증언을
강요받고 몇 시간씩 법정 관리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다.
어린 카를이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결국 어렵게 양육권을 획득한 베토벤은
카를이 어머니 요한나를 만나는 것을
전면금지했다.
하지만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삼촌은
카를에게 부정한 엄마 이상으로
견디기 힘든 존재였다.
자식을 키워본 적이 없었던 베토벤은
제대로 양육하겠다고
조카를 친모로부터 무작정 뺏어왔지만
막상 제대로 가르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베토벤은 권위주의적이고
툭하면 화를 내는 데다 대
화가 아니라 명령으로
자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빵점짜리 아빠였다.
삼촌의 집착을 견디지 못한 카를은
자주 엄마를 만나러 갔으며,
이에 분노한 베토벤은
경찰을 동원해서 카를을
요한나의 집에서 강제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러니 요한나와 관계가 평생 좋지못했다.
베토벤은 카를이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장차 자신처럼 뛰어난 음악가가 되길 바랬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이 없는 돈을 쪼개서
보낸 사립학교에서
적응을 못하고 번번이 문제를 일으켜
퇴학을 당했으며,
음악을 가르치려 해도
그에 대한 대한 흥미나 재능이 전혀 없었다.
카를은 삼촌이 적성에 맞지 않은
음악을 강요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1824년 빈 대학교에 떠밀리듯
입학하자마자 자퇴하고
군대를 가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베토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두 사람은 2년간 이 문제를 놓고
다투다 점점 격해져서
급기야 우울증에 걸린 카를이
권총 자살을 시도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가서
카를은 찰과상 밖에 입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한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후 잠시 베토벤 곁에서
조용히 지내던 카를은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해인 1827년
결국 군입대를 강행하고
보헤미아의 이글라우(Iglau)로 떠나버린다.
이미 중병에 걸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던 베토벤은
크게 상심하였으며
카를이 떠난 후 약 두달 후에 사망하고 만다.
베토벤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를은
즉시 빈을 향해 떠났지만
빈과 이글라우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장례식을 치룬지 3일 후에야 빈에 도착했다.
삼촌은 자신이 남긴 모든 재산을
카를 앞으로 남겼고
아직 나이가 어렸던 카를은
앞서 양육권 소송 당시
자기 엄마(요한나)의 변호인이자
그녀의 친척이었던 야콥 호셰바
(Jakob Hotschevar)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행히 호셰바는 신사적인 사람으로
카를과 카를의 재산을 잘 돌봐줬다고 한다.
이후 카를 판 베토벤은
5년간 군대에 있다가 제대 직후
어머니 요한나와 같이 살다가
카롤리네 나스케(Caroline Naske)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둘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원수같아도 그래도 생전의
자신의 삼촌이 그리웠는지
자신의 독자에게
루트비히라는 이름을 붙였다.
칼 판 베토벤은 52살에
간암으로 죽었으며
아내는 이후 33년이나 더 살았다.
카를의 아들 루트비히(1839~1916)는
나중에 자신이 베토벤의 직계 후손으로
사칭하면서
자신의 큰할아버지
루트비히의 작품으로 위조한 악보 등을
여러 곳에서 팔아먹는 추태를 저질렀다.
후에 진상이 밝혀지자
대차게 욕을 처먹었고,
미국으로 도망치듯 이민해서
거기서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베토벤이 누구야?"라고 물어볼 정도로
베토벤이 유명하지 않았던 탓에
큰 돈은 벌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사기만 치고 다녔던 것은 아니고,
미국 이주 후 철도 회사
(Michigan Central Railroad Co.)에
근무면서 나름 성실하게 살다가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니체
(Maria Nitshe)와 결혼하여
아들 카를 율리우스
(Karl Julius Beethoven)를 두었다.
이 카를 율리우스가
1917년 47살로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베토벤의 가계는 여기서 끝난다.
카를의 엄마 요한나는
83세까지 장수했으며
심지어 아들 카를보다도
10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베토벤 사망 후
그녀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줄어든 탓에
말년이 어땠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베토벤의 사망 이후에도
딱히 재혼을 하거나 정착하지는 못하고
불우하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카를의 이부(異父) 여동생이자
요한나의 사생아인
루도비카 요한나(Ludovika Johanna)는
대략 성인이 될 때까지
요한나와 함께 살았던 것 같지만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미국의 베토벤 연구가
메이너드 솔로몬
(Maynard Solomon, 1930~ )은
베토벤이 요한나를 멸시한 이유가
일종의 애증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
즉, 카스파가 사망하고 나서
베토벤이 요한나에게 들이댔으나
요한나가 거절하자
복수심에 조카 카를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소문은
베토벤 당시에도 있었으며
한술 더 떠서 카를이
사실은 베토벤의 조카가 아니라
요한나와 베토벤의 친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물론 이런 풍문들은
딱히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베토벤이 카를에게
너무 집착했던 탓에 나온 이야기들로
솔로몬의 가설도
이런 풍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영화 '불멸의 연인'도
이 풍문들을 낭만적으로
각색해서 만든 것이다.
이 가설은
소문 이상의 증거가 전혀 없는데다
요한나가 죽을 때까지
베토벤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않고
그에 대해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던 점,
베토벤이 기본적으로
음악적 소양이 없는 여자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현실성이 별로 없다.
게다가 2016년 현재에는
솔로몬 본인도
이 가설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 영화 불멸의 연인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재미로 보자.
1.4. 베토벤의 스승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
크리스티안 고틀롭 네페
(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는
고전파시기의 음악가이자
어린 시절의 베토벤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네페가 베토벤의 진정한 은인이었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닌데,
베토벤의 음악적 잠재력을
본격적으로 깨워주고
음악가라는 인생의 방향을
정해준 사람이 바로 네페였기 때문이다.
네페는 한동안 작곡가라는 본업은 거의 잊혀지고
단지 베토벤의 스승으로만 알려졌는데,
후에 자신을 훨씬 넘어선
대작곡가가 된 자신의 제자 덕분에
그의 음악들도 다시 발굴되고 있으며
베토벤을 테마로 한 연주회 등에서
그의 곡이 종종 레퍼토리에 오르기도 한다.
네페는 독일 켐니츠(Chemnitz) 출신으로
초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세 무렵에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분들과 마찬가지로 졸업 후에
진로를 음악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음악 지망생 네페는
당시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드레스덴의 세일러 음악극장
(Seyler theatrical company) 감독이었던
요한 힐러
(Johann Adam Hiller, 1728-1804)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776년에는 힐러에 이어
세일러 음악극장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오페라 작곡가이자
연출자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취임한지 3년만에
세일러 극장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고
이에 네페는 한동안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1781년경에
본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하게 된다.
네페는 본에 오기 전까지는
오페라 작곡가로 나름 알려졌으며
특히 1780년에 초연된
징슈필 아델하이트 폰 벨타임
(Adelheit von Veltheim)은
네페가 죽은지 한참 지난 뒤에도
종종 공연이 되었을 정도로 유명했다
(아쉽게도 현재는 거의 공연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에서 오르가니스트가 된 후에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으며
주로 건반음악이나 실내악곡,
협주곡 등의 기악곡을 작곡하였다.
본에 온 네페는 동료 음악가인
요한 판 베토벤의 맏아들 루트비히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루트비히를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채용한 후
본격적으로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쳤다.
루트비히 역시 괴팍한 아버지와 달리
자상하고 자신에게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네페를 굉장히 좋아했다.
네페는 특히 베토벤이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작곡의 기초를 세심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이 시기에 씌어진 베토벤의 작품들,
예를 들어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
(WoO 63, 1782),
3곡의 피아노 소나타
(일명 선제후 소나타, WoO 47 1-3, 1783),
피아노 협주곡
(일명 0번 협주곡, WoO 4, 1784) 등을
들어보면 네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베토벤을 가르칠 때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비롯한
바흐의 건반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대위법의 매력을 알려줬으며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나
신동 분야의 선배인 모차르트의 작품도
소개해 주었다.
이 시기 베토벤이 작곡한
오르간을 위한 푸가(WoO 31)를 들어보면
거의 바흐의 작품처럼 느껴진다.
후에 베토벤이 대위법을 바탕으로
숱한 명작을 만들어낸 밑바탕에는
네페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네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베토벤을 합창음악이나 오페라 등의
음악공연에 자주 데려갔으며
사춘기를 벗어난 베토벤이
본의 궁정음악가
(수석 비올라주자 및 부지휘자)로
취직할 수 있도록 힘써주기도 했다.
베토벤은 더 넓은 세계에서
음악인생을 펼치기 위해
1792년에 빈으로 떠났으며
이후 스승과 다시 재회하지 못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일생동안
네페를 은인이자 스승으로 존경했다.
베토벤은 빈으로 떠난 이듬해(1793)
네페에게 쓴 편지에
'제가 음악가로 성공한다면
그 몫의 상당부분은
선생님에게 있습니다'라고
감사를 표시했으며,
이후에도
네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스승' 또는 '은인'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베토벤이 빈으로 떠난 직후
나폴레옹 전쟁이 본격화되었고
1794년에 결국 본도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한다.
이 시기에 네페는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고
점령군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본 지역의 행정을 관리하는
공무원으로 임명된다.
네페는 음악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본을 떠나 데사우(Dessau)에 있는
작은 극장의 지휘자로 부임하게 되는데,
데사우로 간지 2년만인 1798년
부인과 함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1787년 한 음악잡지
(Cramer's Magazin der Musik)에
네페가 소년음악가 베토벤에 대해
기고한 글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그는 베토벤의 재능이
모차르트에 뒤지지 않으며
장차 제 2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지만
정작 네페 본인은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5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1.5. 베토벤의 스승 하이든
하이든은 1790년 말 경에
런던으로 음악여행을 가던 당시
본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베토벤은
이 위대한 음악가를 처음 만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두 곡의 칸타타(WoO.87, WoO.88)의
악보를 받아본 후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승낙한다.
1792년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몇달 전 7월에 런던에서 돌아와서
빈에 머무르고 있던
하이든의 제자로 들어간다.
그동안 동네 음악가들에게만 배우다가
모처럼 당대의 거장에게
배우게 된 베토벤의 기쁨과 희망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가르침을 받게 되자
하이든에 대한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이든은 분명 작곡가로는 1급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의문부호가 한두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느긋한 성격 탓인지
2차 런던여행에 대한 준비에 치중했던 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튼 하이든은 기대했던 만큼
베토벤을 열성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언젠가 베토벤이 작성한 악보를
하이든이 고친 후에 돌려주었는데,
다른 음악가인 요한 밥티스트 셴크
(Johann Baptist Schenk, 1753~1836)는
이 수정된 악보를 보고
하이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베토벤은 자신의 교육에
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하이든에게 크게 실망했다.
이 외에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몇 곡에 대해
악평을 하거나 출판을 반대하여
베토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베토벤 자신이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C단조의 피아노 3중주를
하이든은 신예 작곡가의 작품 치고는
너무 길고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베토벤은 자신과 너무 성향이 다른
하이든에게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1년여만에 사제관계를 청산한다.
후에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크게 실망했었다.
물론 이 말은 하이든이 배울 게 없는
시시한 음악가라는 뜻이 절대 아니라,
단지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주지 않은
하이든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한 것이다.
여튼 하이든과 결별한 베토벤은
전술한 요한 셴크를 비롯햐여
음악이론가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
(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이론과 작곡법을 배우고
빈의 궁정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에게
이탈리아 음악양식과
오페라 및 성악곡 작법을 배웠다.
한편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
빈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피아노 3중주 3곡(op.1-1,2,3)의 출판 때
하이든은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는
내용을 삽입하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는데,
베토벤은 이 제안을 가차없이 일축해 버렸다.
자존감의 사나이 베토벤은
애초에 하이든의 제자 같은 타이틀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하이든은 자신의 2차 런던 여행 때
베토벤에게 제자이자 비서격으로
동행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전에 사제관계가 끝나버리는 바람에
이 제안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냥 파국으로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헤어진 이후에도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과
독학을 병행하면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곡수법을 익혔으며,
그로 인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양식을
수립하기 전까지
그의 초기음악에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이나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 등을
분석해보면
하이든의 작곡 방식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
수제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비록 스승으로서 하이든은 기대에 못미쳤지만
작곡가로서는 당시에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 필적할만한
롤모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94년 하이든이
2차 런던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베토벤은 자신의 첫 피아노 소나타 3곡
(op. 2-1,2,3)을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리히노브스키 공작 저택의 연주회에
참석한 하이든에게
자신의 연주로 이 곡을 들려주었다.
베토벤은 이 소나타를 통해
자신의 발전된 모습을
스승에게 과시하고 싶어 했던 것이며
하이든은 대인배답게
이 소나타에서 드러난
베토벤의 재능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베토벤을 만날 당시
하이든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대음악가였으며
유럽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명세를 감당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베토벤처럼 자존심 강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후배 음악가의
비위를 일일이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하이든은 그냥 베토벤에게
중요한 것만 알려주고
세세한 음악공부 같은 것은
스스로 하면서
자신의 제자라는 후광을 입고
운신의 폭을 넓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반면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잠재력을 깨워줄
열의가 넘치는 스승을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의 이런 생각 차이가
사제관계의 결렬을 가져온 것.
하이든은 1809년 사망했으니까
베토벤이 자신을 딛고
본격적인 대작곡가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
그가 1804년 발표된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한데
이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아쉬울 따름.
일각에서는
하이든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인
60번 C장조를
베토벤이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살짝 오마주한 것 같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하이든 60번에서 나오는 일부 동기가
엘리제를 위하여에
아주 조금 오마주처럼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베토벤이 직접 밝힌게 아니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1.6. 베토벤의 첫 번째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더불어
교회나 귀족등의 유력자들에게
전속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데,
스스로 큰 돈을 벌었던 모차르트와 달리
베토벤은 후원자들의 후원에 대한
의존도가 꽤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후원자들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배 작곡가들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애초에 베토벤이 빈으로
음악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본의 선제후가 후원금을 준 덕분이었다.
빈에 온 베토벤은
초기에 연주회와 피아노 교습 등으로
돈을 벌었는데,
막강한 후원자를 만나게 된 이후로
본격적으로 작곡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빈 초기 시절에
베토벤에게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비창 소나타의 피헌정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작
(Karl Alois Lichnowsky the Prince,
1761-1814)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인척으로
빈에서 태어나서 주로 빈에서 활동했으나
그의 영지는 당시 프러시아 영토
(현재는 체코의 Hradec nad Moravici 영역)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프러시아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리히노프스키 공작
원래 대학에서는 법률관련 공부를 했으나
음악에 꽤 조예가 깊어서
바흐의 악보를 수집하기도 했고
전문가 수준으로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연주와 작곡에도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빈에서는 같은 프리메이슨이었던
모차르트와 친교를 맺기도 했다.
리히노스프키 공작은
빈의 사교모임에서 연주자로 초청된
젊은 음악가 베토벤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1796년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떠나는 베토벤과
동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베토벤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았던 공작은
1800년경부터 적극적으로
베토벤의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자신의 빈 저택 내에
베토벤의 숙소를 제공하고
그가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 때까지
연 600 플로린의 후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베토벤은 베토벤대로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비창 소나타를 비롯,
제 2번 교향곡(op.36)과
피아노 3중주 3곡(op. 1),
피아노 소나타 12번(op. 26) 등의
중요한 작품들을 헌정하였다.
또한 베토벤은 이 시기에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히노프스키 공작에 대해
'나의 가장 절친이자 최고의 후원자'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로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후원관계는
6년간 별 탈 없이 계속되다가
정말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종결되고 만다.
1806년 여름 리히노프스키공은
베토벤을 자신의 영지에 초청했다,
그런데 하필 같은 시기에
프랑스군과 장교들이
그의 영지를 방문했다.
공작은 프랑스군을 접대하는 차원에서
베토벤에게 즉흥 연주를 요청했는데
당시 나폴레옹에게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던 베토벤은
이 요청을 일언지하에 일축해 버린다.
빈정이 상한 리히노프스키공작은
베토벤을 나무랐는데
베토벤이 지지않고 이를 맞받치면서
큰 언쟁으로 불거졌다.
싸움은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이성을 잃은 베토벤이
의자를 집어들고 공작에게 달려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같이 이 자리에 있던
오퍼스도르프
(Franz von Oppersdorff the Count,
1778 - 1818)백작이
베토벤을 말려서
그나마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싸움이 벌어진 다음 날
베토벤은 짐을 싸서
그대로 공작의 영지를 떠나버렸으며
앞서 싸움을 말렸던
오퍼스도르프백작의 영지로
숙소를 옮겼다.
이 싸움의 충격이 컸던지
두 사람의 관계는 1814년
리히노프스키공작이 사망할 때까지도
화해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베토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런 싸움을 두고 잘잘못을 논하는게
큰 의미는 없겠지만
현재는 대체적으로 베토벤이
너무 과했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이 당시 베토벤은 야심작이었던
오페라 레오노레가 흥행에 실패한데다
동생 카스파의 결혼문제로
카스파와 크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공을 들였던
요제피네 폰 부룬스비크와의 연애도
사실상 망해버렸고,
그것도 모자라서
귓병은 계속 악화되서
필답이 아니면
대화를 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베토벤을 자신의 영지로 초대한 것은
이처럼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한
베토벤에게 휴식과 위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다른 자의식의 소유자였던
베토벤은 공작의 이런 깍듯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요청은
일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갈등이 결국 파국을 야기한 것이다.
인간적인 면을 차치하고라도
이 싸움은 베토벤 입장에서
그리 현명한 처신이었다고 볼 수 없는데,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든든한 후원을
한방에 걷어차버린 베토벤은
한동안 경제적으로 상당히 쪼들려야 했으며
후술하는 것처럼
다른 후원자들이 나타난 후에야
간신히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담으로,
베토벤은 저택을 떠나면서
자신이 머물던 방에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쓴 편지를 놓아두었는데
거기에
"이 세상에 당신같은 귀족은
수없이 많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한사람 뿐이오!"라는,
오늘날 유명해진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런 모욕적인 편지에 대해
공작이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지사.
1.7. 베토벤의 두 번째 후원자 루돌프 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