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가가 바라보는 조승희와 총기난사 사건
미국에서 일어난 사상 최대의 캠퍼스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인 한국인 1.5세 조승희 군. 평소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던 그가 벌인 살인극은 우리들에게 황당함, 어이 없음,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전문가들은 그의 행동을 ‘반사회적 공격행동’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반사회적 공격행동의 원인으로 어린 시절의 암울한 기억이나 상처를 들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아픔이나 힘듦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조승희 군의 경우에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적개심을 표현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우리 애는 너무 착해...
교사로 근무하다보면 정말 착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척 순종적인 아이들 같습니다. 모든 것이 수월합니다. 어른들이 하자는대로 그저 따라 하고 별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법도 없습니다. 친구들과 그렇게 잘 어울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구문제를 크게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조승희 군은 아마도 이런 유형의 아이에 해당한 듯 합니다.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한 그런 아이말이죠. 이런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양육하는 것은 참 편한 일입니다. 신경 쓸 것도 부딪힐 일도 거의 없습니다.
착하다는 말... 참 무서운 말입니다. 이것만큼 사람을 잡고 바보로 만드는 말도 없습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착함의 실체는 결국 어른들이나 상대방이 그 사람을 입맛대로 조종하기가 얼마나 쉬우냐를 나타냅니다. 어른들이나 권위자의 기준에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거나 반항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결국 착한 사람은 자기 의견이나 생각을 표현하게 되면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순종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죠.
조승희 군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 듯 합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의 진술에 따르면 무척 조용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착하고 순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착하고 순한 것 마냥 좋아하고 칭송할 일이 아닙니다. 착하고 순하다는 것은 지금 그 사람이 자기 표현을 못하고 안에서 삭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인군자 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는 순간 매도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왜 착한 사람이 되는가?
이쯤에서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어지는 심리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착하고 순한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고 순한 아이로 길러지는 것입니다. 착하고 순한 아이들은 자기 표현을 잘 하지 않기도 하고 못하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아이들은 점차 입을 닫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거나 표현을 하는 아이를 심하게 혼을 내서 수치심, 죄책감을 심어주게 되면 아이들은 철저하게 자기 입을 막아버립니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의 공격성입니다.
심할 정도로 자기 표현을 하지 않는 아이는 그 자체로 굉장히 화가 나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교적 문화나 나이에 따른 예절 관념이 강한 탓인지, 표현하지 않는 아이에 대해 크게 문제삼지 않는 듯 합니다. 조승희 군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부모를 보면서 자기 힘듦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수용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부모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아이를 받아주게 되는데, 척박한 이민자의 삶 속에서 그 만한 여유가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삼시 세 때 밥은 먹여주었겠지만 마음의 굶주림은 채워주지 못한 경우 아이들은 좌절하거나 곁길로 새나가게 됩니다. 조승희 군 역시 안타깝게도 이런 경우에 해당하겠죠.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마음의 굶주림만큼 큰 병이 없습니다.
과도한 착함에서 적당한 나빠짐으로...
과도하게 착하고 순한 아이는 시한 폭탄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도하게 착하고 순한 아이는 뭔가 자기 표현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무 착하고 순응적인 아이들에게 우리는 표현을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표현을 못하고 자란 사람들은 대개 표현이 미숙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표현하며 자라지 못한 사람들은 표현하는 것이 참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적절하게 전달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일단 표현하도록 합니다. 표현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풀리고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제 아내가 아들은 잘도 안아주는데 저는 잘 안아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고 신경쓰는데 제게는 성의 없다는 마음이 들어 서운하기도 하고 질투심도 났었죠. 그래서 4살 난 아들 놈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니까 엄마가 널 그렇게 안아주디? 아빠도 좀 알려주라...”
그러자 아들 놈 하는 말,
“안아주세요! 라고 하면 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기고 싶을 때는 안아달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된 표현이구나. 사랑받고 싶을 때는 “사랑해 주세요.” 위로받고 싶을 때는 “위로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최선의 표현이라는 것. 단순하지만 저처럼 표현 못하며 자란 사람에게는 무척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조승희 군의 사건, 무척 비극적이고 슬픈 일입니다. 언론의 보도대로 15년 만에 처절하게 무너져버린 아메리칸 드림입니다. 32명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분노와 적개심, 분노와 적개심 역시 한 사람의 자원이자 힘이기도 합니다. 그가 적절하게 표현하며 살기만 했더라도 적개심의 폭탄을 던지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오릅니다. 기독문화는 표현하는 문화라고 확신합니다. 표현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기독문화가 아닌, 유교문화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희노애락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사람이 생기 있어지고 건강하게 됩니다. 복음 안에서의 소통이 가능해지고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김명찬 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