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로 올라가는 언덕에 노오란 개나리가 환하게 피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줄장미의 계절이다. 장충공원 숲은 초파일을 기리는 연등 물결이 화려한 밤을 연출하고 대각원 앞 느티나무는 나날이 푸르름을 더해 간다.
빠른 것이 세월이라고 했던가. 동국대학에서 만난 봄은 유난히 감회가 깊다. 아득히 먼 옛날의 4월이 생각나고 개나리꽃이 가득 피어나던 S 대 캠퍼스의 정경이 아프게 떠오른다.후래쉬맨으로서의 설레임과 들뜸이 채 갈아 앉기도 전에 닥쳐온 4월의 함성.
"3.15 선거는 불법이다. 공명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노도와 같이 터져나온 학원가의 분노. 종로에서 을지로에서 혹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민주주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천지를 뒤흔드는 피의 절규. 곧 이어진 무기휴강.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 동국대 만해광장에 초대되었다.남산타워의 오색 불빛이 바라다 보이는 야외 체육관에서 대형 화면에 비치는 틱낫한 스님의 차분한 모습과 대면한다. 살아있는 법문 그 자체라는 그분의 온화한 미소와 음성. 쥐똥나무 울타리 넘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등을 내놓고 특별강연에 귀 기우린다.
"나는 도착했다. 바로 행복의 집에" "나는 지금있고 여기 있다." 말씀 울려 퍼질 때 진달래 꽃잎 파르르 떨고 전신을 휘감는 맑은 흐름을 감지한다.지나간 과거에 매달려 있지 않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잡혀있지 않으면서 다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깨달음. 그 말씀에 힘입어 오랜 미망에서 깨어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호홉명상에 열중한다.틱낫한 스님을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 여유있는 마음으로 걷기 명상을 시작한다. 한 숨 한 숨 만들어 내는 正念의 힘과 맑게 깨어있는 마음이 엄청난 에너지로서 지친 영혼을 재생시킨다.
봄밤의 정취 무르녹고 성능 좋은 마이크에서는 뭇 생명을 정념으로 인도하는 은은한 종소리, 그 종소리를 들으며 아득한 날의 핏빛 그리움을 잠재운다.그리움이면서 깊은 恨이었던 4월을. 틱낫한 스님의 고요와 맑음을, 그리고 종소리와 함께 전신을 휘감던 청량한 기운을 되새긴다.
"나는 든든하다. 나는 자유롭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됐다." 우리는 모두 행복의 집에 도달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
2003년 동대신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