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邪 道 章
◎ 이만함이 없다(이 없는)하는 말씀은 도도한 고자세의 眞理이란 뜻일 수도… (※ 정리때의 생각이나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수 없으나…) 그 알알이 個體마다 만발한 꽃수풀 동산과 집이요 룡으로 섰(立建)음이라 얽고 얽히고 얽힌 굴레를 가르키는 말씀이다.
(※ 또 價値觀은 思考力에 있다로 적혀 있다) 또 그대의 몸집이 空同身이니라로 적혀있다.
◎ 그 무엇을 主長하는 것은 邪辟스런 뜻 (생각이 그렇게 짚히게 하는 것)이 시켜서 정신이 그에 사로잡혀서 하는 것이다.
正當함을 주장함 또한 好勝心이 強한 邪心에서 나오는 것이다。物事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에 있어서나 本來의 正當함은 없다。오직 억압적 힘이 正當性을 부여함으로부터 正當함이 심어질려는 터를 잡는 것인데。이것 또한 모든 그에 관련된 저항요인을 제거시켰거나 好應을 얻어야지만 정당함이 되는 것이다.
比較할수 있는 부정적 視角의 判別力이 缺如된 主張은 正當性의 好應을 얻기 어렵다。主張하는 名分 또 重要하다。對象의 평상시 견해나 관점상 정당함이 결여된 名分은 共感帶가 形成되지 않는다.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주장은 그 뜻을 펴지 못하고 그냥 그 주장선에서 끝나고 만다。多數의 主長에는 詐欺性이 농후 잠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主長의 모순이나 반박에 대응하기 위해 틔워 논 숨통과 같은 성격을 띈다 할 것이다.즉 구실과 변명 빙자할수 있는 어둡고 좁고 험한 길 위에 비춰지는 빛과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斷言한다면 시세에 편승한 주장은 끝까지 정당한게 얼마없다。이반면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라 하는 것은 아집과 독선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이도저도 아닌 절충은 간사의 극치다。이래서 中用을 쓰고자 하는 자는 갖은 굴레를 쓸 각오가 돼 있어야 할 것이다.
베풀고 생색내는건 우러를 位致가 아니다。主長을 위한 美化이거나 大魚를 낚기 위한 미끼이거나 의도적이던 저절로이던 베푸는 자를 키우기 위한 심도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바람에 날리는 쭉정이 허물보다 더한 내가 빈 것이라고 아무런 표현이 없는 空한 상태가 그 아무(某)개이다.또 이런 뜻이나 명분명호를 도용당하고 그 반대의 굴레를 뒤집어 씌워도 아무런 표현이 없는 것이 그 아무개이다.또 이런 솔깃한 감언에 말로 파고들어와서 그 병원 根같은 사탄의 자리잡고자 함을 부숴버리지 않는 것 또한 그 아무개이다。저쪽에서 이쪽을 상관치 않아 생각이 그를 끌어내고자 하나 도리혀 마력에 당기듯 딸려가게 하는 것이 그 아무개이다.
저ㅡ 칼은 갈고 닦아 빛날지언정 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저
돌은 무량세월에 시달려 마모되어
다 없어지듯 하더라도 그 性分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면 특별난 것은 없다。저마다 독특한 象을 내보이는 것이 그 아무개라 할 것이나 원하는 것이 엉뚱하면 (또한 엇비슷해서 가까히 다가서더라도) 경계를 지워논 것이 있어 理想으로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그렇더라도 그노력하는 像은 가상히 여길만 하지 않겠는가?
그 아무개가 無方未知의 世界에 居處를 삼고 있으니 밖이 아무리 난잡한 요동이 있더라도 따라 돌지 않아 이 굴레테를 벗어남과 같음인 것이다。이는 영원불멸의 眞理이다 한다면 그 말씀이 그럴듯하나 이는無眞理가 아니고 삿된 진리이다.왜냐하면 그 말과 뜻이 반항과 저항하는 感을 일으켜 어찌 그럴건가를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삿된 진리는 제 주장만 내세우는 융통없는 고집만 부리는 것이요 무진리는 그뜻과 말씀이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무개가 未知의 靜處에 있어 어느 界이던간 界라 하는 것을 초월하였으니 어디엔들 임하지 않으랴이다。이 또한 이것만이 아니요 어찌 그럴건가가 또 있어 限界가 없는 것이다。어찌 그럴건가가는 글을쓰고 표현하는 이의 재는 척도에 달렸다 할 것이니 왜냐하면 무언가 확증적인 것을 쥘수 없기 때문이다.일념으로 자기주장을 펴는 것은 충성스럽게 보이고 이리저리 융통을 도모하는 것은 간사함으로 보이기가십상이니 모두가 삿된 정신이 그 집(心身)을 파멸로 이끌고자 하는 유희 농단인 것이다。또한 이런 것을※ 곡해하면 오른걸 그르다 하고 그른걸 오른 것으로 두둔하는 뜻으로 와닿게 되는데 이는 보는 이의 마음가짐(태도)에도 달렸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어찌 그리 잘알아! 그 아무개가 그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지 누가 알아…。」등등이다。혹이 무진리와 진리를 판가름하여 말함이 이 또한 삿됨이 아닌가?」할지 모르나 分割 累數 多數
意味에 의한 判別力을 가르키고 있지 않는 理論은 이론 그 自體를 전개할 수 있는 말의 성립 글의 成立이없어 머리에 생각만 그리고 필은 가만히 있는 白紙의 상태와 같다할 것이다.
머리는 骨 髓덩어리 일뿐 무슨 생각이 담겨 있으리오 아무것도 없다.
육신은 마음에 그릇이고 마음은 튀는 覺點의 연결로 얽혀 이뤄지는 정신의 집이요 정신은 조밀하기도하고 허술허기도 한 고치집 얽음같은 빈 그릇이다(이는 살아있는 영원한 생명 循環體를 形成하여 빛과 같은 氣를 말한다 할 것이니 그 氣의 힘을 발산하는 것이 육신에 전달되어 象과 行으로 나타나게 됨인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추상적인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것일 뿐이다) 그에 담기는 것은 우주의 모든 참이라 하는 것과 삿됨이라 하는 것이다。이러한 곳에서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생각이 얽는 것이 精神이고 정신은 우주를 담은 허상의 그릇이다.소위 포개 논 그릇에 갈등과 순종의 흐름이 가득 넘쳐 흘러나고 흘러들어 끊임없는 순환의 役事가 生成되어 그 그릇을 에워싸고있는 것 같음인 것이다.그 여러개의 포개 논 그릇을 一器로 化하여 본다면 ㅡ器요 一器 또한 空虛한 것으로 본다면 그 실상의 그릇은 없고 그냥 공허한 우주나 物事 象態를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정신에서 생각이 나온다는 교과서 같은 얘기는 하나마나한 것이요 생각이 얽히어서 정신이라 하는 그릇을 만들어서 宇宙를 담는다 하는 것이 고상(高尙)한 次元의 思考라 할 것이다.
이러한 얽음 얽음이(즉 理治=리치의 얽힘=얽음은 다스림이다=다스려 얽는 것이니 空에는 이미 다스릴 틈의 여지가 없고 파고들 여지가 없이 얽음이 꽉차 있다.※ 이 또한 생각을 그렇게 기울길 탓이다.)
來歷(物事의 蓄積에 의한 史積의 傳來)을 形成하고 래력은 點次的 인 여러 단계의 層階와 같은) 祖를 形成케 되고 모든 것은 이 로 말미암아 있게 됨인 것이다.
만약 어떤 걷는 자가 있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온 길을 뒤돌아 본다면 저 멀리서 온 足跡은 점차적으로 내려오는 序列象으로 보일 것이다。이렇듯 祖는 서열을 이뤄 온길을 形成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내가온 바를 기리는 뜻에서 또 앞으로의 막연한 흐름을 축원하는 뜻에서(또는 어떠한 리상의 나래를 펴던간 어떠한 理由에서던간) 사람들은 어떠한 表象(理想을 行爲로 옮길 때 道를 이루고 道는 信仰으로 發展되고 신앙은 宗敎化되는 것이다。이것은 邪相象의 原因인 것이다。즉、삿된 주장 진리를 형성하는 언덕임)을 만들고 경건한 마음가짐에 허리 굽혀 敬拜禮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혹이 부득이 하여 어떤 자리에 참여하여(사벽스런 귀신들이 그렇게 몰고 간다。빠질 구멍없는 올가미를 씌우고 말이다。그렇더라도 의연해야할 것이다。더럽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諸佛이 내게 賞을 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라。저쪽에서 권능을 잡고 있을 때에는 내가 그 권능을 갖고 올 때까지 순종하는게 슬기로운 대처 방안이라 할 것이다.그러면 안줄수 없는 여건이 조성돼 절로 내놓게 돼 있다.
노심초사 와신상담하고 있으면 기회는 오게 되어 있는 것이며 이미 好期가 當到하여 戰爭을 하고 있는 중이니 앞과 같이 대처하면 사벽스런 귀신을 때려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그 어떤 儀式行하길 요구하거덜랑 그리하라。본의던 본의 아니던 이미 그 모임(會)에 참여한 것은 그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며 그 인정은 겸양을 갖춰 허리 굽혀 허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남에 사상을 존중하는 곳에 나도 좋은리상을 갖고 있다는 긍지를 가져 내 자존심은 확고히하여 절대로 굽히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런데 대략은 그렇치 못한게 사람들의 태도이다.마음에 불굴심도 있다 하겠지만 이것은 어떻게 처신함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인데 이쪽 잘못이 아니라 그런 모임을 주최한 주최측이나 이끌고간 사냥꾼의 안내가 부족한 탓이라 할 것이다. 또는 선전 세의 과시 등 현란한 유혹에 마음이 들뜬 상태가 되거나 정신이 몽롱해져 어쩔수 없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기도 한다 할 것이다.
如何한 理想이나 主義나 信仰의 表象을 삿된 眞理라 하는 것으로써 절대로 拜禮받을 位에 서지 못한다。다만 그리하라 가르킬 뿐이다.그러므로 그 어떤 허상같은 것에 배례를 드린다 하더라도 또는 허리를 굽힌다 하더라도 敢히 삿된 이 사악한 뜻을 가져 禮받지 못하나니라. 다만 좋은 뜻의 명분으로 온 바를 숭상하는 道나 目的하는 바를 가르킬 뿐이다.또한 허상이 좋은 명분을 빙자해서도(一例로 佛、天、창조주、諸神明 등등=이런 것 따로 없다。따로 있다 하면 우상놀음이나 원가진 삿된 귀신의 종류일 것이다)절받지 못하나니라。절받을 位에 서지 못한다(※ 누구나 자기의 신앙의 주체는 그렇치 않고 의식이 또한 그렇치 않다 할 것이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된 계기(가피=낚시밥 함정 사로잡힘)가 있거나 스스로를 위안하는 마음에 위안일 뿐인 것이다) 오직 옴이 있게한 조상님네만이 그 位에 설 수 있다 할 것이나, 그것은 어떠한 우상으로 숭배할 대상이 아닌 것이나(※ 우상=신앙의 主體) 조상님 또한 온 길이니 전체적인 막이 오르게 하는 무대 一身으로 있음인 것이다。절받는 位致는 아무도 없다。한마디로 말해서 虛像인 것이다.
내 허상인 무대에 등장되는 것은 주위 여러 가지 소품과 나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로서 이로써 연극이 있게 되는 것이다.진리라 하는 것이 사악함이 이루 말할수 없으나 와 닿기엔 좋은 감정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호감을 갖는 자리에 서보지 못함에서 그러한 것이니 즉, 그 에 설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其實은 好感이라 하는 것도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질곡속에 절규하는 어찌 그럴건가? 라는 무진리의 끊임없는 諸行이기 때문에 그러함인 것이다。설한풍은 육신 정신감각의 서글픔이지만 꽃이 핌은 저 먼곳에서 오고 저 먼곳으로 가는 얽힘(理)의 슬픔이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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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힘은 푸는 恨의 始初이니 아름답고 예쁘다고 자랑만 마라! 벗고자 하는 그
고(罟)를 무진리만 셈한다…。혹이 의구심을 두어 생각하길 어찌 그럴건가? 어지러운 궤변으로서 또하나의 삿된 진리를 숭상케 함을 방조하고 조장함이로다 할 것이나 그 의구심을 둠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그러한 마음먹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이것은 내려다 보는 어투같으나 머리에서 흐르는 문맥이 그럴 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헛된 우상이 감히 예받지 못하나니라.내라 하지 않는 깨달음에 집을 만들어서 내라 하지 않았던 우리 얼님들의 덕이 깃들게 하기 위해서 헛된 신앙 등의 우상이 존재할 뿐이로다。
깨달음과 덕이 氣와 같아서 理氣時空으로 있는 한 不滅이나니라(※ 四月九日로 기록되어 있음) 완력으로도 지고(敗) 그 相이 점잖커나 험상커나 어떤 相이던가 해가지고 하는 반박논리에도 답할 궁변의 생각을 얻지 못하여 져서 허리를 굽힐케라도 그 추종하는 바의 우상이 결코 禮 받을 位에 서지 못하나니라. 이 말씀이 진리는 아니나 결코 비굴하고 사벽스런 변명이 아니다.왜냐하면 어떠한 진리라는게 있어 진리라 하면 누구의 가르킴 따라=※ 정리때 생각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수 없음) (우겨되는 고집 그렇게 믿게 하는 유혹 나만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게 하는 그러한 쇠뇌를 시킴으로 인해서 쇠뇌를 당함의로 인해서) 이미 삿됨이 됨으로서니라 이러모로 어떠한 장소나 位置(입장)나 시간에 있어 그 무리와 (부득이한 형편) 또한 뭔가 있는가 하고 찾아볼려고 설령 스스로 원했을지라도) 휩쓸리드라도 혼탁하게 물들지 않나니라°또한 물들음의 한테에 들더라도 결코(平等尺 主體性) 잃지 않나니라。또 잃더라도 以往은 꺼리고 걸리는 바가 없고 없어 누누히 여한을 헤아릴 건덕지가 없나니라。
물드는 듯해도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요 잃는 듯해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同化되어도 무슨 내라함이 있겠으며 또한 同化되지 아니하여도 내라함이 있어 무슨 걸림이 있겠는가? 이런들 그런들 온 바를 禮의 位致에 세우고자 함이니 굳이 고집하고 탓할 理由가 없으나 못내 미련을 떨치지 못함은 삿된 내라는 뜻의 잠재의식이 일깨우기 때문에 그러함이니 사벽스런 것아! 저만치 밝은 곳으로 들어가 비추어 보아라 할지어다.그러면 내라하는 것이 부끄러워 하는 빛을 발산할지 모르리라. 필자가 겪어보니 아무것도 없고 그 조촐한 床과 禮 드리는 이만 있고 禮 받는 位의 우상의 形容은 보이지 않고 그냥 빈자리 그 자체 허상이더라.
즉 헛된 우상은 그 位에 서질 못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필자는 예 드리는 이 뒷전에 공손히 서 있는 것 같았었다。또는 전체적인 상황을 투시하고 있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니 그 禮 드리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나였고 투시하고 있던 자는 또다른 나였거나 어떤 허깨비 같은 神이 내정신 감관을 사용하여 관찰하였을 것이다。누군가 형용상을 지어 있어야만 허상이 됨인 것인데 아무도 없다.
이를 본다면 소위 저들이 말하는 어떠한 理想이나 主義나 宗敎的인 儀式을 行함에 있어 최권위의 愚象의 位致에 있는 자라 하더라도 禮 받는 位가 아니라 예 드리는 입장에 서 있는 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뜻이다。하늘이라 하는 허상도 그에 서질 못하고 神이라 하는 허상도 그에 서질 못하고 三界에 그 어떤 이도 그 位에 서질 못하고 모두가 겸양을 미덕으로 삼아서 그 에 서질 않음이라.
혹 어리석고 제 처지를 잘 몰라 바보스런 귀신이 그냥 거기 서면 되는줄 알고 설지 모르리라(아니면 상관이 없어서 이던가 맞지 않는다 질책하는 뜻에서던가 未知의 界를 경시히 여기고 제 멋대로 주접을 떤다 하여 또는 너무 비약적이고 지나친 억측을 한다고 하여서 또는 다른 뜻이 있어서이던 그 位에 서지 않음인 것이다) 權位를 갖고 諸般信仰의 對象體는 모다 禮 드리는 位致이니 제반 깨달음의 仁聖 神靈主體및 그 卷屬(권속)들은 모두가 다 예 드림을 펴시고 가르키신다。그러므로 설령 어느 상을 택하여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계신다 하더라도 예 드림을 가르키기 위한 수단일 뿐 예를 받고자 해서 그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왜냐하면 그 자리의 主라 한다면 삿된 진리의 첫 우상으로 몰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절대자이고 自存者라 하는 것은 귀신같은 삿된 진리를 추앙하는 세력들이 저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定立한 假像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만약상 自請帝를 한다 한다면 언젠가는 파훼되고 말 것이다。무엇을 쫓던간 家見이요 見解이나 자아를 버리고 스스로를 기르기 위한 僞像을 쫓는다는 것은 迷宮에들어가 그 채찍만 맞는다 할 것이다。僞像에 등장되는 諸森羅 또한 자아를 지키고 스스로를 버리지 않고자 하여서 즉 스스로의 領域에서의 役事를 인정받기 위해서 그 位가 나의 位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저마다 스스로 맺혀 왔는데 또 누가 올걸 바라지 말라。모두들 가믄 하늘에 단비 바라듯 하니 스스로가 절로맺혀 왔음(※ 누가 원하던간 또 누가 원치 않하던간 相對願이면 이쪽이 제공자가 되고 이쪽이 願이면 저쪽이 제공자가 되는 것이다)을 왜 모르나! 스스로가 가뭄이이요 스스로가 단비이니 얽음의 時흐름으로 孕果됨이니 眞理라 하는 삿된 相에 기대지 말라。왜냐하면 스스로가 삿된 진리의 잉과로써 맺힘으로서라。그런데도 삿된 진리를 또 쫓아 구하느뇨.
삿된 진리는 그 아무개를 저기 높은 곳에 올려놓고 이만큼 이루어낸 것을 자축하는 뜻에서 그 아무개에게 허배한다。그런데 實相은 役事하는 일꾼(제보살 및 에워싸고 돌봐주는 天使라 하는 것 등 感에 無現한여러 가지와 나타난 헤짓거리 즉 거래작용 부여된 운명(주어진 기회) 이미 어떻게 될 것이라고 것의 그렇게 되기 위한 作用과 그에 동원 등장되는 森羅)은 있다.
도움받는 主體가 어느 궤도상에 오르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그 지나는 흐름따라 멀어져갈 뿐이다。계속 보채면 오히려 멀쩡한 것이 덥부치는 것이 되어 폐단으로 나타난다. 지나친 감쌈은 도리 손해요인으로 작용한다.또는 내가 너를 돌봐줬으니 나도 너에게 덕 좀 보자는 식의 기대는 현상은 도리혀 가 중한 부담을 가져와
고(罟)탈파의 저해요인 즉 主體의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된다 할 것이다.그러한 일꾼은 酒毒과 같은 것이니 풀어내는 方策을 미리 만들어 놓고 부려야 한다 할 것이다.
지나친 감쌈과 온전한 것에 덥부치기는、 울안에 기르는 가축과 방목 또는 산야의 짐승과의 차이점이 있는거와 같고 또 어느 시점에 달하면 어미는 새끼를 自立하라고 떨쳐낸다。이것은 종국에 귀의 처는 자신이라는 釋氏類의 가르침은 굳이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自然燮理가 그렇게 돼 있는 것이다(※ 爲行(위하여 하는것) 관점이면 지난 죄의식을 일으키는 것이라도 보살관점으로 승화되게 되는 것이니、自他를일로매진케하여 大功果를 이뤄 그 모든 참여나 댓가를 치룬 것들을 가치를 살려 爲行보살관점이 되게 할 것이니 諸求道者와 탈파 갈구자에게 보복적 차원의 선입견 마각을 주입시키고자 하지 말것이다(타락 등 죄를 받는다. 죄를 받아서 그렇다는 식)。諸行이 爲行菩提관점이란 뜻이다 근심되게 말고 이룩하게 한 성취편의 자세관점으로 생각이 들게 할 것이니 이것이 잘못이라하는 것을 미화시키고자 함은 아닌 것이니 이와 같은관점으로 놓지않으면 西氏론 처럼 諸衆이 관점에서 허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 아무도 없기 때문에 무진리는 목적이 없으며 趣旨가 없으며 길과 생명이 없어 삿되지 않고 참도 없고 해서 걸림이 없는 것이다。걸림이 없다는 것은 걸림(얽힘 그물) 고(罟)를 벗어났다는 뜻이겠다。취지 길 생명 원하는 바 희망 등등이 있으면 무진리가 아닌 것이다。내가 꼭 무진리로 가겠다는 집착을 버려라. 그러면 무진리이다。여지껏 석씨의 주장을 환태하고 있는 것이니 새로운 내용이랄게 없는지도 모른다. 또는 필자가 석씨 일부 가르킴을 철없이 곡해하고 있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난잡한 말은 우리 둘째놈 삼치레때의 느낀바를 옮긴 것이니 三神이 이미 같던 모양이다. 그러길래 내게 그렇게 보였지.
무진리는 어찌 생각해보면 자신없어 줏대를 세우지 못하는 氣꺽힌(풀죽은 또는 썩죽은) 주장을 간사한 말놀림으로 합리화 시키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敗者의 獨白같은 것을 누가 금쪽같은 시간을 할애하여 귀기울여 주겠으며 눈을 피로하게 하겠는가?
◎ 六感覺은 思考에 至大한 영향을 끼치니 분수를 망각시킴도 감각에 의한 思考力에 있고 이와 모순인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함도 감각에 의한 思考力에 있다.즉 진취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무궁한 발전이란 명분이′분수를 망각시키는 주제넘은 짓을 하게하는 作用을 한다 그렇다고 움추린 생각에 소심함으로 있으라는건 아니다 진취적인 발전에 앞서 자기의 처지를 훑어보고 조화있게 맞춰나가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思考力이 守準을 잃음은 主題도 따라 잃게되는 것이다。所以 생각의 원인인 들여받치는(觸) 事物이 思考의 관점을 흐리게 하는게 있어 부작용을 일으키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또한 이런 모든 것이 관찰하는 관점에 있다할 것이니 三界의 흐름이 생각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그 어지러움이 不美스러움으로 나타나는 것이 곧 부작용이란 관점이다.
이러므로 주제를 파악하여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찌 他를 헐뜯어서 自己를 내보이려할까? 이것은 옳치못한 行爲인 것이다。비루하고 야비한 짓이지만은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不美함이 쌓이고 그 피해가 여럿에게 돌아오니 내노라하는 희생의 정신도 좋지만 어찌 善한 체하는 僞善의 君子노릇만 위할것인가? 의롭지 못함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용기없는 사람이란 소리는 저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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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이 말하길 恨을 풀겠다고 하도나해서 담보없이 집을 빌려줬는데… 빌려준 집이라도 오래가면 그 빌린자가 소유권을 주장한다 그래서 담보도 없고 빌려줬다는 근거도 희박한 나의 집 빌려준 것을 내가 되찾을 테다 하니까 상대방쪽에서 인제와서 한다는 말이 이게 어찌 내 집이냐? 내가 居住한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이건 내집이다 하곤 제집인 것처럼 권리를 주장한다 한다 以上은 삿된 진리라 하는 것의 一片의 內用相인데 아무나 가져도 무슨 상관 있으랴? 집착을 버리고 그 놓아보낸다면 너의 마음이 잔잔한 호수같을 것이다。(대개는 삶 등 여러가지에 얽매여 놓아보낼 형편 케가 되지 못함이 처해있게 된다)홀가분한 생각은 너의 심신을 나는 새처럼 만들리라 하는 그 아무개의 말씀을 빗기듯한다면 여운은 사라지지 않고 맴돌다가 잊는듯해도 기억속에 축적되어 그 衆生의 넋과 얼속에 고통
고 (罟) 가 되어 時回로 들어가 저멀리 갔다가 相(진리)을 變形하여 석탄처럼 되어가지곤 森羅에게 利德을 준다는 것이 도리혀 恨을 품고 있는 毒가스의 도끼를 품고 돌아와 헛점을 노리고 파고들뿐만 아니라 寃塊(원괴)의 힘을 利用하고 난후라도 諸森羅를 病들게 하는 가스와 灰를 분리시켜 오염의 源泉 空害作用을 하게 하는 것에 一助를 하는 것을 生產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될것이니 이 무슨 그 아무개의 말이 眞言이라 할게 있으며 한발 더 디뎌놓아 논리를 자루처럼 뒤집는다 하더라도 (※ 이미 그 以前은 어떠 어떠해서 그렇다는 그럴듯한 理由를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즉 제고통받음은 인과응보 남을 고통받게 했던 것이 되돌아 온 것이니°또 장기 한수를 더 들여다 봐서 그럼 또한 집착을 놓아보냄도 저쪽에서 먼저하면 안될까이다? (굳이 내 입장 굴레에서 맴돌것이 아니란 뜻)가 생각의 머리를 든다 즉 저의 갖고 있는 능력 저(自)가 그 利用價値나 맛등 호감으로 집착을 놓아보낸다 용서한다는 뜻으로 되어놓곤 또다시 남은 원척이 아직 있다는 뜻의 집착을 한단 말인가? 이것은 느끼는 者의 立長이라할 것이나 만약상 혐오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상대방의 집착도 따라 사라지지 않는다할 것이다。또 마음을 잘-다스려서 저ㅡ 汚物도 그를 좋아하는 자의 맛있는 먹이라 한다면 그 아름다운 꽃이나 그 속에 담긴 꿀이나 진수성찬등 제좋아하는 여러가지로 관념이 놓아져서 이것저것 다떨쳐버린 저ㅡ 언덕을 넘어온 達覺한 신선의 마음이 된다할런지 모르리라°생각에 생각은 꼬리를 물어 지칠줄 모르니 좋아함 속에 심신은 황폐화되 깊은 나락에 떨어져 헤어 나올줄 모른다한다。그것이 어쩌면 금새 그 形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여한도 남기고 여한을 푸는 삶의 旅路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한다 또 그렇게 하면서 억겁을 지나는 동안 탈파에 탈파를 거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할 것이다 지금 평상인의 관점에선 권리를 주장하는자의 用心을 아무렇게나 합리화시켜주려는 뜻에 불과한 말이 될 뿐이다. 이것은 森羅를 鳥頭처럼 여겨 격멸하는데서 비롯된 저는 우월하고 남은 열등한 관점에서 남을 어 어떻게 제위치대로 제뜻대로 구제하겠다는 敎導主義的 發想에서 비롯된 구제 방편論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러나 時空攝理에 順應할 줄 아는 森羅들은 鳥頭性面만 있는 것은 아니다。빌려준 衆生은 영세토록 저허공에 뜬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돌면서 山川草木과 벗하게 하고 빌린 중생은 영원토록 권리를 주장케하여 그 소유인 것처럼 하게 한다면 공평치 못한 처사라고 할 것이다。빌려줄 넋은 본의 아닌 사탄악마처럼 되어있고 빌린 귀신은 천사와 신령 하늘처럼 되어있다。이것이 또한 저의 크나큰 정당한 능력이라 한다(※이 文의 흐름이 敗者의 변명같은 것으로써 敗者를 雍護(옹호)하려는 의구심이 들게한다)
남이나 또는 내가 해서(창작 연구 발명 발견) 내 논 것은 旣存의 있는 것의 편이 되어 그것이 어떤 理想이던간 物件이던간 이미 썩어문드러지는 부패되어 가는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므로 극히 삿된 것이다 그것이 그 어떤 그 아무개를 뜻하던가 즉, 마음에 쉼터를 뜻하던간 生活에 편리한 물건을 뜻하던간 어느것이나 마찬가지로 삿된 주장과 利를 내세우는 理想이나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한다면 이 말씀이 또한 眞理는 아니나 지극히 삿됨이니 어찌 그럴건가?를 또、연상하게 되는 것이다。기존에 있는 것을 사용함은 萬有의 行을 쉽게 하게 함인데 즉 닦아논 道라면 行하기 수월(易)하고 만들은 물건이라면 사용을 해서 生活을 편리하게 함인데 치사하게만 여겨 악취나는 쪽으로만 몰아재킨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생각과 이미 만들어논 그렇게 완전한 것으로만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완전타하는 事物界가 지극히 삿된 理로 된 것으로써 부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하더라도 行을 쉽게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또 이런것이 아니니 조상에 얼이 썩음(부패)이 감싸도는 理(舊態의 思考方式)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 새로운 발상 (발상에 의해 모든 새로움은 열린다
우연한 것이라도 터득하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오래 머무는 것도 있겠지만 곧 흐름 따라 사라져 거듭 터득할 기회를 상실케되거나 他에게 기회가 돌아갈 것이다)에 있음이라 그러므로 大學의 첫구절을 빌려서 親곳이라 함인 것이니 親의 字形解와 그 意意를 결부시켜볼때 民(백성) 즉 萬有(만유란 하필 사람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삼라가 나와 관련이 아니없다는 말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萬有는 제반 關緣 있는 森羅인 것이다)를 雨後 晴後 靑山江野처럼 새롭게 하는 곳에 어버이의 얼이 활력을 얻어 되살아난다는 뜻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짐 파문이 멀리퍼져 사라짐과 동시에 또 돌을 던짐 파문의 번복이 있음과 같음이니 이러한 번복이 계속 끊임없이 전개되는 가운데 새로움이 싹터 우리에 얼이 영원히 깃들어 있게 된다할 것이다…。
이상의 잡다한 말씀도 시간이 흐르니 좋은 言道가 못되는 것 같다。흐르는 번뇌의 일부를 쏟아논 것일뿐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眞正하다하는 眞理의 相은 점점 희박해져 사라져 갈 뿐이다. 즉 시간따라 行人의 옷에 흙묻어 가듯 시간에 묻어 저만치 앞머리가 묻어 계속 달고 흘러가는 것이다.마치 술술 풀리는 실꾸러미의 실을 달고 가듯 말이다。꾸러미의 실이 다할 때 그 진리라하는 삿된 번뇌의 멈춰 맴돌던 것은 영원히 사라지고 그 빈 꾸러미 허탈한 정신만 남아 새로운 감김을 기다린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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