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주
* 시작 기도
(시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곧 창세전 언약 안에서 주의 자녀로 택함 받은 자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한 일은 오직 죄와 악밖에 없는데 이런 자를 주의 자녀 삼아주심은 오직 은혜입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어찌 나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는지요?
그것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주님이 대신 지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심이 그저 죄송스럽고 면목이 없어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이 하루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거하기 원합니다.
오늘은 주일, 주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곳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예배가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뜻대로 사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주님만이 나의 온전한 소망이오니 이 땅에 있는 존재물에 치심하지 않고 주님의 나라에 온 마음을 쏟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살전 4:13-5:11
제목 :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리니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 나의 묵상
믿는 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림 신앙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던 주님께서 분명히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것은 진리다.
이 진리를 우리가 믿음으로 굳게 붙잡고 살아갈 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더욱 승화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이런 믿음으로 살았다(히 11장).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 즉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받은 그리스도를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보았고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을 환영하면서 이 땅에서 살았다(히 11:13-16).
이 땅에서 사는 그들의 모습은 그곳에서 무슨 결말을 내려고 하지 않고 단지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가장 심플한 삶을 산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소망을 이 땅에 두지 않고 오직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여 그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재림 신앙, 즉 종말적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 땅을 염세주의나 또는 운명론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가장 단순하고 심플하게 살되 욕심과 정욕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와 그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가장 복된 삶이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치부하거나 거기에 치심하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잘 알지 못하는 자였다.
단지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쯤으로 알았기에 그것은 나의 삶에 실재가 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관념과 지식에 머물러서 머릿속에는 있지만 삶으로 실제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의 삶 역시 이 땅에서 무언가 결판을 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 땅의 일에만 몰두하여 땅의 것으로 치부하고 그 일에만 치심하였다.
따라서 나의 신앙생활은 항상 갈 지(之) 자를 그리면서 살았다.
혼미하고 흔들리며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주님도 온전히 붙들지 못하고, 세상의 그 무엇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20-30대에는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학비를 벌기 위하여 길거리에 좌판을 펼쳐놓고 “쌉니다 싸요”를 외치면서 아동복을 판매하기도 하고, 신문을 배달하기도 하였다.
늦은 나이에 군에 갔지만 그곳에서 역시 밤을 낮 삼아 보고서를 차트로 써야 하는 차트병으로 거의 날밤을 새는 삶을 살아야 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취업을 하여 들어간 곳이 흥국생명이었다.
처음으로 배치를 받은 곳이 흥국생명 프로파팀이었다.
이곳은 직원들이 젊은 남자들로만 구성된 보험팀이었는데 예외 없이 처음부터 필드에서 뛰어야만 했다.
필드에서 뛰는 것은 괜찮은데 문제는 젊은 남자들만 모이다 보니 날마다 일과를 마치고 나면 술집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술도 마시지 못하고 그런 문화가 전혀 낯선데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하여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고민 끝에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조그만 중소기업의 총무과 직원으로 입사하여 총무과 총괄업무를 맡아서 담당하였다.
이 일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고 결혼을 하였지만, 일에 대한 만족이나 성취감은 없었다.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서 과외를 시작하였고 1년 정도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갈 무렵 교육청 직원들이 와서 과외방의 문을 강제로 닫아 버렸다.
우리가 과외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나는 과외법이 있는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사업을 하기 위하여 학원을 시작하였다.
학원 사업을 7년 정도 하는데 기쁨보다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학원생들이 들어올 때는 기쁜 반면, 방학이 시작되면 학생들이 빠져나가는데 그때는 가슴이 조여 오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매일 새벽기도를 나갔다.
나는 1부 새벽기도를, 아내는 2부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학원을 붙들어 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하였다.
돈은 좀 벌었는지 모르지만 이 일 역시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진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나이가 35세가 되었고 갑자기 주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고픈 마음이 생겨났다.
“그래, 지난 35년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 남은 35년은 주를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설렘과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내와 함께 기도하면서 그 마음을 확증하고 신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신학 3년을 마치고, 부교역자로 7년 정도를 섬기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도 항상 목마름이 있었다.
나름 열심히 하는데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바라보는 것은 항상 땅의 것, 만물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성취와 나의 영광이었다.
기도를 해도, 설교를 해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을 만물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분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였고, 내가 만든 우상에게 매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만든 송아지 우상과 다름없었다.
문제는 내가 우상을 만들어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배 목사님들에게 그렇게 배워 왔고, 복음은 겨우 십자가 복음 정도 알지만, 그 역시도 온전히 알지 못하였기에 언제나 나의 걸음은 갈지(之)자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신에서 발행되는 기독교보의 어느 기자가 한기총의 대표를 선출하는 총회가 금권선거와 이단 영입이라는 것으로 혼탁해져 있을 때 이런 글을 적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저 분들은 목사님은 맞는 것 같은데,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 같애...”
이 말은 비단 그 목사님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 나를 비롯한 수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외침인 것이다.
고 한경직목사님은 이런 소책자를 쓰셨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오죽하면 한목사님께서 이런 책을 쓰셨을까?
목사들의 타락은 성도들의 타락을 더욱 부추겨서 결국 한국 교회가 타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사시대 레위인과 제사장들까지 타락의 길을 걸음으로써 결국 사사시대 400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 영적으로 가장 암흑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신앙이 현실에 근거를 두면 끊임없이 흔들리고 혼미해지고 말 것이다.
현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되면 좋고 안 되면 흔들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신앙의 근거가 창세전 만물 위에 두고 살아갈 때 그곳으로부터 오는 하늘의 기쁨은 땅에 있는 어떠한 고통도 넉넉히 삼킬 수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은 신앙의 목적이 이 땅 곧 만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복음을 통하여 아들의 생명을 얻은 자이다.
이로 인하여 이 땅에 나의 소망을 두는 자로 살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나라, 창세전 만물 위에 나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요즘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음으로 나의 신앙 역시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다.
(히 12:28-29)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왜냐하면 현실적으로는 삶의 무게로 인하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것이 나의 신앙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오는 기쁨과 아버지의 영광은 오늘도 나를 그 나라로 이끌어 간다.
이전까지는 자기주장의지로 행했던 일들이 이제는 나의 의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의로 일한다.
주님이 행하셨기에 주님만 드러나고 나는 감추어진다.
나는 감추어지고 오직 주님만 드러날 때 그 일에 영광이 임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주님이 함께하시는 영광 가운데 거하길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그토록 찾고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던 안식을 이제야 찾아서 맛보고 있나이다.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 세상에 나의 신앙의 근거를 두고, 여기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없었나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심판하시고 의를 세우시므로 의의 결과 주님은 참된 평강을 주셨나이다.
저는 신앙의 순서를 오해하였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잘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의 근거가 영생, 즉 창세전 만물 위에 있을 때만이,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이 환경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온전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도 창세전,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기로부터 오는 영광을 아는 빛을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 나의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일희일비 하지 않고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이제는 이렇게 얻은 영생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자 되게 하소서.
나의 소망은 주님의 재림 때 부활하여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오니 그 신앙 안에서 주를 사모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