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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6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6:19).
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선한 데는 미련하여 느려터지고 오히려 악한 데는 눈이 벌개져서 얼마나 빠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런 나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창세전부터 감추어졌던 복음을 이제 나타내 계시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신비의 계시요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께 있을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종 역시 늘 주님과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땅에서의 소원은 있다가 없고 또 없다가 있는 것이지만 영원한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항상 있는 소망임을 믿습니다.
오늘도 그 소망 가운데 하루를 거하는 자로 세워주옵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시고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부터 다낭에서 베캄지역(베트남 캄보디아) 선교부에서 선교대회가 있습니다.
모든 일정들 가운데 성령님 함께 하여 주시고 은혜가 넘치는 대회가 되도록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살전 5:12-22
제목 : 항상 기뻐하라.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 나의 묵상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슬픈 일, 아픈 일, 고통스러운 일, 우울한 일 등 마음이 어두워지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못 먹는 감 찔러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왕 못 하는 것 말이라도 해 보자는 식으로 하신 것일까?
주님께서 그렇게 책임감 없이 말씀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기뻐해야 하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도 히죽히죽 웃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암에 걸렸을 때도 기뻐해야 하며, 사랑하는 자녀가 대학이나 직장에 떨어져도 즐거워해야 한단 말인가?
주님께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말이 아니다.
‘항상(恒常)’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 속한 말이 아니다.
이 세상 곧 만물 안에는 ‘恒常’에 속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에 속하는 모든 만물들은 ‘無常’에 속한다.
무상성이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 곧 만물 안에 속한 모든 만물은 무상성이다.
언젠가는 없어지고 쇠하여지는 쇠락의 법칙을 따른다.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는 들풀과 같이 사라지고 만다.
아침에 탐스럽게 핀 장미꽃을 저녁에 볼 때는 모두 시들어서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벧전 1:24) 이와 같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러나 이 무상성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비록 주의 말씀이 이 땅에서 선포될지라도 이 말씀은 만물 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물 위에 속한 하나님 자신이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만물 위에 있으나 만물 안에 있으나 항상 있는 말씀으로 존재하며, 이는 하나님 그 자체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과 함께 할 때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의 능력을 덧입고 넉넉히 하늘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장사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암이라는 고통의 수렁에 빠져 사경을 헤맬 때, 그것이 주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해결하려고 몸부림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수술도 하지 말고, 치료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고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해야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주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주님의 심판은 옳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초청하신 고난의 무덤 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들어가야 한다.
말씀 없이 그냥 들어가면 고통만 더 가중될 뿐, 평안도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말 지옥 같은 고난의 무덤이지만 주님의 심판을 인정하고 그 안에 말씀과 함께 들어가 주님의 품에 안기면 주님께서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 무덤 안에서 말씀과 함께 거할 때 주님은 그 안에서 성소를 지어주시며, 그 성소에서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깊은 교제를 원하신다.
주님이 하신 일이요,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주님은 일하시는 것이다.
어제까지는 지옥이었던 그 고통스런 무덤이 주님을 만나는 고즈넉한 성소가 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전에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이 속에서부터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의 기쁨이다.
이 하늘의 기쁨은 세상의 고통을 넉넉히 이기고 삼키는 능력이 있다.
세상의 기쁨이나 고통은 사라지고 지나간다.
그러나 하늘의 기쁨은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할 때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매일 같이 말씀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씀묵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아버지의 영광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들이 보았던 아버지의 영광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겟세마네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 역시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들이 보았던 이 영광은 이 세상 만물 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 만물 위에 속한 아버지의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의 복종을 받으시면서 그 복종을 자신의 유익으로 취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다 내어주시는데 그 내어주시는 사랑의 본질이 바로 영광이다.
따라서 그 영광의 빛은 아들의 얼굴에 새겨져 있고 그 영광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 비추어져 항상 빛난다.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아들의 얼굴에 있는 그 영광의 빛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고통과 아픔 우울함은 넉넉히 이기고 삼킬 수 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것이 바로 영생이다.
이 영생을 위하여 아들은 이 세상에 오셨으며 공생애 기간동안 철저하게 이 영생을 위하여 사역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이 땅 위에 산다면 이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하는 일을 우리도 똑같이 다 한다면 그것이 무슨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겠는가?
그들이 하는 걱정 다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 다 좋아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 우리도 다 싫어하고, 그들이 염려하는 것 우리도 똑같이 염려한다면 그것이 무슨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겠는가?
적어도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자라면 믿지 않는 자들과 달라도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아파하거나 고통스러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넉넉히 수용하여 하늘의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암에 걸려 숨이 넘어갈 때, 또는 대형 사고로 인하여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어서 같이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그 순간에도 믿는 자들은 무언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의연하게 대처하며 그 안에서도 하늘의 기쁨으로 넉넉히 이겨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잔인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잔인한 것이나 무정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창세전, 만물 위에 계신 주님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그들의 소망이 이 땅, 즉 만물 안에 갇혀 있다면 세상에 속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해에서 목회를 할 때 우리 청년 중에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청년이 있었다.
그 해 초 교회 표어를 ‘하늘의 기쁨으로 땅의 고통을 삼키는 교회’로 정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그 청년이 폭발하고 말았다.
어떻게 사랑하는 엄마가 죽었는데 하늘의 기쁨으로 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차근차근 복음을 전하면서 이해를 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의 차원이 아닌 것 같다.
정말 스스로 말씀 안으로 들어가서 아들이 보았던 아버지의 영광을 보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로 오신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이는 실재로 해보지 않으면 그저 막연하며 관념적인 신앙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면서까지 기도하시면서 우리가 보기를 원하셨던 ‘그 영광’, 이제 나는 그 영광을 날마다 본다.
나 역시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땅에 속한 자로, 만물 안에 속한 것을 바라고 소망하면서 살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 만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창세전 만물 위에 계신 주님께 소망을 두며 살기에 세상의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는 나의 소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의심의 안개와 근심의 구름으로 자욱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기쁘고 참된 평화는 오직 거기만 있기에 그 곳, 즉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인 영원한 나라를 나는 오늘도 바라보며 찬송하며 나아간다.
찬송 491장
1.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2.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3.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있는곳
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사옵니다.
후렴.내 주여 내 맘 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아멘.
영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이제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게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
오직 땅의 것에만 치심하여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아왔던 지난날의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는 비참한 자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나를 용납하여 주신 주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복종하여 그 분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그 자리에 아버지의 영광이 임한다.
나는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과 연합한 자임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하늘의 기쁨으로 땅의 고통을 삼키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주의 것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입니다.
세상은 나로 하여금 기쁘게도 하지만 고통스럽고 우울하며 힘들게도 합니다.
내 마음이 세상의 만물에 붙잡혀 있을 때는 그것으로 일희일비 하여 중심을 잃은 돛단배처럼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며 살았었나이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말씀은 나의 인생의 나침반이요, 나의 삶의 목표와 목적이며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만 나는 가장 안전합니다.
세상의 소문은 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나 주님의 말씀은 나의 찢어진 마음을 다시 싸매어 주시니 내가 어찌 주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있으리요?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붙잡으시고 이끌어주심을 믿사오니 나는 주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은 땅에 있는 어떠한 고통도 능히 삼킬 수 있사오니 주님만이 나의 힘이요 능력이요 생명입니다.
오늘도 하늘의 기쁨으로 땅의 고통을 삼키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 살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