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마는
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
그러나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다
시인 김수영은 1955년에 발표한 <나비의 무덤>에서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나비의 죽음과 다름을 이야기했다. 나비의 고운 지분은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고독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올 가을 들어 가장 쌀쌀한 날씨래.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라는 노래 가사처럼 찬바람 따라 떠났던 형이 생각나네. 그리고 고독했던 형이 나의 뇌리를 헤집는다. 아놔~ 리버 피닉스 형아~
죽었지만 죽어 없어지지 않은 사람.
세상에 여전히 그 체취를 드리운 사람.
세상에 삼투하지 못한, 그래서 요절한,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리버 형아.
다시 시월의 마지막 날이 왔기 때문이겠지. 10월31일.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잊히지 않고 떠오를 시기.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잊혀진 계절’도 벌써 25년이 됐단다. 거참 세월하곤... ☞ 이용 "'잊혀진 계절'이 25살이네요" )
그 밤, 13년 전 형이 떠났던 그 밤. 일면식도 없던 우리도 헤어졌네.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형은 차가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새처럼 파르라니 온 몸을 떨면서 차갑게 식어갔더랬지. 직접 보진 못했지만 형의 마지막이 그랬다더라? 그럼 진짜 마지막 슬픈 날갯짓을 하며 영원히 죽지 않는다던 진짜 ‘피닉스(Phoenix)’로 영면한 거유?
피닉스가 원래 그렇잖아. 아라비아 사막에서 500~600년마다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올려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조 ‘피닉스’. 유목민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래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형이 자본과 탐욕의 용광로,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견뎠겠어. 내가 생각해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 결국 향나무를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겠지? 난 형이 그 길을 자진해서 택한 게 아닌가 싶은 게지. 영원히 박제돼 불사의 길을 택하는 것. 형은 그렇게 다른 곳에서 날갯짓하고 있는 거지?
리버 형을 떠올리는 시간
사실 형이 향나무를 쌓아올렸다는 소식에 나 있잖아. 슬프고 아팠어. 더구나 할로윈 파티를 핑계로 들썩거렸을 선셋대로, 절친했던 조니 뎁형이 운영하는 바(BAR) 앞에서 이승과 절연했다니. 자연 나는 <아이다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쓰러져 길 위에서 파르라니 온 몸을 떨던 마이크를 연기하던 형의 모습. 형의 마지막도 그러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든 게지.
<아이다호>의 마지막 장면
당시 나는 스무 살 전후의 방자함을 맘껏 누리며 친구들과 술판을 벌리고 있었을 거야. 곧 군대로 (끌려)갈 것이란 핑계로. 어느 신문 귀퉁이의 요절 소식에 나는 화들짝 놀랐어. 내 청춘의 한 구석에 바람이 일더군. 바람바람바람... 또 하나의 바람구두가 저벅저벅 길을 나섰으니... 형은 어찌 고로코롬 껍질을 일찍 깨버리고 가 버린 것이오.
그 이후, 이맘 때. 가슴 속에서 서걱거리는 바람소리를 듣자면, 가을 낙엽의 방랑에 눈길을 주자면, 희뿌연 거리의 표정을 보자면, 내 마음은 하염없이 부유한다오. 방랑의 숨결은 스멀스멀 대고. 다 형이 남긴 자취 아니겠소. 책임지시오. 후후. 형도 참 유난했소. 그러고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설랑 그런 독특하고 유난스런 체취를 풍기다니. 누가 감히 형의 아우라를 따르겠소. 그 모질도록 슬픈 형의 아우라를...
마음의 고향, 아이다호를 찾아서
그게 따지고 보면 그 <아이다호>때문 아니었나 싶네. 형도 그 영화가 제일 좋았지? 너무 자신을 드러낸 것 같았는지 몰라도, <아이다호>는 형의 모든 것이었어. 아마 내가 형을 처음 본 것은 <인디아나 존스3>였지? 형의 소년시절이 담긴 <스탠바이미>는 내가 나중에 접했으니까. <인디아나..>에서 인디(해리슨 포드)의 어린 시절로 처음 눈도장을 찍고 <스니커즈>의 재기발랄한 청년까지 그저 강렬한 눈빛에 잘 생긴 얼굴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거든.
근데 <아이다호>가 떡하니 온 거지. 형은 그때 내게로 왔어.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장식한 우상. 랭보가 보낸 ‘지옥에서의 한 철’이나 제임스 딘의 ‘에덴의 동쪽’이 어디에 있으며, 짐 모리슨의 ‘The End’를 알고 싶어 하던 시기. 형도 그 대열에 들어섰다오. 더구나 그때까지만 해두 형은 살아있었으니. 형의 브로마이드를 모아두던 생각도 나네. 이후 <허공에의 질주>에서도 형의 연기는 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같드만.
<아이다호> 포스터
형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다며? 히피 생활을 하면서 너무 일찍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탓인가. <아이다호>에서의 형이 연기한 마이크도 그래서 유난했지.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 남창에, 부랑자에, 기면발작증에, 동성애까지... 어느 하나 동정 없는 이 세상으로부터 환대받을 요인이라곤 없네. 초점 없는 눈빛과 휘청대는 발걸음, 어디에도 안식처는 없고...
그래서 마음 깊은 곳의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아이다호행. ‘길’은 형의 유일한 보금자리 같더라. 긴장하면 갑자기 혼수상태로 빠져드는 기면발작증을 가져놓고선 기어코 길을 나서는 똥고집. 그럼에도 그 길이 있어서 덜 외로워 뵈기도 하더라. 그래 “길의 감식자”라며 “평생 길을 맛볼 거야”라던 마이크의 대사가 그저 형이 진짜 마음이었겠지?
누군가는 그러더라. <아이다호>를 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툭하면 쓰러져 둥지에서 떨어진 새처럼 길 위에서 떠는 영화 속 모습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뒹구는 최후와 포개지기 때문’이라고. 어디 나라고 그렇지 않겠소. 그 보도블록이 춥지는 않았소. 그렇게 잠이 들이댔소. 묻고 싶구료. 이 대답 없는 형아.
형이 덧댄 흔적들
나는 형의 영면과 함께 몇 사람도 떠올라. 우선 키아누 리브스 형. 절친했던 친구를 잃고, 이후 여자친구를 불의의 교통사고로 곁에서 떠나보내고 친동생도 백혈병으로 투쟁 중이라던 사람.
☞ 키아누 리브스, "하늘은 내게 공평치 않다" 눈물
<아이다호>의 한 장면
또 “리버 피닉스의 <아이다호>, 정말 좋지 않아요”라며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고 라디오에서 형의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애처로이 울먹이던 한 여인. 소외받은 영혼들에게 끊임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영화와 세상의 연결고리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건네던 그 여인. 고 정은임 아나운서. 형을 너무 좋아하다던 그도 갑작스런 사고로 형을 따라갔어. 형, 그곳에서 은임 누나랑 만났지? 누나가 무척 좋아했겠다.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포함한- 무수한 팬들. 형은 그 많은 사람들 훌쩍 놓고 떠나 버린겨. 킁~ 나쁜 사람 같으니...
세월, 거침없이 흐르더라. 벌써 13년이야. 고작 23에 죽은 형의 나이를 난 훌쩍 뛰어넘었어. 형이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았으니 어쩔 수 있나ㅎ 형이 살아있었음 36인데 어떤 모습일까. 사실 난 상상이 안 돼. 리오(강-스페인어)처럼 흘러가고자 하는 형이 할리우드에 섭생하고 있을 것 같진 않거든. 어디에선가 길을 감식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
그래. 형처럼 요절한 사람들, 지금보다 어릴 때, 한 땐 부러웠다. 27에 생을 마감했던 오스트리아의 천재작가 게오르크 트라클, 프랑스 달의 시인 쥘 라포르그, 한국의 이상, 김유정, 이장희. 지미 헨드릭스는 28이란 나이에 목숨을 잃었고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샘 쿡, 짐 크로스, 행크 윌리엄스, 듀언 올맨, 마크 볼란. 또 전혜린, 김정호, 김현식, 김광석, 유재하, 나운규, 기형도, 윤심덕. 일본의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아울러 모딜리아니, 쇠라, 고흐, 랭보, 슈베르트, 제임스 딘, 장국영, 매염방... 에휴~
형, 나는 사실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있어. 청춘은 매순간 다양한 사건들을 잉태하고 있지만 가끔 청춘에 되묻고 싶어지는 것도 있다. 폴 베를렌이 이렇게 읊었듯 말이야.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봐, 뭘 했니?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
다시 김수영이다. 주야를 무릅쓰고 애 쓰고 있는 나의 생.
나비야 나비야 더러운 나비야
네가 죽어서 지분을 남기듯이
내가 죽은 뒤에는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는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단다
참, 형 13주기가 지난 다음날(11월1일)은 (김)현식 형의 16주기, (유)재하 형의 19주기야. 누군가 그 형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 줌 좋을 텐데... 리버 형, 거기서 현식형과 재하 형 만나서 예술을, 문화를 논하고 있겠지? 거긴 말도 통하고, 국경 같은 경계도 없겠지? 차별도 분리 따위도 없고 전쟁도 않는 동네겠지?
어쨌든 나는 다시 울컥해도 <아이다호>를 꺼내 볼 지도 모르겠다. 그걸로 만족해야지.
형은 여전히 불사조(피닉스)야.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마음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