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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4일(연중 제11주일 ) 마르 4,26-34 (겨자 나무) 예수님이 남긴 것,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두 개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씨를 뿌려 놓으면,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사람들에게 선포되면, 그들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라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땅에 뿌려질 때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그것을 수용할 때는 보잘것없지만,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성장하여 자리 잡으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율사와 사제가 생기자 하느님을 잊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가 가르치던 것은 율법을 지키고, 성전이 요구하는 제물 봉헌에 충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본시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한 생활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준수를 담당하는 율사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율법의 조항들은 늘어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율사들이 행세하자, 사람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율법 지키기에만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제물 봉헌이 생긴 것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수확의 맏물을 성전에 봉헌하면,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옵니다. 자기 노동의 산물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겠다고 마음다짐 하는 제물 봉헌 의례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면, 자기가 거둔 수확은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롭다고 의식한 사람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과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고 하느님에게 함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제물 봉헌도 그 일을 전담하는 사제들이 행세하면서 하느님은 은폐되고, 많이 바치면, 많은 축복을 받는 장치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렇게 율사와 사제라는 직업이 등장하여 행세하면서, 이스라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지켜야 하는 율법과 바쳐야 하는 제물봉헌에 시달렸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움도 잊어버리고, 기쁨도 모르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율사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병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죄의 대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벌을 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하느님이 조건 없이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벳싸다 못가에서 38년 동안 앓아온 사람을 고친 후,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17) 아버지가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 당신도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두 개의 비유 말씀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자라고, 그것이 자라면, 주변에 은혜로운 혜택을 준다고 말합니다. 뿌려진 씨는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합니다. 그리고 땅은 씨를 뿌린 사람이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 남기셨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예수님이 사람들 안에 뿌린 씨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또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사람들 안에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수확하여 혜택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주변의 모든 사람과 하늘의 새까지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루카 6,20-21)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사랑에 충실하기 위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되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도 가르쳤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알다시피 민족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그들 위에 왕 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누릅니다. 그러나 그대들 사이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2-43) 우리 안에 자라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섬김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백성에게 환기시키기 위해 생긴 것이 율사와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섬김을 잊어버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을 때,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은폐되고, 지켜야 하는 율법과 바쳐야 하는 제물 봉헌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인간을 벌하는 분, 곧 인간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남긴 것, 사랑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7,9)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을 신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신뢰를 살았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복장을 하지도 않았고, 존경스런 호칭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섬기는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뿌리지만,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고, 하느님이 비옥하게 만드시는 땅입니다. 우리가 행세하고, 우리의 독선과 횡포가 작용하면,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집니다.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씨앗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1고린 13,4-5).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앗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그런 씨앗입니다. 참고 기다리며, 성을 내지도 않고, 비난하거나 성토하지도 않는 사랑의 씨앗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가능성 "하느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장 핵심 주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리적인, 물리적인 영토를 가진 공간으로서의 어떤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있는 세상, 하느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이 우리 삶과 이 세상에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명이었고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추구해 온 목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아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꽃나무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나무가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기 전에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었을 것이다. 과일나무를 보면서도, 이렇게 풍성한 과일을 맺기 이전에는 하나의 작은 씨앗에 불과했을 것이다. 숲속에 앉아 커다란 나무들을 바라볼 때도, 이 나무가 이렇게 성장하기 이전에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보는 하나의 작은 씨앗에는 이미 그 안에 꽃들과 과일이 담겨 있고 큰 나무가 이미 숨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의 씨앗에는 수십 억 년의 생명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씨앗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전개될 수 있다. 예컨대 꽃씨 하나에 수십 억 년 동안 피고 졌던 꽃나무들의 생명의 역사가 담겨 있고, 이 꽃씨 하나를 통해 앞으로 수천 수만의 꽃나무들이 피고 질 수 있다.”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의 시작은 아주 작지만 언젠가는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눈에 확 띄게 드러나거나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겨자씨의 비유는,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작고 작은 것들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라는, 희망을 보라는 말씀으로도 이해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피정을 동반할 때 체험하는 것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보통 세 가지 양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인 역동이 일어나는 경우(하느님의 위로), 아니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 그리고 말씀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하느님의 고독/실망).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한 이를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해 저항이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불편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용서하라, 사랑하라, 화해하라 등등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밀어냅니다. 이것은 곧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마음 안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분명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고 흔들림이 클수록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 이 씨앗에 얼마나 큰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저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삶의 힘을 얻고, 삶의 희망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 밭에 뿌려지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 그 씨앗 안에는 풍요로운 생명이 담겨 있었습니다. 내 마음 밭에, 내 마음의 정원에 무슨 꽃들이 피어 있는지요? 무슨 나무들이 자라는지요? -최성영 신부님(요셉) [생활 속의 복음] 하늘 나라의 씨앗 매달 한 번 정도 10여 년 차이가 있는 후배 신부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 주제는 ‘재물과 가난’, ‘좌절과 용기’ 등입니다. 사목하면서, 살아가면서 느끼고 고민한 내용을 신앙인의 관점에서, 사제의 입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6>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관계의 수용 오늘날 사람 사이의 소통 수단의 발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원하는 사람끼리의 소통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도 손쉽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 관계망을 통해 원하는 정보도 안방에서 온 세상을 주유하며 얻을 수 있다.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걱정도 있다. 이와 같은 편리함이 낳은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교황은 권고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적극 수용하도록 촉구하였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순기능을 잘 이용하길 바라셨다.
[아! 어쩌나] 297. 열심인데 불편한 사람
행복의 씨 마음에 심기
저는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 안에 여자라고는 어머니밖에 없었고, 아버지 쪽은 친척도 같은 또래의 여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라면서 여자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다가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남자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화이트 데이날 큰 병에 든 사탕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냥 친구와 나누어 먹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거금을 쓴다고 하면서 보냈던 것인데,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 주지 않아서 선물을 준 저로서도 많이 섭섭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생각지도 않았던 것으로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전화 하겠다는 그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네... 고마워요....”
저는 전화 끊을 때, 언제 다시 하겠다고 꼭 이야기를 해 주었고 거의 틀림없이 그 시간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 것이 선물을 주는 것보다 감동적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큰 선물을 해 주는 것이 쉬울까요, 작은 것으로 감동시키는 것이 쉬울까요? 사실 큰 것은 돈만 있으면 어려움 없이 선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으로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학을 천 마리 접는 것이, 학 한 마리 사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그런데 작은 것에 감동하는 것은 여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자매가 매일같이 일기형식으로 썼던 편지를 한꺼번에 받아보았을 때 가장 기뻤습니다.
‘매일같이 생각했구나!’
예수님은 오늘 하느님나라를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나무처럼 커져 그 안에 새들도 쉬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이 비유의 뜻은, 행복은 작은 것들로부터 커져가는 것이지 일순간에 커다란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을 생각해봅시다. 혼인성사의 의미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여 서로 한 몸이 되는 행복을 누리며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간의 사랑이 커지기보다는 줄어드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에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지금 너희 아빠 같은 사람만 데려오면, 내가 당장 결혼시켜줄게.” 하고 말하는 자매님이 계십니까?
결혼할 때는 그래도 최고의 신랑감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딸이나 아들에게는 지금의 배우자와 같은 사람을 추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결혼해서 남편이 변했다고요?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도 세세하게 잘 챙겨주던 남편이, 결혼한 후에는 직장에 다녀오면 피곤해서 아내의 말을 들어주기보다는 TV앞에 앉아서 쉼 없이 채널을 돌려댑니다.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해도 귀찮아 할 때가 많습니다. 설거지, 청소 한 번 도와주는 적이 없습니다. 결혼할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엔도르핀, 옥시토신의 4가지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도파민은 마약과 같이 정신적인 쾌감을 주고, 페닐에틸아민은 분별력을 없애서 상대가 마냥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며, 엔도르핀은 사랑의 희열을 극대화해서 상사병이 걸리게 만들고, 옥시토신은 육체적인 성욕을 증가시켜줍니다. 모두가 정신적이고 육체적, 감성적인 자극을 주는 호르몬들입니다.
문제는 이 호르몬들이 18~30개월이면 더 이상 분비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게 되면 이 호르몬의 분비가 딱 끊긴다고 합니다.
즉, 만난 지 3년 정도가 지나면 정신적이고 육체적으로 즐거운 감정을 상대를 통해서는 얻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 때면 피곤하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감이 가는 새로운 이성을 만나면 이 호르몬들이 다시 분비되기 시작해서 그 사람을 자신의 참 사랑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의 행복감은 하나의 씨앗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그냥 썩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키우면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더 깊어지는 연인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이제 호르몬과 관계가 없는 수준으로 그 사랑의 씨앗을 키운 사람들입니다.
폴란드의 귀족 출신인 캐서린은 스웨덴의 왕자 존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권력다툼 때문에 그녀의 남편 존은 형 에릭에 의해 평생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에릭이 국왕으로 있는 동안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캐서린은 급히 스톡홀롬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캐서린은 에릭왕에게 나아가 간청했습니다.
“폐하, 저를 남편과 함께 감옥으로 보내주십시오.”
“케서린, 그대의 남편은 평생 동안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할 텐데 그대는 그것을 알고 간청하는 것인가?”
“폐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유죄이든 무죄이든 간에 존 왕자는 변함없는 저의 남편입니다.”
왕은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캐서린에게 말했습니다.
“짐의 생각으로는 그대의 남편이 감옥으로 보내진 순간부터 서약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캐서린은 자기가 끼고 있던 결혼 반지를 빼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부디 이 반지에 새겨진 문구를 읽어 봐 주십시오.”
반지를 받아든 왕은 “오직 죽음으로서만”이라는 문구를 읽은 후 캐서린을 단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대로 감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17년 동안 남편과 함께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국왕 에릭이 사망하자 풀려나오게 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불멸의 사랑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들의 사랑이 영원할 수 있었을까요? 캐서린은 사랑이 호르몬작용이 아닌 ‘의지’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의지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다른 이들은 사랑의 씨를 육체나 머리에 심지만, 캐서린은 마음에 심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믿음이 마음을 받쳐주면 마음은 그 믿음으로 지속적인 의지를 발휘하게 됩니다.
사랑이 감정에서 이성으로, 또 이성에서 마음으로 오지 않으면 언제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합니다.
우리에겐 언제나 행복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그 씨앗들을 마음의 밭에서 키워나갈 때 하느님나라는 바로 우리 안에서 완성되게 됩니다.
마음에서 감사와 찬미가 솟아날 때 나오는 호르몬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다이돌핀이라고 하는데 엔돌핀보다 4,000배 강한 행복감을 준다고 합니다.
어쩌면 나에게 뿌려진 행복의 씨앗들을 잘 키워, 그것이 자라나 열매를 맺어 하느님을 찬미할 때, 그 행복감이 이 지상에서 느낄 수 있는 하느님나라가 아닐까요?
이 행복이 솟아날 수 있는 씨앗은 이미 뿌려졌습니다. 이제 잘 키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전삼용 신부님(요셉)
작은 행동이 변화를 가져옵니다. 겨자씨를 뿌리십시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은 완전히 초토화됐습니다. 생존자들도 생필품을 구하느라 아우성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베를린을 공격해서 건물들을 뼈대만 남은 폐허로 만들어 버렸는데, 이제는 시민들마저 그런 꼴로 몰아갈 작정인 듯 보였습니다.
식량을 실은 트럭과 열차, 선박은 모두 봉쇄됐습니다. 외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주민 전체가 주려 죽게 될 판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베를린 공수로 대응했습니다. 무려 열한 달 동안 250만 베를린 시민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식량을 공중 투하했던 것입니다.
게일 핼버센은 당시 미군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였습니다. 어느 날, 베를린에 착륙한 핼버센은 서른 명 남짓 되는 독일의 어린아이들과 철조망을 사이에 둔 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꼬마들은 헐벗고 배고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누구도 구걸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감동을 받은 핼버센은 주머니를 뒤져 껌 두 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절반으로 쪼개서 철망 너머로 건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마치 일억 원쯤 횡재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작은 껌 조각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았습니다. 다들 행복에 겨워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핼버센은 아이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그래서 내일 다시 비행을 나오게 되면 더 많은 껌을 떨어뜨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꼬마들은 30분마다 한 대씩 식료품을 공수하는 비행기가 날아오는데, 어떻게 알아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종사가 대답했습니다.
“공중에서 날개를 아래위로 흔들게.”
라인마인 공군기지로 돌아온 핼버센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껌과 사탕을 모조리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사탕꾸러미들을 조그만 낙하산에 단단히 매달아서 자기가 모는 c-54 수송기에 실었습니다.
다음날 베를린 상공으로 날아간 그는 약속대로 날개를 흔들었습니다. 거리에 나와 있던 아이들은 친구가 조종하는 비행기를 단박 알아보고 떨어지는 사탕꾸러미를 주우러 달려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이른바 ‘작은 보따리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곧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3주 만에 공군당국의 재가가 떨어졌습니다.
다음 몇 달 동안, 미군기들은 베를린에 3톤이 넘는 사탕을 투하했습니다. 아이들은 조종사들을 ‘날개를 흔드는 아저씨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행동이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 낸 거 같은데요. 저도 그러한 변화를 종종 체험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하나는 말씀 문자를 보내는 일을 통해서입니다. 저희 본당 신자들이 많지 않아서 모두에게 매일매일 말씀 문자를 보내는데요. 큰 노력이나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나서 보내고 싶은 말씀을 단체문자로 보내면 됩니다. 처음에 보낼 때는 ‘말씀 한 구절이 신자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고 어떤 기대를 품지 않았었는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씀 한 구절이 그 날 그분의 어떤 상황과 기묘하게 들어맞을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냉담하고 있거나 완고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다.’ 라는 말씀 문자를 받거나, 화해하고 용서하지 못할 때 ‘용서’에 관한 문자를 받거나, 아픔이 있을 때 위로의 문자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그분의 마음에 심겨지고 열매를 맺게 되는 거 같습니다. 어떤 신자 분은 다시 성당에 나오시고, 어떤 신자 분은 화해를 시도하고, 어떤 신자 분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고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일들을 보게 되면, ‘겨자씨와 같은 작은 행동이 열매를 맺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거 같습니다.
또 저희 본당이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 된지 6년 밖에 안 되었는데요. 많은 건물을 지었습니다. 성당도 짓고, 3층짜리 교육관도 짓고, 별관도 짓고, 공소도 지을 예정입니다.
그런데 저희 신자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규모로 보면 인천 교구에서 맨 밑에서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신자들의 노력에 외부 신자들의 정성이 더해졌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신 덕분에 필요한 건물들이 하나씩 지어질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도 ‘신자들의 겨자씨와 같은 작은 도움들이 모여서 큰 열매를 맺는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겨자씨와 같이 작은 행동.. 칭찬이나 격려의 말이든지, 안부 전화라든지, 작은 후원이라든지, 친절한 행동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간에 실행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가 그 행동이 더 큰 열매를 맺는 계기가 되고, 보탬이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주교님이 오시는 날이라 자매님들이 전 날 저녁부터 개고기를 삶으셨다. 아침에도 일찍 나오셔서 준비를 하시고, 같이 아침을 먹었는데, 자매님 중에 네 분은 개고기를 안 드셨다. 그래서 한 형제님이 “개고기 왜 안 드세요~ 맛있어요.. 조금 드셔 보세요~” 했다. 그랬더니 한 자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개고기 먹으려면 술도 한 잔 먹어야 하는데...”
-김기현 신부님(요한)
[금주의 성인] 6월 18일: 성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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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