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정치적 권력을 휘어잡았던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들
일반적으로 그들은 단일 정치세력으로 운명을 함께하여 권력을 좌지우지해 나갔다고 인식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서로 절대적인 유대감으로 정권을 운영해 나갔을까요
민씨척족들은 명성황후의 간택으로 성장 집권한 세력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민씨 척족들은 명성황후의 인척세력으로 정계에 등장한게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외척세력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생모 부대부인 민씨가 민씨일족이었고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될수 있던 것도 부대부인의 공로가 제일 컸지요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는 부대부인의 친동생이니
명성황후 간택 당시 대원군은 외척 지위를 안동김씨나 풍양조씨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처가 세력을 고종의 처가세력으로 삼아 이중으로 외척지위를 맡겼고
민씨 척족들은 국왕의 외가에다 처가까지 겸하여 그 지위가 굳어져서
장기적으로 대원군 퇴임후 권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큰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지요
결과적으로 민씨척족들의 집권의 기반을 만들어준건 아이러니하게 흥선대원군이지요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귀인 이씨의 소생 완화군을 책봉하여 여흥 민씨가
절대적인 외척세력으로 군림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이를 눈치챈 민씨 척족들과
명성황후는 대원군 반대세력을 끌어모아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지요
명성황후는 민씨 세도정권의 지도자이나 그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 정권을 운영한건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 민영익 민영준 등
민씨척족의 권신들이지요
민승호 민겸호 등 민씨 정권 초기 지도자들은 운현궁 처남출신들이라
명성황후와 직접적인
혈연관계와 멀어서 현실적으로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운영하기 보다는 수평적인
관계로 운영하였고 민태호 민영익 부자는 세자빈 순명효 왕후 간택으로 성장한 세력이고
민영준등은 조선에 주재한 청나라 원세개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던 세력이라
현실적으로 명성황후에 절대적인 의존성을 띠지 않았지요
후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은 4대 강령에서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를 없애자는 구호를 내건 것만 봐도 명성황후보다는 민씨 척신들이 부패의 온상이었지요
갑신정변때 김옥균이 일차적으로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걸 보면 말이지요
권력을 잡은 민씨 세도정권은 개화파까지 끌어들여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타파하고 통상개항을 추진하게 되어 열강들과 수교를 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지만
극심한 정치적 부패와 보수세력의 반발로 임오군란을 초래하였고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에 의해 다시 재집권하면서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되고
친청성향으로 민씨정권의 운영권은 사실상 청이 쥐면서
국왕 고종을 위협하는 권귀적 성격으로 변모하였지요 임오군란 대부터
그래서 고종은 김옥균의 급진 개화파와 함께 친청성향의 민씨정권을 타도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청에 의해 실패하면서 청의 간섭체제는 강화되고 청일전쟁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지요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 외교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청의 눈밖에
나고 청나라 원세개는 고종 부부를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본국 정부의 비협조와 타 열강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민씨 정권의 수장 민영익은 원세개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할 정도로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들은 동지 관계가 아니었지요
후일 명성황후가 박영효의 친일파를 실각시키고 친러 내각을 수립시킬때
민씨 척족들을 불러 들이지 않고 박정양등 신진 관료들을 내각의 주 세력으로
삼은 사실을 고려하면
명성황후와 민씨척족들의 유대관계는 그리 절대성을 띤게 아니지요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영준이 나중에 민영휘로 개명하여 자신의 친족을 죽인
일본에 협조하여 친일파가 된 사실을 보더라도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들은 일심화된 정치세력은 아니었죠
상황에 따라 서로 연대하고 경계하는 이중성을 띤 관계였죠
@공실불 계유정난 이전과 이후 구분해야죠
@하균횽을내작품에 성리학이 꽉막힌 것이 아니라면 사문난적과 천주교 동학 탄압 척불 숭명배청등이 나오지 않았겠지요
왕과 왕비가 여기에 손을 내밀자 덥썩 잡은 것입니다. 아무리 측근 관리를 잘 해야 하는게 정치라 해도 측근들의 배는 적당히 불려 줘야 하는데 대원군은 그걸 안 한 겁니다.
그리고 순명효황후 구박은 남가몽에 나옵니다. 뜰에 몇 시간씩 세워두었다거나 절을 백 번 넘게 시켰다거나.. 남가몽은 왕의 측근이 쓴 야사라 최소한 궁중의 비사는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몹시 미워했을 것이고-그녀 성격 자체가 따스한 성격은 절대 아닙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 차갑게 대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상한 게 아니지요
왕과 왕비가 손을 내밀었다고 해서 넘어갈 민승호인가요 그리고 당시 권력의 중심지는 대궐이 아니라 운현궁이었고 운현궁의 안주인 부대부인은 자신의 친누나라 그런 회유에 넘어갈 사람은 아니지요 그리고 남가몽은 저자가 직접 목격하고서 쓴게 아니라 주워들어서 쓴 것이라 부정확한게 많았고 게다가 명성황후 사후 궁중 내명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엄귀비가 과거 명성황후에게 핍박받았던 원한으로 대다수 궁녀들은 엄귀비 영향력으로 명성황후에 그리 안좋은 소문을 낼수밖에 없지요 남가몽의 저자 정환덕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록한 것이고 순명효 황후의 김상덕 편지를 안 읽어본 모양인데 편지에서 시어미가 죽어서 의지할 곳을
@공실불 잃었다고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보면 이게 구박받았다고 할수 있나요 구박을 엄청많이 받았다면 편지에서 이런 내용을 쓸수가 없지요
@공실불 세자빈 정도면 립 서비스 잘 합니다. 그리고 독한 시어머니라도 며느리 입장에서는 의지처이긴 합니다. 심리학 공부 하시면 잘 아는 내용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죽었을 때 북한 사람들 반응보세요. 단순한 충성 쇼로 본다면 나 심리학 몰라요 라고 자복하는 것 뿐입니다
@공실불 친누나... 천형제라도 돈 때문에 이간질하고 배신하는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부정확하기로는 매천야록도 별로 뒤지지 않습니다.
@공실불 사람이 적당히 잘 해준 것 보다 더 악독하게 구는게 그 사람 없어지고 난 후 더 그립게 만드는 수법입니다 이미 심리학에서는 증명된 논제입니다
@하균횽을내작품에 같은 시집살이를 하는 별반 차이가 없는 명성황후와 순명효 황후라 게다가 이들은 같은 일족이라 서로 미워할 이유가 없지요 명성황후도 법적 시어미 조대비와 생물적 시어미 부대부인과의 사이를 두고 고심하는 터라 시집살이는 이보다 고될수 없지요 며느리는 궁중내명부에서 자신의 유일한 친족이라 함부로 미워할수가 없지요 그리고 개인편지는 개인심정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립서비스라 해도 정황적으로 시어미의 부정적인 면들을 간접 들어낼수가 있지요
@공실불 상사가 아주 지독하게 굴었거나 아주 호구 잡혔거나 하는게 그냥 적당히 혼낼 것 혼내고 인자할 때 인자하고 하는 것 보다 더 기억에 남고 오래갑니다. 여기에 최후까지 비참하면... 명분은 있었던 쿠데타를 하고 경제 개발을 했으나 독압 정치를 편 박정희와 완전 호구 잡혀서 뭘 해 그 사람 탓 소리 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난 후 어떻게 평가가 달라졌는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심리는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 다양화 되었기에 한가지 부분으로 대처하기가 힘들지요 심리학을 쉽게 운운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민승호는 자신의 친형제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터라 대원군이 죽을때까지는 그 욕심을 잠재워야 하겠지요 매형이 오래 살것도 아니고 죽으면 자신이나 자기 일족들에게 그 차례가 돌아오는데 뭐하러 특별한 요인 없이 고종의 회유에 넘어가겠습니까? 민감한 완화군 후사 문제가 거론되니까 고종으로 돌아선 것이지요 그리고 명성황후는 민승호가 폭사될때 신철균만 제외하고는 큰 배후의 주모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승호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민승호와의
@공실불 조건적인 관계 때문에 말이지요
@공실불 명성황후는 지금 입장에서서도 개꿀 빤 시집살이 입니다. 어차피 두 대비는 힘이 없고... 신정왕후는 정사 개입 안 하고, 부대부인은 엄연히 자기 밑입니다. 이런 시집살이를 고되다고 하는 건 아줌마들과 이야기 안 해 봤다는 증거입니다. 자기한테 의지하는 남편, 별 간섭 없는 시월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사실상 내 밑... 이걸 고되다 하면 다른 여자들은 다 과로사입니다. 자기가 시집살이 안 겪어 봤으니 며느리 마음 몰라서 호되게 나가는 거죠
@공실불 사람은 눈앞의 이익에 약합니다.
@하균횽을내작품에 부대부인은 사적으로 시어머니이고 게다가 자신의 책봉을 도와준 은인이라 명성황후는 부대부인에게 빚을 진 상황이지요 대원군 실각 후에도 명성황후는 아들 순종을 데리고 시어머니 부대부인을 찾아가 문안할 정도로 함부로 하지 못했지요
@공실불 함부로 하고 안 하고와 시월드가 편하고 안 편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명성황후는 아주 편한 시집살이 한 겁니다. 야사에 등장하는 당당한 명성황후의 모습은 시월드에서 해방도니 모습이지요. 하긴 신정왕후만 잘 댈래 놓으면 궐에서 간섭할 사람이 없으니.. 지 세상이긴 하겠죠
@하균횽을내작품에 민승호에게 운현궁이 눈앞의 이익이지요 자기가 운현궁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차기 외척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었으니 어찌되었든 최고 권력자를 매형으로 둔 것 때문에 정치적 지위가 든든해진게 아닙니까 왕비의 양오빠가 된 것도 매형이 자신 양동생의 책봉을 승낙한 것이었으니
@공실불 처남 대접 안 해주는 대원군과 차기 왕의 외삼촌이라는 미끼가 있는 왕과 왕비.. 후자에 기우는게 사람입니다
@하균횽을내작품에 뭐가 처남대접을 안해줍니까 매형이 집권하는 시절에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 권력요직을 역임한 것도 민승호인데 부대부인의 친동생이니 누님이 있는 한 반대원군 입장을 취하기가 쉽지 않지요 누님의 의사가 대원군 반대의사를 표명치 않은 상황에 말이지요
@공실불 중요한 건 벼슬이 아니라 실권이지요. 뇌물을 받고 관직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이런 걸 적당히 허용해야 하는데 대원군은 모두 자기가 쥐었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폭주할 수 밖에요
@공실불 학계에서도 완화군 책봉 이야기는 믿지 않는 걸로 압니다. 민승호를 위시한 민씨 일가의 배신은 제대로 대우를 안 해주는 대원군에 대해 불만이 있던 그들이 고종과 중전 민씨의 손짓에 넘어갔다 정도로 봅니다. 그리고 고종과 중전 민씨는 이들에게 권세를 부여했고요
@하균횽을내작품에 실권도 벼슬과 세력이라는 밑바탕이 있어야 쥐기가 쉬운 법입니다 민승호는 매형 덕택에 왕의 외삼촌 왕의 처남 왕비의 오빠라는 거대한 지위를 얻었으니 매형에게 진 정치적 채무가 상당하고 매형이 후사를 민씨일족의 외손이 되는걸 반대하지 않는 반대성향을 보이기가 어렵지요 대원군이 쥐었다 해도 대원군이 죽으면 그때 풀어지기 마련이라 민승호는 고종편으로 돌아서지 않아도 차기 권력은 자동적으로 자신에게 올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완화군 문제가 아니라면 고종편으로 돌아설 이유도 없지요 권력도 없는 고종에게 붙는건 당시 민승호에게 이익이 없죠
@공실불 완화군의 책봉 문제 자체를 학계가 인정하지 않는 걸로 압니다.
@하균횽을내작품에 학계에서는 완화군 책봉 시도설을 부정한바 없습니다 논문자료들을 보십시오 대원군과의 갈등 시작이 완화군이라고 학자들의 논문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공실불 누가요? 완화군 책봉이 문제라면 고종 실록에도 나와야 하는데... 고종 실록을 위시한 정사에도 없습니다. 물론 논문에도 없고요. 그저 지나가는 투로 언급하지. 최근의 주장은 고종 자신의 친정을 위해 민승호를 방패막이로 썼다 정도로 말합니다. 완화군은 언급 없습니다
@공실불 제가 알기론 70년대 이후부터 완화군 때문에 갈등했다는 사라진 걸로 압니다. 학계에서는.... 드라마의 영향입니다. 완화군 책봉 문제는
@하균횽을내작품에 완화군 책봉건은 흥선대원군의 일방적 계획이라 조정회의에서 실현되지 않았기에 그 계획이 소문으로 누설된 것만으로도 민씨일족들을 등을 돌리게 만들고도 충분하지요 드라마의 영향이 아니라 사료 기록이 그러하기 때문이지요
@공실불 계획이 있었다는 신빙성 있는 물증 없습니다. 그저 드라마 영향
무엇 때문에 구박한다? 아들이 없으니까 대비들은 뭘 했느냐? 저 시기는 1884년 이후로 추정되는데 철인왕후는 이미 사망한 후이고, 신정왕후는 일가를 잃어 정치적 발언권도 약해졌고 애초부터가 그렇게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명현대비야 뒷방 늙은이였으니 긴 말 안 해도 되고요... 당시 궐에서 중전 민씨를 제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전을 견제할 수 있는 후궁들도 왕비가 승은입은 궁녀를 족족 내치는 바람에 그것도 없었습니다
어떤 책을 보니 (고종과 메이지싣 였나) 갑오개혁 때인가 암튼 일본의 개입이 심할때 민부대부인등이 궁궐에 자주 입시해서 중전을 자주 '감시' 하였다고 나오는것 같더군요... 이게 정말이라면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