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9
아서 에번스의 크노소스 궁전
서울대총동창신문 제487호(2018. 10.15)
고대 미노스 문명 살려낸 ‘대담한 보수’
그리스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의 대계단(The Grand Staircase)
2018년 여름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Knossos) 궁전 유적에서 단체 여행객들에게 길을 비켜주려다가 우연히 안내자의 설명을 엿듣게 되었다. 소위 ‘대계단’으로 불리는 구역이었다. 안내자는 한숨을 쉬면서 발굴자가 이곳만큼은 원래 상태 그대로 손대지 않았다고 했다지만 누가 알겠냐고 했고, 여행객들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반응은 현대 고고학자들이 고대유적에 너무 많이 손을 댔다는 불만을 담고 있다. 실제로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한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Arthur
Evans, 1851-1941)의 보수 방식은 초창기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필자도 예전엔 학생들 앞에서 무모한 복원 작업의 대표적 사례로 이 유적을 들곤 했다.
그러나 당시 자료들을 살펴보면, 지금에 와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쉽게 던지기 미안할 만큼 상황이 긴박했음을 알게 된다. 고대 크레타 인들이 바닥과 벽체 하단, 문설주 등에 주로 사용했던 석재는 석고암(gypsum)으로, 발굴자들이 “비만 오면 설탕처럼 녹아버린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게다가 천정을 지탱하는 목재 기둥들은 이미 삭아서 건물 층층이 무너져 섞여있었다. 위의 안내자 말대로 “원래 상태대로 손대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는 거의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에번스가 특히 심혈을 기울여서 보수한 구역이 바로 이 ‘대계단’이었다. 중간 참의 칸막이 벽이 발굴 직후부터 기울어져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건축 전문가들조차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발을 빼자, 그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 기울어진 중간 벽체 밑 부분을 따라서 양 측면에 가늘게 틈새를 판 후에 벽체 전체를 판자와 밧줄로 꽁꽁 싸맸다. 그리고는 위쪽 테라스에서 60명의 일꾼들이 구령에 맞추어 동시에 밧줄을 끌어당겨서 벽체를 수직으로 세웠다. 도로 세워진 안쪽 벽면 틈새는 자연스럽게 닫혔고, 바깥쪽 틈새는 자갈과 시멘트로 메워서 작업을 마무리했다. 에번스 자신은 자신의 보수 방식에 대한 정당성과 필요성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피력했다.
에번스와 동료들은 약 4,000여 년 전 석고와 목재, 흙으로 세워진 크노소스의 궁전을 철골과 강화 콘크리트로 보강해서 우리 앞에 보여주었다. 이들이 만들어 낸 모습이 과연 원래 건축물과 얼마나 정확하게 부합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테라코타 봉헌 모델과 프레스코 벽화에 묘사된 당시의 크노소스 풍경, 그리고 기타 고고학적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제한된 여건 속에서 상당히 충실한 작업을 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구현한 생생한 이미지 덕분에 고대 미노스 문명이 다시금 살아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에번스의 재구성 작업은 고대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크노소스 역사의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글 조은정(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