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군 죽도
* 정여립의 전설이 있는 곳 *
진안에서 무주방향으로 약 8km를 달리면 상전면 수동리 내송마을의 죽도에 이른다.깎아 세운 듯한 바위산 절벽을 맑은 물이 한 바퀴 휘돌아 흐르고 있기에 마치 섬과 같은 곳이다. 산죽이 많다고 해서 죽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곳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정여립이 한때 은신했다는 죽도서당이 있었던 곳이다.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리자 이곳으로 와서 관군과 싸우다가 자결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여립이 자결한 곳은 이곳이 아니라 부귀면 오룡리 다복동인 것으로 밝혀졌다.
*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 *
조선중기 사람인 정여립은 (1546~1589)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 체제하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다. 그 후 정여립은 제비산 기슭으로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는데, 대동이란 큰 도가 행해져 천하가 공평해진다는 의미이다.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한 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혁명적인 명제를 가지고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왕성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정여립의 죽음에는 자살설과 타살설이 분분하며, 실제로 그가 대동계를 이용하여 혁명을 꾀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는 조작설과 역모설의 양설이 있지만, 조선왕조의 기본적 가치관의 하나인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당시로써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의 전말
선조 22년(1589)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과, 그것의 사후처리 과정에서 나온 기축옥사에 관하여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정여립은 조선 중기의 끔찍한 모반자로서 성격이 포악 잔인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을 간추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다. 그는 이이ㆍ성혼의 문인으로서 원래 서인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아부하였고 스승인 이이가 사망한 뒤 그를 배반하였으며, 박순ㆍ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 부윤이던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등의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서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였던 의연(依然) 등의 기인모사를 끌어모았다.
또한 『정감록』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선조 22)에는 거사를 모의하여 반군으로써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황해 감사 한준과 신천 군수 한응인, 재령 군수 박충간, 안악 군수 이축이 그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으며, 그 또한 아들 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피하였다가 잡히자,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를 조직했는데, 이는 기축옥사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진안 죽도로 도피하였다가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발생한 정여립 모반 사건, 즉 기축옥사를 두고 혹자는 조선왕조의 정치ㆍ사회적 구조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귀결이라거나, 지역 내 사림 사이의 갈등과 개인적인 감정 대립의 결과라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여립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지 모반사건이 아니라고도 하며, 한편에서는 모반을 하기는 했는데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1589년 무려 1천여 명이 희생당한 기축옥사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기축옥사로 인해 김시민, 이억기, 신립, 이순신 등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장수들을 이끌고 이탕개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구촌 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였고,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서 끌려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으며,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훌륭한 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기축옥사는 아직도 많은 의문점을 안은 채 진실의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재주 있는 사람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전주부윤이며 양명학자였던 남언경은 “정공은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다른 사람이 가히 따르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주자에 비유하였고, 이발은 정여립을 두고 “당대의 제일 인물”이라 했으며 이이 역시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 하였다. 이렇듯 정여립은 당대의 인물이었으나 그가 가진 재주와 개혁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비운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정여립의 죽음으로 모반사건은 일단락되었고 그 뒤처리가 시작되었다. 이때 선조는 서인인 정철로 하여금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는데, 서인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던 정철은 동인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지 아니하면 귀양을 보내는 등 매우 가혹하게 다스렸다. 그 때문에 그는 사건이 끝난 후 동인들에게 ‘동인백정’이라는 말로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세자의 건저(建儲) 문제로 실각하여 유배를 가게 된다.
당시 이산해는 영의정이고 정철은 좌의정이었다. 이산해는 정철이 옥사를 빙자하여 자기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뜬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 그때 정철은 금부에서 옥사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철을 쫓아냈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정철을 논박하여 멀리 강계에 귀양 보냈다. 양사에서 또 율(律)을 더 가하고자 하였지만 이산해가 옳지 못하다 하여 중지하였다.
정철이 귀양 간 뒤에 이산해는 동인 가운데에서 정철에게 쫓겨났던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조정의 관직에 앉히고, 또 정철을 따르던 서인을 쫓아냈다. 이것이 신묘년에 있었던 일진일퇴의 정국이었다. 이로부터 동인이 국정을 전담하였다.
- 『택리지』 「복거총론」
어쩌면 정여립 사건은 호남 지역의 음식 맛이 뛰어나고 판소리와 풍물, 굿, 민요 등 풍류가 발전하게 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들이 넓고 물산이 풍부한 덕에 음식문화가 꽃을 피우고, 그러한 기반 위에서 문화 예술이 발전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위의 주장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 태조에서 선조 때까지 전국의 생원과 진사 합격률을 보면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 남원이 상위권이었는데 선조에서 숙종 때까지를 살펴보면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에 머물고 있다. 결국 기축옥사가 일어난 뒤 호남지역 사대부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되자 맛이 있는 음식만 찾아 다니고 풍류도 즐기게 되면서 맛과 멋의 고장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기축옥사가 일어난 뒤 벼슬길이 막힌 호남지역 사대부들은 낙향하여 맛과 멋을 찾아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어쩌면 정여립 사건은 호남 문화가 발전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죽도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