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닦음에서 들음은
구현을 위한 것입니다.
대화는
말함과 들음의 동시성으로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실제 완료는
들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공허한 대화를
무수히 경험하는데
항상
쏟아지는 말은 있으나
들음이 없기 때문이지요.
시간을 들인 만남 이후
펼쳐보였던 말이
증발하며 허탈감이 몰려옵니다.
출발한 말(言)이
닿을 곳을 잃었습니다.
모든 대화가
엄중하고 심각한 것만은 아니지요.
대화에서 들음은
대략 3가지 정도로 나뉠 수 있습니다.
첫째
만남의 상황을 보조하는 들음입니다.
여기선
내용에 대한 깊은 동의나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화 내용이 중요하지 않으며
만남의 초점 자체도
언어에 있지 않습니다.
이때 언어는
그 만남의 실질적 목적을 위한
보조 수단입니다.
초점은
서로의 감성에 있을 수도
혹은
사회적으로 구비해야 할 형식에
있기도 합니다.
들음에 힘을 싣지 않는다고
비난받을 것도 아니며
현장의 초점을
놓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들음의 주된 역할은
통로입니다.
전체 상황이 원활히 흐르도록
돕고 있습니다.
현장의 우선적 목적이
빛을 발합니다.
둘째
정보 수집을 위한 들음입니다.
듣는 이는
다소 주의를 기울이고
세세히 듣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사용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듣는 이가
동의할 수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황을 보조하는 들음은
현장에서 그 역할이 끝나지만
이 들음은
현장을 떠난 다음 단계에서의 작용에
열려있습니다.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교육과
업무적 만남에서 발생하는 들음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정보의 들음엔
행위를 위한 강제성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셋째
도약을 위한 들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며
뒤따라야 할 도약이라는
구체적 목표가 있기에
결실에 대한
강제성이 있습니다.
이 들음은
외형적으론 어쩌면 두번째 들음과
같을 수 있으나
듣는 이의 태도에 의해
갈리게 됩니다.
들음을 통해
도약에 대한 비전이 발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더 근본적으론
평소 그가 취하는 삶의 방식에
좌우되지요.
밭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은
씨앗의 역량입니다.
밭이 공평하게 제공되듯
들음이
모두에게 일어나도
도약하는 이들은
다른 그룹입니다.
닦음은
어느 분야보다도 뚜렷한
도약이라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무수한 이들이
법문과 강론과 설교를 듣지만
대부분
정보 수집에 그치는 듯 합니다.
훌륭한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자신의 삶엔
훌륭함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착하고
남에게 베풀 수는 있으나
개인 내면엔
여전히 충만이 없습니다.
닦음이나 진정한 영성은
사회적으로 좋아보이는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닦음은
내면의 도약을 통해
삶의 패러다임 즉 플랫폼을 바꾸고자
합니다.
인간의 '존재 지평'이
바뀌어야
수 십 만 년 시행착오한
우리의 모순과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닦음의 들음은
실제적 구현을
요구합니다.
도약을 위한 강제성을 수용할 때
비로소
영성적 들음이 발생하지요.
영성의 정의는
성장을 위한 의식의 확장입니다.
이 확장은
한 번이 아닌
거듭되는 도약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영성이
들음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검푸른 밤 홀로 불 밝히니
귓가 울리는 적막의 소리
쌓이는 얘기 하늘 닿았고
보이는 지평 숲을 넘었네.
..250305小野
첫댓글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눈으로보고, 가슴으로읽어서. 귀로듣는 공부를 일념으로 하시면
우주에너지[報身]氣法,으로
번뇌망상을 녹이는 공부가 됩니다.
재자"만"의 포교전법자.
현산김봉현 합장 ㅅㅎㅅ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