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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겨쓴 편지
고개를 들자 늙은 여자가 보도블록에 엎드려 껌을 떼고 있다
늙은 여자와 나 사이에는 카페의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다
나는 낯선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편지를 쓰러 이곳에 들어왔다
그녀의 몸속으로 쥐가 드나든다 새끼를 낳아 기른다
그녀는 구멍투성이다
그녀의 입술 밖으로 쥐 새끼가 고개를 내미는 날도 있다
내가 소파에서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어미 쥐가 새끼 쥐를 몰고 소파의 용수철 사이로 올라온다
쥐를 떼어버려 나는 편지를 쓴다
쥐들이 짠 망상이야 한없이 길어지는 그물이야 쥐들이 널 놀리는 거야
쫓아버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밤이 오고 있지만
늙은 여자는 여전히 껌을 떼고 있다
그 오래된 사원의 지하엔 천 마리 쥐들이 숨어 있대
인간으로 환생할 날을 기다린대 네 죽음이
시킨 걸 거야 왜 그러냐 하면 죽음도 살고 싶거든
네가 불러냈으니까 네가 쫓아버려 나는 하염없이 편지를 쓴다
퇴근길의 사람들 물밀듯 밀려간다 언젠가 온다는 그
빛이 오면 눈이 멀 사람들
유랑은 끝이 없나 보다 불 켠 창문들만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는 눈알처럼 환하다 보도블록 밑에는 우리의
밤을 제 집인 양 들여다보는 쥐들의 눈알이 반짝거리고
카페를 흐르는 재클린 뒤 프레는 내 몸속에서
쥐가 나가야 할 텐데 고개를 들자
늙은 여자가 멀어져간다 보도블록을 밟으며 침을 뱉고
재채기를 하면서 구멍에서 뭔가가 줄줄 새는 듯
한없이 중얼거리며 걸어간다 쫓아버려
새끼들도 내다버려 내 몸 속 어딘가 진공 팩이 터지고
무슨 나라의 글자인가 책 한 권이 푸르륵 넘어간다
금붕어들의 조용한 카페가 터져버렸는가
한없이 밀려오는 쥐떼가 나를 덮친다 나는
내 심장을 입술에 문 것처럼 딸꾹질을 시작한다
겨울나무
나뭇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등 굽은 길 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 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
버리는 몸을 감당 못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속의 갈비뼈들이 날
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안에서
봄 밖으로
부러져 나갔다
그녀 요나*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두 눈을 뜨고 당신을 보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게 분명하지요?
그러니 자꾸만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지요)
오늘 밤 그 여자가
한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덤불 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젖은 머리칼 흔드나 봐요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와요
아아, 어쩌면 좋아요?
나는 아직 태어나 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아직 두 눈이 다 빚어지지도 못했는데
* 요나 : 구약성서 <요나서>에 나오는 사람.
그녀의 음악
바다는 지쳤어요
파도치기 지쳤어요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거 이제 그만 하고 싶었어요
축축한 바람이 온몸을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는 거
지구는 둥굴어서 내 품도 둥글어서
내일인지 어제인지
똑같은 세월이 왔다 갔다 하는 거
똑같은 등대가 쉴 새 없는 밤낮처럼 켜졌다 꺼졌다 하는 거
저 머리숱 적은 섬의 발뒤꿈치 그 짜디짠 소금 맛을
혓바닥 속속들이 모두모두 기억하는 거
이제 그만 지쳐버렸어요
너를 멀리 데려가줄게 속삭여놓고는
언제나 사랑만 하고 돌아가는
저 태양이 밤마다 몸속으로 기우는 거
모두모두 지쳤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긴 이야기는
시바가 제 아내에게 들려준 70만 댓귀의
이야기의 바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듣기만 하는데 500일이 걸린대요
시바의 아내는 얼마나 지겨웠을까요?
밤마다 체위를 바꿔가며 듣는 그 이야기
저 햇살을 가닥가닥 풀어
해가 뜨는 문양의 담요에 싸서
이제 그만 재워주고 싶었어요
해가 지는 수평선을 도르르 말아
붉은 장미 한 송이 그녀에게 갖다주고도 싶었어요
바다는 지쳤어요
파도치기 지쳤어요
그래서인지 오늘 밤엔 내 방까지 몰려 들어와
찬 물결 시린 몸으로 왔다가 갔다가 그러면서 울었어요
나는 그만 저 바다가 너무나 불쌍해서
웅크린 몸 따뜻한 눈물 한 방울로
그 푸른 파도를 꼭 안아주었어요
기다림
나는 우선 집에 돌아오면
스타킹을 벗고 손발을 씻고
하루분의 화장을 지우고
대못에 가 걸린다
네가 나를 데리러 오리라는 생각
네가 날 데리고 점점점
높은 가지로 오르리라는 생각
그 생각에 걸린 채
푸줏간의 살덩이처럼
천만 근 무거운 살주머니로
밤새도록 대못에 걸려
눈알을 디룩거린다
발밑으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나비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
두 날개가 파닥이면 맞잡은 전신으로 파문 진다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께
네 꿈속에 내 꿈을 메아리처럼 울리게 할께
귓바퀴 속 두 소용돌이가 환하게 공명한다
어쩌면 귀먹은 사람이 잠결에 들은 것 같은
그런 편지를 내 왼쪽 귀를 다하여 쓸께
네 꿈속으로 들어가 혈액을 다정히 흔들어줄께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일 수 있겠니?
문드러진 꽃처럼 피어난 우리 입술의 암술 수술로
우리가 키우는 이 나비 한 마리
나중에 나중에 우리 없는 세상에 뭐가 남을까?
우리 몸을 버리고 날아오를 저 나비 한 마리
우리 몸속에서 아직도 팔딱거리는 어둠처럼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저 멀고먼 쌍둥이 태아처럼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1
아침 일곱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동그랗구나
숟가락들엔 모두 손잡이가 달렸다
시끄러운 아스팔트 옆
저 늙은 나무엔 이천이백만 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파리들이 달렸다
2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서울 사람들, 두 귀를
가죽배의 방향타처럼 쫑긋거리며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속을 넘나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한밤중 서울의 일천이백만 개의 무덤은 인중 아래
모두 봉긋하고 오오오
또 한강은 일천이백만의 썩은 무덤 속을 헤엄쳐 나온
일천이백만 드럼의 정액을 싣고 조용히 내일로 떠난다
다시 하늘의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내다 길면
일천이만 쌍의 태양이 눈을 번쩍 뜨고
저 내장들의 땅속 지하 삼천 미터 속까지
빛살 무늬 거룩하게 새겨진다
나의 팝 옵티콘, 그 조감도
저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가라앉아가고
그 대신 연락선 한 척(저 혼자 어디 갔다 오는지)
마치 수상 감옥처럼 방마다 불 켜고 흔들흔들 떠올라 오면
나는 필름의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스튜디오는 이미 부서졌지만 필름은 남아
여전히 달빛이 복도를 은은히 비춥니다
복도 양쪽으로 철문들은 ㄷ다혀 있고 자물쇠가 걸린 방들
방마다 네버 엔딩 스토리의 필름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지만
그건 이미 너와 내가 다 봐버린 것들, 이미 다 살아버린 것들
기억에 갇힌 죄수들은 모두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습니다
어디선가 괘종시계가 댕댕 울리면 나는 마치 시계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바늘들과 톱니바퀴들 사이를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저 복도 끝에는 내 잠 속에서 뛰어나온 양이 한 마리
내 애인과 내 애인의 애인이 잠든 방을 들여다보고 서있습니다
나는 느닷없이 내 가슴뼈가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같이 아파
졸음 같은 안개를 헤치고 이 복도를 달려가봅니다
밤마다 감옥을 열람하는 것
이것이 겨우 내 꿈의 조감도란 말이지요
내 몸속의 복도들이 터지려 하는지 벽이 출렁거립니다
어디에도 무덤 속처럼 비상구는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나날의 내가 투옥된 복도를 걸어가다가
창문에 어리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바라볼 뿐입니다
내가 아는 얼굴이 곤돌라에 실려 흔들흔들 내려오는 날도 있습니다
밖에서 조간신문 배달 자동차 멈추는 소리 들리고
큰 연락선 한 척, 한 사람도 내리지 못한 채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저 수평선 너머에서 나의 고장난 영사기
나의 몸이 흔들흔들 떠오를 시간이 되었나 봅니다
날마다 맑은 유리처럼 떠올라
넌 모를 거야
밤마다 내가
잠든 나를 살그머니 눕혀놓고
네게로 간다는 걸
이건 더욱 모를 거야
밤마다 네가
잠든 너를 벗어나
나를 맞으러 나온다는 걸
우리 둘이서 즐거이 손잡고
요단강을 넘나들며
벗은 몸에 수천의 꽃잎을 달고
아름다운 불꽃을
입으로 내뿜으면서
발목에 지구를 매달고 날아다닌다는 걸
정말 모를 거야
깊은 밤 우리 둘이서
맑은 유리처럼 떠올라
하늘을 마시고 달을 삼키며
그림자도 없이
사랑하고 포옹한다는 걸
넌 모를 거야
그리고 넌 이것도 모를 거야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우리는 헤어져
다시 잠든 몸 속으로 들어가
소리도 없이
드러눕는다는 걸
드러누워 불을 끄고
땅속 깊이 우리의 꽃대궁을
묻어둔다는 걸
그리고 잠 속 깊이 우리의 영혼을
감춘다는 걸
넌 더욱 모를 거야
날마다의 장례
슬픔이란 이름의 새를 아시는지
그 새의 보이지 않는 갈퀴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그 새의 투명한, 그러나 절대로 녹지 않는
갈퀴에 머리채가 콱 잡혀서
나는 문설주에 고개를 기대고 서서 말하네
잘 가거라 항구를 떠난 잠수함아
여기 절벽 위에 서 있는 나를 잊지는 말아라
누군가 내 심장 박동 소리로 내 속을 쿵쿵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저 잠수함 저 혼자 떠난 거야
누군가의 손가락 내 관자놀이에서 쉬지 않고 파닥거리기 때문에
저 잠수함 저렇게 혼자서 가라앉기만 하는 거야
엄마의 몸 속에서 내팽개쳐진 그날 저녁부터
날마자 가라앉기만 하는 잠수함
이제 내 탄생의 그 종착역에 다 와간다고 기별이 오는데
내 슬픔의 박자는 이렇게 쉬지 않고 울리고
내 슬픔의 숨은 이렇게 쉬지 않고 헐떡거리고
추운 밤의 밀물 같은 슬픔이 온몸을 적시는데
찬 물 속의 찬 물처럼 나 흐느끼는데
항구를 떠난 잠수함아 우리가 처음 헤어지던 그날 잊지는 않았겠지
그 깊은 바다 속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지는 않겠지
내 머리채를 놓고 이 새가 날아가버린 날
매일매일 가라앉는 꿈, 그 속의 잠수함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시체처럼 나는 네 속에
비로소 탑승하게 되는 거겠지?
그러니 부탁이야,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헐떡거리며 서 있는
김혜순을 잊지는 말아줘
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내가 달을 비춘다
내가 달을 비춘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하여
그도 열심으로 달을 비춘다
낮은 곳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생명 가진 것들이
온몸으로 푸르름 다해
이 낮은 땅에서
저 높은 달을 비춘다
안 보이는 지구 밖
세상에 떠다니는
완벽한 죽음의 얼굴을 향하여
온 생명 다해 빛을 퍼붓는다
머리를 밤하는 향해 높이 쳐든 채
네 겹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기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을 내가 또 읽는 사이
109페이지와 111페이지를 읽는 사이
노인이 아마존 밀림 입구에 쳐놓은 해먹에 누워
책 속의 베네치아와 곤돌라 위의 연인들을 상상하는 사이
나는 부안에 다녀온다 솟대 당산들을 보고 온다
부안 땅은 떠나가는 배처럼 생겼다 한다 옛사람들은
책을 읽듯 땅을 읽고 다녔나 보다 배에는 당연히 닻이 있고
돛대가 있어야겠기에 사람들은 그 배 위에다
솟대를 세우고 닻을 내렸다
책 속의 노인이 곤돌라, 곤돌라 아직도
도시에 떠다니는 배를 떠올리지 못해 몸을 비비
꼬고 있는 사이 밀림 속에선 밀렵꾼의 총에 남편을
잃은 암살쾡이가 사람들을 물어 죽이기 시작한다
다시 노인이 고통스런 키스란 문장에 걸려
애 낳다 죽은 원주민 아내의 사진을 더듬는 사이
노인이 연애 소설을 읽고 세풀베다는 노인을 읽고 나는
세풀베다를 읽고 안 보이는 너는 나를 읽는 사이
나는 또 부스럼 투성이의 석장승을 더듬어 본다
돌눈을 부릅뜨고 모가지 사라진 아내를 내려다 보는 남편 장승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운 간척지 아래서 바다는 윙윙 숨막혀 울고
밀려 들어오는 집에 파묻혀 슬레이트 지붕 위로 고개만 내놓은 돛대
출항할 바다를 잃은 그 돛대가 덩달아 울고
책갈피 속에선 암살쾡이가 아직도 눈벌판을 핏발 세운 채 맴돈다
노인이 책 밖으로 나아가 암살쾡이를 찾아 밀림을 떠도는 사이
나는 아무 정거장도 거치지 않고 돌아와 네 겹의 텍스트를 떠돈다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제목
눈물 한 방울
그가 핀셋으로 눈물 한 방울을 집어올린다. 내 방이 들려 올라간다. 물론
내 얼굴도 들려 올라간다. 가만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으면 귓구멍 속으
로 물이 한참 흘러들던 방을 그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가 방을 대물 렌즈 위에 올려놓는다. 내 방보다 큰 눈이 나를 내려다 본
다. 대안 렌즈로 보면 만화경 속 같을까. 그가 방을 이리저리 굴려본다.훅훅
불어보기도 한다. 그의 입김이 닿을 때마다 터뜨려지기 쉬운 방이 마구 흔
들린다. 집채보다 큰 눈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깜빡이는 하늘이 다가든 것
만 같다. 그가 렌즈의 배수를 올린다. 난파선 같은 방 속에 얼음처럼 찬 태
양이 떠오르려는 것처럼.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장롱 밑에 떼지어 숨겨놓
은 알들을 들킨다. 해초들이 풀어진다. 눈물 한 방울 속 가득 들어찬, 몸속
에서 올라온 플랑크톤들도 들킨다. 그가 잠수부처럼 눈물 한 방울 속을 헤
집는다. 마개가 빠진 것처럼 머릿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한밤중 일어
나 앉아 내가 불러낸 그가 나를 마구 휘젓는다. 물로 지은 방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터진다. 눈물 한 방울 얼굴을 타고 내려가 번진다. 내 어깨를 흔드
는 파도가 이 어둔 방을 거진 다 갉아먹는다. 저 멀리 먼동이 터오는 창밖에
점처럼 작은 사람이 개를 끌고 지나간다.
다시 태어나기 싫은 아이
이름없는 이를 두드리지 마. 열지 마
죽은 사람이 소리친다
물 없는 섬에
물 흘려넣지 마
내 방의 벽화를 보려고 마
실핏줄 당기지 마
내 이마의 글씨를 읽으려고 마
얼른 문을 닫아
빛을 들여보내지 마
숨막혀
생명이 다 날아가
다시 살아나기 싫다면서
엄마를 큰 파도 속에
텀벙 던지는 태중의 아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엄마를 모른체하는 아이
백지 한 장의 기억도 없는 아이
망각의 무덤 열기 싫어
기억의 문고리 당기는 엄마 손
힘차게 깨무는 아이
땅속에서 땅 밖으로 마악
뽑혀오르려는 아이
달
달은 먹는다
우리의 깊은 잠을
잠든 영혼이 품은 대낮의 햇볕을
대양을 떠가는 배들의 영혼을
폭풍우 치는 밤 들판에 흩어진
꿈틀거리는 시신들을
보리밭에 머리 처박고 가랑이 벌린
밤처녀의 혼령을
웃으며 빨아먹는다
둥그렇고 싯누런
완벽한 죽음의 얼굴이
동산 위에 떠올라
잠든 세상의 꿈을
마구 뒤섞어 달빛으로 절여 먹는다
달이 꾸는 꿈
달 어머니가 국을 푸신다
퍼올리는 국자마다 달덩이 하나씩
폭풍우 끝난 밤
달 아기들이 밥상 아래
둥글게 앉아 있다
그 집은 문을 닫아도
달 냄새 멀리까지 퍼지는 집
꿈 냄새 요란한 여자의 집
사람들은 꿈속에 나타난 달
어머니에게 오줌을 누고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돼지처럼 구석으로 몰아대고
엉덩이를 때리고
달 아기들은 문 밖에서 울고
그러나 아무도 달이 꾸는 꿈
속이 꿈인 줄도 모르고
(당신의 꿈속은 내 밤 속의 낮
내 몸이 당신 꿈으로 환해지나이다)
달 어머니 탯줄을 자르시고
썰물처럼 떠나가는 날
밤 부엉이 한 마리
창밖 어두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어두운 내 몸 속을 노리고
나는 또 달 어머니 퍼주시는 국 한 그릇
빈집처럼 기다리고
달 어머니 머리 풀로 어디어디 다녀오시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고
도솔가(兜率歌)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신발 좀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신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부축해다오 발이 없어서 그러며는요
두 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달라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하늘엔 산이 뜨고 길이 뜨고요
아무도 없는 곳에
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레인 피플
밤비가 찬찬히 빌딩을 닦고 있다.
가끔씩 내려오는 하늘 그림자는
언제나 투명하다
우리 모래 나라의 깃발도
조금씩 깨끗해지고 있다
투명하게 울고 있는 비
하늘 나라엔 레인 피플이 사는데요
그들은 너무 울고 울어서
결국엔 모두 사라지게 된대요
물이 다 빠지면 꼭 우리같이 생겼대요
우산을 치우고 잠시 올려다보면
저 멀리 롯데 호텔도
손을 들어 감은 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다
모래 기둥이 조금씩 무너져내려 길가에 쌓이면
투명한 그림자가
그것들을 쓸어내가고 있다
내 팔짱을 풀고 그가 운다.
밤비가 닦아 놓은
길 위에
눈물이 덜 마른 그가 잠깐 서 있다 사라진다
내가 찬찬히 닦여진다
미라
나는 죽어서도 늙는다
나는 죽어서도 얼굴이 탄다
만약 한 사람의 일생을 지구 한바퀴 도는 것에
비유 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사하라에 있다
폐경의 바다가 다 마르고
조개들이 타오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손목을 잡던 수천의 손가락들이
발바닥 밑에서 뜨겁게 부서져 밟힌다
감싸안은 누더기들이 부서져 날린다
감은 눈 온다
불쌍히 여기소서
삼천 개의 뛰는 심장이
전동차 열 량을 끌고 간다
삼백 개의 따스한 심장이
지하로부터 무쇠 에스컬레이터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다시 삼만 개의 고린내나는 발가락이
저 푸른 하늘 아래
저 쉼없이 흐르는 강 위에
전동차 열 량을 올려놓는다
만원 전동차 안, 내 심장 일심실 곁에서
삶으면 한 움큼도 안 될
쉰 머리칼의 할머니 분홍빛 심장 이심실이
뛴다 코티분 분통 터진 것보다
더 화한 심장이 뛴다
저 검은 머리털 아래
저 하찮은 에드윈, 언더우드 아래
저 붉은 심장들이
숨어서 뛴다
오우 하나님 보시옵소서
따뜻한 속꽃 삼천 송이로 지은 심장 만다라
지금 한강 노을 속에 잠시
떴나이다
비에 갇힌 불쌍한 사랑 기계들
화가가 세필을 흔들어
자꾸만 가는 선을 내리긋듯이
그어서 뭉그러지려는 몸을
자꾸만 일으켜세우듯이
뭉개진 몸은 지워졌다가
또다시 뭉개지네
카페 펄프의 의자는 욕조처럼 좁고
저 사람은 마치 물고기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입술 밖으로 퐁퐁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네
저 사람은 마치
비 맞은 개처럼 욕조마다 붙은
전화기를 붙잡고 혼자 짖고 있네
전화기는 붉은 낙태아처럼 말이 없고
나 전화기를 치마 속에 감추고 싶네
나는 내 앞에 있으면 좋을
사람에게 말을 거네
-한번만 다시 생각해봐요
더러운 걸레 같은 내 혀로
있으면 좋을 그 사람의
젖은 머리를 닦네
탐조등은 한번씩 우리 머리를 쓰다듬고
나는 이제 몽유병자처럼
두 손을 쳐들고
물로 만든 철조망을 향해
걸어나가네
쇠줄에 묶인 개처럼
저불쌍한 사랑 기계들
아직도 짖고 있네
서울 신기루
한 방 건너고, 두 방 건너서
사람들이 돌아온다.
불개미 한 마리에 불개미 한 마리가 얹혀서
사각사각 사람들이 돌아온다.
잠시 수그려 보면
여기서 소리들은 잦아들고
잦아드는 소리마다 은밀한 불꽃이 튀긴다
마디말 곤충이 마디말 언어를 낳고
마디말 곤충을 낳고, 낳고, 낳을 때
문 밖에 서 계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한 방 건너고 두 방 건너서
누가 아직도 돌아갈 수 있을까?
거기선 새도록 당나귀들이 떠나고
붉은 꽃 샐비어 지는 향기 하늘 높다지만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바삐바삐 이 방에서 이 방으로
건너 다니기만 할 때 나는 듣는다.
네가 부르던 외마디 가엾은 노래.
어느 별의 지옥
무덤은 여기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숨 들이키고 있는 곳 무덤은 여기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두 개의 무덤 아래
죽은 자들이 모여 살면서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달을 건져 올리고 끌어당기는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또 한 세상, 무덤은 여기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초승달 떠오를 때
기지개 켜는 곳
여우와 뱀이 입 맞추고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되살아나고 되지던 곳
무덤은 여기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얼굴
당신 속에는 또 하나의 당신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은 당신의 몸을 안으로 당당히 당겨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손톱은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려들고, 당신의 귓바퀴 또한 당신의 몸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들고 있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당겨 잡
은 그 손을 놓는 순간 당신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겁니다
당신의 얼굴은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모습 그대
로 굳어져 있습니다 가끔 그 얼굴이 당신 밖의 내 얼굴로 기울어지기도 하
고, 당신의 두 눈동자 속에서 나를 내다보는 당신 속의 당신을 내가 느끼기
도 하지만 당신 속의 당신이 당신을 당겨 잡은 그 손을 놓은 적은 한번도 없
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팽팽히 당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그 긴장을 견
디느라 이제 주름이 깊습니다
당신 속의 당신은 또 얼마나 힘이 센지 내 속의 내가 당신 속으로 끌려 들
어갈 지경입니다
당신은 지금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치즈를 손에 들었습니다
내 속의 나는, 치즈는 우유로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합니다 그리고 곧 이어
서 그 우유는 어느 암소 속의 암소가 내뿜은 걸까 고민합니다
혹 당신이 멀리 떠나 있어도 당신 속의 당신은 여기에 또 있습니다 나는 당
신 속의 당신을 돌려보내지도, 피하지도 못합니다
아마 나는 부재자의 인질인가 봅니다
내 속의 내가 단단히 나를 당겨 잡고 있는 동안 나 또한 살아 있을 테지만
심지어 나는 매일 아침 내 속의 나로 만든 치즈를 당신의 식탁 위에 봉헌하
고 싶어집니다
얼음의 알몸
너는 흰눈을 저장해둔 곳에 가본 일이 있으며
우박 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바다 밑 얼음 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거기서 물로 빚은 물고기들이 숨죽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마음속에 눈이 내려 높이
높이 쌓인 눈 속에 숨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사람이 잠 깨어 눈뜰 때
그 눈 속에 떠오르던 검은 달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에서
쏜살같이 달아나는 흰 산들을 잡으려 해본 적이 있느냐
그 산들의 싸늘한 눈길을 견뎌본 적 있느냐
땡볕 쏟아지는 여름 그 큰 얼음을 아픈 사람처럼 담요에 싸안고
눈물을 훔치며 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너는 그 적나라하고 순결한 얼음의 알몸을 만져본 적이 있느냐
깊은 밤에 깨어나 우는 사람의 눈물을 받다 먹어본 적 있느냐
그러니 잘 들어라 얼음아씨가 말하노니
너는 우박 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다 녹아서 흘러가버린 우박 창고에 우두커니
서 있어본 적이 있느냐
* 욥기 38:22
오래된 냉장고
나보다 먼저 내 발이 너에게로 가려고 하는 것,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나보다 먼저 내 입술이 너에게로 가려고 하는 것, 나는 필사적으로 참고 있
다.
벌써 이렇게 참은지 수십 년. 생각해보니 참 묘하다.
내가 이렇게 참고 있었던건 내가 내 소유의 냉장고를 갖게된 후부터인 것
도 같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생각해왔다.
내 머릿속은 얼음으로 꽉 차 있고, 내 차디찬 발을 만진 사람은 모두 기절
한다.
내 가슴속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입술이 얼어붙는다.
그러니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자.
아무에게도 손 뻗지말자.
나는 또 이것도 잊지말자고 생각했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참고 있으니 내 방 안에서 나뭇잎 하나 떨
어지지 않고,
땅을 박차고 새 한 마리 날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바람이 불어와도 필사적으로 220볼트의 콘센트 속에 손가락을 끼
운 채 버티자.
얼어붙은 풍경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풍경 속의 얼음나라 얼음공주 얼마나 순결한가.
그러니 허벅지 밑으로 피가 흘러내려도 금방 얼어붙을테니 걱정말자.
밖은 뜨겁고 안은 시리다.
시리다 못해 팽팽히 끓는다.
문을 열면 화들짝 놀라 불을 켜는, 얼어붙은 창자들을 매단 겨울 풍경화 한
장.
태풍이 와서 정전이 며칠째 계속되고 몸속이 전부 썩어 문드러지기 전까지
몇십 년째 혼자 새침을 떨던.
이 밤에
쥐가
잠에 빠진 흰 토끼를 갉아 먹는다
토끼장 밖으로 검은 피가 쏟아진다
쥐가 죽통에 빠진 돼지 새끼를 갉아 먹는다
(이제 막 자궁 속에서 구워진 살덩어리들
푸들푸들 첫 공기에 떠는 아가들
기름덩어리들
맛있고, 따뜻하고, 물어 뜯으면 피 흘리는 것들)
쥐가 요람에 든 새 아가를 갉아 먹는다
아가 엄마는 식당에 설겆이하러 갔다
쥐가 이제 땅 속에 갓묻힌
싱싱한 시체의 몸 속을 드나든다
훔치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쥐가
우리들 그림자를 뭉친 다음 입김 불어 눈 뜨게 한 쥐가
발가락 사이 무좀 아래 숨죽였던 쥐가
게걸스레 처먹다가 바스락 소리에도 꼬리를 말아올리는
쥐가
감시용 카메라 뒤에서
몸을 섞는 우리들 다 봐 버린 쥐가
우리들 번쩍이는 표면 속
보드라운 살갗 어둡게 미끈거리는 내장 속
삐걱거리는 마룻장 아래 열 개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사이
비와 바람의 발자국 소리 숨겨둔 두개골 그 아래
눈먼 빛의 발치를 들치고 들어가본 그 아래
몇 십년째 내 앞에서 숨죽인 죽음의 문 그 뒤켠
내 열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이를 가는
쥐가
이 밤에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저 붉은 구름
이제, 마셔버린 물처럼 그렇게
너를 지워버릴래
내 몸에서 솟아오른 붉은 저녁의
아픈 바위에 걸터앉아 혼자서
혼자서만 입술에 붙은 그 노래를 부를래
모든 기억이 사라져도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노래만은 남는 법
불러도 불러도 핏줄기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그렇게 슬프거들랑
그만, 이 붉은 벼랑에서 뛰어내릴래
내 몸 속에서 너와 다니던 길들이 터져
검은 피, 흐르기 전에
슬픔의 푸른 상자는 못질해 저 공중에 감춰둔 채
이승에서 우리는 만났으나 그 무엇이
우리를 반쯤은 어디론가 데려가버렸는지
온전히 만나지도 못했던
그 안타까움의 절정에서 그만 사라져버릴래
땅은 늘 우리를 담으려 열려있고
바람은 늘 우리를 갈라놓겠다고
맞잡은 손 가운데로 불고 있었으니
너무 가벼워 숨 막힌 그 노래
누군가 채록해가기 전에, 그만
이제 그만 이 몸의 붉은 벼랑에서 뛰어내릴래
노을이 지기 전에
지평선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선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
사랑하는 성례야 네가 있는 곳에선 왼쪽 개찰구를 나와 왼쪽 계단을 내려
오면 강을 건너 내게로 올 수 있다. 만약 네가 오른쪽 계단을 선택했다면 강
을 건너지 않고도 내게로 올 수 있을지. 그러나 더 멀리 돌아오는 것이 되니
너는 강을 건너 오너라. 더구나 여기선 강을 건너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전
설처럼 떠돌고 있단다. 저기서 선글라스를 끼고 한 손엔 지팡이를 들고 또
한 손엔 바구니를 들고 하모니카를 멘 사람이 오고 있구나. 여기선 그 사람
만 움직이는구나. 항아리 속에서 목을 쓰윽 빼낸 여자가 그의 지팡이 노래
를 듣다 말고 다시 항아리 속으로 고개를 집어 넣는 것이 보이는구나.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주시기 바
랍니다, 사자의 서가 매일 매순간 한번도 쉬지 않고 낭독되고 불켠 전동차
가 도착된 순간 플래쉬가 번쩍하듯 파라오 투탄카멘의 부장품들처럼 우리
는 한꺼번에 찍힌단다. 매일 매순간 점호를 받는 것처럼 네가 세상을 한번
더 돌아오는 동안 만큼 내 품에서 말라간 안개 꽃다발이 전동차가 몰고 온
바람을 맞곤 단번에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는구나. 그러나 나는 내 항아리
속에 창자와 심장을 넣고 숨죽여 너를 기다린다. 네가 오는 세상이 오기를.
관뚜껑보다 확실하게 이가 잘 맞는 문 속으로 지팡이를 든 사람이 들어가고
모두 실려간다. 열차 밖에는 저승 가는 안내문처럼 순환이라 쓰여 있구나.
네가 한번 더 세상을 돌아오는 동안 난 여기 있을께. 그러나 언젠간 네가 여
기 오겠지.
참 오래된 호텔
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
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
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
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
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
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밖으로 내던
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
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내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
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
텔.
캄보디아
부비트랩이 설치된 길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공중에다 뿌리를 내리며
땅으로 다가온 나무들이
그 꿈틀거리는 거대한 육질의 뿌리로
궁궐을 쪼개고
시바의 아내를 쪼갰다
그러자 밀림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덮어주었다
몇 세기를 걸어가는 동안 지워지다가
지워지다가 아직도 덜 지워진 사람들이
없는 다리를 끌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밤이 오면 다시 지워지다가
아직 지우개의 터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무너지다 만 칠흑의 궁전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서 떨어져 나온
가느라단 실 한 파람이
차가운 바람 속을 떠다녔다
혼자서만 떠났다가 혼자서만 돌아오는 보고픔처럼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아직도 긴가민가 나 혼자 오래 듣는 네 한 마디 말처럼
품에 안아보지 못한 혼령 하나가
내 옷깃을 가만히 건드리고 날아갔다
그러다 다시 태양이 떠오르면
부비트랩이 설치된 길
지워지다 만 그림 속에서
실타래같이 해진 근육을 햇빛에 태우는 시바의 아내가
너무 뜨거워 들을 수도 없는 비명을
귀가 멍멍하도록
퍼부어대는 길
세상에, 끈질긴 저주의 손길처럼 하늘에
뿌리들이 떠 있다니
타클라마칸
해 떠오르면 머리를 감는 여자
허벅지가 없는 그 여자가
머리칼 위로 모래를 한 바가지 퍼 들이붓고는
첨벙 모래 구덩이에 머리를 담그는구나
발도 없는 여자가
모래강 위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헹구고 있구나
가슴도 없는 여자가
머리칼도 없는 여자가
오, 몸도 없는 여자가 머리를 감고 있구나
우리 가지도...오지도...말고...너는 거기...나는 여기
무너진 나날의 메마른 머리칼이 부풀었다 펴졌다 이리저리 뒤척인다
해 떠오를 때부터 해질 때까지
없는 허리를 한번도 펴지 않고 그 여자가 머리를 감는구나
모래강의 물살을 뒤적여 빗고 있구나
풍경 중독자
풍경이 나를 거닌다
내가 밤의 풍경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비오는 오늘 밤, 풍경이 침대 위에서 돌아눕는다
풍경은 왜 거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가
소름이 돋아 우둘두툴한 풍경
두 팔로 껴안아도 여전히 온몸 떨리는 풍경
왜 풍경은 몸 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요?
비 쏟아져 들어가는 지하도를 옆구리쯤에 품은 풍경
그 지하도 밖으로 나오자
녹슨 철골들이 산발한 채 붉은 물을 뚝뚝 흘리는
그 아래 입을 쓱 닦은 깨진 유리병이
피를 뚝뚝 흘리는 밤의 풍경
그곳, 우산도 없이 내가 서 있는 밤의 풍경
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멀리 안 보이는 관악산이 비켜서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풍경에게도 깊이가 있나 봐요
나날이 풍경이 깊어져요 명치 끝을 파고 들어요
호흡이 바뀔 때마다 풍경은 바뀌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내 방이 녹아서 강물에 떠내려가요
왜 고통이 몸 밖으로 나가면
한낱 고물 집하장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안에서 밖으로 내뿜어지는 풍경 속
나는 어째서 녹물을 칙칙 뱉는 짓다 만 우정병원 콘크리트에
기대고 서 있는지 비는 철썩철썩 내 뺨을 갈기고 있는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바뀌어버리는 예민한 풍경의 살갗
그래, 이제 그만 풍경의 문을 닫아 걸자
행복했어요 멀리서 바라보기엔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참혹했어요
비 오는 밤의 풍경이 내 두 팔 안에서
나 없이도 울고, 나 없이도 헐떡거린다
비 오는 밤, 풍경의 한복판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벙어리 여자처럼 큰 소리로 울며 내가 지나갔지요
먹구름이 몇 가닥 얼굴 위로 흘러내려요
언제나 한 장의 표면밖에 가진 것이 없는
그런데, 이 풍경의 출구는 어디예요?
피 흘리는 집
눈이 내려
집을 찬찬히 감는다
하늘 나라의 붕대가
내려와 상처난 집을 찬찬히
감는다
피고름이 멈추지 않는다
집은 열이 몇 도나 될까
피 흘리는 집이 붕대를 녹인다
붕대 밖으로도 피고름이 흘러넘친다
상처 속에서 뛰어나온 우리들이
눈 치우개를 들고
이 놈의 더러운 붕대!
피 묻은 붕대를 밀어낸다
(눈 녹은 뒤
상처는 더욱 선명하다)
핏덩어리 시계
내 가슴 속에는 일생을 한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했다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 준 걸까
태양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닷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공포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 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 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 이거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 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계 바늘을 멈추어 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네 가슴 속에 귀를 대보면
핏덩어리 시계 저 혼자 쿵쿵 뛰어가는 소리
시간 맞춰 잘도 울린다
한 잔의 붉은 거울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듯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 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자 온몸을 떠는 나를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환한 걸레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환한 방들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 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 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 켠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 속처럼 어두워진다
흐느낌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가 내 몸 속으로 깊이 깊이 숨어들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내 몸 속에서 춤추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여름비가 오열하는 파도처럼
춤추는 사람 천 명을 때린다.
격정적으로 때린다.
숲의 천 그루 나무들이
전신으로 물방울을 튀기며
쏴아 쏴아 군무에 빠져 있다.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가 내 몸 속으로 깊이 깊이 숨어들 때가
들어가선 못 빠져나와 안간힘 쓸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내 몸 속에서 북 치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도 아직 몸통 속에 갇힌
미친 멜로디가 다 풀리지 않았는지.
내 눈물이 한 방울 몸 속으로 떨어지고...
김혜순
1955년생.
건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로 입선.
1979년 《문학과지성》에 시 〈도솔가〉〈월석〉〈담배를 피우는 시체〉를 발표하며 등단.
시 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불쌍한 사랑 기계] [어느 별의 지옥]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우리들의 음화]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한 잔의 붉은 거울] 등
김수영문학상(1997), 소월시문학상(제15회), 2000년 월간현대시 작품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 작가 이야기
독특한 상상력이 작동시키는 말의 공장
김혜순의 시를 생산하는 기계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만하다. 그녀만의 독특한 상상력에 의해서 작동되는 공장은 현실의 곳곳에 '거울'을 장착함으로써 만들어진 제품만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성 있는 '주형(鑄型)'을 만들고 그 속에 현실을 집어넣어 특허품을 개발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 속에서 기존의 시간과 공간은 잘게 쪼개지고 해체되어 재조립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선형적 흐름은 소용돌이처럼 구부러지고 치솟아 엄청난 아나크로니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의 혁명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그녀가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에게 토제(吐劑)를 먹이는 까닭은? 아마도 "윤전기는 쉬지 않고/자꾸만 같은 숫자를 찍어대는 거예요"('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란 개탄에서 은밀히 들어나듯, 숫자(돈)로만 치환되는 현대 산업 사회의 물량주의적 시간론을 부정하고 저항하기 위함이다. 공간의 문제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녀에게 공간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전이와 대체가 가능하다. 김혜순은 이곳 저곳의 공간들을 한 몸 속에 집어넣고 흔들어 솎아 낸다. 그래서 그의 시에선 이곳이 곧 저곳이며 저곳이 곧 이곳이다.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물론 입구도 없다. 열리면서 닫히고 닫히면서 열리는 공간의 역동적 전신(轉身) 유희!
그 절정에서 시인은 튀밥처럼 폭발하는 감춰진 욕망의 활화산을 본다. "가슴과 함께 뇌가 작동을 시작한 시한폭탄처럼 폭발하"고 싶은 욕망의 맨얼굴을 슬쩍 엿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이 껍질을 벗고 한줌의 영혼만으로 저 공중 드높이……". 또한 그녀의 기계에는 고도의 정밀 렌즈가 부착된 현미경이 달려 있어 육안으로 감지 할 수 없는 '마이크로코스모스(Mikrokosmos)'의 진풍경을 포착해 낸다.
예컨대 다음의 시구를 보자: "호박 속에는 127개의 씨가 있다/127개의 씨 속에는 127개의 호박이 들어 있다/그 호박들 속에는 다시 127개의 씨가 들어 있다/다시 그 씨 속에는 127×127×127×127개의 호박이 들어 있다/머릿속에서 노오란 원자 호박탄이라도 터졌나"('39도 5부'). 호박 속의 작은 우주, 그렇지만 하나의 수렴점(씨)으로 응축되는 그 내부의 살풍경은 실로 읽는 이의 머리를 터지게 만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부차적으로 얻어지는 지적 ․심미적 쾌감 또한 흥미롭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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