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가 발탁한 집권 2기 외교안보 담당자들의 면모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나토(NATO)가입을 거부하고, 현전선에서 전쟁을 조속히 종식하는 트럼프의 구상을 밀어붙일 인사들로 팀이 짜여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3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트럼프 새 인사와 우크라이나'(Новые назначения Трампа и Украина) 코너에서 "트럼프 당선자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용사이자 폭스 뉴스 진행자인 피트 헤그세스를 국방부를 이끌 수장으로, 존 랫클리프 전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CIA 국장으로 각각 지명했다"면서 “그의 인사가 푸틴 대통령에게는 애틋함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깊은 경멸로 드러냈다”는 미 의회 전문 매체 더 힐(The Hill)의 평가를 소개했다. 이는 트럼프 전대통령에 대한 첫 탄핵을 초래한 스캔들 발생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측을 실망시킨 데 따른 감정적 대응이라고 더 힐은 짐작했다.
트럼프 당선자는 또 일론 머스크 태슬라 CEO와 갑부 출신인 비벡 라마스와미 전 공화당 대선 후보를 신설될 정부기관인 정부효율성위원회(도지, DOGE, 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의 공동 대표로, 크리스티 노엠 사우스다코타 주지사를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또 맷 게이츠 플로리다주 하원의원과 툴시 게버드 전 민주당 하원의원이 각각 법무장관과 국가정보국장으로 발탁됐다.
스트라나.ua가 트럼프 당선자의 초반 인사에서 주목한 대목은, 발탁된 인사들의 면면이 모두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해온 대표적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도지(DOGE) 수장으로 지명된 머스크 CEO와 라마스와미 전 후보의 임무는, '정부 관료주의를 제거하고, 과도한 규제를 줄이고, 세금 지출에서 낭비를 막고, 연방 기관을 구조조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일(트럼프 발언)"이지만, 두 사람은 비즈니스 시각에서 바이든 미 행정부가 그동안 키예프(키이우)에 제공한 지원 자금을 감사하는 데 관여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의 성향이 반우크라이나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에게는 상당히 껄끄럽고 버겁다.
트럼프 가족들의 당선 축하 사진에 유일하게 참석한 머스크(오른쪽 아이를 안은 사람)/캡처
그동안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전쟁 종식을 주장한 머스크 CEO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 대(對)우크라 자금 지원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으며, 키예프로부터 '검은 돈'을 받아온 미국의 '전쟁 로비스트'를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또 라마스와미는 자신의 선거 운동 중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점령 지역을 러시아에게 남겨둘 것을 요구했다.
◇ 파격적인 차기 국방장관 지명
전쟁 종식 과정에서 이들보다 더 역할이 강조되는 인물은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인데, 그의 발탁은 워싱턴 정가를 놀라게 할 만큼 파격적이다. 그동안 군사 및 군행정 경험을 가졌거나 방산업계 관련 인사들이 국방장관에 오른 오랜 관행은 헤그세스의 발탁으로 단박에 깨졌다. 폭스 뉴스 등에 몸담아온 그는 군 인맥이나 방산업체 로비스트들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의 로비가 일체 통하지 않을 것으로 스트라나.ua는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특수를 누려온 미국 방산업체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방위산업 로비스트들은 헤그세스의 지명에 충격을 받았다"며 "도대체 그가 누구냐?고 비명을 질렀다"고 썼다. 트럼프 당선자도 이를 노린 것으로 알려졌다.
헤그세스의 국방장관 지명에 관한 폴리티코 보도/캡처
헤그세스 지명자는 기자로서, 또 앵커로서 그동안 키예프에 돈을 보내는 데 반대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도 중요하지만, (이민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길거리 범죄나 우리 사회의 과시적인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 지갑에서 느끼는 인플레이션, 남부 국경의 현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면서 "일반 미국인의 삶의 질이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폴리티코는 국방장관 인사에 대해 "트럼프 당선자가 국방장관들과 대립했던 집권 1기의 학습 효과에 따라 집권 2기에는 자신의 정책을 군소리없이 따를 충성파 인물을 발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헤그세스 지명자는 찰스 브라운 미 합참의장 등 최고위 장성들과 관료들을 교체하려는 당선자의 뜻에 따를 것임을 이미 분명히했다.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가 정권 출범 후 교체할 고위직 군인사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 무시한 차기 법무장관, 국가정보국장
게이츠 차기 법무장관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중에 박수를 치지 않았던 두 의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대우크라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내기도 했다.
이라크전 참전 경험이 있는 개버드 국가정보국장은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에 대한 지도부와의 의견 차이로 2022년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는 러시아가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개시하기 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를 '젤렌스키 독재 체제'라고 선언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그는 또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은 2022년 7월, '러시아 선전'에 앞장서는 미국 주요 인사들의 목록에 개버드 지명자를 포함했다.
트럼프 당선자의 반우크라적인 인사는 국경 안보및 이민 단속, 세관, 연방재난관리청, 비밀경호국까지 통괄하는 국토안보부에서도 나왔다. 장관으로 지명된 크리스티 노엠 사우스다코타 주지사는 2023년 "우크라이나 지원이 러시아를 중국과 협력하도록 만든 '전략적 실수'였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은 지난 5년 동안 미국-멕시코 국경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에 더 많은 돈을 썼다"고 바이든 정부를 직격했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찌감치 지명된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도, 뒤늦게 국무장관으로 공식 확인된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도 키예프 지원에 막대한 예산을 할당한 민주당을 비판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사진출처:페이스북
◇ 유럽, 트럼프 첫 인사에 대응 부심
트럼프 집권 2기의 외교안보팀 진용이 반우크라 인사들로 짜여가자, 유럽은 대안 마련에 분주하다. 트럼프 당선자의 향후 우크라이나 정책에 저항할 의사도 부분적으로 드러냈다.
마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12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난 뒤 언론 브리핑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 지원 약속을 지켜야 하며,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 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이터 통신은 그의 발언을 '차기 미국 행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필요한 만큼 우크라이나에 대해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동조했다. 퇴임을 앞둔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서둘러 유럽으로 향하는 것도 '트럼프 시대'를 대비한 것으로 관측됐다. 블링컨 장관은 언론에 "뤼터 사무총장을 만나 내년에도, 트럼프 집권 후에도 우크라이나가 계속 싸울 수 있도록 군사 지원을 충분히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미국이 대우크라 지원을 축소하거나 중단할 경우, 누군가가 그 부족분을 메워 키예프가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도 평화 정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도드라지고 있다.
미 워싱턴 포스트(WP)는 12일 전현직 유럽·나토 외교관 10명과 접촉한 뒤, "지속적인 지지 의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협상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점점 더 러-우크라 협상을 위한 기반 마련을 모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보도했다. 유럽과 나토 관리들은 WP에 우크라이나의 영토 포기(양보)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예전만큼 놀라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우크라의 마지막 카드는 핵폭탄 개발
'영토와 평화의 교환' 쪽으로 점점 더 내몰리는 우크라이나의 마지막 카드는 뭘까? 핵폭탄 개발 주장도 나온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급진적인 방안을 포함해 다양한 옵션을 고려하고 있다"며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기사를 소개했다.
더 타임스는 우크라이나 국가 안보국방위원회(우리의 국가안보실 격) 산하의 국립전략연구소 알렉세이 에자크 부서장의 보고서를 인용, "우크라이나는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 핵폭탄과 유사한 핵폭탄을 몇 달만에 개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간단한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80년이나 지난 지금 어려운 작업이 아닐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원자로에서 가져온 사용후 연료봉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을 사용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방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가 핵폭탄을 개발하더라도, 이를 운반할 운반체 개발에 최소 5년은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심은 이 보고서의 공개 이유다. 일단 미국에 보내는 정치적 신호라는 해석이 많다. 러시아에 대한 '협박'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키예프가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핵 위협은 거꾸로 우크라이나의 조기 종전을 지지하는 서방의 평화주의자들에게 힘을 더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의 핵 보복을 초래할 경우, 키예프는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해지고, 영토의 상당 부분이 방사능 사막으로 변할 것이라고도 했다.
당초 키예프는 트럼프 집권 1기의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을 통해 트럼프 측과 끈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트라나.ua가 키예프에게 가장 놀라운 인사 메시지는 폼페이오 전 장관을 집권 2기에 발탁하지 않기로 한 트럼프의 발표였다고 설명한 이유다. 그전까지만해도 그는 가장 유력한 국방장관 후보였다.
폼페이오 전 장관은 전쟁 중에 적어도 세 번이나 키예프에 와 젤렌스키 대통령과 예르마크 실장을 만난 친우크라이나 인사다. 지난 9월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기업가 빅토르 핀추크(재단)가 연 '얄타유럽전략포럼'에 초대 연사로 참석하기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나는 폼페이오 전 미국무장관/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 차기 대선 경쟁력도 떨어지는 젤렌스키 대통령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전쟁 종식후 시나리오'도 젤렌스키 대통령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발레리 잘루즈니 전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에게 패하는 것으로 비공개 여론조사 결과, 나타났다고 한다. 키릴 부다노프 군 정보총국(GUR) 국장에게도 뒤졌다(3위).
이같은 상황에서 전쟁의 조기 종식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치적 앞날에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