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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끝까지, 믿을 때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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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끝까지, 믿을 때까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어 하시는 말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지막이 좋아야 하고,
이런 마지막을 우리가 좋아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니, 저에게는 이중 감정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좋으나 마지막은 싫은,
천국은 좋으나 이 세상에서 이별은 싫은.
이는 마치 제주도에 가고 싶다면서 집은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결국 선택해야 하는데 이 선택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이런 선택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불행이 되겠지요.
왜냐면 그것은 영원한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선택의 기회를 주시고,
마지막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애쓰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신 다음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주님 의지의 표시이고,
이는 최후 만찬 때에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지막 날이란 마지막까지이고, 끝까지이며
우리가 믿을 때까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뜻이고,
그때까지 애쓰시겠다는 뜻이니
그 사랑과 사랑의 의지를 크게 느끼고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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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영화 아이언 맨, 셜록 홈즈, 오펜하우어를 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일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 것입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배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때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다고 하네요. “나는 마약의 힘으로 창의력을 높이려는 집안에서 자라났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와 마약치료센터에 반복적으로 드나들었고, 당연히 결혼도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갱생 불가’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는 마약을 완전히 끊었고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끊기 힘들다는 마약을 끊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그는 버거킹 ‘치즈버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버거킹의 치즈버거를 좋아해서 매장에 가서 주문한 버거를 입에 넣는 순간, 버거의 맛을 하나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버거 맛도 제대로 못 느낄 지경까지 몸이 망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가지고 있던 마약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리면서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약과 버거 중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마약을 선택했다면 순간의 쾌락에만 의존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버거를 선택했기에 건강해질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선택의 갈림길에 자주 서게 됩니다. ‘주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라는 선택입니다. 세상의 것은 분명 순간의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것은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것을 쫓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순간의 만족만으로 충분하다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선택하라고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마지막 날에 주님을 통해 다시 살려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선택하십니까?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 것에 눈길이 더 많이 가고, 한 번이라도 만져 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욕심과 이기심만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세상 것에 있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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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이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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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에 대한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의 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곧 당신 말씀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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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서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의탁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아! 이 말씀이었구나! 하는 깨우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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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분들과 대화 중에 ‘서울 신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서울 신학교를 나온 신부님들이 인품이 좋고, 사목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서울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입니다. 군인들 중에도 해병대, 특전사, 공수부대 출신들이 있습니다. 일반 군인들도 나라를 위해서 복무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특수한 부대에서 복무한 군인들은 나름대로 자부심과 명예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는 전역 자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난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 중에서 ‘청년성서공부’를 했다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먼 미국까지 와서 열심히 봉사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청년성서공부를 통해서 얻었던 신앙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꾸르실료를 체험했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분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원동력은 청년꾸르실료에서 신앙의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에 근거한 교리와 신학입니다. 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교계제도를 설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이단을 구별하였고, 세상의 논리에 대응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체계화 시킨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확립한 분들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는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신앙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에 근거한 영성과 은사입니다. 신앙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성적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차원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초월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카리스마’라고 이야기합니다. 카리스마에는 많은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의 최종 목적은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 전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안토니오, 베네딕토,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영성과 은사를 정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영성과 은사를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영성과 은사가 없는 교리와 신학은 자칫 차갑고, 무미건조할 수 있습니다. 영성과 은사는 활력을 주는 기운과 같습니다. 교리와 신학이 없는 영성과 은사는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악의 세력도 영성과 은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신학에서 벗어난 영성과 은사는 때로 이단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교리와 신학이라는 그릇은 견고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서적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영성과 은사라는 활력은 충만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영적인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신심단체와 함께 한다면 신앙생활에 위안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 그리고 영성과 은사의 날개가 튼튼한 신앙인은 두려움 없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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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십자고상을 보았고,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도 보았습니다. 가족을 보았고, 여러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저 단순히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김을 보았고, 느낌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보았고, 냉기와 온기를 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 뜻은 이렇다고 말합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보고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키는 어떻고, 얼굴은 어떻고, 눈은 어떻고…. 등등이 아닙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서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사랑 안에서의 만남, 기쁨 안에서의 만남, 고통 안에서의 만남, 슬픔과 좌절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걷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야 우리는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만남은 전인적인 만남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만남이 아닌 온몸에 새겨지는 그런 만남입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그런 만남입니다.
우리의 삶의 길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그분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이 목표는 바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지금 우리가 근심하는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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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중요한 것은 자세다.
모든 스포츠를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공으로 하는 운동은 거의 다 해봤습니다.
각 운동은 공의 크기도 다르고
운동 공간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늘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공을 다루기 위한 ‘자세’입니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공을 제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 탁구 선수 할 때
탁구를 가르쳐주던 코치 선생님이 그렇게 자세 연습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같은 자세를 1000번, 2000번 이상 했으니까요….
그러고 그 자세가 굳어지면 드디어 공을 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자세
겸손과 의지의 자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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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기쁨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주님께 드려라.”(시편66,1-2)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알렐루야 부활시기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날로 짙어지는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하는 신록의 아름다움, 신록의 기쁨입니다. 요즘 부활시기 전례도 계속되는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입니다. 부활의 기쁨, 찬미의 기쁨이 없으면 도대체 이 광야인생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수 있을런지요! 예수님 부활 사건이 하느님의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새삼 예수님을 닮아 선교해야 하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이 가르침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물이 한 곳에만 모여 있으면 그 물은 썩는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갈 때 물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다산
“하늘은 한 사람을 부유케 하여 사람들의 가난을 구제케 하였으나, 세상은 제 부유함에 취해 가난한 사람을 능멸한다. 이런 사람들은 천벌을 받는다,”-채근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장면이 참 역동적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어 복음은 사마리아에 전파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 및 로마로 판도가 바뀌면서 복음의 불길이 퍼져가는 모습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속담이 그대로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박해와 스테파노의 순교상황시 죽음의 분위기는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돌변하는 모습들이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흡사 강풍에 번지는 복음의 불길같습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며 일곱부제들중 스테파노에 이어 두 번째에 속하는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맹활약을 펼칩니다.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놀라운 기적들의 발생입니다. 정말 신바람 나는 분위기입니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얼마나 역동적 분위기인지요! 그대로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이런 기적에 큰 기쁨,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파스카의 봄철에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전 인용했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엊그제 4월15일은 온종일 부드러운 봄비에 촉촉이 젖은 봄의 대지였습니다. 늘 인용해도 기분 좋은 ‘봄비’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19년전 봄이나 지금의 봄이나 여전히 똑같은 심정입니다. 봄비처럼 메마른 우리를 촉촉이 적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 우리의 희망, 우리의 기쁨, 우리의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은 어제에 이어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처럼 다음 대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을,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험난한 광야 여정중 세상 것들에 중독이 되어 폐인이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고파, 배고파, 목말라, 주님의 생명을, 사랑을, 평화를 찾아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마디인지요!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 먼저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이어 우리를 예수님께 보내셨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보냄 받은 “하느님의 선물”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어 또 당신께 온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약속을 환기시키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목적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확연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당신께 오는 이들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릴 것이라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구원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구원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기 시작한 우리들이요 저절로 나오는 다음 주님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찬미요, 감동과 감격이옵니다.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오늘이옵니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주님을 찬미할 때, 내 입술은 방실방실
속량하신 영혼도 너울너울 기쁘리다.”(시편71,8.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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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 가는 길>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믿음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믿음입니다
희망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희망입니다
사랑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사랑입니다
정의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정의입니다
자유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자유입니다
해방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해방입니다
진리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진리입니다
평화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평화입니다
함께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함께입니다
살림이신
당신께 가는 길
오직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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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7.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생명의 빵은 죽음을 이기는 힘을 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십니다. 배고픔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을 없애 줄 뿐인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과거에 있었던 것 - 우리의 공통된 근원 - 과 지금 현존하는 것 - 우리의 공통된 존재 -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것도 우리에게 훤히 드러날 것이다. 엑카르트는 우주가 미래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다. “창조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에 협력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는 떼이야르 드 샤르탱의 시각과 유사하다. 그것은 우리가 “온통 하느님처럼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본디의 우리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실로, 우리의 흘러 나옴은 안에 머무름이다.(155)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수도생활의 새 양식:
나) 퀼른의 성 브루노(1030/1035∼1101)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창설자가 되었다(1084). 후에 교황이 된 우르바노 2세(1088∼1099)가 그의 제자로 있던 랭스 교구에서 화려한 생애를 보낸 후, 공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그르노블 부근의 깎아지른 듯한 암산(岩山)인 샤르트뢰즈에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최초의 ‘카르투지오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그는 교황 우르바노 2세를 마지못해 따라가야 하였던 남부 이탈리아에 몇 개의 수도원을, 즉 칼라브리아의 라 토레와 보스코의 산 스테파노 수도원을 세우고, 여기서 1101년에 사망하였다. 회원수가 매우 많았던 시기가 없으며 절대적 침묵을 지키는 이 “카르투지오회 수도지들”은, 기도와 명상에서 항상 참된 종교성과 내적인 힘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중세 후기와 종교개혁 때까지도 배반하지 않고 이겨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하여 이러한 말이 전해진다. “카르투지오회는 개혁된 적이 없다. 결코 변질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 그러나 항상 새롭게 되도록 자극받는 개혁으로의 욕망은 도상(途上)에 있는 교회와 그 제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아닌가?
클뤼니의 수도자들은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관통하는 개혁정신이 서방교회룰 쇄신한 같은 세기에, 또 그들 자신의 계열에서 베네딕토회의 수도생활을 개혁하자는 소리가 일어났다- 시토회는 베네딕토회의 개혁된 한 분파이다.
퀼른의 브루노 밑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몰렘의 수도원장 로베르토(+1111)는1098년에 스무 명의 동지와 더불어 시토의 황무지에 엄격한 베네딕토회적인 개혁 수도원을 창립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알베릭(Alberic. 1099∼1109)과 하딩(S.Harding. 1109∼1133) 수도원장은 회헌 사랑의 헌장을 만들었다. 이 회헌에서는 특히 사도적 청빈과 기도룰 위한 고독, 규칙적이고 확고한 육체노동이 강조되었다.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는 전통적인 봉건질서와 쉽게 결부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재산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새 이상을 찾는 데 도움을 준 사랍은 부르고뉴의 젊은 귀족이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091∼1153)였다.(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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