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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8: 9-15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추스려 주십니다.그 분께서 택하신 가정과 교회를 구석구석까지 살피시고 정결하게 해 주십니다.
주께서는 책망과 그 분의 너그러우심을 병행하시는 중에 그 분께서 택하신 가정과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가도록 항상 주선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 안에 어떤 소망을 두게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하시며 마침내 그 소망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1. 본문 9절은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분명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이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박애(博愛)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천사들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시작하십니다. 모세가 다른 데서는 화자(話者)를 단지 한 사람에게만 돌리고 있는 한편 여기서는 한번에 세 사람의 화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세 사람이 함께 한 사람의 인격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중요한 위치가 한 분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살아 계신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가끔 천사들의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편 동시에 그분께서는 친히 천사를 거느리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의 머리로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께서는 천사들을 그분의 수행원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에 대하여 묻고 있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 사실에서 사라가 그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불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지고 있습니다.
2. 본문 10절은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입니다.
제롬은 ‘내가 생명이 나에게 따르면 돌아오겠다’ 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의 방법으로 내가 살아 있으면 돌아오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의 권능을 아주 놀라웁게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말씀하시는 형식을 빌어와야 했다는 것은 애매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분을 멸망될 자로 추측하게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영원한 구원을 다루고 있는 이 괄목할 만한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무슨 위엄성을 지니게 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해석은 절대로 인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해석이 전적으로 그분께서 하신 약속의 위력과 권위를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 말이 ‘생명의 시기에 의하여’ 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사라에 대한 말로 주해를 하면서 마치 사라가 그 기간까지 생존할 것이라는 식으로 천사가 말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아기에 대한 것으로 설명한 것이 더 적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아기를 낳을 적당하고 알맞을 때에 그 분이 오셔서 사라가 살아 있는 아기의 어머니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1절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입니다.
모세는 이 구절을 삽입하여 천사가 말하는 것이 사라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늙어서 비틀거리는 노인에게 아이들이 약속되는 것은 자연 이치에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관한한 이 점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이가 고령이라 할지라도 힘을 부여받아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살던 그 기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비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력이 왕성한 기간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자기 아내와 같이 지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의 몸이 거의 죽은 상태에 있는데 자식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의 말년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스마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12년이나 경과된 지금에 와서 그의 늙은 아내에게서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된다는 가능성이야말로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사라의 경우를 위주로 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장애가 그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습니다.
4. 본문 12절은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전 장에서도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웃음은 절대로 유사하지 않은 웃음이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감탄과 기쁨으로 취해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자기 나이와 남편의 나이를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며 내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분에게서 오는 확신을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녀 자신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주시는 확신을 보류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솔직하게 잘못된 기질과 헛된 것으로 하나님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안된 일에 대하여 생각하는 그 일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있는 그녀는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권능을 묵상하는 데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저울질만 하다가 마침내는 경솔하게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게 불신앙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자주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혹은 자연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사역을 헤아리는 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비난적인 행동을 취할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결국에 가서는 그런 행동에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나타나고 있는 모든 장애들이 모두 하나님 말씀의 복종하에 두어졌다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마땅한 영예를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불신감이 그렇게 크게 용서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는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수치와 겸허로 머뭇거리고 있게 되어서 그녀가 들은 모든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한 그 말 자체도 가장 큰 겸허성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늙었는데 정욕에 우리 자신을 몰두시킬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의 마음 속에는 다른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관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죄는 바로 다음의 사실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생각은 너무나도 자연의 익숙한 질서에만 고정시킨 나머지 자기 마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기적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구절에서 사도가 뽑아내고 있는 충고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라가 아브라함을 그녀의 ‘주’ 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3:6). 베드로 사도는 사라의 본을 받아 남편들에 대하여 순종하며 안정하게 처신하라고 여자들에게 권면합니다. 정말로 많은 여자들이 그들의 남편들에게 이런 칭호를 별로 문제가 없이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들의 남편들이 전제적인 교만으로 아내들을 그들의 지배하에 두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자기가 남편을 존경하고 있는 것을 마음 속으로부터 진실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사도는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로 공언했던 겸허성에 대하여 실제 행동으로도 입증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5. 본문 13-14절은
“⑬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⑭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이제야 그 천사들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분명하게 그분의 칭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 무슨 의미로 하나님 칭호가 천사들에게 옮겨졌는가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것을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의 말씀이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자기 사역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그 시간에 여호와께서 거기에 임재하신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사실은 언제나 말해야 할 필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상들에게 나타내실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과 그들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 하나님의 역을 맡아서 말씀하시고 행하실 뿐 아니라 바로 그분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의 웃음이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그녀가 살아 계시고 항상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 다음 상황도 속해 있습니다. 그 천사가 장막에다 등을 대고 있었으며 사라는 자기 마음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세의 선언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책망이 사라의 웃음이 불신임과 제휴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라는 말씀에 적잖은 중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사라를 꾸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하나님의 권능을 그녀 자신의 이해의 테두리 안에다 제한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대조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과 사라가 자기의 육신적인 이성으로 상상했던 축소된 측량과의 사이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라)라는 말을 ‘감추어진’으로 번역하여 마치 천사가 하나님께는 전혀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절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일에도 실패하고 때로는 어려움에 처한 때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과는 훨씬 다릅니다. 그분은 위에서 기고만장한 자세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런 일들을 경멸하시면서 내려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라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시고 크신 권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불신할 때마다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권능을 박탈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바울이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냉정한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지금 죽은 상태와 같은 자기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이루실 수가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가운데서 그 찬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롬4:19). 그러나 우리가 불신앙의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면 우리가 죄악으로 하나님의 능력에서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면 그 즉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우화적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순간에도 우리 속에서 의곡 된 생각이 돋아나서 넌지시 말하기를 ‘어떻게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의혹을 일으킵니다. 그런 협소한 사고방식으로 얽매이고 먼저 점령된 우리는 그분의 권능과 수천 세상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참된 지식을 배제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 자신의 이성으로 빈약하게 측량하는 방법을 가지고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것을 하나님에게서 기대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에게 서글픈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호와의 말씀은 불가분리적으로 그분의 권능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포된 뜻을 제외하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을 문의하는 것보다 더 터무니 없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관하여 논쟁을 할 때 그들 자신들이 심오한 미로(迷路)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토록 애매한 애착에 관련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등불처럼 우리를 인도하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권능과 뜻이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정착의 방식으로 결합되게 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사도 바울께서는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4:21)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께서는 이런 신앙을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천사는 다시 ‘기한이 이룰 때에’ 내가 오리라는 약속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출생의 기간이 다 차게 되는 년도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6. 본문 15절은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입니다.
금요일 밤 10시30분 경에 집에 들어서자 마자 제 아내가 딸에게 묻습니다. 너 지금까지 텔레비젼 보았구나, 딸 아이의 대답이 나오고 저도 퉁명스럽게 몇 마디 하였습니다.
1) 사라의 다른 죄는 자기의 비웃음을 거짓으로 덮고 감추려고 노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위선자들이 곧잘 구실을 붙여서 빠져나갈 곳을 찾는 방법을 따라 이런 변명이 옹고집의 죄악성에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위선자들은 끝까지 그들의 성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감정은 달랐습니다. 자기의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한편 몹시 놀란 나머지 자기가 했던 일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하나님에게 불쾌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성품이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 부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덕성들의 차원 높은 가치가 허물로 타락하기까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사실에서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그 두려움은 갑자기 사라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은밀한 죄를 간파해 내셨다는 사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위엄을 심각하게 절감할 때 그것이 우리를 무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떨리게 하는 마음을 유발시키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정에 올라가셔서 우리의 죄를 백일하에 드러내실 때 우리는 특별히 더욱 그런 위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2) 15절 끝에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에서 천사는 다양한 말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직접 그 사실을 그녀가 거짓으로 부인하고 있는 점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때 핑계를 보여서 빠져나가려 했다가는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 사건을 단 한마디로 즉시 처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여 거짓 핑계로 하나님을 조소하다가 결국은 그분을 멸시까지 하는 자들의 변덕스러운 성질을 본받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들의 죄를 모르시고 그냥 지나가신 것처럼 당분간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호통을 치시며 ‘네가 가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주 안에 우리의 지향성까지 녹화 중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첨단 과학자나 그 과학보다 아래 계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다른 것으로 돌리거나 발빼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는 욕망에서 위장의 도피처로 자신을 은익시키는 자들에게는 그 두 배의 정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한 고백을 하여 공개적으로 정죄된 사람으로서 사죄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은 다정스런 책망을 하시는 것에 만족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라의 이중적인 범죄를 더 심하게 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때로는 부드러우시고 관대하심으로 그분의 백성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가랴는 더 심한 처벌을 받아서 아홉 달 동안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눅1:9).
그러나 이런 실예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구적인 법칙을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형벌을 내려서 그분의 백성들을 회개시키시는 것과 같이 그분께서 흔히 쓰이는 방식은 어떠한 징치(懲治)도 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충분히 겸손하게 되는 것을 좋게 보고 계십니다. 사라의 경우에서도 정말로 그분은 이런 긍휼에 대한 특이한 본보기를 제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너그러이 다 용서해 주시고 아직도 그녀가 교회의 어머니로 남아있게 그녀를 선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여기서 관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 앞에 죄 있는 자로서 나아가서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확정된 죄인처럼 그분 앞에서 조용하게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이 더욱 더 좋습니다. 이런 믿음의 방식들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습적으로 하고 있듯이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기뻐하는 것보다 얼마나 훨씬 더 나은 사실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제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