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혁명 세력들
상퀼로드
수공업자, 소상공인, 근로자 등의 무산시민을 말하며, 급진주의자들이다.
자본의 집중을 반대, 직접 민주주의 자유보다는 평등을 강조, 공화제를 주장했다.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여 종종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의회에도 반대했으므로, 혁명을 이끄는 세력은 상퀼로드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프랑스 혁명이 과격하게 흘러가는 하나의 요인이기도 했다.
총재정부 시절에 직접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자코뱅 당의 종파 싸움에서 밀리고, 점차 세력을 잃는다. 혁명 주도세력은 다시 부르주아지로 돌아온다.
(* 판탈롱 바지)
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우아하고 세련된 복장을 좋아했다. 그리스 시대의 여자들이 입는 튜닉이나. 로마 귀족이 입던 토가를 좋아했다. 토가는 망토가 되어서 프랑스 멋쟁이 남자의 어깨에 걸쳐졌다.
그러나 룻소의 제자인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권력을 쥐자 그리스나 로마의 흉내를 내는 복장은 끝장이 났다. 그런 복장을 하고 으스대다가는 언제 붙잡혀서 단두대로 끌려갈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의상에서 새로운 영감이 떠올랐다. 빈민굴의 불한당들이 입던 바지였다. 소위 하천민들은 더럽고, 낡은 긴바지를 입고 일터로 나갔다. 귀족들도 이런 옷을 입어야 자신이 청렴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고, 로베스피에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긴 바지는 원래 노예선 갤리의 선원들이 입는 옷이었다. 나중에는 갑판에서 일하기 좋다 하여 영국 선원들이 입었다.
이 바지를 판탈롱이라고 불렀다.
이태리 연극은 16세기부터 배우들이 관객을 웃기기 위해서 판탈로네라는 남자 배우가 반드시 나왔다(삐에로-어릿광대). 긴 바지를 입고 우스꽝스런 몸짓을 하면 극장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윗도리는 헐렁한 블라우스가 되었다. 이 이름은 피에몽의 가르마뇨에서 따서 카르마뇰이라고 했다. 모자도 세련된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테가 없는 완만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뿐만 아니고 혁명정부는 프랑스를 최악의 빈곤 상태로 몰아넣었으므로 국민들이 복장 따위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목이 달아나지 않도록 간직하려면 새로운 국민색이 된 빨강색과 흰색과 파란색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사용하였다.
로베스피에르 자신은 결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다른 인간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다녔을 때도 왕당파들이 입던 바지인 퀼로트를 입고, 단정한 복장을 좋아했다. 판탈롱을 입는 인간들을 ‘상퀼로트’라 하여, 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고전주의 화가인 다비드에게 로마 귀족들이 입던 근엄한 복장을 그려달라고 했다. 대개의 남자들은 다비드의 그림이 보여주는 튜닉이나 토가를 입고 깃털에 덮인 모자를 쓰는 것을 바보로 보인다고 생각했으나, 로베스피에르의 눈밖에 나지않기 위해서 필요할 때만 입었다. 혁명시대르 거치면서 프랑스인의 취향도 변하였던 것이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이었으나,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날 때도 살아남았다. 이런 그림을 그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면 곧 이어 나폴레옹이 집권하지 나폴레옹의 궁중화가가 되었다. 우리가 보듯이 몸에 꽉 쬐인 바지를 입은 나폴레옹을 그렸다. 그를 우리는 서양미술사에서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는다.)
2. 산악파(몽타뉴파(La Montagne)는
프랑스 혁명 시기 국민공회에서 활동하던 가장 급진적인 정치 파벌로, 지롱드파와 대립하였다. 공포정치의 주도 세력이었으며, 혁명에 대해 온건적 입장이었던 지롱드파와 대립하였다. 각자 사상이 조금씩 달랐으나, 장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이상 실현, 경제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 급진적인 토지 개혁, 폭력을 통한 공화정 질서 확립, 합리주의에 기초한 보편주의적 국가 운영 등을 주장하였다.
주요 지도자들이 단두대로 가면서 사실상 몰락하였지만, 19세기 공상적 사회주의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대표적 인물로, 로베트피에르, 조르주 당통, 장폴 마라 등이 있다.
**혁명 정신
혁명 정신과 관련하여“박애”를 올바르게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 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나폴레옹 시대
요약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대혁명 때에 많은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함으로 국민 영웅이 되었다. 혁명이 국민을 억압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했다. 나중에는 황제가 된다.
역사에서 나폴레옹의 공적을 꼽는 것은
나폴레옹 법전 –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 민법이 유명하다.
군사 제도와 많은 업적을 남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로 24세에 장군이 되었다.
1810년까지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승승장구함으로 유럽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1806년 대륙 봉쇄령이 나폴레옹 몰락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을 가져온다.
1814년 엘바섬 유배 – 탈출 – 100일 천하(정확히는 95일이라고 함)
1815년 센터헬레나 섬에서 6년을 보낸 후에 죽다.
1789년 대혁명 때 코르시카 의용대 부사령관이었다.(23세)
자코뱅 당은 귀족 제거 정책을 폈고. 하급 귀족 출신이 나폴레옹은 동생이
자코뱅 당원이어서 살아 남는다. 왕당파가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진압함으로 출세의 발판을 마련한다.
*스페인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는 툴롱항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이 진압한다. - 이 공적으로 빠르게 권력가도로 나아간다.
왕당파의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795 파리폭동 — 나폴레옹이 진압
1796 이태리 원정군 사령관(27세)
1798 이집트 원정(나폴레옹의 권력이 치솟아 오르자 일부러 보냈다고 한다.)
많은 학자(180명)를 대동 – 학문적으로 대성과를 얻다.(로제타 석)
이집트 원정 시기에 프랑스는 유럽 연합과의 전투에서 곳곳에서 패배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정부의 명령 없이 귀국한다.(군인으로서 항명이고, 탈영이었다.) -- 쿠데타를 일으킨다.
1799년 – 의회를 장악한다.
1800년 – 국민투표로 새헌법 승인(비밀 투표가 아니고) 10년 임기 통령이
된다.
1800년 —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로 진격(이때 다비드의 유명한 그림)
유럽의 연합군이 프랑스로 처들어 오고, 물리친다.
*이때부터 나폴레옹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1.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와 산업을 부흥시킨다.
2. 레지옹 드뇌르 훈장 창설(1802)
3. 공공 교육법 개정 – 국민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도록
4. 프랑스 법전 제정 – 민법이 유명하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 이 정신의 법의 정신이 되었다.)
5. 국가도 세속화 하였다.(돈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6. 도로 교통망의 정비
(*나폴레옹이 펼친 정책을 보면 박정희가 모델로 한 것이 아닌지?)
7.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하면서 미국과는 친교정책을 편다.
( 1812년 미국 독립 전쟁에 미국이 승리하는 요소가 된다)
멀지 않아서 미국과 다시 적이 된다.
*아이티는 프랑스 령으로 흑인 노예를 이용하여 사탕수수 농사를 지었다.
프랑스가 유럽에서 전쟁으로 정신이 없을 때 흑인노예가 반란을 일으켜서
8. 아이티에 원정군 파병하였으나 패전한다.
1804년 아이티는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국가를 세웠다.
남미 지역의 독립에 많은 영향을 준다.
9.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았다.(돈이 딸려서 1500만 달러(띵값에)에
10. 프랑스 혁명 정부는 반 카톨릭 정책으로 교회재산 몰수, 예배 금지
==>카톨릭과 협약을 맺고 모두 풀어주었다.
11. 1802년 — 헌법을 뜯어고쳐 — 종신 통령이 되었다.
(이 시기의 프랑스 왕당파는 왕정 복귀를 부르짖으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12. 1804년 – 국민투표로 황제가 되었다.
이로서 제 1 프랑스 제국이 탄생했다.
==> 황제의 대관식을 어마무시하게 폼 잡으면서 한다.
(다비드 그림이 있다.)
황제가 된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