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邪相의 物理 推測 論
邪惡한 精神의 憶側妄想은 不確實性의 엉뚱한 생각을 그린다 즉 그럴듯한 궤 생각으로 맞지도 않는 物理 理論을 定立하게 되는 것이다.그는 왜인가? 世人이 造世原因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밝혀놓지 못했음으로서니라 그래서 삿정신이 이렇게 저렇게 재어보고자 함인 것이다.
아뭉튼 이런 하찮은 생각을 옮겨논 글을 가지고 世上에 내놔 혹세무人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가소롭다 못해 그 痴愚한 생각은 동정을 금할 길이 없다 할 것이다 (※ 이는 정리때 立案文을 보고 그 論을 일으키기 위한 論頭이다)
◎ 어떠한 이완되지 않는 物體에 있어서 그 物體가 圓을 그으며 한바퀴 돌면 중심축도 한바퀴 돈 것으로 착각하나 속도감으로 논할진데 중심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느려져 그 중심을 뚫고 나간 반대쪽에서는반대방향으로 움직임으로 인해 돌게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반대쪽으로 뚫고 나가기 以前에는 선다(停止)는 뜻이 成立되니 즉、모양도 없고 부피도 없는 點이다. 이것이 필자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렇다면 說하는 이의 假說理論(삿된 진리相)은 성립되니 그 지점을 확대시킨 것이 圓空으로써(六合) 上下좌우 전후로 날은 여러 時줄의 포화상태를 이룬 확산이라 그 되구말구 얽어메는 시줄을 타고時差에 의한 停滯 누적현상을 일으켜서 공간이란 면적과 부피가 생겨 表空化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즉정체로 인하여 정체란 줏대를 세워 나타난 것이니 家見의 삿된진리相이 된다는 것이다。아무리 하여도 그정체가 다튀어 나올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니 (※ 앞에서는 다튀어 나오는 것으로 봤음°물론 空에 대한公正性을 부여치 않음 또한 賦與해도이다) 圓의 활동에 있어서 作用과 그 작용에 의한 反作用은 같은 꼴이 되어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되어 원주율과 점을 합한 것 그것이 숫자의 표현 七十二라면 그 숫자로 논할진데 정체의 원인점이 되는 것이 마흔여덟로 定列되어 튀어나와 時줄을 타고 정체의 누적현상을일으켜 표空化시킨다는 것이다.이것은 원칙론이지 반드시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그 숫자의 成立은 저 앞 書頭 오십육억에 논하였을 것이다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무위유동하는 시줄(時線)이 하염없이 곧게 뻗는 것만이 아니라 아니 곧게 뻗는다하더라도 언젠가는 휘어져 제위치로 돌아온다는물리학자의 이론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 가는 되돌아와 輪回인 것이다。즉、이를테면 지구땅덩어리로 논할진데 자 ㆍ공전으로 인하여 시간은 흘렀지만 흐른게 아니라 돌고 돌아 제위치로 가까이 온다는 논리이니 지난 춘분점에 지금의 춘분점이 거의 가까이 온다는 뜻이나 그러나 공간은 그 지점의 공간이 아니고 다른 위치에 벗어나 있고 時線의 내 뻗침만 그 位致로 다달아온다 할 것이다.
그는 왜인가? 無形有氣한 引力作用이 空間을 사이에 놓고 일정한 힘을 加하는 것처럼하여 훌라호프 돌리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物象現相에 비긴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 못되어 거짓말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득이 예를 들어 논했을 뿐이다.다시 조금앞의 말로 되돌아가서 아무리 하여도 다
튀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속심은 그대로 있다는 뜻 空은 역시 空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한 생각에서 삿된 신앙의 대상체
삿된진리 偶象이 成立되 많은 世人을 현혹 시키게 되는 것이다) 관점을 그렇게 나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역시 또한 다튀어 나온 것으로 본다면 다튀어나온 것으로도 보이는 것이다。즉、관점이 格을 定立하게 되는 것이다。즉、관점은 일정한 것이 없는 것이다。이는 왜인가? 覺의 일정한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우리가 8字形을 斜視的으로 그려보자 이것을 立體的인 것으로 여겨 그 象形의 內面을 들여다본다할 것 같으면 윗동그라미가 이쪽으로도 될 수도 있고 저쪽으로도 될 수 있는 것이니 뒤집었다。엎었다하는 그 보는 각도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다.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상체에 대하여 보는이에 따라 각도를 달리함으로 자기의 주장만이 반듯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앞서의 數點이 다튀어 나온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다 안 튀어나온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그 適用에 있어 앞의 논리라면 헛주먹이 항상 그 位致에 있고 또 하나의 활동을 표현할 수 있는 實相의 주먹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그 힘은 無限하며 영원히 물레방아의 자자손손의 힘을 생산한다는 뜻이고 (끊임없는 우주의 확장= 그러나 그 우주의 끝은 이 시점이다= 왜냐하면 空觀임으로서니라) 뒷논을 거론한다 하더라도 그 용트림치는 活動(太乙形모습)은 영원히 꺼질 줄 모르는 불과 같아 태양보다 더 작열한 빛과 같은 힘은 우주를 영원하게 이끈다 할 것이다.어느 것을 택하던간 무궁한 에너지 영원한 힘의 발현인 것을 人間은 아직까지(지금 이시점을 가르킴 앞으론 어떻게 될진 알 수 없다) 그 힘의 活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고난에 의해 어렵게 생산해낸 힘의 낭비적 소모에만 열중하는 사탄의 이론만 쫓고 있는 것이다. 즉 소비와 勞苦에 의한 생산이 있는 곳엔 균형과 화평은 있을 수 없고 아귀다툼만 존재케 되는 것이다。사용해도 그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힘을 갖고 제位致를 지킨다면 먹을거 입을거 아플거 늙을거 죽을거 등、걱정없는 세상이 된다할 것이다。이것은 단조로운 세상이라 할 것이나 그러한 염려를 갖게 하는 것이 곧 사탄性覺이니 그러한 염려가 있다면 어찌 걱정없는 理想世上이라 할 것인가? 탐욕가진 異性의 사탄이 제한 몸을 만들어서 그 꿈를 벗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이 세상 되어돌아감이라 한다。그러므로 인하여 비늘가루 떨어지듯 갖은 걱정근심의 환란과 이 반면을 취한 향락과 감미로움이 있다하였다。즉、흥망성쇠、고진감래、흥진비래 등의 연속이란 뜻이다.이런 세상은 백가쟁명。이기면 正이 되는 사탄 마두귀신이 활개치는 세상이란 뜻이다.
그러면 가만히 그대로 있어야할 空間이 有動에 의해 新興 老衰등 왜 변화현상이 일어나는가? 이는 거듭말하지만 거듭되는 정체 누적현상에 의한 空間象(모습 貌)의 표시인 것이다。즉、흐름을 탄 정체가 표면화되어 나타난 모양생김이니 흡사 미세한 찌꺼기가 여울파도에 밀려 가에로 가에로 밀리어서 여러번 쌓여 사람의 감으로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또한 그렇게 하면서 피었다 시들었다 하는 꽃처럼 모양을 변경하는 것이다。움직이는 六合의 되구말구 얽힌 집합된 여러 時줄은 살아있다는 生命力의 표현이니 이 또한 生命이란 삿된 진리(相)인 것이다。그 싯줄들의 읽는 모양새를 따라 권능 또한 있게 될 것이니 갖갖은 공간이 원대로 얽혀메여서 그 역할을 다한다할 것이다。이것을 간단히 표현시킨 것이 부적과 같은 그림들이다。즉 金文篆體 符籍의二次元的 원리도 이러한 논리에서 나왔다할 것이다。부적이란 능력을 行事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상징 사람이라면 힘센 장수이거나 물건이라면 그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圖形이거나 事에 관한 것이라면 잘 진행되라는 뜻이거나 등등) 하여 글자처럼 단면으로 그린 것으로써 그에 內在되어 있는 암시적 권능의 立體的 또는 活動的 發現을 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다。이 부피도 없는 生命이라 하는 것들이 삿된진리(邪相)를 주장케하는 것들이라 즉「내다! 내다!」하는 것들이며 또「나요! 나요!」하는 것들이다。갖은 形 생김새가 영혼이 깃들어 서린 靈體이니 갖은 靈相을 다동원하여 갖은 技巧와 슬기를 갖게된다 할 것이다(정리때 생각 말씀이 군더덕이가 지고 어째좀 이상하게 흐르는 감(어색)이 든다할 것이다) (모순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니 앞서말한 부정적인 슬기와 여기서 말한 긍정性을 내보이는 지혜라는 뜻과는 좀 차이가 난다할 것이니 그는 왜인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영혼이 깃들어 있는 靈象에 의한 슬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할 것이다) 아무튼 부적에 관한 論은 자세히 알 수 없음으로 여기서 끝이고 말머리를 돌리까한다。
즉 天地 萬物이 각자 形을 짓고 나(我)라고 나타나 있다。이 수많은 생명들이 나라는 줏대를 세웠으니 그 空의 願 탈相이라 할 것이나 삿된진리(相)인 것이다。누구의 만들음을 말할 것 없다。시간이 저절로 있는 것이지 누가 만들어 있다곤 필자는 보지않는다。이 저절로라는 것이 만든 것이며 만들은 자인 것으로써 저절로들 보란듯이 내세우고 있는 삿된 진리들인 것이다.그래서 철부지 아이가 예쁜 꽃을 들고 나보란듯이 서 있는 것처럼 한편으론 아름다움으로 보이겠지만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삿된 진리를 옳은 진리라해도 상관이 없다。아무래도이다…。說하는이가 몸하고 집하고 있으면서 스스로의 그 집을 삿된 것으로 몰아 욕된 것 같으니 이후의 說엔 그냥 진리로 할까한다。읽는이가 삿된것으로 이해하면 그 전하는이의 생각이 통하였다할것이다。그 집이 뭔가? 허물탈이다。생명力이 잠깐 쉬었다가는거 네가 만들은 집 네가 만들은 집이 아니다를 따질게 뭐이 있겠는가만은? 자꾸 제집이라고 유세를 떨고 비위를 건드리니까? 더럽고 치졸한 생각에 그럼 어디 진상규명 해보자 하는 것이지…。上下가 긴지 좌우가 길은지 짧은지를 누가알건가? 다만 空이란 개념에서 公正性을 부여하기 위해 같다고 표현할 뿐이지…。장단이 상관없고
박후가 상관없고 경중이 상관없어 아웅 다웅 할게 없는 것이다.
촬영된 정지된 影象(사진) 움직이는 영상(TV화면 극장의 상영판 등은二次元的 面의 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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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論·空을 보는 삿된 견해 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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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槪念
空은 現在 現位致를 뜻한다(※ 그렇게 본 것이지 空은 實相 空이 아니다。현위치를 공으로 본 것 또한一邪見解 一現相이기 때문이다.)
「」。空의 胎動
空의 나쁜 氣運을 바위(암석)로 굳게 하였다。이것은 邪言이다。앞으로 나오는 말들도 계속 狂的인 邪言이다。즉、이 單幕은 그런 狂的인 邪言이 많다는 뜻이다。空을 次次로 부스러지게 하여 순수한 흙이 되게하여 萬類 삶의 根本 디딤이 되게하다 時의 흐름의 歷史(또는 役事)가 空으로 化하여 萬有로 나타나다。
物만이 아니므로 空이라한다。그러므로 곧 空은 時流를 正邪로 갈러보는 (分別觀點)二原의 現相이다。(二原은 면적과 부피 즉 陰陽을 가르키는 말이다) 宙 흐름은 陽理。宇 空間은 陰氣로써 理氣合 一元太極 本質 無極이다。太極은 살아있는 흐름 꿈틀거림°과거와 미래를 現位에서 形容化하여 본 것이요 無極은 現位이다。즉 흐름의 축적현상이 과거미래요 그것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 現在現位致空인 면적과 부피 삼라萬類란 뜻이다. 또한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를 뜻하는 시간의 흐름도 現位致를 가르치는 空속에 들어 있는것으로써 피고지고 有(流)動하는 空속에 일科란 뜻이지 어디로 부터오고 어디로 까지 간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념 생각이 그렇게 去來한다고 그릴 뿐인 것이다。아무리 깊이파고 들어도 이것밖이니 누가 만들음이 아니요 흐름은 神性이란 것 空은 그 흐름의 現相化한 鬼質일뿐인 것이다。(혹이 음양이 전도된 걸로 착각할
런지 모르나 음과 양이 전도된 것은 아니다 면적은 神性線이 뚫어낸 것으로써 陽化한 性으로 보일뿐인 것이다。性質은 空됨의 不可分의 관계이니 어느 한쪽으로만 관념을 치우치게 놓아서 치우치게 척도를 그려서) 그것이 음이다 양이다 판별지을 수 없는 것이다) 모양도 부피도 없는 것에서 끌어내어서 (혹은 그 모양도 부피도 없는 것의 뜻이던 아니던 願이던 아니던 제공해서) 空의 現相이 나타나게 되었다.어떠한 方式을 취하였는가? 그 數로 擧論할진데 일흔둘을 마흔여덟로 定列해서 끌어내었다。흐름이 곧 만들음이요 모양도 부피도 없는 것이 이 곧 제공자이나니라。흐름이 어지러운 윤희요 모양도 부피도 없는것 또는 그 以前後가 亭淨止處이나 無爲有動이다 (남에 字句를 베껴쓰고 있는 感이 든다. 이것이 진리가 아니요 邪言이다 사단에 말씀이 또한 一家見을 이룰진데 진리인것처럼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일흔 둘은 또는 三十六을 지칭하는 것은 空象이 나온 觀點 또는 點 저쪽에서 열차를 타려고 待期하고 있는 승객수와 같을 뿐인 것으로써 그에다 이상하고 괴이한 의미를 두어 현혹에 들고자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러한 數를 거론하는 自體가 어리석음이 아니던가? 흐름은 生命(力)이다。그 영혼을 거론하는 자는 그 어떤 理由이던간 흐름(神)에 들겠다는 것이요 그 수 많은 돌음(回)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은 點도 없는 亭에 들겠다는 것이다。亭이란게 찍힌 사진과 같은 것이라서 不變이니 흐름에서 벗어날 화려한 꽃과 같은 것이라면 그냥 그대로의 모습을 띈다할 것이다。(물론 하염없는 歷史의 기억을 필름처럼 內在하고 말이다) 즉 空은 여러方 無方處에서 볼지라도 亦是 空이다. 다만 그 꽃을 감상하는 자세가 어떻게 되었느냐이다. 正邪의 관점은 이쪽에 있으니 측면 정면 뒷면등 여러척도의 成形面관점을 그리는 것은 이쪽에서 格을 세워 있는 것이다。찍혀나온 저사람의 등뒤를 보고 등뒤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관점인 것이다.
흐름에서 벗어나 한다 하더라도 그 아무것이 大覺醒者와 어떤 연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그 아무러크소니는 아니다 앞서 설파한 논리를 전도시켜서 무슨 空이던 空은 같다는 개념은 이 삿된 진리이다 空은 같지 않나니라。따라서 空化의 定列數도 같지 않을 수도 있다 空이 같다는 개념에 묶인다면 그는 진리 즉 삿된 가견을 설파하고자 하는자이다。진리는「내라」는 줏대를 세워 내보이는 것이니 이 삿된것이다. 그러므로 點과 그 以前後가 어떤 正邪나 是斜視的인 모양이던간 그 數로 거론할진데 일흔둘 설흔 여섯수만이 아닌 것이다。그 邊의 數 또한 설흔둘이던 설흔셋이던 다섯이던간 何等에 無有상관이라 할 것이다. 하필 數로 표현하는 것만이 아닌 것이니 數로 표시치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도 있고 말씀과 어떠한 것에 관한 이론 등등이 또한 그러하다.
또 앞의 거론한 말씀중에 삿된진리라 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을 加하는 뜻에서 그 意味를 轉倒시켜 진리는 삿되지 않은 것이다.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면 무엇이 있을까이다。다만 진리를 주장하는 그 行態가 他를 인정하더라도 저만이라는 아집으로 고집하여 있기 때문에 삿되다 함인 것이다。(他를 인정한다는
것은 저를 세우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서이지 진실로 원해서 한다는 뜻은 드물고 설령 원한다 하더라도 어떠한 반대급부를(댓가성을 바라는) 노리는 세상 통념상 정당화 하다 할지 모르지만 이는 가증스런 위선의 편에서는 수가 많다할 것이다》그 있는 것 자체가 먹음되어 먹혀주지 않으니 맛되다함이요(즉 스스로 허물어지지 않음이 삿된 것이요) 도리혀 물들이고자 먹고자하니 삿되다 함이다「나는 아니다 먹혀준다 소멸되어 없어지도록 먹이되어 먹혀준다 아주 꿀꺽 삼켜라「한들 이미 이것이 일가견을 이루니 삿된 진리인 것이다.
運命은 흐름가락에서 亭止空化로 벗어져 나오는 初入門이다。아름다운 꽃을 찍었다면 그 空이 소멸퇴색될 때까지 그 美花이다。다른것도 이에 유추하라。흐름속에든 寃鬼神들이 편치못하다하는 표현을 萬類에 기대어 표현할때는 아름다움이나 甘味로움을 人爲的으로 만들어 들게 한다 이것을 갖다 흐름 寃의 인위적
고(罟)脫破라한다。所謂 巫女가 꽃등 여러 畫象을 만들어 神堂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절 및 사당을 단청하는 것은 이런맥락에서 하는 것일 것이다。넓게 본다면 宇宙燮理나 自然造化에 의한 脫破가 또한 이와같다할 것이다. 이것을 주름잡아서 응집 시킨것이 人爲的인 願脫破의 꾸밈(화려한장식)인 것이다 이것은 집사람의 피곤한 날꿈에 和尙이 말하길 우리와 같은 道라 해서 집사람이 말하길 아니다. 먼저번 살던 사람의 붙인 부적과 그림이다 하곤 그 많은 탱화、그림、부적을 뜯어냄에 화상이 시주하라 하길래 하지 않았더니 저만큼 돌아서 가더란다. 화상이 저만큼 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作文흐름일 것이다.
「二」空은 空이다
흐름에 의해서 이 形成되면 그것이 거짓이던 참이던 어떠한 현대의 시각 관점에서 본다하더라도
즉 어떠한 과학적 화학적 氣質을 가졌던간 또는 그런것을 갖고 있지 않던간 空은 空이다.
흐름은 六合을 形成시키고 육합은 空의 原단계이다。그 흐름은 움직임에서 비롯되고 움직임은 살아있다는 뜻이다。살아있다는 것은 즉 생명을 말한다。生命은 出入할 수 있는 목숨(壽)이 붙었다는 뜻이다。목숨이 붙어있어 瞬息하는건 살아있다는 표현 삶의 일(事)科中의 하나이다。출입은 왕래로써 움직임을 뜻한다。뜻이란? 이 진리를 내세우는 머리(頭)로써 삿됨이 그지없는 것이어서 둘에 머리를 가지지 않는다(이말씀은 오직 저만이란 주장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內用上은 콩팥등 여럿의 뜻을 내포한다하더라도 역시 뜻은 (주된 목적 같은거) 하나요 하나의 꼬리로 귀결 지을 뿐이다(이말씀은 통채로 꿀꺽 집어삼켜 버리겠다는 뜻이니 제가 먹어치워 제한 몸 肥大一色을 만들겠다는 뜻이다)뜻을 따르는 것은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왜냐하면 그 뜻이 크던 작던 흐름 神이요 삶에 힘 의지에 힘이 되기 때문이다。영혼을 논하는자는 그 흐름 굴레틀 속에 있을 것이요 벗어나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흐름이 곧 영혼을 싸고 있기 때문이다。영혼이라 하는 것은 곧 흐름의 일부를 논한 것이나 진배없음이다된 이는 곧 의미를 달리 부여하는 흐름도 있을 것이라 해서 그 명칭을 영혼이라 하여 분변코자함인 것이다 흐름이라하여 뻗음만이 아니요 굴름만 아니요.뒤엉킴만도 아니며 또한 흐름은 한없이 흘러감만이 아니다 흐름이 있는 이상 흐름에 있는 이상 그 役事에 의한 空이 形成되어 그것이 희열이던 고통이던 如何한 탈상이던간 一存
고(罟)로 있게 됨인 것이다。길은 하나가 아니요 그렇다고 둘 또한 아니요 그 어떤 것을 뜻하는 것만 아니니 즉 여러 명분 목적 취지의 하나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니 우리 나희 너희 여럿등도 아니며 세우지도 세우지 않지도 않나니 이것이 핍박에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말도 아니요 그저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듯하는 아무런의 말씀이나니 아무러크소니는 진리가 아니요 또한 무진리가 아니나니라
백도 아니요 그 中도 아니요 간사함도 아니요 모두가 다 아니나니라 또한 앞의 부정함을 모두(싹) 지우듯하고 그이나니라 이 정신분열증자의 邪言과 같은 말씀으로 들릴 것이나 진리를 세우는 것이 이 사탄이나니라。空은 명경알같이 되어 찾을 길이 없고 다만 비춰진 그림 物事만 존재한다는 것이다。그 존재하는 것이 空의 행세를 한다는 것이니 그것이 또한 실제의 空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三」。(정리때 한번 훑어본 다음에 나오는 說은 완전히 邪誕에 깊이 들어가 허우적 거리는 느낌이 드는 相이다)…
아무리 궁구하여도 亦是 陰과 陽(면적과 부피) 뿐인 것이다。그 어떤 것이 그에 끼어들지 못하나니라. 空과 空의 개념이 같다는 건 萬有가 열둘이 짝을 잃어 있다는 뜻이다。六合時流(線)에 의해 형성된 八空中空 外空=合十空인데 空의 개념이 같다는 의미에서 注知시키고 解說하기 쉬운 無數入門 無爲有動(天宮)數 三十六을 各空에 配當하면 (물론 此數에 대하여선 다른 意味도 있을 것이다) 中과 外空만 合하면 七十二數이다 모양도 부피도 없는 中空이 모양을 感指할 수도 또는 감지할 수도 없는 外空과 合하여 八空의 數와 혼합하여 모양을 만들어서 느끼게도하고 또는 느끼지 못하는 것 등도 있게 하나니라。中外 七十二數에서 四十八이 튀어나와 모양을 만들므로 나머지二十四數가 그냥 제位致에 있다면 열둘이 짝을 잃게 되나니 즉 三十六을 짝지으면 十八인데二十四數 뿐이므로 여섯은 짝을 지울 수 있으되 열둘은 짝을 지울 수 없서 十二가 空亡되는 理由가 여기서부터 인재 비롯되나니라(※ 정리 때 생각 이것은 완전히 한쪽에 치우친 편벽된 妄想이고(즉 그렇게 여기니까 그렇게 보인다는 뜻의 논리가 成立된다는 것으로써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증명할 수 없어 자신없는 論說이니 사이비한 것으로써 정신감관 계통이 삿된 想念에 지배당해 속이는 뜻의 글인 것이다.또 이것은 헛주먹과 實相주먹의 논리를 쫓은 것임으로 定列하여 다 튀어나온다는 太乙形의 관점을 취한 것이 아니니 독자는 주의하기 바란다。要는 邪의 관점이란 뜻이다。혹 神崇上者들이나 의혹에 들진몰라도 크게 신빙성없는 말씀이라 할 것이다) 흐름의 六合(現相=이말은 정리때 넣은 것임)界는 六升六하여 三十六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七升八하여 五十六으로 面을 形成하여 있는 것이다 六升六은 無數人門개념으로써 그 數를 말할 것조차 없나니라。(※ 이것을 他說論에선 三十六門 두루뭉실 三十六計 또는 天宮이라 하기도 한다) 全體로 볼때 三十六이라서 空亡은 없고 回空象態일 뿐이다. 즉 저 사람이 우뚝 서 있다 醒者처럼 말이다。여기서 醒者는 원만함에 가까움을 칭한다(이것은 완전히 狂的인 관점이었으니 深醉한자가 도취한자가 더 원만함일런지 어떻게 알겠는가?)
全體는 空이나 亡이 없다(※ 정리때의 문=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空亡이 없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생각이 짚혔는지 지금와선 알 수 없도다) 個個의 具體的인 것은 空의 象態이지만 (이것은 文彩의 美學을 거론한 것 같은데 확실친 않다 그렇더라도 편벽된 관점이다.문채현상이 인다해서 分別되 보인다해서 원만空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럴수록 풍경의 운치를 더하여 극한 아름다움에 다달아 懷恨이 없다 할 것 아닌가? 회한이 없다는 건 원만하게 풀렸다는 뜻 아닌가?) 三十六이 아님으로 있어 空亡이니 (空에 흠결=이는 짝이 결여된 것이 있다는 뜻이겠다) 無數入門에 들지 못하니 아무러크소니에 가까운 전체로 볼 수 없다 (※ 정리때 생각=이것이 이래서 편벽된 관점이란 뜻이다) 以上의 논리가 空의 개념은 같다는 의미에서 나왔나니라 그러나 空의 개념은 같지 않을 수도 있어 같지 않나니라。何必 空이 上下左右前後에 의함 뿐이랴? 空은 이러함만을 뜻함만이 아니다。空은 어떠한 理致와 相에 매이고 얽히지
않는 것도 空일 수도 있어 空이다.그러므로 空은 같지 않다。관념은 空을 形成한다。理想도 空을 形成한다。또다른 것도 空을 형성한다°(백가쟁명화 현상을 가르킴을 말한 것일게다.) 관념과 理想 등등이 하나를 뜻함만이 아니요、그 數란 것을 뜻함만이 아니요、糧을 뜻함만이 아니요、사상과 이념과 주의와 물질만 추구하는 또는 정신을 분열하는 그런것만이 아니나니、이 모든 것이 空이다。理治를 거론하면 걸려드는 것이 空이다.또한 거론치 않더라도 그냥 그대로 空이다。理를 거론한다는건 實體陽 글른相이요 걸려드는건 그림자 陰 글른相이다。그 어떤 것이 이에 끼어들 수 없음인 것이다。空이 같지 않으니 흐름에 대한 空亡이 없어 열둘이란게 짝을 잃지 않나니라。空은 같지 않으니 서로가 서로를 견줄수 없어 트집잡고 헐뜯고 시샘치 않나니라。줏대를 세우는건 진리이지 같은 개념의 空은 아니나니라。줏대를 세워야 견주고 시비가 있지 줏대를 세우는 삿됨이 없는데 무엇의(삿된 相) 진리가 있으랴? 원래가 어디 있겠나만은 말을 일으키려니까 원래이지… 원래 헐뜯음의 理治 시샘의 이치 등 眞理(참다움다 옳게 다스렸다 하는相)가 없나니라。
「四」。낮과 밤이 있고 해와 달이 있고 별과 하늘이 있다。즉 부귀 빈천 흑백논리가 있다(타협점을 모색하는건 그 나중事이다) 이는 모두 흐름의 役事蓄積(歷史)에 의해 있다。즉、모든 삼라만유가 그러하다 흐름이 돌고 돈다. 또는 돌고 도는데에 흐름이 있다. 달도 변하고 해도 변한다。하물며 如他萬類야 말할 나위랴? 富한 것이 계속 富할 수만 없는 것이요 貴한 것이 계속 귀할수만 없는 것이요。이것이 그 어느 누가 주장한 흘러가는 퇴보한 리론 만이 아니요.
또한 미래지향적인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논리가 아니다。과거와 미래가 어디 있겠는가? 과거와 미래가 흐름연속의 윤회요 그 輪回는 空으로 化하여 나타난다。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떼어 버릴순 없는 것이다(※ 정리때 생각 과거와 미래가 현 위치라는 것을 例를 들어서 실감있게 말해보자.소리는 공기 파장을 뚫고 오는 속도가 있다。거리의 원근에 의해서 差等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건너보이는 마을집에 도끼로 나무를 쪼갠다。이쪽에서 볼적엔 도끼가 이미 나무를 쪼개었는데도 소리는 한참 있다가 난다。즉 물체 현상은 과거로 흘러가는 가운데 소리는 미래가 와서 들리는 것이다。이것은 現在의 活動하는 位致 空속에 있는 것이다。이것이 필자의 착각인지는 알 수 없다) 흐름은 흘러도 空으로 化한 이상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체상태가 現空이나니라(그러나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이니 저- 단단하게 보이는 여러 가지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천태만상의 차등이 있고 그 차등에 의해 여러 삼라 탈상이 되어지는 것이다。그래서 적멸 정지라 하지 않는 것이니 또한 적멸 정지도 무위유동이라 그 명분을 그렇게 달았을 따름인 것이니 하필 누구의 리론을 흉내만 낸다고 하지 말 것이니 사실은 사실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現在空이라 하더라도 不變이 없으니 現在는 現在대로 계속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무엇이던지 理論을 定立하면 있으나, 음양엔 끼어들지 못하나니라。하염없는 유동은 以上의 흐름이 아니요 음양이 아니요 탈파가 아니요(이 말씀은 탈파란 뜻과 명분을 모른다는 뜻일게다.
停止가 아니요 얽히고 메이고 감긴 것이 아니요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다。그러므로 아무렇게나 그저 그런 아- 무- 러크소니나니라。活動고삐가 느슨타 하지 말고 게으르다 하지 말라 멍한 무기력한 것이라고도 하지 말라。내라! (그 어느 것이라!) 하지 않으니 벗어나는 방법이라고도 하지 않고 굳이 아니라
고도 하지 않음이라°무엇을 얻고 잃음이 한낫 거품이라는 釋氏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실이 그러하니 邪瑞의 부풀린 거대한 누각 같은 것은 눈녹듯 날아가고 정신의 알음알이들은 도망가 숨고자 하나니 무엇이 떳떳한게 있으렸만은 떳떳치 못하여 두려움을 느낌으로서니라。
자신있음 과단한 결정을 하고 과단한 결정은 원숭이 나무에 떨어지듯 언젠가는 꺾임이요 꺾어지면 회의와 실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려 벗어나질 못한다。또한 과단한 결정은 정복하는 희열을 맛보나 정상의 공허한 메아리가 엄습해옴을 어찌 감당할까나。그 주름진 얼굴 허전한 마음에 엄습하는
입구변주부의자 애(哀)懼의 꿈는 뭔가? 내라는 삿된 진리의 주장에서 불러들였을 뿐이다.
精神은 邪의 끝(頭端)이요 육신은 그를 좋아하는 곳으로 인도하고 기르고 견제하여 돋우는 집이나니라 집과 집은 界의 秩序를 維持하여 定然히 있나니라。정신이 이탈하여 딴짓하고자 한들 부적과 같은 집에 갇혔으니 강도질을 하랴? 사기를 치냐? 폭력을 쓰랴? 흐름의 현상이 空化하여 스스로 갇힘(자가당착처럼)이 이미 무량으로 돌았음이라°이것이 누가 원해서 그러함이 아니요 제 스스로가 그러함이니 점 저쪽에 무엇으로 지칭할 수 없는 것이 제공하여 도울 수밖에 더 있는가?(實은 저쪽에 있는 제몸이 덜 빠져나온 것이 빠져나오는 상태라 하였다)
萬有가 空化의 肉身을 갖고 흐름의 안식처 願處를 제공하였나니라。흐름이 무엇을 원하는가? 오욕칠정과 모든 行爲事 등등이리라《賦與된 時間、生命이 다할때까지 저쪽에서 내 몸이 다 빠져나오지 않은 것이다。그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또 서서히 빠져나오는 모습이 저쪽에서 그 事를 주관해주는、그누가 있어서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實相은 말이 빠져나오는 것이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과이거나, 넓디
넓은 天地에 힘찬 웅지를 갖고 비상하려는 그런 활동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따라서 답답한구멍(穴)을 연상하지만 답답한 구멍이 아니라 발돋움하여 곧게 서도 몇억만길도 더 되는 무량 높이와 억폭도 더 되는 넓이라서 부닷칠 염려없는 現位致 하늘땅새인 것이다》무엇으로 지칭할 수 없는 것이 그 무엇인가? 그것의 권능력을 논코자 아니하나 다만 그것은 옛님들 거룩한 님들이 계시는 하늘도 아니요 造世主라 하는 것도 아니요、그 아무것이 醉醒者와의 관계는 잘 모르겠으나, 空의 개념이 같다면 일흔둘 삼백육십 삼십육 등등 數量이 메겨진 것이라면 그것이요.空의 개념이 같지 않다면 무수 무질량 무知性 등 無의 모든 것 등등이며 또한 이를 굳이 고집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이다.
내라는 者 권능을 말하고 고통을 말하고 세멸토록 고집하다가 흩어졌다 또다시 모였다 하나니。 설령 차원이 다르다한들 무슨 소용있으리 내라 하는자, 용기있고 힘있어 당당한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질찌기 싫어하니 그런 호승심 강한 모습을 누구에게 얻었는가? 한낱 슬기로운 체 하는 사탄 괴뢰의 유회탈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흩어져 억겁으로 흐르다가 空으로 거듭나와 回를 거듭할 뿐이다.
「五」。흐름은 어떤 物質이나 그 物質的인 面의 現相空化를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만 아니다。흐름은行事로 본다(물론 이것도 現相空化이다) 흐름의 머리가 과거였다면 몸은 현재 꼬리는 미래란 行事이다
行事의 功積果과 空의 現象으로써 흐름을 볼수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리론 設立에 의해서 *흐름을 空의 現相으로 볼수 있지 그냥 평소때 허공을 보는 것처럼 해갖곤 흐름을 본다고는 할 수 없다。따라서 他理나 또다른 如他에 의해서 空이라 할땐 그저 빈것(空)으로 升斗속에 곡물이 없는 것으로 여길 뿐인 것이,
다《(무슨 高上한 뜻을 가졌다고 大衆과의 관점이 괴리되어 共感帶를 形成치못하거나 호응을 얻지 못할시는 狂泉國 임금처럼 오히려 미친사람 취급을 받거나 따돌림을 받게 된다。즉 걷돌게 된다。제 혼자만 특별난 것처럼 대중과의 타협할중 모르는 그런 성격 소유자는 여럿과 휩쓸리길 꺼려하므로《그는 왜인가? 의구심을 두어 뭔가 캐보려고 파고들어 계속 질문공세를 펼칠까 두렵기 때문이다(또 그런 魔의 짓굿은 장난같은 질문공세를 펴는게 사실이다。이는 겉만 보곤「꼴 같잖은게 하곤 능멸히 여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리있게 답한다 하여]도 그 답이 시원치 못하다면 묻는이들 더욱 답답함으로 몰고 갈 뿐이요. 잘 나지도 못하였으면서도 잘난체 하는 꼴을 심어주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고 또는 실력이 모자라서 밑바닥을 들어냄을 싫어함에서 그런 것이다》대중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 할 것이다.내가 남이 나를 대하길 어렵게 하니 사람들이 멀어질 수밖에…。까다롭게 하는 사람과 절친하고자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뭐ㅡ 추앙받을만한 예의를 차리거나 격식을 찾을만한) 그러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라 한다면 제혼자만이의 道를 누리는 방치해둔 가시넝쿨속에 에워쌓인 망부석처럼 험상의 탈을 쓴(보는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선 그렇치 않을 수도 있다) 주위가 험상인 獨王이라 할 것이다。이것이 여럿에게 시달리기 고달파서 갈구하는 자들을 아이들이나 妾실처럼 취급하여 멀리함과 같음이니 원망의 소리가 들린다 하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필자 자신을 말한 것 같다.
「六」。흐름은 곧 神이므로 神의 一面性을 본다는 뜻도 된다。혹이 참으로 시건방지고 주제넘다 할련지 모르나 흐름은 어데 다른데다 표시하지 않나니° 다른 것도 없거니와 空化에다 표시할 뿐이다。혹이 나타
나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것(일례로 영혼에 피상적인 천국 지옥 극락에) 등등이라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흐름속일 뿐인 것이다(※ 환각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卞形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마치 꽃이 사람처럼 보이듯 그 어떤 환각체가 사실로 있다면 현실계에서 볼땐 그것이 흐름현상으로 변화되어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흐름을 미래 현재 과거로 가름하여 거론했다 해서 수직 수평이나 등 곧게 뻗어만 가는 일직선상을 뜻하는 것만 아니다。물론 그러함도 있겠지만 흐름은 回(굴레테=돌림 놀음)의 혼합 집합 짜임과 축적 확산 분산 응집 등 兩極 多極 등의 다양한 作用이다。흐름은 돌고돌아 大空相 小空相 등등 여러 공상을 形成하여 現象하여 空으로 現相하나니 일예로 地球가 自轉하면 하루라는 行事가 있고 空轉하면 年이라는 行事가 있고 달이 지구를 돌면 한달이란 行事가 있는 것처럼 그 理由는 같다.
쉽게 말해서 어제의 이 시각이 오늘의 이 시각이요 오늘의 이 시각이 내일의 이 시각인 것이다。※ 또한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각은 그렇더라도 空의 축적은 틀린다) 空의 卞不卞의 현상은 흐름의 生命力에 의한 役事의 功果이지 과거와 미래가 어디 따로 있어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것만은 아니다(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는 以上의 논리를 사시적 비판관념을 갖거나 또다른 길(생각의 골수름이 다른데로 길을 트거나 다른 웅덩이에 고인다)을 택함으로부터 비롯된다 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같이 있어 흘러 움직이는 生命力일뿐 달리 있는건 아니다。但只 이름이 과거 미래 현재요 생각관념을 그렇게 굴리고 있을 뿐이다.그러므로 過現來는 回流요 萬有의 生命인 것이다。어떤이는 生命을 造生命이란게 있어 따로 있어 造生命했다할지 모르나 곧 生命이 造生命이요 그에 의한 空化現※이 造物인 것이니、 한마디로 말해서 제절로 이러하단 뜻이다。흐름은 理를 說罷 함에서 비롯되나니。앞에서 說한 時空 논리이다。過現來가 따로 없이 回이니 太初가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이 누구에게 正面으로 挑戰意을 내는 사탄의 발악에 지배당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게 할뿐이다) 종말이 있을수 없으며 따라서 태초의 造主의 造物이란게 있을 수 없으며 종말의 심판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回는 生命인데 무엇이 따로 있겠는가?
回流일뿐이다。지금 아까는 森羅 萬有의 回生覺에서 나와 그렇게 여길 뿐이요 여기저기는 萬有의 回生覺에서 나와 그렇게 느낄 뿐이다。覺은 精神을 形成시키기도 하지만 그 정신에서 오기도 하니 神은 流라하였음으로 정신각은 곧 回流인 것이다。정신은 내라하여 삿된 진리를 주장 내세우니 곧 回流는 삿된 것이니 삿된 번뇌 萬有 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이에서 비롯되어 삿된 정신들이 탈파를 부르짓음인 것이다(※하필 삿될까? 속과 껍질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空을 製供받아 스스로 家하여 갇혔으니 천태만상의 풀어벗긴(벗길)탈 空相에 허우적거리며 무량수로 流回함인 것이다。그 여러 森羅象과 象들이 그 滿王과 邪端들이 떼를 지어 醒者에게 몰아간들 어찌할까나? 그 아무것이의 醒者數가 무량이라 궁구 定立 準備한 界가 억만 무량계보다 많은 그 아무개 醒者들이라 하더라도 어찌할까나? 그 모순의 검극을 들고 먹이를 헤치듯 찢고(破列) 찢기움 등과 그들을 조종하는 괴수들과 사탄 그 아무것이인데 그 아무것이에 대한 아무것이 醒者라 하더라도 어찌할까나? 해볼도리 없으면 궁국의 도피처와 같은 아무러크소니 나니라.
흐름은 절대로 탈파시켜주지 못하나니。아기가 배 고프면 금새 배 고품을 면케 하는 먹여주는 것 쯤이야 하겠지만…。왜냐하면 흐름은 空相을 만들므로 깨트려 벗긴다는 것이 또다른 空(罟)(고: 짜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탈파가 아니라 제 힘 있는 능력자랑 行事이다。願이 많아 얽히면 걸리니 걸리는 바가 있는데 무슨 깨트림이 있어 사무치도록 깨우침을 이룬다 할 것인가? 緣을 끝는다는게 願인데 무슨 탈파이랴? 목표를 세우지 않고 집착치 않는 것이 탈파의 上等이라 할지 모르리라.
「七」ㆍ
열둘이 짝을 잃었다 해서 그 표현한다는 게 하필 어느 한 것이 못쓰게 되거나 모자름만 뜻하는건 아니다。온전하다 하는 萬有 에다데고 표시하나니라。空
고는 變形한다(물론 不變도 있다 할 것이다) 앞의 回理를 파악한다면 空의 變形으로 깨달을 것이다。回는 짓굳어서 다듬기도 잘하고 망가트리기도 잘하고 어떨땐 한참이나 보고 즐긴다。이런 것들 등등이 回의 行事속에 짝잃은 표현을 한 것이다.
열둘이 짝을 잃은게 回가 아니라 回가 空相으로 표시를 한다。아주 잘한다。그 짝잃음이 空으로 표시될 수 없으나 回는 空으로 잘도 표시한다。나머지二十四는 원래 回이었던가?…(※ 정리때 생각 표시한다는 것이다로 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왜냐하면 관점이 많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以上의 內用을 훑어 본다면 정신에서 사탄이 자발적으로 生成된다는 것을 뜻한다。왜냐? 정신은 늘상 사탄의 싹을 틔울 수 잇는 여건을 조성시켜 논 장소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정신은 열린 문과 같음이니、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표현이다。문이 열려 있으니 뭣이던지 들락날락 할 것 아닌가? 그리하여 먹을거리가 있다 한다면 자자손손 터하여 살고자 아니할 것인가? 이후의 논함도 계속 같은 맥락에서 관찰해볼 것이다.
「八」。外空은 흐름인가? 없는 것인가? 空은 九뿐이라서 九天인가? 흐름을 파괴하면 空은 停止다。 그러나 그 空을 形成키 위해 作用했던 영혼이 깃든 생명들은 그 모르는 또다른 흐름속에 든다 할 것이다 이렇듯 그 空은 흩어져 他空相을 이룸이니 즉 如他 흐름에 의한 他空을 形成시킨다。이러지 않기 위해 미이라나 石像을 만드는가? 만고의 바위로 되는가? 그 성질 不變의 金木水火土로 되어가는가? 하늘땅 대기권을 벗어난 무중력 상태 진공상태와 해와 별 따위가 되는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하리로다.
回(굴레돌음)에 들지 않겠다는 것이 回의 作用에 의한 停止空이다.왜냐하면 모양도 부피도 없는 想想치 못할 곳에서 모두 나와서 空을 形成하였기 때문이다。열둘을 空成에 덜어주고 흐르는 정신(마음) 같은 것은 時線이 되어 生命되어 流回한다。덜어주는 논리는 停止空이라 하나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즉 정체현상이지 완전한 정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원래가 六對一의 比率이나 여기서 논하는 것은 六對一과 三分之一의 比律을 말함인 것이니 六은 有動이고 一三分之一은 軸과 外空의 合한 것중의 三分之一을 제외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 動二百八十八과 亭 四十八을 뜻한다.亭 四十八중에서도 열둘은 다른 亭의 의미의 성격을 갖게 된다 할 것이다.
즉 有動二百八十八에 亭四十八이 혼합하여 空을 形成하였음으로 空은 徐急 속도를 막론하고 움직인다. 性分이 하늘과 땅으로 갈라진다 하더라도 혼합된 것이 에워싸던가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던가 하더라도 또 아주 깨끗하게 찌꺼기 걸르듯 했다고 뭐갖고 장담하겠는가? 그러므로 반대를 뚫고 초월하여 움직이는 것이다。이、소리가 뭔가? 정지가 아니라 정체현상을 말하는 것이니 즉 움직이는 것은 서고자 해서 서다 못해 그 선 것을 뚫고 움직이고 선 것은, 움직이고자 그 움직임을 뚫고 서고자 움직이는 것이다。어떠한 物事이던지 가만히 있질 않는다는 뜻이니 단지 그 비율 여하에 따라 노둔하고 민첩함을 달리 할뿐인 것이다.
필자가 앞서 말한 숫자들은 전체의 空、구성을 들어 말한 것이니 그 구체적인 것에 들어가선 천태만상이라 비율이 일정치 못하기 때문에 건곤을 부모로 하여 六十四란 그릇(器)이 있게 되는 것이다.空化한現相을 볼 때 動行(亭) 四十八은 축적시키는 無動體이다。各八空의 三十六은 動하는 것이나 표면上 모양은 정체이다。흐르는 정신이 시줄이 되었다면 삼백육십인가? 삼백육십육인가? 삼백육십도 무수입문개념이요 삼백육십육도 무수입문 개념이다。여기서 회류와 空相을 볼진데 數의 모자름이 나온다。그렇기 때문에 各論의 度가 다 있어 보충 보완 修理하고자 함인 것이다.
모든 것은 움직이어서야만이 원만함을 이루게 된다。움직이지 않으면 덕을 볼 것 같으나 무너짐의 지름길이나, 즉 움직이질 않으면 되질 않는다는 뜻이다。움직이는 가운데 役事의 축적이 功果로 나타나 원만해지는 것이다.
(지금 계속 설파하고 있는 논리는 空의 개념은 같다 에다 주제를 두고 논하는 것이니 착오없기를 바란다。또 헛 주먹과 實相 주먹의 관점으로 논하는 것이니 要注意를 바란다) 回에서 벗어나 停止空中 亭空이脫破인가? 그렇치 않다。일단 空을 형성한 것은 回에 의함이므로 그 空에 當한 回生命이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回를 벗어난다 할수 없어 탈파가 아니다.
「九」。萬有는 一家이다。形에 억메일 필요가 없으니 상의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에 있다。그러므로 개나 소의 外形을 말함이 아니요 그 空象을 논함이니 人相을 거론할제 비유하면「그 사람、참 돼지같이 생겼다」하기도 하고「양같이 순하게 생겼다」또는 백합꽃 같기도 하고 한떨기 장미꽃 같다고도 하여 形容을 다른 것에서 따서 말한다.
이러함을 미뤄볼제 궁극은 空一象이니 그 外貌나 영혼이 깃든 정신을 구별할 것 없이(그 표현하는 방법과 주입시켜 느끼게 하고 깨닫게 하는 생각시키는 方式이 다를 뿐 空一象인 것이다。內外面積이 모두 空
一象이나 단지 각 개성을 살려 形을 지었을 따름이다。性은 行으로 나타나고 行은 곧 回流인 것이다。회류는 생명이라 했으니 生命은 같은 것을 그리는 힘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性 生命과 不可分의 관계로그 이름과 이론의 진행과정에서 그리는 관념 구사만 다를 뿐이다。길이 하나가 아닌 것처럼 生命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즉、각 개성의 생명이 여럿이어서 그 形을 개성따라 짓는다。돼지 몸에서 소가 나올리 없고 사람 몸에서 파리가 나올리가 없다。그렇더라도 같다 함은 그 갖춤을 의미한다.
여기서 象이란 뜻은 있을 것(有) 다 있고 갖출건 다 갖추고 없을 것 모두 없다는 뜻이다。감지할 수 있는 것이나 감지할 수 없는 것이나 를 不問하고 念圖하는 相의 관점을 그렇게 두면 그렇다는 뜻이다。그렇기 때문에 空이라 하는 것이다。이상은 공의 개념은 같다는 의미의 이론에 가까운 말이라 할 것이다.
뭐든지 空相으로 볼땐 空이다。정신도 空이고 생명 회류 또한 空이다。어떠한 形을 짓는 흐름의 行事라면(一例로 사람形이나 香 息 味 無感 등등) 그 또한 空이란 뜻이다。또한 形을 짓지 않고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또, 그 다른 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역시 空이다。「수고한 자들아 내게 와 편히 쉬어라!「하는 뜻과 논리적인 말씀과 어떠한 行爲를 짓는다면 그런 것도 역시 空속의 一科이다。아름답다 밉다 하는 형용하는 생각과 뜻과 말씀도 역시 空이다。풀벌레나 나비가 날아간다。역시 空인 것이다.모든 것은 空이니空相으로 볼땐 空인 것이다.
시공을 나누어 거론하였다 해서 착오있을까 해서 염려하는 생각에 이렇게 서술하는 바다。또한 그 時相회류상으로 볼때도 마찬가지다。개는 개고 소는 소지、개가 소고 소가 개란 뜻은 아니다。착오 없길 바란다。개가 소、소가 개라면 그는 理治가 壞(乘)圮(異)됨이니 理論不成立이다。그리고 그러한 논리전개가 없을 것이므로 설파하거나 거론할 수가 없는 것이다。앞의 논리를 곡해하면 개를 갖다 소라 할 수도 있을
지 모르나 相의 관점을 어디에다 두느냐일 뿐이다。지난번 몽매에 누가(어떤 흐름일는지…) 말씀하시길네가 이제
고(罟)(또는 라 한 것인지…) 집을 건드렸으니 한없는 번뇌가 풀려 나오리라 하신다。이제는 생시에 이런 생각을 짚히게 하여 이 말씀을 잊을까 해서 글로 옮겼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物空 그대로를 직시하더라도 그것이 네 모지건 둥글던 어떤 성질이나 형상이던간 空相으로 볼 때 겉의 생김이나 진행事 現相은 흐르는 回이다(매끈한 물체를 연상하면 빨리 다가온다 할 것이다。그렇다고 울퉁불퉁한 것이 회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空에다 열둘의 생명을 불어넣었으니 그것이어떠한 空이던 그 뜻대로(영역 활동을 벌임) 作用한다。
쉽게 말해서 식물은 그 根基에 뿌리하여 섰고 짐승은 저대로 활동하고 등걸토막이나 바위 등은 가만히있는 것 같고 바람은 풍화작용을 일으키는 등 그 外에 것도 그가 뜻하는 바대로 向하는 것이다。하늘은 겉을 몰라 모른다 할 것이나 푸르른 창공을 쳐다보는 것이 하늘이라면 그것이 곧、空相이니 回流하고 있는 것이다。회류의 두미가 없고 몸통을 알수 없으니 그저 빈손바닥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을 뿐인 것이다.네모진 회류 세모진 회류 등등 어떠한 흐름相이던간 마찬가지다。그 겉모양새 흐름은 계속 끝일줄 모르고끝도 없이 회류하고 있는 것이다 (※ 정리때 생각=삼라는 覺相이 정신감이나(性感) 이목구비의 성질이 다 內在되어 있고(또는 一感一色으로 통합되어 있다던가 八감九감 등 무량 무감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다) 人相 또한 그러하다。다만 경계를 그어 차원을 달리하는 탈을 뒤집어 쓰고 있기 때문에 各各象으로 보일 뿐인 것이다。또는 이 뒤에 나오지만 다른 감을 가지고도 自他를 비춰보거나 관찰할 수 있는것이다。그 하는 짓거리 본능적 행위라 하더라도 그 性感覺相으로부터이니 그를 모른다 하면 存在가 없는것이다
즉 어떠한 미물이라 할지라도 感에 의해 삶을 영위하게 되므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大宇宙의 有動生命의 축소판이 될 수도 있는 움직이는 菌些 物體를、저 이、쪽으로 뚫고 去來出入하듯 해서 뒤집히듯 에워싼 것이 온 전체의 宇宙의 것이리라。)
「十」。空의 槪念은 같지 않다.
空의 개념은 같지 않아서 萬有의 空狀(펼쳐지고 전개되는 상황相)과 萬有의 理論과 思想 理念 主義 등등을 說罷하여 係導하고 敎化하고 목표를 세워 따르고 있다(이런 것을 통털어 백가쟁명의 道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空이라 말하지 않고 그들의 이상과 관념속의 주장을 내세워 그라 한다。理想과 現實의 갈등 괴리와 부합도 모두다 이에 있다。내가 내 속의 내면을 살펴보니 생명이 얼룩져 살아 있다는 저를 ㄷ내세우는 듯한 표현을 하고 겉을 보니 세파에 시달린 空化相이 얼룩졌도다。얼룩이 짐은 걸림이 많았음이니 옷은 얼룩지면 빨면 되지만 걸림이 많은 번뇌스런 나를 무엇으로 씻어낼 것인가? 금방나서 그 아무것이 醒者가 있는 곳으로 갔으면… 하지만, 흡사 시골 촌뜨기가 서울에 올라온 것처럼 空의 이동에 불과하리라
緣이 다하면 헤어지고 緣이 닿으면 만남이라 하던가? 緣은 無形의 질긴 끈과 같아 金剛이라도 끊지 못하니 씻어내지 못하리라°걸림이 많아 무량이라서 그를 모르는 것 같으니 이 도리혀 깨끗함과 한통속이라 깨끗한데 무엇을 세탁할까나? 아무래도이다.
열말을 벌려놔도 음과 양만함이 없음이니 음양 上帝를 받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나님 뿐이니 하나님[나발똥님 유태 조상 야소 귀신 지칭하는 말]을 믿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佛뿐이니 그에게 해탈을 구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마귀 사탄 뿐이니 共忿을 사는 싫어하는 것은 저주하고 敎化하고자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뭣이든 지극히 당연하다。「뭐이가 그래!「하고 반론을 폄도 지극히 당연하다。아무래도이다.
※ 정리때 생각=以上의 말들이 완전히 사탄 손자의 억만대 손자의 주장과 같은 소리로 들리도다.
그렇치 않을까 하는 想想에 의한 空의 生成 科程 見解。이것은 확증적인 것이 아니다。실증적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그렇치 않을까 하는 생각의 짚힘과 다른 글에서 발췌한 것을 조합해서 敍述해 보는 것이다…。
生命과 生命인 回流들의 速度差로 因하여 貌樣도 없는 것에서 亭滯를 이끌어내어(또는 制供받아서) 누적시켜 엇가로 짜고 짜서 空의 현상을 일으킨다.그리하여 萬有空과 그 相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空成立을 여러 척도로 재어 보는 것 중의 일부이다) 빠르게 흐르고 느리게 흐르는 그 間에서 부벼대는 듯한 그 어떤 것(혹 마찰)이 作用하여 말리는 듯한 가운데 軸이 生成되어 그 軸이 亭滯상태가 되고 그 亭滯를 끌어내는 것이 곧 空化인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빈 공간이나 찬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란 뜻을 배제하거나 초월한 흐름만을 갖고 논하는 것이다。저ㅡ 뒤엣말을 정리때 자주 인용해서 뭣하지만 時空이 一色이라 즉 공간이 풀리면 시간이고 시간이 응집되면 공간化 된다는 논리가 나온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이란 뜻을 배제한다 하여서 어디 헛된 차원이 따로 있어 흐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다
만 공간의 허실을 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같은 方向으로 흐르더라도 어떤 原因(장애로 인한 걸림이나 무애평이 하여 가속도가 붙는 원인)에 의해 속도差가 나면 부벼되는 듯한 말림작용을 일으켜서 軸의 生成亭滯를 이끌어내게 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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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例 나무를 갈른 송판 무늬목을 볼 것 같으면 나이테에 의한 흐름이 같은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흐르는 중간에 곁가지나 옹이가 있었다면 그 흐름은 일정치 않아 돌게 되므로 흐름의 굴곡 차등으로 인하여 무늬가 얼룩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흐름의 차등은 空化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이끌어내는 것을 저쪽에 무언가 있어 제공받는다 할 수도 있어 제공받는다 한다) 그러면 속도는 왜 나는가? 그는 곧 비밀에 가리운 것처럼 흐름 그 스스로들의 願에 의해서니 즉 그것이 뜻이라면 뜻에 의해서다。空相을 갖고 투시하여 볼진데(內面을 들여다 봄、이것은 어디까지나「본다「는 생각이다) 생명과 생명이 사귀어 다툼이다. 즉, 다투기도 하고 같이 즐기기도 하고 천태만상의 形容이다。이러하기 위하여 원을 풀어벗기 위하여 속도 差가 生成됐다 할 것이다。제 몸 空相化에서 원인을 찾아야지 어디 다른게 있어 그 다른데서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흡사 여인의 신경질적인 발작증세라던가 狂的인 喜悲갈등의 연속과 같다 할 것이다. 흐름은 속도차로 인하여 波長이 生成되고 波長은 모양없는 정체를 두들기거나 그 정체에 依持附合하여 大轟 微細 등의 有 無 聲의 音을 生成시켜 그에 在載한다。이 音은 萬有 空化의 元素의 근본이라함인 것이 다。이 音의 元素는 萬有空을 現象化한다。音波는 강약 大小 그외 여러 모양의 파장을 이루어 그로 인하여 힘을 갖게 되어 발산케 되는데 이것이 곧 공을 일으키는 원소역할을 하는 것이니 어두움을 발산한다면 상대적으로 밝음이 들 것이요. 밝음을 발산한다면 어두움을 찾고 또는 그 두가지를 똑같이 발산한다거나 둘만 아니라 무량의 원소들을 갖고 있어 같이 또는 달리 발산시킨다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하필 光蔭을 거론했다 해서 광음만이 아니라 如他 空을 形成시킬 수 있는 원소를 생성하는 것이다。다만 그런 것들이 확실히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 그 대표格으로 광음의 명분을 빌렸을 뿐인 것이다。그러므로 다음 단계와 다음 단계로 들게 하는 원인은 어느 것의 원소만이라고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次次로 단계를 밟아 萬有空 粒子를 生成하여 空을 일으키는 것이다。그것이 色、맛、향 등의 원소와 그外의 여타 원소라 할지 모르나 이미 광음서부터 空化되는 뜻의 명분을 빌렸음 이라(또 그 以前 논리 전개한 여러 가르키는 뜻들이 모두 空相이라。즉、音도 空이요 波도 空이요 회류 또한 空이요 모양없는 것 또한 空을 이끌어내는 원인 제공 근본역할을 하였으니 그 역시 空이다。이름짓는 것 뜻하는 것은 모두가 空인 것이며 空相의 명분과 뜻과 實體인 것이다) 空이지 근원의 원소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물론 이루어진 어느 일부 또는 전체의 空의 현상들이 또다른 他空을 이루는 원소역할도 한다 할 것이다(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전체문장의 흐름과 크게 관계가 없으나 중간에 서술되어 있음으로 그냥 그대로 적어본다 막간에 머리를 식히기 위한 말과 같다 할 것이다)
[失期하는 자는 생명을 잠재우는 것이다。生命의 억지 空亡(짝없음)을 만듦이다。어떤 이는 좋아할지 모르나 世人은 싫어한다。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는 생명의 힘을 축적 그 行事를 힘써 하고자 하는 자다。어떤 이는 싫어할지 몰라도 世人은 좋아한다。과욕은 생명을 피곤케 하는 자다。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힘을 다시 충전시키듯 얻게 되어 다음 이어지는 생명의 空成 功果가 있게 함인 것이다。운동과 휴식의 간격조절은 몸를 풀어벗기는 중요한 守則이라 할 것이다]
(十一」。物理的인 현상도 화학的 反應도 역시 空이다。어떠한 物體의 物理를 갖고 空을 설명하는건(空된 意味를 해석하는건) 좀 뭣(덜된 생각) 하지만 그 物體의 物理 또한 空에서 비롯된 物理로써 空이다.
이를테면 막대의 중심을 잡고 회전시킨다면 중심을 분기점으로 하여 양쪽으로 나눠 봤을 때 그 반대는반대 方向으로 움직인다。그렇게해서 돌게돼 있는 것이다。거리와 속도 및 움직인 넓이 폭은 제쳐두고라도(제쳐두는 理由는 各空의 形과 생김이 같지 않음으로서니라) 그 意味는 加減하여 같다로 나온다. 그러므로 움직였더라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되어 亭 즉 無動인 것이다(하물며 회전시켜 움직이지 않음에야 말할나위랴?) (※ 만약상 물체를 잡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다면 그것은 회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체의 이동이지 自體的 無、有、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물체의 자체적 변화는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복합적인 要素 혼합적인 有動에 있는 것이다) 이를 미룰진데 無現有動으로 관점을 둘수도 있는 겉 또한 無現有現의 相形이던간 無動이라 모양없는 點心과 合하여 일흔둘이 無動이다。
要는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서 無動과 有動을 판별짓는다 할 것이다. 하필 일흔둘만 아니라 八空處를 모두 포함한 三百六十數가 無動의 관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空의 개념은 같다 에서다)그러면 回流는 따로 있는가? 이것이 邪論이다 따로없다。空의 形成이 六合으로 부터이니(六合이란? 그렇다는 理治를 의미한다) 그 말과 뜻이 六이며 六合이지 실제가 있다면 실제로는 六이 아니고 모르는 것이다。자신없어 하는 논리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五엔 넘치고 六엔 미치지 못한다 하는것을 가르킴인 것이다。이 또한 이 數에 얽메일 필요는 없다。넘고 미치지 못한다는 뜻만을 취할 뿐이다.실제로는 六合의 끝을 볼수 없음으로 말이 六合이지 六의 數가 아닌 無形有形의 空限相이란 뜻이다. 무량
의 벌레가 얽히고 설켜 기어가는 듯한 흐름이니 어떻게 표현을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지 알수 없음으로 얽힌 엮인 공한상이라 하는 것이다(六의 數가 확연하게 확실 확증적으로 들어나면 그것은 무수입문 개념이다) 이 六合이란 것이 回流란 時線이니 수차 거론했지만 일직선상으로 흘러감만 아니라 뒤엉켜 휘어감겨 회류하는 것이다.그러는 作用속에 空이 生成 相化하여 現하는 것이다。이것은 作用卞化를 말한다。
억만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억만년의 길고 긴 시간은 느낌의로 부터이니 잠깐의 흐름으로 본다면 어찌 변하지 않을 것이 있을 것인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도 변하고 있는 중이다. 過不及은 不完全한 것으로 병폐가 있다는 뜻이다。五의 수도 完全하고 六의 數도 完全하다。그 사이를 잇는 架橋역할을 하는 하나의 數가 不安全하다。얼마만큼 不完全한가? (여기서 모든 나타난 數는 무수개념에 들 수 있으나 얼마인지 모르는 수는 무수개념에 들지 못한다는 논리가 成立된다. 즉 완전한 확실한 것은 완만한 主長을 취하므로 하등에 탈잡을게 없다는 뜻이다.이반면 확실치 못한 것은 불완전한 것임으로 흠결과 같은 병폐를 치유치 못한 형태라 여한의 탈이 아직 있어 무수개념에 들지 못한다는 뜻이다)加減에 差異는 있을지라도 하나의 논리를 빌린다면 그 闖(틈)이라 하는 것을 네등분 한다면 약세등분정도 모자른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대략이라 하였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사분의 일 하고 삼 정도만 완전한 수의 미침에 가깝고 사분의 이 하고 나머지 일곱정도는 모르는 것에 속한다는 것이다。이것 또한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未知의 생각을 토해낸 것일 뿐이다。색깔을 띄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흐릿함과 색색의 분별인 농도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그가「나이다「하고 각 사상과 이념의 주장등이 있다는 것이다) 앞의 수에 너무 의혹해 메일 필요는 없다。다만 過不及 不完全 未知다 하는 뜻을 취하였을 따름이다。또한 比較 比律 比例의 뜻을 취하였을 따름이다。數는 있으데 확실치 않아 모르면 무수개념에 둘지 못한다.
앞의 數의 설명에 있어서 그 사이를 잇는 하나의 수를 모르면 그 以前의 五의 數는 있어도(무수개념에 들수 있다 하더라도) 限없는 부질없는 수가 되는 것이다。수를 푸는 관건의 열쇠는 가교역할 數에 있다。 모든 空相들은 無數에 들기까지 그렇게도 많은 부족한 面이 있는 것이다。부족한 면을 다 채워주는 것이 있어 거의 다해주다 싶이해야 무수개념에 든다 생각해보라! 사분의 일점 삼정도인데 사분의 이점 칠이면 거의다 해주다 싶이 하는게 아니고 뭔가?
이 모든 空相은 거의가 허상이요 빈 쭉정이에 불과하고 썩고 부패한 삿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그나마도 일말의 희망이 있는건 사분의 일점 삼정도래도 붙어있으니까 나머지 모자름을 보충해서 무수에 들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무엇이 저마다 주장을 내세우는 각 理想과 思想 및 추종하는 主義가 보충 채워줌인 것이다。[圖形]
(몽매에 나는 집을 지으면 이렇게 낮은 곳에 짓지 않고 터를 돋구어 짓는다 한다。길위의 푸르른 수박잎 넝쿨 가득한 넓고 경사진 밭 한곳에 어느 아늑한 분위기가 드는 밭에 어울리지도 않는 작은 집 '초라한 오막초가, 울타리 나무는 삭은 것들로 에워싸여 있네.그런데 다시 한번 보니 변화에 밭 끝에 달린 덩그런 큰 수박처럼 보인다。길밑의 낮은 터를 가르키면서 새로 집을 지을 터라 하면서 집 지을 사람이 와서 앞서와 같은 얘기를 몇사람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한마디로 말해서 저질 作文 좀 잘 써보라는 뜻이겠다。그 以前 몸매는 번잡스러운 것이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구십칠년 七月二十三日朝七時가 조금 넘었다。아무튼 각설하고 본론 정리로 들어간다)
理論은 時的인 回流 神같은 것이거나 그 여러 방면 大覺醒을 뜻한다. 이런 것을
체계화시켜 정립한 것이 이론인 것으로써 진리인 것처럼 삿되게 주장을 내세우게 되는 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無數의 궁극적 목표는 뭔가? 그것은 각 空의 腹案이니(속에 들은 원하는 안껀) 원이라면 원 뜻이라면 뜻 해탈이라면 해탈 맛 소리 향이라면 그것。다 필요없다 하면 그것。이러한 것을 가르키는게 아니라 하면 그것 등등 여러 가지 일수 있을 것이다.그럼、모자르는 者(병폐스런 것)와 보완 하는 자는 누구이며 왜? 보완 또는 치유 해주는가? 또한 병폐 덜됨의 位致는 뭔가? 그 모자르다 하는 것은 各空의 홈결된 주장이며 즉 사단이면 사단 진리이면 진리 그밖에 것 등등이고 왜 보완해 주는 것은 목적이니 목적이 있으면
*고이니 고를 풀어 깨치기 위해서다.즉 고 脫破이다。또한 모자르다 덜되다 하는 위치는 우상 또는 崇上하는 相、實相도 될 수 있으며 아주 하찮게 여기는 것도 될 수 있으며 그 외의 여러 차원을 달리 하는 것들도 될 수 있다。또한 모자르는 者의 位致엔 왜 서는가? 답은 간명하다。
고(罟)를 풀기 위해 다。치켜세워 서기도 하고 서고 싶어 서기도 한다.
모자르는 者는 허실상을 막론하고 군림하는 또 다스리는 또 구원하는 王 理想과 관념 또는 현실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를 뜻하는 空類의 王、實相을 뜻함인 것이다. 즉(삿된) 진리 相이란 뜻이다。또는 王이 아닐 수도 있다。그 명분을 빌렸을 뿐이다.그것은 먹이도 될 수 있고 노리개 구슬도 될 수 있다.즉 이런 것에다 자기 고(罟)를 기대어(의지) 풀고 있는 자인 것이다.
「十三」。주사위와 같은 一面에 八無動이 배당되는 것은 面을 형성할렴 周園 八空處가 있다는 뜻이요八空 각 空處엔 基存의 無數개념 三十六이 있음이요 八無動은 중심축과 外空에서 이끌어낸 四十八 無動을 六으로 나눈 것이요 또한 四十八 무동을 八로 나누면 六이 되어 八空 各處의 기존의 三十六들과 合하면四十二요(四十八定列론을 따른다면 실제에 있어서 四十五쪽이다) 無數는 六升六하여 無數됨이요 六과 이끌어낸 一無動을 合하여 七이 되고 七이 八空處를 뛰고 뛰어 縫緘하여(또는 걷어내여) 七升八하여 五十六으로 一面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六升六은 무수임으로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거론할 것 없이 그냥 八數가 一面을 세운다 해도 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六升六은 다양한 變化를 구함에 있어 꼭 필요한 數다。面은 六合時線에 의해 여섯이니 六升八하여 四十八無動이 空을 이뤄 現相化한다 할 것이다。이것을 둥그렇게 연마한다 생각하면 매끈한 유리구슬처럼 空의 現한 實相의 하나라 할 것이다。六升六은 걸림이 없어 계속 흘러 面을 지을수 없다는 뜻이다.三百六十六 즉 三百六十加六合回流 또한 완전히 縫한 것이 되어 어느 특출하게 面을 지을수 없으니 無數에 든다는 뜻이다(空 즉 부모는 흠결이 없으니 하늘과 땅처럼 그렇게 化하여 제 삼라를 포용하고 空으로 이끈다는 뜻이다) 모든 알수 있는 數는 완전하다. 이반면 모르는 數는 있어도 불완전하다。六도 아닌未知한 것에 확실한 듯하나 확실치 못한 과 八이 뛰고 뛴다.필자의 쇠뇌시키는 듯한 어지러운 설명이라야만 物事의 완전한 걸림없는 다양한 변화를 가르킬수 있는 것이다.
八升九는 七十二인데 各空(八空처를 말함)이 乾坤形을 다짓는다 할 것이니 九가 六으로 化하니 六升六은 四十八이란 뜻이다。건곤은 九쪽(片)이나 六十四器의 大成卦象은 六爻로 하나의 괘象(器成)을 이루는것이다。이것은 太乙形 四十八定列 意味를 취한 것이다. 저 앞머리에 조금 내비침과 이 뒤에 나오는 얘기를 잠깐 비춰냈을 뿐이다。움직여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임이 回流인 것이다.回流는 五도 아니고 六도 아닌 모름에 흘러 五도 六도 아니면서 五와 六을 이루고자(六이 완전하면 五도 완전한 數란 뜻、하나의 매개체를 제대로 이룬 것은 완전하다는 뜻임) 無수에 들고자 하나니라。그 色의 농도를 갖고 논할진데 짙은 것이 六이라면 흐려서 불분명한 것이 五도 아니고 六도 아닌가? 눈에 뭔가 끼인 것 같기도 하고 거리가 멀어서 가물가물 시야가 희미한 것이 五도 아니고 六도 아닌지 모르겠다.※ 六升六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양한 변화의 순서를 定하는데 없어선 안될 수이기 때문이다。物事의變化는 일률적인 방식이 아니며 삼라 物事는 한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삼라 物事라 하는 것이다. 곧 여러 가지로 가지수가 많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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