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복음.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부님, 신부님 본당 아이가 그린 그림을 주보에서 보셨어요?”
제게 많은 분이 이러한 SNS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주보를 보니까 교구 주보에 어린이들의 그림이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그중 두 개의 그림이 우리 본당 아이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의 그림에 저로 보이는 얼굴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많은 분이 제게 연락하셨던 것입니다. 기분이 좋았을까요? 아니면 나빴을까요?
솔직히 부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의 주제 때문입니다. 그림 주제가 ‘내가 만난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그림 속의 인물과 제가 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를 그리면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일까요? 이 점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스스로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죄 많은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짐했지만, 지금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의 눈에 저를 이렇게 봐주더니 어떻게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 눈에서는 신부를 모두 예수님처럼, 수녀를 모두 성모님처럼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함부로 사는 삶이 아닌, 예수님 닮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은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피하는 삶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통과 시련은 내게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부활이란 커다란 영광입니다. 이 부활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 전에 겪어야 할 수난과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더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 논쟁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가장 낮은 위치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높은 자리만을 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닮는 삶은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낮은 사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즉,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 닮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기를 통해 다른 이에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겸손한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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