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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3일 토요일 맑음
아침 6시에 칼리에 도착했다. 칼리는 뚜렷하게 목적이 없는 그저 지나가다 잠시 멈춘 도시다. 터미널의 규모는 크고 현대식이다. 칼리는 살사의 본 고장, 고향, 살사의 기원지이다. 살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춤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춤을 잘 못 추니까, 관심도 없기 마련이다. 은퇴 후에 할 일이 없으면 운동 삼아 아내와 춤을 배워보자고 했지만,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춤을 제대로 접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살사를 빼면 볼 것 하나 없는 도시인 깔리는 그냥 스쳐가는 도시다. 하지만 콜롬비아 사람들은 삶 자체에 살사가 녹아 있어 어디서든지 살사 음악이 들리고, 밤이면 살사 클럽에 춤추러 가고 여기저기 살사 클래스가 열려 있고, 길에서도 흥이 돋우면 살사를 추곤 한다. 콜롬비아하면 살사를 추가해야할 것 같다. 매년 열리는 살사 축제가 여기 깔리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매년 크리스마스 정도에 열린다고 한다. 깔리는 해발 1,014m의 칼리 강 양안에 자리 잡고 있다. 콜롬비아 남서부에 있는 산간 아열대지역인 카우카 강 하곡에 위치한 이 도시는 1536년 7월 25일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사르가 건설했다. 육지로 둘러싸인 입지조건 때문에 195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보고타와 메데인 시에 이어 콜롬비아 제3의 도시가 되었다. 1954년부터 카우카 강 하곡의 농업과 공업 발전이 미국의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를 본뜬 자치공공단체인 카우카 강 유역 개발공사(Cauca Valley Corporation/CVC)에 의해 진전되었다. CVC는 콜롬비아 제2의 수로인 카우카 강 상류에 배수시설을 설치하여 전력을 발생시키고 홍수를 방지했으며, 관개와 기계화에 의해 주변 농지를 대규모 경작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 칼리는 계곡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주요 집산지이고, 공업 중심지로서는 보고타·바랑키야·메데인과 경쟁적 위치에 있다. 상업용 농작물로 사탕수수와 커피가 재배되며, 최근에는 목화와 콩도 수확하고 있다. 쇠고기·낙농업·가금사육도 중요하다. 인쇄용지(토산의 사탕수수를 짜낸 찌꺼기를 이용하여 만듦)·의약품·화학제품이 주요공산품이다. 칼리는 지난 400년 동안 콜롬비아에서 전략적 교통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철도와 고속도로 편으로 북동부의 주요도시들과 태평양 연안지역(부에나벤투라)에 연결된다. 국제공항과 공군기지도 있다. 이 도시는 매년 열리는 사탕수수 박람회 겸 사육제에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인기 관광지이다. 또한 중요한 문화 중심지로서 고고학박물관·종교미술박물관·시립극장·음악학교·대중문화연구소가 있다.(백과사전) 살사는 1940~50년대에 시작하여 주로 뉴욕 시에서 발전했으나, 1960년대까지는 살사라는 명칭이 붙지 않았다. 라틴 아메리카 계 문화의 확산과 함께 1970년대에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스페인어로 'sauce'인 'salsa'의 어원은 'son'에서 찾을 수 있다. 스페인 식 기타 연주에 전통 아프리카 음악의 원천인 복잡한 리듬, 화답하는 형식의 노래 등의 요소를 혼합한 송(son)은 쿠바 동부의 시골에서 시작되어 20세기 초 수십 년 만에 아바나까지 퍼져나갔다. 이 음악은 당김음을 많이 사용하여 저음부가 반 박자씩 하박을 앞서가게 되는, '서둘러 앞서가는' 리듬 구조를 사용함으로써 독특한 박자를 만들어낸다.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라는 밴드리더가 선구적 역할을 하여 송은 볼레로에서 콩가, 룸바에서 맘보까지 매우 다양한 춤 중심의 아프리카계 쿠바 음악 형태들을 보여주는 기본 틀이 되었다. 아프리카계 쿠바 음악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특히 멕시코까지 퍼져나갔다. 1940년대에 쿠바계 이민자 마치토(본명 프랑크 그릴로)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뉴욕 시에서 공연되며, 그 음악이 살사로 변형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살사는 아프리카계 쿠바 음악 형태와 재즈 및 빅밴드의 접근방식을 혼합한 것이었다. 이 음악이 리듬과 호른 파트를 구성하는 소규모 중창단과 푸에르토리코계의 많은 뮤지션의 참여에 의해 살사로 발전하였다. 또 다른 쿠바계 이민자인 셀리아 크루즈는 1960년대에 아프리카계 쿠바 댄스 음악의 디바가 되었다. 주목할 만한 푸에르토리코계의 밴드 리더들로는 티토 로드리게스, 팀발레스 연주의 거장이자 비브라폰 연주자인 티토 푸엔테, 프로그레시브 재즈에 영향력을 끼친 피아니스트 에디 팔미에리가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주 템포가 빨라지기도 하고 '열정적인' 살사는 더욱 다양한 연주자, 예를 들어 파나마인 정치 운동가이자 싱어 송 라이터인 루벤 블레이즈나 멕시코 계 미국인 로커인 카를로스 산타나 등과 결합하게 되었다. 살사는 1970년대에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백과사전) 아침이라서 도시 깔리는 조용했다. 깨끗한 거리다. 초록색 가로수가 많고 숲으로 이뤄진 공원도 보인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자전거 전용도로도 있다. 아침에 달리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메데인 행 버스표를 끊었다. 아침 7시 30분 출발이다. 우리는 5만 페소에 표를 샀는데 옆에 있는 아저씨는 4만 페소에 표를 샀다. 좀 배가 아프다. 우리가 타려는 버스는 손님이 너무 적어 출발하지 않고 다른 버스에 표와 함께 승객이 인도되어 다른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더 크고 더 고급스러운 버스다. 그러나 출발 시간이 오전 8시로 바뀌었다. 저녁 7시에 도착 예정이란다. 터미널에서 대충 정리하고 다시 버스를 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약간 집중호우성이다. 거리에는 갑자기 내린 비로 도로가 침수되었다. 흙탕물이 도로에 가득하여 차들이 거북이 걸음이다. 배수 시설이 잘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차에서 구경하는 우리는 재미있다. 별 무리 없이 도시를 빠져나오니 엄청 넓은 사탕수수 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아내는 잔다. 평원이참 좋다. 비는 사라지고 하늘이 맑아지더니 태양 볕이 따가워 보인다. 차는 부가(Buga)라는 마을에 들어간다. 터미널에 잠시 서더니 손님을 태운다. 10분 정도 머물더니 다시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린다. 평원이 사라지더니 점점 계곡이 있는 산지로 올라가는 분위기다. 커피 농장이 많이 보인다. 오후 1시 허름한 길가에 있는 휴게소로 들어가 차가 멈춘다. 대형버스 서 너 대면 꽉 차 보이는 주차장이다. 차에서 내리니 엄청 덥다. 점심을 먹고 간다. 우리는 고로깨 같이 생긴 감자튀김을 사서 먹었다. 맛이 구수하고 양도 적당하고 먹기도 편리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여러 가지 음식이 판매되는데 주로 소세지 구이와 돼지고기 구이가 많다. 갑자기 몰아닥친 손님들로 인해 주방이 바쁘고 음식을 나르는 발길이 분주하다.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주방이 엉망이다. 흐르는 물도 아니고 항아리에 있는 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한다. 더러운 걸레로 그냥 접시를 닦아내는 것이 설거지 끝이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코는 냄새로 즐거운데 별로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다. 휴게소 주변에는 산지를 이용해 경사면에 커피를 심은 농장이 많다. 휴게소 앞에는 당나귀 수레가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타고 있는 꼬마가 귀엽다. 뜨거운 태양아래 휴게소 그늘에 앉아 있으니 편안하다. 운전기사가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니 기다리던 손님들도 차에 탄다. 다시 출발이다. 이제는 오른쪽에 강(카우카 강)을 끼고 계곡을 간다. 강에는 가끔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콜롬비아의 카우카 자라고자 주에 있는 다가우 강의 사금채취는 아주 유명하다. 여기서 채취한 사금인 카우카산 사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을 금꾼 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돈이 필요하면 벽에 모아둔 사금을 꺼내 돈과 바꿔 쓰고, 사금이 다 떨어지면 강으로 나간다. 오래 일한 사람들은 쉽게 사금을 얻는다고 한다. 갑자기 차가 멈추더니 총각 한 명을 태운다. 그의 손에는 사금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넓은 접시가 손에 들려있다. 강이 이어지더니 다리를 건넌다. 이제 부터는 험한 산을 넘어간다. 엄청 규모가 거대한 산이다. 그런데 도로는 편도 1차선이다. 대형 트럭들이 힘겹게 뱀처럼 구부러진 길을 넘어간다. 속력도 엄청 느리다. 위험해 보인다. 그 사이를 오토바이들이 추월해 간다. 지겹게 돌아, 돌아 올라가는데 정상 부근에는 마을이 있다. 도로변에 있다. 이것도 고속도로인지 가끔 요금을 받는 톨게이트가 있다. 우리는 예정보다 늦게 메데인에 도착했다. 왜 메데인에 이렇게 힘들게 찾아가는 것일까? 우리에게 아직 친숙하지 않지만, 스페인어권의 여러 국가에 유명한 화가들이 많다. 그 중 한사람이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Angulo) 이다. 되게 뭔가 진지하게 생기셨는데 대표작품들은 보면 풉 하고 웃음이 난다. 그이유가 벨라스케스, 루벤스, 반 고흐, 얀 반 아이크 등 여러 거장들의 작품을 그 만의 독특한 해석과 시선을 담아 패러디해서 고전의 엄숙한 느낌이 아닌 유머를 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뚱뚱한 모나리자 ” 얀 반에이크의 작품 '아르놀피니의 부부'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패러디한 그림들이 있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얼마 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도 했었다. 메데인은 화가 겸 조각가인 보테로의 고향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그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두 번째 이유는 마약 왕 파브르의 활동 무대라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메데인 구아타페 마을의 엘페뇰이라는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가보고 싶어서이다. 1949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한 소년이 태어납니다. 이름은 파블로 에스코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자동차 절도라는 지극히 평범한 범죄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담배와 주류 밀매 등 다양한 밀수를 업으로 삼던, 그는 콜롬비아에 불길처럼 치솟던 코카인의 판매가 그를 떼돈을 벌게 해줄 거라는 걸 알아채고 비슷한 부류의 범죄 집단을 모아 메데인 카르텔을 형성하게 됩니다. 강력한 단결력과 파블로의 비상한 머리가 합쳐진 메데인 카르텔은 금방 일대의 마약상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파블로는 대담하고 강력하게 경쟁세력을 파괴하며 콜롬비아 마약 유통권의 대부분을 쥐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조직은 미국시장의 코카인 유통량의 80%를 장악하며 거의 독과점과 다름없는 시장을 구축하게 됩니다. 세금도 안 붙고 무조건 현찰박치기인 마약사업은 떼돈을 벌게 해주고 그의 콜롬비아 안에서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게 커져가지요. 파블로는 고향에서 민심을 얻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콜롬비아 마약조직은 반정부 친 서민 구조에 게릴라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민심을 잃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일이었지요. 실제로 콜롬비아의 상당수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위해 돈을 뿌리는 마약 상들을 혁명 게릴라 혹은 자신들의 친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는 곧 경찰이나 정부로 부터 마약 상들을 지켜주는 중요한 요인이 되지요 그가 즐겨 쓰는 방법은 자동차에 현금을 가득 싣고 빈민 주택가 골목을 다니면서 꽃가루 뿌리듯 현금을 뿌려대는 것이었지요. 메데인에서는 거의 매일 무료급식소가 운영되었고 남미 인들의 특성에 맞추어 성당을 무료로 짓거나 보수해주는 행사도 자주 했습니다. 당연히 메데인에서 파블로의 지위는 공권력을 훨씬 앞설 수밖에 없었지요. 파블로는 이런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합니다. 콜롬비아의 마약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거물로 성장해버린 파블로에 콜롬비아 정부는 부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콜롬비아가 코카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궁창 같은 현실이지만 이 대형쓰레기에 한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콜롬비아 검찰과 경찰은 파블로의 조직을 추적해 피래미들을 잡아들여 파블로를 기소하지만 파블로에 돈맛에 취한 법관들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었지요. 잡혀온 파블로의 똘마니들도 목숨 부지를 위해 당연히 증언거부 해주시고 파블로는 증거불충분으로 번번이 빠져나갑니다. 이러는 동안 파블로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져가고 콜롬비아 정부는 매수당하지 않은 판사와 검사들로 파블로 기소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파블로는 일단 돈으로 회유해보고 안 넘어간다면 무조건 암살을 감행합니다. 경찰들이 매수와 테러에 몸을 사리자 정부는 군 특수부대를 투입하지만 역시나 파블로의 암살공작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파블로는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정부 관리와 판사 검찰 군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하고 200여명이 넘는 정부 인사를 살해하는 대담함을 선보입니다.(이중에는 마약퇴치를 공약으로 내건 대선후보도 포함) 정부도 검찰도 군인도 언론도 파블로가 무서워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국내에선 어떻게 할래야 할 수가 없자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에게 도움을 청한다. 콜롬비아에서는 파블로의 재판이 불가능하니 미국으로 인도하여 미국에서 처리하게 하는 범죄인 인도 협약을 논의하기 위하여 판사와 법무부 인원들을 미국으로 보내게 된다. 가만히 있으면 파블로가 아니다. 파블로는 그들이 탄 항공기 전체를 공중에서 폭발시켜 120명 전원 죽여 버리는 초강수를 둔다. 그야 말로 법위에 군림하는 상황이고 그 누구도 통제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충격적인 행동 뒤에는 10여 년간 콜롬비아의 정부와 공권력을 비웃으며 마음껏 암살과 테러를 저질렀던 자신감과 갱스터 특유의 배로 돌려주는 습성이 크게 작용되나 이 비행기 폭발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행동이 되고 만다. 예나 지금이나 비행기가 폭발하면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된다. 똑같이 100명이 죽어도 길바닥에서 죽는 거랑 공중에서 터져죽는 건 관심도에서 차이가 엄청나게 난다. 120명의 승객이 탄 민항기 공중 폭파 사건은 전 세계인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온다. 남미 구석에서 일어난 일들은 관심 밖이었지만 공중으로 날아오른 비행기의 폭발은 세계인 모두의 관심을 끌게 된다. 파블로 본인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지만 서방 언론들은 그를 나르코 테러리스트라 부르며 파블로는 마약 상에서 시작해 테러리스트자리에 오르는 본인은 전혀 원치 않았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언론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가 파블로 '개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어버리는 파블로에게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 닥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마약은 파는 놈이 나쁜 놈이고 파는 놈만 잡아 죽이면 마약이 근절될 거라는 허황된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조지 부시 대통령은 CIA와 DEA에게 당장 미국 내 마약 판매 루트와 현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CIA와 DEA는 처음엔 너무나도 쉬운 임무에 환호성을 지른다. 미국 내 80~90퍼센트의 마약이 파블로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70먹은 할머니도 아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침 비행기 테러까지 겹치면서 파블로는 미국 정부 내에서 일약 주요 이슈가 되어버린다. 마침내 조지 부시는 또 잘 하는 짓을 해내게 된다. 주적선언이다. " 파블로는 미국 안보의 현존하는 명백하고 확실한 위협이다 " (다른 말로는 파블로는 망했다고도 하죠) 그리고 바로 미국 정보 요원들에게 외국에서 미국에 반하는 미국 범죄인들의 사살을 허가하는 비밀 명령안을 발의 한다.. (굿바이 파블로) 비행기를 날려버리고 정부 요인과 판사들을 공중에서 터뜨려 죽였지만 자신에게 손도 못 대는 콜롬비아 정부의 무능과 자신을 나르코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세계 언론에 잔뜩 오만해진 파블로는 평소에 다름없이 메데인에 돈을 뿌리고 미국으로 마약을 수출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미국 DEA에서 나온 위장요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들은 콜롬비아의 정부와는 완전히 별개로 수사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설마 미국에서 자신에게 수사요원을 파견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한 파블로는 자신이 뿌려놓은 콜롬비아 정부 내 강력한 정보망으로 정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조소를 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DEA는 계속 차분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콜롬비아 정부와 공유하게 된다. 지금까지 가질 수 없었던 심도 있는 증거를 가지게 된 콜롬비아 정부는 이번에야 말로 파블로에게 한방 먹일 수 있는 기회라며 매수된 검, 경찰이 아닌 육군 특수부대 소속의 코르티네즈 대령의 지휘 하에 정예병만을 뽑아 1992년 그의 자택을 기습하여 체포에 성공하게 된다. 체포된 파블로는 저 사진의 해맑은 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역시 신경도 안 쓴다.. 무조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증거물들은 무능한 콜롬비아 정부에서 수집할 수 없었던 A급 증거물인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DEA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과거처럼 매수로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정부를 상대로 거래를 제의 한다. (나를 사면해주면 나라 빚을 한 번에 해결해드립니다) 콜롬비아 정부가 갖고 있는 해외 빚을 모두 사면해 줄 테니 자신과 자신의 조직원들의 전면적인 사면을 요구한다. 과거 콜롬비아 정부였다면 통했을지도 모르는 거래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미국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에 콜롬비아 정부는 이를 단칼에 거절해버린다.
재판이 시작되고 파블로는 마침내 감옥에 가게 된다. 하지만 파블로의 막강한 재력과 오랜 시간 정부 내에 침투시켜놓은 매수능력으로 일반 교도소가 아닌 '개인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막대한 돈을 들여 개인교도소를 만든다. 파블로의 안전을 위해서 라는 되도 않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돈을 두둑이 먹은 고위관리들의 배려였다. 그 교도소(라고 쓰고 호화주택이라고 읽는)에는 볼링장,당구장,수영장,개인식당,나이트클럽,바 가 설치되 있었고 교도관들은 모두 파블로가 직접 선발하여 정식 교도관 월급의 수십 배에 달하는 월급을 지불했다. 교도관이라기보다는 파블로 개인 사설 경비에 가까웠고 외부의 적이 파블로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거대한 요새 휴양저택이다. 낮에는 고급저택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놀다가 해가지면 밖으로 차를 몰고 나가 화려한 밤 문화를 즐기며 간만에 휴가를 즐기던 파블로의 모습을 보고 받은 미국 정부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 상황에 콜롬비아 정부를 갈구기 시작한다. 기껏 DEA가 정보 모으고 증거 수집해줬더니 감옥이 아니라 휴양생활이나 즐기게 해주니, 열이 뻗칠 대로 뻗친 미국정부는 범죄인 인도 협약에 따라 미국으로 이송시킬 것을 요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파블로의 코카인은 미국 전역에 나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파블로의 귀에 들어간다. 파블로는 생애 처음으로 긴장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가게 된다면 그저 남미에서 온 마약 상 1번이 될 뿐이다. 게다가 자신을 미국의 위협으로 규정지어 놓은 미국정부니 뭔 짓을 할지 상상도 안 갔던 파블로는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30여명의 무장경호원의 경호를 받으며 자신의 고향 메데인으로 잠적한 파블로에게 콜롬비아 정부와 경찰은 대대적인 체포에 나서지만 당연히 메데인 주민들에게 파블로는 신적인 존재였으므로 수사가 전혀 진행이 되질 않았다. 이제 완전히 뚜껑이 열린 미국은 델타포스 소속의 특수 추적대와 DEA CIA요원을 콜롬비아에 급파하게 된다. 당시 파블로의 부하들은 대공미사일과 대전차미사일등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델타포스도 같이 파견이 된 거다. (파블로는 총 같은 건 안 썼다고 합니다. 자동차는 대전차 미사일로 날려버리고 조금 공중에 떴다 싶으면 대공 미사일을 쐈다고 한다.) 인공위성과 항공기를 이용한 통신 감청 주파수들이 남미의 조용한 시골인 메데인을 뒤덮게 되고 수십 명의 감시요원들이 파블로의 신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당시 파블로는 여러 개의 핸드폰을 일괄 구입 한 후 버리는 방식으로 콜롬비아 수사당국의 전파추적을 따돌리고 있었다. 미국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를 추적하게 된다. 바로 음성인식 추적 방식을 통해 그를 추적하게 되는데요. 메데인 지방에서 나오는 휴대폰 통화음을 모두 도청하여 슈퍼컴퓨터가 확보된 파블로의 음성을 발견하면 자동으로 추적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런 기술이 있는 건 생각도 못하던 파블로는 가족과 친지들과 끊임없이 통화를 한다. 그의 음성을 발견한 슈퍼컴이 대략적인 위치를 추적해내고 파블로는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끼고 휴대폰 사용마저 하지 않고 완전히 잠적해 버린다. 어느 정도 구역을 좁힌 추격대는 근방에서 정보를 수집하지만 주민들의 비협조로 인해 추적은 난관에 도달한다. 그러나 포위망이 좁혀져 사실상 그가 끝나간다고 생각한 파블로의 최측근하나가 DEA요원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주게 된다. 해당지역의 어느 어느 주택을 사용한다. 이런 식의 정보를 말이다. 델타포스와 그들이 훈련시킨 콜롬비아의 특수부대가 출동하고 파블로를 발견하고 추격전을 벌이게 된다. 격렬하게 총을 쏘며 도주하던 파블로는 결국 메데인의 한 뒷골목에서 특수부대원들에게 비참하게 사살되고 그렇게 마약왕의 전설은 끝나게 됩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자택에서만 6000만 달러의 현금이 나왔고 은행에 예치하거나 각종 부동산 귀금속 등 비밀금고에서도 엄청난 재산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실제 90년대 포브스지에서는 그를 세계 10대 부자중의 한명으로 선정했을 정도니 그의 재산은 정말 엄청났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파블로는 70~80년대 흑인들 몇 명이 허름하게 팔던 마약 상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은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금도 미국 내 마약 유통량은 전혀 줄지 않았으며 한명이 독과점으로 팔던 걸 여러 명이 나눠 파는 구조로 바뀌었으니 마약이 싸지긴 싸졌겠다. -전설의 마약 왕 킬링 파블로 -작성자 비트에서 따온 글. 메데인 터미널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한 장 얻었다. 택시를 타고숙소가 많다는 포블라도 지역으로 갔다. 관광객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해가 지고 어두우니 길가에 모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숙소를 몇 군데 들어가 봤으나 가격이 비싸면 방이 있고 가격이 저렴한 곳은 방이 없다. 여러 블럭을 걸어 다니며 숙소를 찾았다. 생각보다 방이 없다. 없으면 방이 있는 비싼 곳으로 간다는 생각에 돌아다니다가 허름하고 간편한 호스텔을 발견했다. 75000페소에 이틀을 묵기로 했다. Tiger Paw 호스텔이다. 칼레 10 거리와 카레라 36거리에 있는 숙소다. 드디어 메데인에 도착하게 되었다.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왔다.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중심 도로인 칼레 10 도로에는 유명 페스트 푸드 점이 있다. KFC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식당들이 있다. 깨끗한 식당으로 들어가 치킨으로 저녁을 먹었다. 작은 슈퍼에 들러 망고와 파파야를 사가지고 왔다.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피곤하다. 그래도 망고와 파파야를 깎아 먹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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