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2월 1일 개통해 1950년 6·25전쟁의 포화로 사라지기까지의 14년간 양양역과원산역 1백80㎞를 이어주던 동해북부선은 영북지역과 서울을 연결하는 유일한교통수단이었다.
함경남도 원산의 아래에 있는 안변역에서 철원역으로 향하는 철도와 갈라져 동해안을따라내려오는 동해북부선의 종착역이 위치했던 양양은 당시 영북지역에서는 가장 크고번화한 도시였다.
경원선이 있는 원산역까지 운행해 영북지역과 서울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동해북부선을 많은 지역주민들이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멀리 강릉에 살고 있던사람들도 양양역(지금의 양양읍 청곡리 일대)까지 와서 서울 가는 기차를 이용했다.
새벽 5시에 출발하는 첫열차와 10시, 오후 4시와 9시 등 하루 4차례 운행했던 동해북부선기차는 낙산역을 지나, 물치-속초-천진-문암-공현진-간성-현내를 지나 지금 통일전망대바로 아래에 있었던 초구역에 이르게 된다.
초구역을 떠난 기차는 지금의 북한땅으로 들어서 고성-삼일포-외금강-장전-통천역을지나 열차의 목적지인 원산역에 이르게 된다.
동해북부선 기차는 금강산의 외금강역을 지났기 때문에 금강산 유람을 원하는사람들에게는 아주 쉽게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특히 지역의 국민학생들이 봄이나 가을소풍을 금강산으로 가는 일은 아주 흔한 것이었다.
당시 양양역과 물치간이역 등 양양역사 관할에서 양양역 개통부터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근무했던 김원호옹(77세, 양양읍 월리)는 “그때 승객을 실은 객차가 7∼8량이 운행됐고정원이 1백20명 정도였으니까 한번 운행할 때마다 보통 8백∼9백명 정도가 기차를 이용할 정도로 양양역이 붐볐다”고 회상했다.
김옹에 따르면 그때 원산역까지의 기차삯이 쌀 세되값 정도였다고 한다. 양양과 속초를비롯해 기차가 지나는 간이역이 위치한 마을에서는 원산여고나 원산사범학교를 다니는학생들이 여럿 있어 주말이면 집에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원래 동해북부선은 일제가 관북 및 강원도 지방의 지하자원을 수송할 목적으로경원선(서울-원산)의 안변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릉-삼척-울진-포항까지 연장하여동해남부선을 통해 부산까지 운행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선로였다.
1929년 9월 11일 안변-흡곡사이가 먼저 개통되고 그 뒤로 8년이 지난 1937년 12월 1일양양까지 개통된 동해북부선은 일제가 전쟁수행을 위해 물자수송로로도 이용했으며,양양역에서는 객차에 앞서 15∼20량 정도의 양양목재와 자철광을 실은 화물차가운행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서면 장승리에 자철광광업소가 1937년 개광돼 광업소와 양양역사 사이에자철광 수송을 위해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었다고 됐다.
이처럼 동해북부선은 일제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물자수송로였으며,지역주민들에게는 남북을 오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특히 양양역은서울을 가려는 사람들과 금강산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 공부를 하는 학생들 등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1층짜리 단층건물로 지어져 있던 양양역사는 지금 그 흔적의 일부만이 남아있지만당시에는 직원들이 이용하던 관사가 7∼8채 정도 있었으며, 여관과 식당을 비롯해여러채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시 양양역사에 근무하던 사람들만 해도 역장을 비롯해 30여명이 근무했었으며, 이외에철길보수를 했던 선로반 10여명과, 차량검사를 했던 검차부 7∼8명, 화차를 담당했던기관부 30여명 등을 합하면 모두 80명 정도가 양양역에서 일을 했었다.
해방으로 인해 양양군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원산에서 출발해 강릉을 지나 부산까지연결하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동해북부선은 말 그대로 동해북부에서 운행하는 기차가될 수 밖에 없었다.
1950년 6·25전쟁중에도 운행을 했던 동해북부선은 그해 가을에 있었던 국군의 대규모폭격으로 인해 양양역사와 철로가 완전히 파괴됐으며, 이후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37년 개통해 50년까지 14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영북지역의 특수성을 대변이라도 하듯일본군은 물론, 소련군, 인민군 등이 이용했으며, 결국은 국군에 의해 파괴된 동해북부선의흔적들은 금강산 자락을 뛰놀던 아름다운 기억들과 함께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