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정권의 경제실태와 전망
휴전 이후 북한의 수도 평양에 자본주의나라 상징인 시장(市場 : 상품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일정한 장소)이 공식적으로 들어선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1984년 여름, 소련 및 구라파 사회주의나라들을 방문하고 귀국한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생겨난 평양시 사동구역 소재 ‘송신농민시장’이 첫 케이스다.
그동안 북한당국에서 ‘시장’은 자본주의사회 한 부분이라며 부정적으로 대해 왔다. 개인의 이득과 사유를 추구하는 시장생활에 빠지면 결국 사회주의혁명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통제해왔다.
이후 생긴 전국의 농민시장 이용자들은 크게 놀랐다. 국영상점은 먼지만 가득했지만 시장에는 온갖 물품이 차고 넘쳤다. 직장에서 주지도 않는 월급만한 돈을 시장에서는 단 몇 시간에 벌었으니 말이다. 허나 당국은 불편했다. 인민들이 시장에서 물건구입과 돈벌이 맛을 보니 당의 지시를 건성으로 듣는 경향이 나타났다.
하여 국제행사, 국내대회, 각종 전투기간(봄·가을 농촌노력동원 시기, 00일 전투시기 등)에는 일시 폐쇄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불평이 많았다. “국가에서 인민들에게 물품을 제대로 공급 못하면 개인이 저절로 먹고 살도록 자유로운 장사활동을 승인해야 하지 않냐?”고 했지만 당국은 못 들은 척하였다.
지난 30여 년간 불규칙하게 운영되던 북한의 시장이 김정은 시대에서 눈에 띄게 활성화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문가의 진단을 들으려 얼마 전 서울 여의도에서 KDB산업은행 북한경제팀장으로 근무하는
김영희 박사를 만났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65년 함북 길주에서 태어났다. 온천이 유명하고 펄프(종이생산)공업이 발달된 지역이다.
원래 부모님은 평양제1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부부였다. 1963년 경, 북한의 각 도에 ‘49호 병원’
(정신병환자 치료전문병원)이 생겼는데 이때 부친이 인사이동으로 길주에 내려왔다. 6형제 중 둘째로
나부터 길주에서 태어났다.
- 학력과 경력은
1987년 원산경제대학을 졸업했다. 경제대학은 경제일군을 양성하는 대학이다.
이후 3년간의 3대혁명 소조생활(현장 체험 활동)을 강원도 회양군 상업관리소에서 했다. 대학에서 이론적으로
배운 것과 사회현실이 너무나 다름을 알았다. 책에서는 국가가 물자를 인민경제 각 단위에 충분히 공급한다고
했는데 실지는 안 그랬다. 거꾸로 국가물품을 공급받는 것도 개인의 뇌물이 있어야 가능했으니 말이다.
- 사회에 대한 불만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의사부부로 인텔리 가정이었고 우리 6형제도 모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로
국가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 불만은 그 사회에서 핍박을 받아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소조생활을 마치고
1990년 말, 평안남도 소재 항만관리기관에서 회계담당 지도원으로 근무하였고 기숙사생활을 했다.
- 직장생활을 여유롭게 했겠다.
노동당의 덕분이다.(웃음) 대학졸업 후 배치 받은 직장에서 10여 년간 일하며 고난의 행군시기
(1996~1999년, 북한이 최악의 식량난으로 300만이 아사한 시기)도 보냈지만 쌀밥을 배불리 먹었다.
물론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식량배급 중단으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당의 배려로 좋은 직장에서 근무함에 더 감사했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내가 근무했던 지역이 평양 다음 잘 사는 곳으로 소문났다. 그러니 고난의 행군시기 전국의 꽃제비
(방랑소년)들이 모여왔다. 정말 눈뜨고 못 볼 광경인데 30분 도보 출근길에 시체 되기 직전 모습의
꽃제비 5~6명씩 보았다. 허나 당국이 전체 인민에게 강연으로 주입시킨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에 대한
분노만 가득했다.
- 이후 생활을 말해 달라.
1992년 연애로 만난 도급기관에서 근무하는 지도원(공무원)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평양에 있는 인민경제대학(간부양성 전문대학) 추천을 강력히 희망했으나 문건이 계속 보류되었다.
이유는 남편 가문에 중국 연고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뇌를 계속하던 남편은 자기 신원문제로 더 이상
승진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북한정권에 불만을 가졌다. 물론 아내인 나와 가족에게도 절대로 내색을 안 했다.
- 탈북 경위를 말해준다면...
2002년 8월, 남편의 “중국 친척집으로 놀러 가자”는 말에 쉽게 따라 나섰고 그게 당과 수령을 배신하는
‘탈북’인 줄 꿈에도 몰랐다. 중국에서 보름 만에 남편이 실토했다. “북조선에는 희망이 없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남조선으로 가자!”고. 남편의 진담은 이해하나 내 형제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 6형제 모두 대학을 나오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한 달간 고민 끝에 남편의 뜻을 따라 그해 12월 남한에 입국했다.
- 서울에서 처음 무슨 일을 했나?
2003년 6월 ‘벼룩시장’(구인구직 광고신문)을 보고 자그마한 자동차정비사업장 경리직원으로 취직했다.
‘소나타’, ‘카렌스’, ‘스타렉스’ 등 외래어로 된 자동차이름부터가 생소했으니 허둥지둥은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도 안 돼 “차 이름도 모르는 저 ‘연변아줌마’ 아가씨로 바꾸라!”는 고객의 전화가 빗발쳤다.
- 그때 심정은?
화가 치밀었다. 북한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도원 동지’로 불리던 내가 ‘연변아줌마’ 소리 들으니 울분이
찼다. 사람 차별하는 이 땅이 싫었고 외국으로 이민 갈 마음까지 들었다. 차라리 수모를 당해도 타민족에게
당하는 게 낫겠다 싶었고. 그러던 중 남편이 내 손을 따뜻이 잡으며 “여보! 우리가 여기서 정착 못하면 어떻게
외국 가서 하겠는가? 이를 악물고 꼭 견디어 내요” 하며 격려해주었다.
- 이후로 무엇을 하였나?
우연히 참 좋은 분을 만났다. 사단법인 ‘새조위’(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의 신미녀(58) 상임대표이다.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우리 탈북민들의 바른 정착을 위해 애쓰시는 고마운 분이시다. 새조위는 올해로
29년째인 대한민국 최고의 민간통일운동 시민단체이다. 그 단체 직원으로 근무하며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에
입학하여 2006년 석사과정을 졸업했고, 2013년 동국대학교에서 북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KDB산업은행은 어떤 곳인가?
쉽게 설명하면 정책금융기관이다. KDB산업은행은 개인 및 기업고객에게 금융을 제공하는 일반 시중은행과
달리 나라의 정책금융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지난 2006년 12월 KDB산업은행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이탈주민 특별우대 채용을 하였으며 여기에 합격하여 입사했다. 올해로 입사 11년차다.
- 주로 하는 일이 뭔가?
림 작가가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봤겠지만 여기는 KDB산업은행 통일사업부이다. 1994년에 북한연구로
발족되었으며 현재는 독립부서이다. 통일 후 낙후된 북한경제 재건을 어떻게 하겠는가를 전문 연구하고
준비하는 일을 하며, 자본주의경제는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북한경제팀장을 맡은 지는 5년째이다.
- 북한의 현 시장경제를 어떻게 보나?
정확히 말하면 북한의 국가경제는 ‘시장경제’(경쟁관계의 자본주의경제)가 아닌 ‘계획경제’(수령이 명령하는
경제계획)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북한의 ‘장마당경제’라고 표현하면 분명하다. 오랫동안 김일성
부자 우상화에 막대한 돈을 쓴 북한의 국가경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완전 멈춘 상태이다.
그나마도 장마당경제가 운영되기에 지방의 인민들이 근근이 연명한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 김정은 시대 장마당 활성화가 눈에 띠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국가경제가 마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국가 소유의 공장이 잘 돌아간다면, 그로해서
배급이 정상적으로 나온다면 굳이 사람들이 보안원(경찰)의 통제를 받으며 시장에 나가서 생계활동을 안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김정은 정권도 인민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하니 장마당이라도 묵시하는 것이다.
- 북한이 남한의 새 정권을 어떻게 상대할 거라 보나?
우선 앞으로 1~2년 사이에 핵개발을 완성할 것이다. 어쩌면 완성했을 수도 있다. 북한에서 핵개발은 체제의
생명과도 같아 절대로 포기 안 할 것이다. 이후에는 남한의 진보정권과 경제협력에 서서히 나설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김정은도 지금처럼 굶주린 인민들을 끌어안고 버티기는 한계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가 집권한지 7년이 되어오지만 인민들의 생활향상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