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그린 화가들>
이응노 ‘취야’ ‘영차영차’
전쟁의 아픔 이겨내는 사람들 … 우리 자화상을 만나다
서양 작가들을 매료시킨 ‘한류 미술’의 원조 작가
전쟁으로 인한 혼란·재건의 의지를 화폭에 담아
섬세한 묘사 없이 특유의 필묵으로 우리의 삶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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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 달 동안 6·25 전쟁을 그린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봤습니다. 이번 주에는 마지막으로 이응노(1904∼1989)의 그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요. 이응노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필묵을 통해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준 예술가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가 그린 ‘군상’ 시리즈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응노는 1983년 귀화해 화제가 되기도 했죠. 이응노의 작품은 대전에 위치한 이응노미술관에서 많이 볼 수 있으니 휴가 때 시간이 된다면 한번 들러봐도 좋을 것 같아요. 이응노(1904∼1989). 출처=이응노미술관
취야, 1950년대, 한지에 수묵담채, 39.9×55.5㎝ 이응노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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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미로 많은 서양인 매료시켜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응노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활동하던 당시 한국 미술계는 이제 막 서양 미술계와 직접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던 때였죠. 그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화가들은 서양의 다양한 미술사조를 그저 쫓아가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달랐죠. 동양화를 응용한 독특한 그의 스타일은 오히려 서양의 많은 작가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최근 세계 미술계가 우리의 단색화를 주목하고 있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죠. 그는 이미 50여 년 전에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유럽인들에게 우리의 멋을 알린 ‘한류 미술’의 원조 격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화의 실험적 경향을 동양화에 녹여
이응노는 식민시기와 해방, 전쟁 등 근대 한국의 굴곡을 모두 경험한 작가입니다. 19세기 서화계의 거장이었던 김규진에게 문인화와 서예를 배우며 미술계에 입문한 그는 일제 시기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여러 번 입선했죠. 그는 수묵이라는 전통회화에 서양 미술과 같은 새 기운을 불어넣겠다는 생각으로 193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이 부분이 그가 다른 전통 수묵화가들과 다른 면이죠. 시·서·화의 전통을 고수하며 전통적인 주제인 사군자를 그린 작가들과 달리 그는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실험적인 경향을 동양화에 녹여내려고 했죠. 훗날 이응노를 대표하게 된 ‘군상 시리즈’는 이런 노력의 결실입니다.
영차영차, 1950, 한지에 수묵담채, 24.5x44㎝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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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끌려간 아들…전쟁을 그리기 시작
해방 이후 홍익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응노는 6·25 전쟁 중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됩니다. 9·28 서울 수복 직전 그의 아들이 북한군에 끌려가게 된 것이죠.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그는 변합니다. 리얼리스트가 됐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응노가 서양의 사실주의 작가들처럼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지·필·묵을 놓지 않았던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쟁을 그리려 했죠. 그는 종군화가로 활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종군화가로 전장을 누비기엔 나이가 조금 많았죠. 전쟁 당시 이응노는 이미 50대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후방에서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피폐한 환경, 참담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자화상 같은 그림 ‘취야’
1950년대 그려진 ‘취야’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응노는 생전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자화상 같은 그림입니다. 그 무렵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는 동안 보았던 밤 시장의 풍경과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 생활의 체취가 정말로 따듯하게 느껴졌답니다.”
저는 이 말과 당시 이응노가 처했던 상황을 생각하며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아들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답답함과 참담함으로 고통스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온 밤거리의 풍경, 그 풍경 안에는 이응노처럼 상처받은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주막의 막걸리 한잔으로 근심을 잊고 호탕하게 웃고 있었죠.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본 화가의 눈에는 상처를 회복하려는 용기가 솟아나지요.
‘취야’는 전쟁의 아픔과 이를 이겨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응노는 섬세한 묘사 없이 특유의 필묵만으로 그 분위기를 잘 포착했습니다. 화면에서는 술자리의 다양한 감각, 소리, 냄새, 맛 등이 느껴질 정도이지요.
재건에 대한 의지 담은 ‘영차영차’
재건에 대한 그의 의지는 ‘영차영차’에 보다 명확히 나타났습니다. ‘영차영차’는 일꾼들이 호흡을 맞추기 위해 내는 소리죠. 이응노는 그들의 소리를 제목으로 가져왔습니다. 제목을 통해 그들의 모습이 더 잘 이해되죠.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서까래 하나를 네 명이 들쳐 메고 ‘영차영차’ 소리를 맞추면서 옮겨 가고 있었지요. 역시 나는 권력 있는 사람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마음이 쏠리고, 그들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곤 했어요.”
그는 합을 맞추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재건의 의지를 느끼고 이에 동참하기 위해 그 모습을 화폭에 담습니다. 이것이 그가 그들과 함께 재건에 동참하는 일이었지요. 참담함에 두 손을 놓았다면 그는 유럽에 가지도, 명성을 얻지도 못했을 겁니다.
전쟁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
저는 이응노의 작품을 통해 전쟁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그리고 요즘 힘들다고 투정했던 제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적어도 그때보단 나을 텐데 말이죠.
여러분은 이응노의 작품에서 어떤 느낌 받으셨나요? 오늘의 내 모습을 반성해보는 시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그때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이게 호국보훈의 또 다른 의미일 것 같네요.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 주임연구원>
<클래식> 그 날 그 시간이 그리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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