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그해 봄 결혼한 나는 휴가를 이용하여 마누라와 소백산(小白山)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친구 아버지가 그곳에 계신다는 말만 듣고 무턱대고 집을 나서 오후 늦게 순흥면 배점리에 있는 초암사에 도착했다. 곧 바로 길도 제대로 없는 계곡을 한 시간쯤 치고 올라갔을까? 천신만고 끝에 첩첩산중의 자그만한 산방(山房)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이었다.
어리둥절해 하시는 영감님이 해주시는 밥을 맛있게 얻어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방은 하나, 단칸방이었다.
산새가 지저귀는 소백산의 아침은 상쾌했다. 사방의 빽빽한 원시림 사이로 월전계곡의 시원스런 물소리가 바람소리인듯 쏴하면서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접하는 이 지역은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오지일 것이다. 2000년 1월호 월간 山 이라는 잡지에 비로소 소개된 바 있는 이 산방은 인적이 전혀 없는 국립공원 내 해발 700m 산속에 들어 앉아있어 흔히들 정감록 (鄭鑑錄)에서 말하는 난리를 피하는 데 첫 손에 꼽히는 십승지(十勝地)라 불릴 만하다. 산방 주인은 어떻게 이 곳에 자신만의 아성을 차리게 되었을까? 그 사연을 추적해 본다.
산방 주인은 원래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무학(無學)이었다. 그는 8살 무렵부터 목공일을 배운 이래, 40여년 동안 오직 장인(匠人)의 길을 고수했다. 그의 가구는 세월이 가도 뒤틀리거나 침수되지 않았고, 나무에 새긴 목각 그림들은 변색되지 않고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가히 보기 드문 예술 중의 예술이었다. 그러던 중, 일생의 인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삼성그룹의 이** 회장이 우연히 대구 제일모직 공장에 순시 왔다가 사무실에 있던 일단의 가구에 매료되어 그 제작자인 산방 주인과 전속 거래를 맺게 된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굴러 들어왔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후, 그는 가업을 정리하고 젊었을 때의 꿈인 지금의 장소에 보금자리를 틀고 매년 6개월 정도를 산에서 지내게 된다.
지난 주 오랜만에 소백산을 다시 찾았다. 그야말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올해로 산방 주인이 돌아가신지 24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곳곳이 그분의 정성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원목과 흙으로 단장한 본채의 외관, 추운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는 부엌의 수도관, 그리고 친환경 뒷간 등등. 그리고 창고 정면에 붙어있는 액자도 여전히 나를 반겨주고 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山은 예로부터 우리 인간사회에 도덕과 양심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山의 위엄은 변함이 없습니다. 山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도 실수하여 불을 낼 수도 있으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모쪼록 즐거운 등산이 되시길!" 蘇學守 백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과 벗하며 지냈던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이 인간문화재?와 재벌 회장과는 6~7년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도 인간적인 우정은 계속 나누었던 듯하다. 가끔씩 회장님 댁에서 식사하면서 나누었다는 대화도 기억이 난다.
"회장님은 돈이 많아 맛있고 비싼 고기반찬을 드시지만 저는 된장 김치만 있어도 밥맛이 절로 납니다"
"네~ 하지만 재물은 쌓일수록 고민은 더 늘어가고, 이를 지키는 일이 꼭 징역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거상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이 말했다던가. 재물은 물과 같이 순리대로 흘러야 하고(財上平如水) 사람은 저울처럼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人中直似衡)! 과욕을 경계한다는 계영배(戒盈杯)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금년 10월 여행명상록입니다)
첫댓글 소씨 할아버지의 넉넉함이 상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