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조선 문화와 민속까지 사랑했던 초기 내한 선교사들
| 크리스천투데이 : 2025.06.13 06:51
[근대 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 6] 선교지 한국 연구한 선교사들
성공회 선교사 엘리 랜디스
내한한 첫 메노나이트 교도
인천에 첫 서양 의원 설립해
한국학 자료 ‘랜디스 문고’
수집, 한국학 연구 선구자
30대 초반 장티푸스로 소천
▲(왼쪽부터) 엘리 랜디스(南得時, Eli Barr Landis, 1865-1898)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선교사.
한국학 연구에 기여한 또 한 사람은 엘리 랜디스(南得時, Eli Barr Landis, 1865-1898)였다. 성공회 선교사로 내한했으나, 원래 그는 메노나이트 교도였다.
메노나이트(Mennonite)는 16세기 재세례파의 한 지류로 평화주의를 지향해 ‘역사적 평화교회(historic peace churches)’로 불리는 교회인데, 그는 내한한 첫 메노나이트 교도였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 카운티에 있는 랜디스 벨리에서 출생했고, 펜실베이니아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하고 1888년 5월 의사가 되었다.
선교에 관심을 가진 그는 미국을 수방했던 영국 성공회 코프(Charles John Corfe)를 만나게 돼 그의 영향으로 조선 선교를 자원, 1891년 9월 29일 코프와 함께 내한한다.
내한한 그는 제물포에서 첫 서양인 의원을 설립하고 의료활동을 시행했는데, 이 의료시설이 성누가병원[樂善施醫院(낙선시의원)으로 불림]으로 발전한다.
랜디스 선교사는 야간학교를 운영하고 고아들을 보호하는 한편, 한국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국학 관련 문서를 수집하고 목록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언어 능력이 탁월해 한문도 익혔고, 한국 역사와 문화, 문학, 종교, 민속, 가례(家禮), 동학사상 등에 대한 깊은 식견으로 한국학 관련 문서를 수집, 이 문서를 ‘랜디스 문고’라고 부른다.
▲엘리 랜디스 선교사의 의료 활동 모습.
불행하게도 그는 1898년 4월 16일 장티푸스에 감염돼 32세로 별세해 미국 랭카스터 메노나이트 공원묘지에 안장됐다가, 후일 인천 부평 외국인 묘지에 이장됐다. 사후 그가 수집한 한국학 관련 문서는 랜디스 문고(Landis Library)로 명명돼 서울 성공회 주교좌 성당에 설치됐다가, 1941년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추방될 때 연희전문학교에 기증돼 현재 연세대학교 학술 정보관에 소장돼 있다.
랜디스 선교사는 실로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헐버트는 “랜디야말로 한국학 연구자 중 뛰어난 학자”라며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학에 대해 연구하던 작은 모임의 수장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작은 모임이란 언더우드, 헐버드, 게일, 존스(趙元時, G. H. Jones, 1867-1919), 트롤로프(조마가, M. N. Trollope, 1862-1930), 그리고 랜디스 등 6명으로 구성된 모임이었다.
랜디스는 한의학 관련 문서와 ‘동의보감’ 일부를 영역했고, 선교사들이 제작하던 『Korean Repository』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예컨대 1897년 5월호에 ‘왕실의 장례식(A Royal Funeral)’이란 글에서 민비의 장례식을 언급하면서 조선 왕실의 장례 절차를 소개하고 있다.
▲엘리 랜디스 선교사.
1898년 2월호 ‘조선의 풍수지리(Geomancy in Korea)’에서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조선에서의 풍수지리 실상을 소개한다. 중국에서 풍수는 바람(風)과 물(水)의 원리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에서 풍수는 언덕과 강의 원리로 알려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지관들은 터를 잡아주고 후손들로부터 사례를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1897년 6월호에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것들(Things in General)’이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조선의 민속, 전설, 속담, 관습, 의식 등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898년 12월호에서는 ‘조선의 약 종류(The Korean Pharmacopoea)’라는 글이 게재됐는데, 이때는 랜디스가 사망한 후였다.
원래 이 글은 ‘중국 논평(The China Review, 478-588)’에 게재된 글인데, 그의 사후 『Korean Repository』에 재수록된 것이다. 이 글은 동의보감(Mirror of Eastern Medicine)에 기초한 글이라 할 수 있는데, 한의학 혹은 동양의학 약제가 되는 기본 내용을 취급하고 있지만 특히 회충, 구이, 지룡 등 무척추동물로 인한 질병들의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점은 랜디스가 동양의학이나 한의학에 대한 이해도 깊었고, 이를 영문으로 소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동양학, 그리고 한국학 연구에 기여했다.
▲과거 조선에서 강의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조선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입국금지를 당했다. 한국인의 심성과 종교성, 특히 유교와 불교와 무속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시도했다.
호머 헐버트, 대표적 연구가
육영공원 교사로 처음 내한
4년 반 만 <사민필지> 집필
선교사로 다시 한국 방문해
『The Korea Review』 창간
해방 후 한국 찾았다 소천해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야말로 대표적인 한국학 연구가였다. 한국 최초 근대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처음 내한한 헐버트는 한국학자로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종은 조선에서의 신식 교육기관을 위해 재한 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에게 미국인 교사 세 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미국 정부는 헐버트를 비롯해 길모어(George Gilmore), 벙커(Dalzell A. Bunker) 등 세 사람을 추천했다.
이 세 사람은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동부 명문이라 할 수 있는 다트머스(Dartmouth)에서 수학한 헐버트는 21세 나이로 조선 정부의 초빙을 받았으나, 갑신정변 탓에 입국이 지연되자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내한했다.
헐버트는 육영공원 교사로 일하던 중 1891년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편찬했다. 내한한 지 4년 6개월 만에 순한글판 세계 지리서를 출판한 것이다. 후에는 지리 교과서인 ‘초학지지(初學地誌)’도 간행하였다.
1892년 1월에는 『Korean Repository(일반적으로 ‘韓國叢報(한국총보)’로 번역된다)』가 창간되는데, 이 창간호에 헐버트는 ‘한국의 문자(The Korean Alphabet)’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돼,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90년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
육영공원 교사로 5년간 일하고 1891년 사임 후 미국으로 돌아가 지내던 중 1893년 9월 미국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해 주로 출판 문서운동에 전념한다. 『Korean Repository』는 한국에서 발간된 첫 영문 잡지였는데, 올링거(F. Ohlinger)가 1년간 발행한 후 귀국해 중단됐다가 1895년부터는 헐버트가 아펜젤러와 함께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고, 1898년 12월 통권 60호로 종간하게 된다.
그러다 1901년부터는 헐버트가 『The Korea Review』를 창간해 1906년 12월까지 발간한다. 이 기간 동안 헐버트는 『Korean Repository』와 『The Korea Review』에 한국 민족의 기원과 역사, 언어, 민속, 종교, 교육, 풍습, 산업과 문화 예술 등 한국학 전반에 대해 연구하고 논문 혹은 논설을 발표했다.
1900년 6월 11일에는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가 조직되는데, 이 학회 기관지가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이 기관지가 일반적으로 ‘紀要’로 불린다)』로, 1900년부터 발간됐다.
헐버트는 이 잡지의 편집을 맡았는데, 창간호에 ‘한국적 문화유산의 존속(Korean Survivals)’이라는 글을 실었다. 유영익 박사는 창간호에 게재된 게일의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과 존스의 ‘한국의 초대형 불상’과 함께 이 3편을 한국학에 대한 본격적 논문이라고 평가했다.
▲선교사이자 한글을 사랑했던 언어학자 호머 헐버트에 의해 재해석된 동화 별주부전, <엄지 마법사(Omjee the Wizard)>. ⓒ박물관 제공
헐버트는 그동안 위의 두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수합해 1905년에는 두 권으로 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2 vols)>를, 1906년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이 책에 대해 연희전문학교 총장이던 백낙준 박사는 “달레와 꾸랑 등 두 프랑스 저자들의 기념비적 저작을 제외하고는 1906년까지 서양인이 서양의 언어로 기록한 한국에 관한 저술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상세하며 권위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 서론에서 자신의 한국사 연구는 ‘사랑의 노작(labour of love)’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의미였다. 헐버트야말로 교사이자 역사가, 언어학자, 언론인이자 출판인이었고, 한국학 연구가였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헐버트 선교사의 묘.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는 글이 쓰여 있다. ⓒ크투 DB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을 만큼 한국을 사랑했고,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했던 이가 바로 그였다.
헐버트는 한국학 연구 외에도 1895년 춘생문 사건에도 관여했고, YMCA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헤이그 세 밀사의 활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1907년 한국을 떠났는데,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1949년 7월 29일 내한했으나, 86세였던 그는 긴 여행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8월 5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이상규 박사. ⓒ크투 DB
이상규 박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