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사
대한불교법화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수암사(水庵寺)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종(재위:1863∼1907) 때 편찬된 《청안군읍지(淸安郡邑誌)》에는 폐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1957년에 절 아래 효재마을 사람들이 부서진 탑재들을 모아 탑을 세우고 불상을 발굴하여 보호각을 세운 뒤 절 이름을 보안사라고 지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고, 유물로는 대웅전 내에 모셔진 약사불좌상과 삼층석탑, 석불입상, 탱화 5점이 전한다. 이 중 석불입상은 대좌와 불상을 돌 하나로 만든 보살상으로 가슴에 영락을 둘렀다. 균형있는 몸매와 사실적인 옷 등이 주목되는 작품이지만 머리 부분과 무릎 부분이 잘라나갔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든 보안사삼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운 것으로 반석이 노출되어 있다. 기단은 모두 4장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1층에 비하여 크기가 급격하게 작아지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1층 탑신에 감실을 마련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평창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48호)과 의성 빙산사지오층석탑(보물 327호)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높이 3.25m로 2000년 8월 1일 보물 제1299호로 지정되었다.
보안사 삼층석탑
보물 제1299호
당초에는 이 석탑이 있는 사지(寺址)의 이름을 알 수 없었으나 1956년 이 사지에 보안사를 세우면서부터 보안사삼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이 탑이 1942년경에도 유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지대석(地臺石)은 확인할 수 없으나 기단은 남북면에서 면석을 조합하여 단층기단부를 형성하고 탑신(塔身)을 올렸다. 지대석(地臺石) 위에 우주(隅柱)가 조각된 너비 46㎝, 높이 85㎝인 4개의 면석(面石)으로 중석(中石)과 너비 123㎝, 높이 13㎝의 갑석(甲石)을 얹은 기단부와 전면 중앙에 가로 10㎝, 세로 12.5㎝, 깊이 3㎝의 방형 감실(龕室)을 조식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둔중(鈍重)하여 낙수면(落水面)이 급하며 옥개석 받침은 3단, 초층에서는 2단으로 되어 있다. 탑신은 1층에 비해 2·3층이 크게 체감되었고, 상륜부(上輪部)에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다.
석탑의 각 부재는 비교적 완전하나 전체적인 체감비율과 옥개받침의 약식화 등을 볼 때 고려 후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신부(塔身部)에 감실(龕室)이 조형된 석탑은 극히 이례적인 예에 속하므로 학술적으로 주목된다.
시골 농가에 위치한 보안사 삼층석탑
보안사 약사전
보안사 여래좌상
보안사 석조여래좌상
문화재자료 제22호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에 있는 보안사(寶安寺) 대웅전 안에 모시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으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남아 있지 않으나 불상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얼굴에 비해 어깨가 위축되었으며 턱을 내리는 등 조각수법이 둔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위에 약그릇을 들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없어진 상태이며, 약사여래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현이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 후기 불상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보안사 약사전내 지장보살상
보안사 약사전내 탱화
보안사 요사채
첫댓글 깨어진 석탑을 세운 정성에 신심을 내어 합장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