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hall please 플라시보 효과
15년 전 중국 티베트 라싸 공항. 3500m 고지라는 동행의 말에 멀쩡하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로 들어가야 했다. 여인숙 수준 호텔에 두통약은커녕 영어가 통하는 직원도 없었다. 그때 방구석에 비닐 마스크가 달린 통이 눈에 들어왔다. ‘Life Saver(생명 구조품)’ 명찰을 보는 순간 안도했다. 방값보다 바가지 수준인 10달러를 내고 마스크를 썼다. 공급되는 ‘순 산소 ’덕분에 두통도 금방 사라졌다. TV도 제대로 안 나오는 여인숙에 100% 산소를 쉽게 만드는 기기가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내부가 궁금했다. 힘들게 열어 본 상자는 허술했다. 어항에 뽀글뽀글 공기를 내뿜는 5000원짜리 공기발생기만 덜렁 있다. 그동안 공기만 마신 셈이다. 그때까지 괜찮던 머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상자를 열지 않았어야 했다. 산소를 마시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고산병 두통이 사라지는 플라시보(Placebo·위약·僞藥) 효과였다.
뇌세포 훈련하면 생각만으로 치료
잘 될 거라는 기대가 도파민 생성
파킨슨·우울증 등 두뇌 질병에 효과
사촌이 논 사면 질투심에 스트레스
나쁜 물질 생성돼 실제로 배 아파
환자에 대한 의사의 부정적 멘트
악영향인 ‘노시보 효과’ 불러
고산증은 머리를 아프게 한다. 올라갈수록 공기(산소)가 희박해져 3500m에서 혈액 포화 산소농도는 평지의 85%다. 인체 공급 에너지·산소 20%를 쓰는 두뇌는 산소부족으로 초비상이다. 부족해진 산소공급을 늘리려고 경보물질(PGE2)을 만들어 두뇌혈관을 확장시킨다. 늘어난 혈관으로 머리가 아파진다. 혈액 속 이산화탄소농도도 떨어지면서 두통은 더해진다. 비상 대응책으로 캔 속 순 산소를 마시면 혈액산소가 높아져 두통이 없어진다.
필자가 호텔방에서 마셨던 ‘가짜 산소’는 어떻게 두통을 없앴을까? 단지 기분 탓일까? 아니다. 이탈리아 투린 의대 연구에 의하면 고산지대에 있는 사람이 플라시보 산소(가짜 산소, 공기만 공급)를 마시면 혈액 내 산소농도는 평지의 85% 그대로다. 하지만 두뇌 생산 경보물질은 진짜 산소를 마신 것처럼 낮아진다. 낮아진 경보물질 탓에 혈관확장이 줄어들어 머리가 안 아프게 된다. 생각만으로 실제 두통원인물질(PGE2)이 줄어든 것이다. 티베트 숙소에 있었던 가짜 산소통은 경위가 어떻든 필자 고산증을 없앴다. 플라시보 효과를 티베트 숙소 주인은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그는 유능한 의사이고 몰랐다면 사기꾼이다. 의사이면서 사기꾼 취급을 받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1796년 미국 코네티컷 의사 엘리사 퍼킨스는 ‘만능치료봉’으로 특허를 받았다. 7㎝ 크기 금속 봉으로 통증 부위를 문지르면 신기하게 통증이 감소됐다. 독특한 금속성분 때문에 통증부위 전기특성이 변하기 때문이라 했다. 당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구매했다고 입소문이 퍼졌다. 의사협회가 효과검증을 해도 반반이었다. 얼마 후 결정적인 반대결과가 나왔다. 눈을 가린 상태에서 나무 봉도 통증을 가라앉혔다. 결국 퍼킨스는 사기꾼으로 매도되었고 이후 만능 치료봉을 쓰는 의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기꾼이 아니었다. 플라시보 효과를 최초로 의료계에 알린 선구자다.
내가 주도해서 좋게 만드는, 심리적 요인이 핵심이다. 통증·파킨슨·위궤양·과민성대장염·우울증·발기부전에 플라시보 효과가 크다. 모두 두뇌 관련 질병이다.
통증은 두뇌가 느낀다. 약으로 통증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면 굳이 고통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가짜 약(플라시보)을 먹으면 통증이 가라앉는 이유다. 2016년 노스웨스턴 의대팀은 만성 관절염환자 56명에게 진짜와 가짜 약을 투여한 결과 참여자 50%가 가짜 진통제에도 진짜처럼 통증해당 두뇌부위가 반응함을 기능성 자기공명장치(fMRI)로 확인했다. 이 부위를 외부에서 자극할 수 있으면 약, 수술 없이도 만성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
‘복싱 전설’ 무하마드 알리가 32년간 파킨슨 투병 끝에 2016년 6월 사망했다. 파킨슨은 두뇌도파민이 적게 생산되면서 운동신경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병이다. 캐나다 연구팀이 유명학술지 ‘사이언스’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가짜 약(설탕)을 환자에게 먹였더니 15m를 30분 걸려 걷던 파킨슨 환자가 마치 약 먹은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갔다. 치료효율은 진짜 약의 25%였다. 중중 파킨슨 환자 경우, 두뇌에 전극을 삽입해서 운동관장부위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 경우 전극을 끄고 환자에게는 켰다고 하면 실제 켠 것 같은 운동효과가 나타난다. 가짜 수술을 해도 치료효과가 나타난다. 가짜 약이나 가짜 치료에 반응하는 부위는 ‘보상회로(reward circuit)’다. 가짜 약이지만 ‘잘 될 거라는 기대’로 실제 도파민을 만들게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왜 배가 아플까? 질투심에 스트레스 물질(코르티솔)이 두뇌에서 생기고 이 신호가 두뇌-대장 신경을 따라 배에 전달된다. 위궤양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많이 생긴다. 위궤양 치료약 ‘타가메트’는 프랑스에서 60% 치료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타가메트 이름의 가짜 약이 59% 치료효과를 보였다. 과민성 대장염은 세균 감염 대장염과는 달리 기분에 따라 증상이 오르내린다. 과민성 대장염 환자 40%는 가짜 약을 먹기만 해도 증상감소효과를 보였다.
플라시보 효과가 가장 큰 질환은 우울증이다. 2015년 FDA에 의하면 우울증은 진짜 약으로 41%, 가짜 약으로 32% 줄어든다. 심리적 요인이 80%다. 가짜 약도 그 효과가 오래 간다. 7주간 가짜 우울증 약에 효과가 있던 그룹은 그 후 12주간 가짜 약을 먹어도 79%가 효과가 유지됐다. 우울증은 플라시보 효과를 톡톡히 보는 질환이다.
비아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다. 발기는 시각·상상으로 두뇌가 신호물질을 보내 혈관을 확장해 이루어진다. 비아그라는 79% 효과를 보인 반면 가짜 비아그라는 17% 효과를 보였다. 섹스상대나 기분에 따라 발기상태가 급변하는 점을 감안하면 플라시보 효과가 클 것 같지만 우울증 플라시보 효과(79%)에 비하면 작다. 청소년 시기는 의지와 상관없이 잠잘 때도 발기된다. 즉 발기부전 현상은 심리적 요인 이외에 육체 상태가 크게 좌우한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잘 믿어 그만큼 큰 플라시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반면 치매환자는 효과가 거의 없다.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어 이 약이 좋을 거라는 생각을 못해 심리적 기대효과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플라시보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 작은 약보다는 큰 약이, 분말보다는 캡슐약이, 안 알려진 약보다는 유명브랜드 약이, 약보다는 주사가 효과가 크다. 그만큼 기대감이 중요변수다. 플라시보 치료효과를 좌우하는 사람은 환자일까, 의사일까.
2016년 10월 이스라엘 의대팀은 가짜 약을 먹는다고 환자에게 알려주어도 치료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진짜 약을 먹는다고 생각해야만 치료효과가 있다는 플라시보 기존 상식을 뒤집는 결과다. 연구팀은 만성허리통증 환자 97명을 대상으로 가짜 약을 먹어도 치료가 되었던 실제 사례를 15분간 설명했다. 이후 3주 실험결과, 플라시보 약이라고 알고 먹은 그룹의 치료효율(30%)이 아무것도 안 먹은 그룹(9%)보다 3배 높았다. 연구진 해석은 이렇다. 이 약이 여하튼 효과가 있다는 의료진의 긍정적 설명, 실제로 약을 먹고 치료에 참여한다는 사실, 즉 의료시스템 신뢰가 플라시보 효과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의사의 긍정적 격려가 플라시보라면 부정적 멘트는 ‘노시보(Nocebo)’, 즉 악영향을 미친다. 전립선비대증 치료약(피네스테라이드)이 발기부전 부작용이 있다는 의사 설명을 들은 그룹이 안 들은 그룹보다 3배 높게 실제로 발기부전이 됐다. 같은 진통제 주사라도 ‘편해질 겁니다’와 ‘따끔해도 참아야 합니다’는 하늘과 땅 차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환자에게 ‘냉철한’ 의학정보도 중요하지만 힘을 내게 하는 의사의 ‘훈훈한’ 격려 한마디가 때로는 더 효과적이다. 영국 의사 97%가 환자에게 플라시보, 즉 가짜 약을 처방한 경험이 있다. 물론 치료목적의 선한 의도다. 플라시보 처방은 정직함과 치료 우선 사이 딜레마다. 환자-의사 사이 솔직한 소통·신뢰구축이 딜레마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