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르 미싸빕
예레 20,10-13; 요한 10,31-42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26.3.27
선과 악이 뒤바뀌면 의인이 죄인처럼 단죄당하고 악인이 선인처럼 위장하여 현실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동족들에게 박해받던 예언자 예레미야가 따돌림당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하느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이 기도에서 사면초가로 고립된 자신의 처지를 사람들이 놀려대는 말이 히브리어로 ‘마고르 미싸빕’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반항하는 동족 유다인들이 돌로 치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과 물로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믿지 않더라도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아서라도 하느님은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때는 요시아 왕이 한창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기원 전 7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아의 개혁은 신하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제들의 고질적인 부패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남유다 왕국은 급속하게 몰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 등 주변 강대국들은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어떻게든 애써야 했으나, 요시아 왕과 백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가짜 예언자와 가짜 사제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안팎이 어렵던 시절인데도, 이 청맹과니 예언자 사제들은 딴청을 피우며 멍청한 낙관론을 유포하였습니다(예레 5,12). 그러나 예레미야가 받은 하느님의 말씀은 정반대로 ‘소름끼치는 무서운 일’(예레 5,30-31), 즉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빌론으로의 유배였습니다(예레 20,4-5).
그런데도 유배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도 지배자만 바뀌었을 뿐 그리스와 로마 등 강대국의 지배는 지속되었고, 이제는 자기 땅에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께 대적하려 드는 못된 버릇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가르치신 바를 들으면서도 되려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몰고 가면서 돌을 던져 죽이려고까지 드니까, 답답해지신 그분께서(요한 10,32)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 즉 아담의 후손이자 노아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느님께 관한 특별한 신앙적 교훈을 듣고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정체성으로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주변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반사해서 전해 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일을 하고 계신 분을 신성모독자로 간주하고는 돌로 쳐서 죽이려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감쪽같이 벗어나셨습니다(요한 10,39). 이렇게 하여,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의식조차 걷어 차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리운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상기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의식을 곧추 세우는 거룩한 때입니다. 더욱이 복음화 제3천년기를 맞이한 가톨릭교회가 아시아 복음화라는 역사적 소명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각별한 여망으로 당부하고 있는 정체성과 사명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2007년에 가톨릭신문이 창간 80주년을 맞이하여 주최한 심포지움에서 심상태 몬시뇰이 발표한 글(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한국 교회의 진로)의 요지를 발췌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한국교회는 발전과 쇠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 역사적 순간에 한국교회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택해야 할 도정은 분명하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준비하고 아시아 주교연합회의가 닦아온 길을 신실하게 걸으려는 결의를 해야 할 것이다. 복음화의 결정적 요체를 주요하고 보완적인 다음의 두 국면들로 간주한다. 하나는 아시아 종교와 문화의 복음화 국면, 다른 하나는 창조의 목표로서의 하느님 나라 구현을 위한 국면이다.
1. 아시아 문화의 복음화를 위한 한국 교회의 주된 과업은 상이한 문화들 사이의 가교 역할이다. 현재와 미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선조들처럼 다종교적 한국 문화 안으로 침수될 때에만, 다양한 종교 전통들과 화해를 이룬 뒤 이 전통들의 풍요로움을 아시아와 세계 안의 자매 교회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가교 역할은 인류 문화의 풍요와 아시아 복음화 실현에 본질적 기여를 할 것이다.
2. 아시아의 종교·문화적 전통들은 세계화 과정 안에서 지구적 세속주의와 소비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사회 공동선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다른 종교 신자들, 선의의 인간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할 것이다.
1) 공동선의 강조가 복음화를 위한 기초를 형성할 것이다. 이러한 토대는 이 다수 종교적 대륙 안에서 이룩되어야 하는 복음화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2) 한국 교회는 하느님 나라로서의 ‘사랑의 문화’ 건설을 위한 주도적 투신을 통하여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교우 여러분!
요컨대, 우리의 정체성은 이러한 아시아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회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