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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8: 1-8
여호와께서 임하신 날에 : 아브라함이
우리는 개혁교회의 성경해석과 정통 예배모범에 의해서 주로 인간의 사고와 의논에 의해서 주어진 절기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때로는 국가적이든 극한 어려움을 당할 때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을 정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날도 지정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감사의 날을 맞이하면서 여호와께서 임하신 날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은혜와 그가 행한 일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경건한 생활의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속들과 함께 거룩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극진히 배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영접하게 됩니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대면하여 뵈옵고 그분과 교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아브라함이 맛보고 누린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그분께서 주시는 바 신령한 복의 일부입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입니다.
1) 모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에 나타나셨다고 한 말인지, 이전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여기서 전에 그가 언급하지 않았던 다른 상황들을 소개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들 가운데 전자를 더 지지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의 마음에 새로운 이상으로 확증시켜 주시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성도들의 신앙이 새롭게 되기 위하여 때때로 도움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삭에 대한 그 약속이 사라를 위하여 다시 되풀이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그분의 은혜의 위대성에 영예가 되는 일을 그분이 택했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왈가왈부 할 수 있겠습니까? 이삭에 관한 약속은 아무리 찬양해도 자체의 숭고성(崇高性)에 흡족할 만큼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 약속의 당사자인 이삭에게서 결국 구속과 구원이 세상에 펼쳐집니다. 이 이상들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든지 간에 이삭이 다시 약속되어진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2) 여기 마므레라는 말에 관하여 13장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아마 그곳에는 상수리나무 숲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위치상으로 그의 생활에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사막지역에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비교적 복된 거주지를 부여받아서 살고 있습니다. 상수리 나무 숲과 어우러진 아브라함의 장막은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그의 삶의 모습에 충분히 비견될 수 있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은 아브라함의 마음이나 그의 거처나 그 숲의 그늘이야말로 안식의 좌소에 대한 적정한 비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심으로써 역사선상에 한가지 사건이 펼쳐집니다. 그분은 복은 근원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안식의 근원이십니다.
3) 때가 오정쯤이고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았다가 어떤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1) 사막의 낮이면 사람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입니다. 해가 쬐이자 마자 더위의 고통이 해질 때까지 계속됩니다. 특히 10시에서 오후 3시경은 혹서의 고통이 극심할 때입니다.
(2) 그 이후에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지역이 그곳입니다(19:1-7). 자연의 피해나 지형적 조건은 차치더라도 롯이 살고 있는 지역에 버금가는 음란과 폭력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을 이해하는 배경입니다.
2. 본문 2절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입니다.
1) 모세가 그리 중요한 내용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 거룩한 사람의 후대함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천사를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형상을 입으시고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되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 세 사람을 사랑으로 맞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박애(博愛) 정신을 입증시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진정한 박애의 증거자들인 만큼 우리들의 봉사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대접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봉사들 가운데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대가나 보수도 기대할 수 없는 나그네들을 도와주는 것은 일반 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면 그 다음에는 무슨 대가나 보답을 베풀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손님들과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은 사심이 없이 관대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인간성은 지대한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전혀 모르는 그들을 자유스럽게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렇다고 그들에게서 전혀 유리한 것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호적인 호의를 전혀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준 아브라함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단지 그는 그 손님들의 필요를 들어 주려는 것 외에 전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① 아브라함은 여행으로 지쳐있는 그들을 보고 뜨거운 열기에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②그리고 그는 여행자들에게는 위험스러운 시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지쳐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쉬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아도 인간의 감정 자체가 나그네들을 도와주도록 지시합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자애(自愛)가 강제로 용역에 종사하게 하지 않는다면 으례히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형태입니다.
우리가 보듯이 친구를 잃고 가정적인 위로를 잃어버린 자들보다 더 위로나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냉대하는 자라고 불려지는 것보다 더 불명예스런 일이나 치욕스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보호를 결여하고 우리 도움을 의지하는 자들을 교만스럽게 멸시하는 것은 짐승과 같이 잔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시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와 같이 가리지 않고 모든 손님들을 다 영접해 들였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우리는 평소에 신중성이 몸에 배어 있는 관계로 그것에 대하여 그는 손님들을 분별했다고 봅니다. 모든 나그네를 다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경건한 나그네를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그 초대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 천사들은 그들의 모습과 모든 동작에서 유달리 숭고(崇高)한 면을 입증해 주는 그런 표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들이 포도주와 고기로만 대접할 분들이 아니라 영예(榮譽)를 받으실 만한 분들이라는 것을 결정짓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상들로부터 천사들이 가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지나치게 철학적인 추리(推理)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이런 생각에 반대되는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사도는 처음에는 그들이 아브라함이나 롯에게 천사들이라고 알려진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대접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13:2).
그렇다면 그가 경건한 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리고 특별한 고귀성을 풍기는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조금 쉬어 가시라고 초대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현재 만연되고 있는 인간의 불신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정직성이 그의 행동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접하는 권리는 위험부담을 보다 더 적게 지니면서 행사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수많은 여관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타락성을 단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그리고 인간성의 주요한 의무가 우리들 가운데서 케케 묵은 것이 되어버린 것은 우리 자신들의 잘못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이런 일까지도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살만하면 게스트룸(손님접대 용 방) 하나 정도 있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2) 2절 끝에
“몸을 땅에 굽혀” 라는 말씀에서 이와 같은 존경의 표현은 동방민족들에게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1) 고대 저자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이 신비를 이 행위에서 삭제해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그가 만난 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경배를 했으며, 그러므로 그는 믿음으로 한 하나님 앞에 세 인격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냥 생략하는 것 이상으로 그 제목을 다룬다면 어리석은 짓이며 잘못하면 조롱이나 중상을 받기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천사들이 그 거룩한 사람에 의하여 마치 인간들에게 어떤 임무를 수행하려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영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조금 전에 언급했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자함을 존귀히 하시고 그 대가로 천사들을 그의 손님으로 나타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이 식사를 다 마치고 자기들을 알리기 전에는 그에게 전혀 의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 천사들에게 베풀어 준 것은 단지 인간과 시민적인 존경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생활의 자연스런 한 부분입니다.
(3)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한 분에게 특별히 인사를 했던 것에 관해서는 그 분이 다른 두 분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났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세가 세 천사들 가운데 한 분을 그 대장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렇게까지 황급하게 달려 나아가서 영접하며 엎드린 것은 그이 일상 경건 생활의 한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면서도 천사들이라든지 그분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요, 그의 일상 중에 그리한 것입니다.
3. 본문 3-4절은
“③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④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입니다.
1) 본문 중에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라는 말씀을 먼저 살펴보십시다.
그렇게 겸허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간청하듯 구하는 가운데는 아브라함이 이미 언급했던 그 이유로 감동되어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만약 그가 모든 여행자를 위하여 송아지들을 잡았다면 그의 가산은 얼마 안 가서 곧 그처럼 아낌없는 지출로 말미암아 파산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멸하지 않는 뜻에서 그들의 덕성과 준수한 자질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방황하는 자들이나 군거(群居)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여 대접할 만큼 관대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야맹성이 그 세 사람들을 그토록 충성하여 대접하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그런 은사를 사모했으며 갈망했으며 그들 가운데 나타난 그런 덕성들을 사랑했던 것이 그렇게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또한 그들에게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아브라함 자신에게 그들이 너무 부담감이나 수고를 끼치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작정했을 경우 그의 제안과 간청에 쉽사리 응하여 따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온후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비하거나 수고를 끼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 그리고 그 지역에서는 발을 씻어주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사람들이 타는 듯한 햇빛 아래서 맨발로 여행을 하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리고 뜨거운 열로 탄 발을 시원한 물로 씻어주는 것은 피로를 경감시키는 데에 무척 좋은 치료 방법이었습니다. 마치 이런 말로 들립니다. ‘내가 지금까지 주의 크신 은혜로 여기 살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시옵는데 내게 주신 주의 은혜를 보소서, 그리고 당신들이 내게 오신 것 또한 주의 은혜이옵니다’라는 표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안식과 함께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에너지원을 확보하셔서 다음 여행을 계속하소서” 라고 강권하는 말씀 같습니다.
4. 본문 5절은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입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의 손님들로서 대접을 받은 것만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때마침 잘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당신이 이곳에 오신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지시하에 이곳으로 인도된 것입니다” 하고 암시하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들이 그처럼 편리하게 시간을 맞춰 와서 햇살이 조금 식을 때까지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과 하나님의 섭리에 돌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라는 말씀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중에 친히 보내신 분들로 인식하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말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께 의하여 보내졌다는 사실로 귀착시켜야 된다는 점입니다.
5. 본문 6-8절은
“⑥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⑦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⑧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입니다.
1) 그의 집안에 들어오신 손님들을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돌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잘 체제가 잡힌 가정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우리에게 몇 마디 말로 가정 행정의 건실함과 아름다운 묘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을 체계를 세워서 조직적으로 서둘러 수행합니다. 2절 이하 글의 흐름이 그 사실을 증거 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하기를 원하는 것을 명령도 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집 주인으로서 자기 의무를 수행하려고 달려갔습니다.
그 때에 사라는 장막 안에서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나태하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마음 한편은 아브라함과 같이 그 일에 마음이 쏠려있습니다. 종들은 모두가 명령에 재빨리 순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 훈련된 가족의 놀라운 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각자가 오랜 기간 동안의 실천으로 올바른 단련에 익숙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런 민첩한 일치가 그렇게 갑자기 되어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모세의 주장에서 한가지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먹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그들이 단지 사람들이 먹는 것처럼 보였다고 주해합니다. 그런 공상은 다른 오류의 중개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천사들이 하나의 유령들이었다고 하며 실제 육체를 지니지 않은 자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쪽으로 멀리 빗나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예언적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부재한 것들의 현상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예언적인 이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천사들이 실제로 아브라함의 집에 왔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리고 피조물을 지어내시는 가운데서 날마다 그분 자신을 놀라운 조물주로 입증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당분간 몸을 주셨다는 사실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성취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말하고 걸어갔습니다. 기타 다른 기능들과 같이 그들이 정말로 음식을 먹었다고 결론짓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알리는 적당한 시간이 올 때까지는 자신들을 숨기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잠시동안 사용하시려고 만드신 그 몸들을 신속하게 무로 환원시켜 버리시는 것과 같이 음식자체도 그들의 몸과 함께 파괴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것에 전혀 모호성이 없습니다.
3) 아무튼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셔서 알리시고 하나님 자신의 일을 알리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의 한 면이 칭찬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아내와 함께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에 자기 역량을 총동원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가정과 가속들은 체계가 잘 잡혀 있습니다.
마치 체계가 잘 잡힌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가속들이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친자들이 실제로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곳에 교회적 기쁨과 안식과 권세가 충분히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감사의 날에 저와 여러분의 감사가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총체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것이 포함되면서 동시에 좀 더 영적이었으면 더욱 더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