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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종 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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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여름은 유난히 찜통더위에 힘들었다. 아침부터 찾아든 더위는 그야말로 푹푹 삶는다는 표현이 맞는 듯싶다. 이런 더위가 밤 2, 3시가 넘어서야 제풀에 고개를 숙였으니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선풍기와 에어컨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막내딸이 손자 성일에게 어린이집에서 방학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단다. 그랬더니 제일 먼저 전주 할아버지 집에 가겠다고 했다니 싫진 안했다.
찜통 더위가 기승을 부린 8월 초의 어느날 아침 짐을 챙겨 식구들과 완주군 동상면 계곡으로 달렸다. 굽이진 시골길을 드라이브 하며 코끝에 스치는 아침 공기가 매우 상쾌했다. 길가의 논에는 벼가 무럭무럭 자라며 초록으로 물들었다. 어린 시절, 이 논 저 논에서 도열병에 걸려 붉은 빛으로 물든 논이 많았는데, 그런 논은 한 곳도 보이지 않으니 농사기술이 향상된 것이리라. 나같이 늦깎이 농사꾼도 벼 한 포기 병에 걸린 게 없을 정도니 말이다.
자식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나가면 다리 밑을 좋아했던 아내는 이 날도 어김없이 다리가 보일 때마다 승용차를 멈추게 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에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다리가 햇빛을 가려주니 시원하기 때문이다. 이날도 다리 밑에 가서 살펴보니 평상은 아직도 사용할 때가 아닌 듯 언덕에서 잠자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려고 만들어 놓지 않았나 싶었다. 아내는 그곳에서 놀다보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러기를 서너 번. 동상초등학교 삼거리에서 운일암 반일암 쪽으로 꺾으니 그야말로 천막과 평상이 즐비하게 늘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올라가다가 신원리 촌락이라는 평상을 대여하는 곳에서 맘에 드는 평상을 골라 여장을 풀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에어컨이 필요 없었다. 평상에 누우니 저절로 눈이 감긴다. 물놀이가 목적인 성일이는 튜브를 들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손자에게는 광대가 되어야 따르는 것이 요즘 세태이지 않은가. 성일이 튜브를 밀어주고 끌어주니 하회탈이 되어 행복만점이다. 나도 이런 때가 있었는가 싶다. 외가나 친가나 할아버지 사진도 보지 못하고 자랐으니, 성일이와 많이 놀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일이를 튜브에 태워 주다가 생각하니 천직이 발동되었다. 성일이 혼자 튜브를 타고 놀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저어보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성일이는 물장구치라는 줄 알고 수면을 두드리니 물방울만 튈 뿐이다. 다시 손가락을 모으고 뒤로 저어보기를 주문했다. 제가 탄 튜브가 움직였는지 또 한 번 해보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웃지 않던가. 잘 했다고 박수쳐주며 이번에는 반대편 손으로 저어보게 했다. 성일이가 영재인가? 다음에는 두 손으로, 그 다음에는 발을 뒤로 퐁당대기를.
성일이는 저어보고 퐁당거리며 제 몸이 이동되니까 신기한 듯 얼굴에 하회탈이 지워지지 않는다.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며 다가오라면 손짓 발짓해 가며 제법이다. 가까이 와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눈을 아주 감은 하회탈을 그린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 있는 얼굴이다. 무작정 내가 목표한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아이들에게 채근하기만을 고집한 지난 세월이 죄스러워진다. 좀 더 다정하게 하나하나 터득하게 해줄 걸.
푹푹 찌는 찜통더위의 여름 날 하루. 성일이가 그린 하회탈이 선하다.
△이종희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저서에 수필집 〈임 보고 뽕도 따고〉가 있다. 김제난산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으며, 현재 전북문인협회 감사, 안골은빛수필문학회장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