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8
황제가 된 이후
1. 파리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하였다.
여러 수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과학적으로
2.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이야기는 유명하다.
(보나파르트 라는 제목으로 작곡했으나 황제 소식을 뜯고 제목을
찢어버리고, 영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3. 영국과는 끊임없이 싸웠으나 도버 해협을 넘어가지 못한다.
4. 트라팔가 해전(1805) -- 넬슨 제독에게 초박살이 난다(전함 두 척만 남다)
이 전쟁을 패배함으로 영국을 포기한다.
5‘ 1806년 — 동생들을 나폴리 왕으로, 네델란드 왕으로 책봉함으로
1000년을 유지해 오던 신성로마제국이 사라진다.
이 일로 프로이센과 원수가 되었다.
6. 1806년 — 대륙 봉쇄령을 내린다. -프로이센과 더 틀어진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와 한 판 붙어서 승리한다.
7. 폴란드 침공 – 동생을 왕으로 임명하여 위성국으로 만든다.
이때 러시아가(알렉산드르 1세) 끼어들었다가 깨진다.
8. 폴투갈 침공 – 대륙 봉쇄령을 어겼다고
9. 스페인 정복
(고야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
10. 1810- 1825 — 남미가 유럽의 어수선한 틈을 타서 독립한다.
멕시코의 이달고 신부가 불을 붙였다고 한다.
11. 교황이 협조하지 않자 – 이태리 정복
12. 1813 –수웨덴이 강력하게 반발한다.
자기의 부하를 왕으로 앉히자.
13. 1813 – 60만 대군으로 러시아 원정
(모스코바를 점령했으나. 초토화 작전과
겨울추위가 다치자. 얼어죽고, 굶어죽고—거의 궤멸상태
===> 이태부터 나폴레옹 몰락이 시작하였다.
14. 스페인 독립 전쟁
러시아 원정에서 대패하자 호시탐탐 노리던 유럽 국가들이 들고 일어났다.
15. 라이프리치 전쟁 --1813년에 독일에게 패배
16. 1814 – 유럽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함락
엘바섬으로 유배를 간다.
17. 엘바섬을 탈출 – 파리로 돌아와서 집권한다.-100일 정부(실제는 95일)
18. 워털루 전쟁 – 영국의 윌링컨 공에게 패배하고
붙잡혀서 센트헬레나 섬으로
(영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프랑스의 적대국으로 맞장 떴다. 맞장을 뜨면서
이 시기에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였다.)
*1821년 사망
센트헬레나에서 6년을 살다가 죽었다.
센트헬레나의 영국 총독 허드슨이 무지막지하게 인간적인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의사도 본국으로 쫓아버려서 치료도 잘 받지 못했다. 총독이란 자는
입에 10원짜리를 달고 살았고, 썩은 포도주를 주면서 조롱하고
죽을 때는 버쩍 말라서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은 얼마나 잔인한 동물인가를 느낀다.
머릿카락에 비소 성분이 검출되어 독살설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폴레옹의 군대
그때는 무기의 성능이 낮아서 장총을 장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명중률은 형편 없었다. 그냥 탄막을 형성하는 역할이나 했다.
나폴레옹은 대포에 동태(바퀴)를 달아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주로 밀집한 보병을 향해 쐈다. 이것이 나폴레옹 군대가 승리하는 기폭제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전술이 인구가 적은 스페인이나 러시아와 전투에서는 기능이 그렇게 특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1739년에 편지쓰기 교본이 나왔다. 이 시대는 편지를 쓰는 일이 유행이라기보다는 생활이었다.
문학에서 편지쓰기를 활용하는 이유는, 편지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낼 수 있다. 감성적 표현이 강한 낭만주의 작품에 많이 나타난다.
**혁명 직후의 프랑스
평등 사상을 퍼트렸다.- 법으로 성문화 했다.
봉건제도가 소멸되어 가면서 --> 귀족 계급의 몰락
카톨릭 교회에 반감 – 엄격한 카톨릭의 제약을 벗어난다
사회가 세속화되어 갔다.
신앙의 자유, 유대인의 해방, 종교 재판 폐지
4. 교회도 살아남으려 — 정부와 분리한다.
돈 좋아하는 사제(세속화된 사제)를 쫓아내면서 개혁운동
5. 프랑스는 통일을 완수한다.
*혁명의 공포정치는 구체제와 신체제의 중간에 나타난 무정부 상태라고
설명한다.
* 나폴레옹은 평등주의자이지, 자유주의자는 아니다.
6. 자유주의자가 아니 나폴레옹은 자유를 바라는 예술과 문학은
지원하지 않는다.
7. 프랑스는 황제시대와 공화정 시대의 기억을 함께 가지므로
이후의 역사에 혼란을 겪는다.
***프랑스가 자유, 평등, 박애를 국가 정체성으로 수용하는 것은
이후의 일이다.
** 프랑스 혁명과 민족주의
주변 국가는 모두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평등과 자유)
평등과 자유를 함께 가지는 공동체를 만들자면서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공동체는 민족이 함께 모이는 단결체이다.)
기본 사상은, 인민 주권 사상, 입헌주의, 대의원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 국가를 건설한다.(민족 국가이다.)
나폴레옹의 침략에 시달리던 주변 국가는 나폴레옹과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민족 국가‘라는 캐치플레이즈를 내 걸었다.
혁명 이전(앙시앙 레짐)에는 가족(귀족 가문), 지역, 국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면 혁명으로 이들은 타도의 대상이 되면서 해체 되었다.
새로운 구심점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다.(공동 언어 등
이미 많은 준비 단계를 거치면서 무르익어 있었다.)
민족을 구심점으로 삼는 방법으로, 잘 나갔던 과거의 시대를 불러와서
오늘의 자신들의 공동체와 연결시켰다. 우리는 위대한 후손이다.
잘 나갔던 그 시절을 오늘에 부흥하자는 캐치플레이즈를 내걸었다.
민족과 역사를 연계시켰다.
동부 유럽(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 전통적 신분사회가 해체되면서
귀족이 중심이 되어서 민족국가 건설에 앞장 섰다.
역사학 --- 민족이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민족 신화 만들기, 민족 및 민족 역사를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공간, 즉 영토적 통일을 통하여 민족 형성을 강화했다.
독립 전쟁은 민족 의식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에(19세기 전반에) 이태리와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 진다.)
<참고> 나폴레옹의 여인들
(강의에서는 생략함으로, 그냥 읽어 보십시오)
1. 조세핀이 나폴레옹 역사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조제핀 드 보아르네(1763년 - 1814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내로, 프랑스 제국의 황후면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한때 형수이자 장모 그리고 나폴레옹 3세의 외할머니이다.
유복한 귀족 집안의 딸로 조각 같은 미모를 소유했지만 낭비가 대단히 심했다. 1779년 12월 13일에 프랑스군 장교였던 자작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 결혼해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와 여식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를 낳았다. 1783년에 끝내 이혼했다.
자작 보아르네(전 남편)는 프랑스혁명기인 1794년 7월 23일에 처형됐다. 이혼한 후 체포되어 투옥되나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 8월 3일에 석방되었다.
조제핀은 파리 사교계에서 미모 덕분에 명성을 날렸다. 몇몇 정치인의 애인으로 지내던 중 자신보다 6살 어린 나폴레옹의 구혼을 받아들여 1796년 3월 9일 결혼하였다. 이 결혼을 두고 외젠은 반대하였고 오르탕스는 찬성했다. 나폴레옹 몰래 애인을 만들어서 놀아났다. 나폴레옹의 가족들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불륜을 눈치 챈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귀국한 후 조제핀과 이혼하기로 결심했으나 그녀와 전 남편의 소생인 외젠과 오르탕스의 눈물 어린 탄원과 조제핀을 향한 자신의 열정 있는 사랑 때문에 결혼을 유지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제핀은 나폴레옹을 진지하게 사랑하게 되어 가지만, 나폴레옹의 조제핀을 향한 열렬한 애정은 차갑게 식어가면서 다른 여성에게 눈길을 돌리게 된다.
황후로 즉위한 조제핀의 사치는 황후가 되기 전보다 훨씬 심해졌는데 그녀가 사용한 드레스는 900여벌, 장갑은 1000켤레, 구두는 500켤레가 넘었다. 한해에 장갑 985개와 신발 520개를 주문하기도 했는데 그 비용을 충당하려고 조제핀은 나폴레옹에게는 비밀로 자식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러한 사치 덕에 파리의 의상실과 보석상은 떼돈을 벌었으며, 프랑스의 웅장하고 화려한 궁정은 타국보다 활기를 띠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사치를 좋아하는 경박한 여자라는 악평을 듣게 되었지만 본인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조제핀은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애인들은 자녀를 여럿 낳았기에 그녀의 입지는 계속 위축되었다. 결국 1810년 1월 10일에 적자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한다. 이때 조제핀은 크게 충격받아 오열을 터뜨리며 실신하였다. 그 후, 그녀는 파리 근교의 궁전 말메종(Malmaison)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죽을 때까지 황제의 아내로서 황후라는 칭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외의 여인들은 첫 사랑도 있지만 바람 피운 여인이 많다.
특히 조세핀 몰래 ------,
참고로 이름 정도만 알아보자.
1.클라라
고향 코르시카에서 23세 때 15세의 클라라를 만나 약혼까지 했다.
조세핀에게 마음을 주자 클라라는 다른 장군과 결혼한다.
2. 마리아
폴란드의 부유한 명문가의 딸로서, 조국을 위해 나폴레옹과 사귀었다는 말도 있다.
딸은 낳고, 나폴레옹이 축하했다는 말도 있다.
3. 도트리슈
신성로마제국 마지막 항제 프란츠 2세의 장녀로 조페핀과 이혼 후에
정략 결혼했다.
4. 포린 푸레스
이집트 원정 때 중위 푸레스의 부인에게 첫 눈에 반하여 남편을 외지로 보냈으나,
영국군이 붙잡아서, 일부러 나폴레옹이 있는 키이로로 보냇다고 한다.
슬쩍슬쩍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5. 주세피나 그라시니
밀라노에서 만난 무대 배우 – 나중에 파리에서 활동하도록 해주고
조세핀 몰래 만나 바람피웠다고 한다.
6. 누넬
파리에서 바람을 피우면서 만난 여인(조세핀 눈을 피하면서 만났으니
스릴도 있고, 재미 있었으리라.)
7. 알빈 드 몽트롱
센터헬레나 유배 중에 — 나폴레옹을 많이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8 조르리다
무대배우. 공연 뒤에 궁으로 블러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