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무백열(松茂柏悅)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松 : 소나무 송(木/4)
茂 : 무성할 무(艹/5)
柏 : 잣 백(木/5)
悅 : 기쁠 열(忄/7)
(유의어)
송무백열(松茂栢悅)
지분혜탄(芝焚蕙歎)
혜분난비(蕙焚蘭悲)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백열록(柏悅錄)이란 책이 있다. 근세 금명(錦溟) 보정(寶鼎) 스님이 대둔사에 머물면서 본 귀한 글을 필사해 묶은 것이다.
모두 74쪽 분량에 다산의 글만 해도 '산거잡영(山居雜詠)' 24수와 '선문답(禪問答)', 그 밖에 승려들에게 준 제문과 게송 등 모두 10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 문집에 빠지고 없는 글이다. 초의의 '동다송(東茶頌)'도 수록되었다.
책 제목인 '백열(柏悅)'의 뜻이 퍽 궁금했다. 찾아보니 육기(陸機)가 '탄서부(歎逝賦)'에서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매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타자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 한 데서 따온 말이었다.
송무백열(松茂柏悅)은 뜻을 같이하는 벗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함께 축하해 주는 뜻으로 쓰고, 지분혜탄(芝焚蕙歎)은 동류의 불행을 같이 슬퍼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보정 스님은 대둔사에서 좋은 글을 보고 매우 기뻐 같이 보려고 '백열록'으로 묶었다. 이를 통해 다산이 불교계와 맺은 깊은 인연 한 자락이 새롭게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 옛글에서도 이 말은 자주 쓰이던 표현이다. 예를 들어 '고대일록(孤臺日錄)'에서 '박공간(朴公幹)이 헌납(獻納)으로 승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잣나무의 기쁨(柏悅)이 어떠하겠는가?'나 '사간(司諫) 문자선(文子善)이 형벌을 몇 차례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혜탄(蕙歎)의 지극함을 차마 못 견디겠다'고 쓴 것이 그 좋은 예다.
다산도 '우세화시집(又細和詩集)'에서 벗이 쫓겨났다가 다시 교리(校理)에 기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그것으로 백열의 기쁨을 표시한다는 시를 남겼다.
지금은 남이 잘되면 눈꼴시어 험담을 하고, 남이 못되면 그것 봐라 하고 고소해한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아낄 줄 모른다.
남의 경사에 순수하게 기뻐 얼굴이 환해지고 남의 불행에 내가 안타까워 슬픔을 나누던 그 도탑고 아름답던 송무백열의 심성은 다 어디로 갔나?
송무백열(松茂柏悅)
육기(陸機)는 탄서부(歎逝賦)에서 ‘소나무가 무성하면 측백나무가 기뻐하고, 지초가 불에 타면 혜초가 탄식하네’라고 언급했다.
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
신송무이백열 차지분이혜탄.
참고로 지분혜탄(芝焚蕙歎)이란 지초(芝草)가 불타는 것을 같은 종류인 혜초(蕙草)가 탄식한다는 말로 곧 동류가 입은 재앙은 자기에게도 근심이 되어 가슴 아프다는 뜻이다.
즉 동류끼리 서로 슬퍼하는 일을 비유한 말이다. 지(芝)와 혜(蕙)는 동류이다. 따라서 지분혜탄(芝焚蕙歎)이라고 하면 벗의 불행에 가슴 아파한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송무백열(松茂栢悅)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벗이 잘되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백(柏)은 나무 목(木)에 흰 백(白)을 짝지어 놓은 글자로서, 나뭇결이 희고 고운 것은 잣나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요즈음에 백(柏)은 잣나무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측백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옛날부터 소나무와 잣나무는 항상 푸르면서도 서로 비슷하게 생겨 흔히 가까운 벗을 일컬었다. 뒤에 잣나무와 혼동되면서 측백나무보다는 잣나무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측백나무를 잣나무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송무백열(松茂栢悅)과 같은 뜻의 사자성어로는 혜분난비(蕙焚蘭悲)가 있다. 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는 뜻으로, 벗의 불행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혜(蕙)는 난초의 한 종류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상록교목(常綠喬木)으로 겨울이 되어도 푸른 빛을 잃지 않아 예부터 선비의 꼿꼿한 지조와 기상의 상징으로 함께 어울려 쓰였다.
송백지조(松柏之操: 송백의 푸른 빛처럼 변하지 않는 지조), 송백지무(松柏之茂: 언제나 푸른 송백처럼 오래도록 영화를 누림) 등이 그 예이다.
이처럼 소나무와 잣나무는 항상 푸르면서도 서로 비슷하게 생겨 흔히 가까운 벗을 일컫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송무백열(松茂栢悅)이 대표적인 예로, 벗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일이야말로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시작이자 사람됨의 근본 도리이다.
이런 까닭으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초(楚)나라의 백아(伯牙)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던 절친한 벗 종자기(種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
고사성어로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사람이 평생을 살아 가면서 진정한 벗 한 명을 얻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信松茂而柏悅(신송무이백열)
嗟芝焚而蕙歎(차지분이혜탄)
이 말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벗으로 비유했으나,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 두 수종(樹種)은 사촌뻘이 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고약한 심보에 비하면 지음(知音)을 아낀다는 것은 참 갸륵한 일이다.
소나무 하나도 그냥 지나쳐볼 일이 아니다. 자연에 흐드러지게 숨어있는 비밀이 곧 자연법칙이니 하는 말이다.
길섶을 지나면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소나무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즉 세 사촌이 있다. 소나무에 가까이 가서 솔잎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자.
소나무는 이파리가 두 개씩 묶어 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재래종 소나무 육송(陸松)이다. 연년세세(年年歲歲) 우리와 같이 살아온 그 소나무이다.
자리를 잘 잡은 놈은 길길이 자라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땅딸보 왜송(矮松)으로 남는다. 그러나 낙락장송이나 왜송이나 다 똑같은 종(種)이다.
이와 달리 잎이 짧고 뻣뻣하여 거칠어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 나무의 잎을 따보면 잎이 세 개씩 묶어 나있다. 이 소나무는 리기다소나무로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병해충에 강하다고 하여 일부러 들여와 심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소나무가 있으니, 잎파리가 유달리 푸르러 보이고 잎이 통통하고 긴 잣나무이다. 잎을 잘 관찰해보니 한 통에 잎이 다섯 개나 모여 있지 않은가.
5형제가 한 묶음 속에 가지런히 들어 있어서 다른 말로 오엽송(五葉松)이라고 부른다. 소나무면 다 소나무인 줄 알았는데 잎부터 이렇게 다르니 이것이 자연의 비밀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알고 보면 우리 나라만큼 소나무가 많은 나라도 없다. 예로부터 소나무를 귀하게 여겨 다른 잡목을 골라 베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소나무가 많은 만큼 그 용도도 다양하다.
우리 조상들은 솔방울은 물론이고 마른 솔가지 삭정이와 늙어 떨어진 솔잎은 긁어다 땔감으로 썼고, 밑둥치는 잘라다 패서 주로 군불을 때는 데 썼다. 솔가지 태우는 냄새는 막 볶아낸 커피 냄새 같다고 했던가.
그뿐인가. 옹이진 관솔가지는 꺾어서 불쏘시개로 썼고, 송홧가루로는 떡을 만들었으며, 속껍질 송기(松肌)를 벗겨 말려 가루 내어 떡이나 밥을 지었고 송진을 껌 대신 씹었다.
더욱이 요새 와선 솔잎이 몸의 피돌기를 원활히 해준다 하여 사람들이 솔잎 즙을 짜서 음료로 만들어 팔기에 이르렀다. 그 물이 달콤하기 그지없으니 이는 설탕과 비슷한 과당이 많이 든 탓이다. 또 솔잎에는 배탈이 났을 때 좋은 타닌(tannin)도 그득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소나무는 집을 지을 때 없어선 안될 소중한 존재이다. 우리가 사는 집도 소나무로 지었고, 무덤을 지키는 나무 또한 소나무가 아닌가.
죽은 시체는 또 어디에 누워 있는가. 소나무 널빤지로 만든 관이 저승집이다. 바람소리 스산한 무덤가의 솔잎 흔들림에 근심 걱정을 푸는 해우(解憂)의 집이다. 늘 푸름을 자랑하는 만취(晩翠)의
소나무에는 영양소와 함께 우리의 넋이 들어 있고, 조상의 혼백이 스며 있다. 그러면서 소나무는 우리에게 절개를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인간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소나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금줄의 솔가지 잎에서 시작하여 소나무 관 속에 누워 솔밭에 묻히니, 은은한 솔바람이 무덤 속의 한을 달래 준다.”
한(漢)나라 때 왕길(王吉)은 강직하고 학문도 뛰어난 인물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젊은 시절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있을 때 정조(正祖)의 명령으로 지은 왕길석고사(王吉釋故事)라는 시가 있지만 이 장편시(長篇詩)는 바로 왕길의 일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 왕길에게는 공우(貢禹)라고 하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왕길이 익주(益州)라는 곳의 지방관인 자사(刺史)벼슬로 부임하게 되자 공우가 자기 갓의 먼지를 털었다. 갓의 먼지를 터는 것은 이제 곧 자신도 벼슬길에 오르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과연 왕길의 추천으로 공우는 벼슬에 천거되어 뒤에 간의대부(諫議大夫)라고 하는 요직에 있으면서 나라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러자 세상에서는 왕양재위 공공탄관(王陽在位 貢公彈冠) 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왕양(王陽)이 벼슬에 있으니 공공(貢公)이 갓을 턴다는 말이다. 왕양은 왕길을 가리키고 공공은 공우를 가리킨다.
왕길이 자리에 있자 공우가 갓의 먼지를 턴다는 이야기는 인격과 학문을 갖춘 훌륭한 인물들은 서로 이끌고 도와 준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되었다.
이 이야기는 우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소인들이 무리를 이루어 서로 자리를 차지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이즈음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경쟁만 강요하는 듯하다. 이럴 때일수록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해서 함께 기뻐한다는 백열(栢悅)이라는 말이나 왕길이 벼슬길에 들어 서자 그 친구 공우가 탄관(彈冠)했다는 고사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친구는 울타리다(松茂柏悅)
학교에 신고 간 노랑 고무신을 잃어버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서울 다녀온 아버지가 사다 준 노랑 고무신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검은색과 흰색 고무신만 보았던 나는 학교에는 신고 가지 말라고 어머니가 당부했지만 듣지 않고 이튿날 바로 신고 갔다. 아이들도 처음 보는 노랑 고무신을 모두 만져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 집에 갈 때 텅 빈 신발장을 보고서야 잃어버린 걸 알았다. 여자 친구가 되돌아와 같은 반의 남자아이를 지목하며 품에 뭔가 숨기고 수업이 끝나기 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줬다.
맨발로 집에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심하게 나무랐다. 여자 친구가 귀띔해준 얘기를 하자 어머니가 나를 끌고 신발을 찾아 나설 때 들어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가지 말라며 내게 "그 친구가 가져간 걸 네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의심하면 안 된다. 그 친구가 가져간 게 설사 밝혀지더라도 절대 내색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그렇게 잊힌 노랑 고무신이 소환한 건 아버지다. 고등학교 다닐 때다. 고향 큰집에서 추석 차례가 끝나자 아버지가 불쑥 그 친구를 만나느냐고 물었다. 중학교 졸업한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에 살던 옛집에 가보자고 앞장섰다.
옛집의 뒷담 구실을 하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한참 둘러본 아버지가 둔덕에 앉아 꺼낸 고사성어가 '송무백열(松茂柏悅)'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문학가 육기(陸機)가 쓴 탄서부(歎逝賦)에 나온다. 그가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매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타자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고 쓴 데서 따온 말이다. 벗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함께 축하해 준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고사가 생각나 여기 와 확인해보니 송무백열은 사실과 다르다. 잘 자란 소나무에 비해 잣나무는 잘 크지 못했다"고 했다. 두 나무는 모두 어릴 때 응달을 좋아하는 음수(陰樹)로 소나무가 좀 무성해 빛을 가려주면 훨씬 편하게 자란다. 좀 크면 소나무는 키 크고 잎이 많아 잣나무가 햇빛을 받기 어렵고, 뿌리가 더 깊이 자라는 소나무 때문에 잣나무가 물을 충분히 얻기 어렵다.
아버지는 "송무백열은 문학적으로 바람을 표현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사람은 또래에게 가장 많이 배운다. '친구는 하는 데 난들 못할까'라는 시샘이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은근한 경쟁 관계다"라고 설명했다.
그날 말씀한 아버지의 교우관(交友觀)은 이랬다. '친구(親舊)'는 한자어 '친고(親故)'에서 왔다. 친(親)은 친척, 구(舊)는 '오랜 벗'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척의 의미가 빠지고 '벗'의 의미로 한정해 쓴다. 벗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다. 우리말 '벗기다'에서 유래했다.
친구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장한다. 유사성에 끌리고 친밀성에 사귀고 불변성에 마음을 주는 관계다. 그 관계는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는 마음인 시기심에서 비롯한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뇌 용량이 150명 정도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어 평생 150명의 친구를 사귄다. 200명을 사귀면 성공한 삶이라는 속설도 있다. 친구는 우리에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친구가 많을수록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 더 중요하다.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아버지 말씀은 계속됐다. "친구는 울타리다. 울타리는 안에서도 밖이 내다보이고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며 다만 경계의 역할만 하는 거다. 돌담처럼 막히지 않아야 한다"고 울타리에 비유해 친구를 정의한 아버지는 "울타리는 허술해도 상관없고 없어도 된다"고 단정 지었다.
아버지는 "사귀는 친구 중 보통 5~10명의 친한 친구를 사귄다. 오직 진정한 친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다. 서로 비밀과 약속을 지키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며 "진정한 친구를 직위, 학식, 빈부차를 벗어던진 '벗'이다"라고 한정했다. 벗은 '나 아닌 또 다른 나 속에 새로운 나'라고 엄격하게 규정했다.
아버지는 "나는 벗으로 여기지만, 친구는 나를 벗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격이나 기대치, 경험과 가치관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어 "그때 그 아이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거다. 노랑 고무신은 떨어져 나간 울타리에 준 것 쯤으로 여겨라"라고 주문했다.
아버지는 유대인 격언을 인용해 결론지었다. "친구는 세 종류다. 음식 같은 친구에게 매일 빠져서는 안 된다. 약 같은 친구는 이따금 있어야만 한다. 병 같은 친구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강한 시샘이 싹틔워 깊게 사귀는 우정은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줘야 할 소중한 인성이다.
친구는 울타리다
학교에 신고 간 노랑 고무신을 잃어버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서울 다녀온 아버지가 사다 준 노랑 고무신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검은색과 흰색 고무신만 보았던 나는 학교에는 신고 가지 말라고 어머니가 당부했지만 듣지 않고 이튿날 바로 신고 갔다. 아이들도 처음 보는 노랑 고무신을 모두 만져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 집에 갈 때 텅 빈 신발장을 보고서야 잃어버린 걸 알았다.
여자 친구가 되돌아와 같은 반의 남자아이를 지목하며 품에 뭔가 숨기고 수업이 끝나기 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줬다. 맨발로 집에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심하게 나무랐다. 여자 친구가 귀띔해준 얘기를 하자 어머니가 나를 끌고 신발을 찾아 나설 때 들어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가지 말라며 내게 "그 친구가 가져간 걸 네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의심하면 안 된다. 그 친구가 가져간 게 설사 밝혀지더라도 절대 내색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그렇게 잊힌 노랑 고무신이 소환한 건 아버지다. 고등학교 다닐 때다. 고향 큰집에서 추석 차례가 끝나자 아버지가 불쑥 그 친구를 만나느냐고 물었다. 중학교 졸업한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에 살던 옛집에 가보자고 앞장섰다. 옛집의 뒷담 구실을 하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한참 둘러본 아버지가 둔덕에 앉아 꺼낸 고사성어가 '송무백열(松茂柏悅)'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문학가 육기(陸機)가 쓴 탄서부(歎逝賦)에 나온다. 그가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매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타자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고 쓴 데서 따온 말이다. 벗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함께 축하해 준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고사가 생각나 여기 와 확인해 보니 송무백열은 사실과 다르다. 잘 자란 소나무에 비해 잣나무는 잘 크지 못했다"고 했다. 두 나무는 모두 어릴 때 응달을 좋아하는 음수(陰樹)로 소나무가 좀 무성해 빛을 가려주면 훨씬 편하게 자란다. 좀 크면 소나무는 키 크고 잎이 많아 잣나무가 햇빛을 받기 어렵고, 뿌리가 더 깊이 자라는 소나무 때문에 잣나무가 물을 충분히 얻기 어렵다.
아버지는 "송무백열은 문학적으로 바람을 표현했을 뿐이다"고 평가했다. 이어 "사람은 또래에게 가장 많이 배운다. '친구는 하는 데 난들 못할까'라는 시샘이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은근한 경쟁 관계다"라고 설명했다.
그날 말씀한 아버지의 교우관(交友觀)은 이랬다. 친구(親舊)는 한자어 '친고(親故)'에서 왔다. 친(親)은 친척, 구(舊)는 '오랜 벗'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척의 의미가 빠지고 '벗'의 의미로 한정해 쓴다. 벗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다. 우리말 '벗기다'에서 유래했다.
친구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장한다. 유사성에 끌리고 친밀성에 사귀고 불변성에 마음을 주는 관계다. 그 관계는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는 마음인 시기심에서 비롯한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뇌 용량이 150명 정도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어 평생 150명의 친구를 사귄다. 200명을 사귀면 성공한 삶이라는 속설도 있다. 친구는 우리에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친구가 많을수록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 더 중요하다.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아버지 말씀은 계속됐다. "친구는 울타리다. 울타리는 안에서도 밖이 내다보이고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며 다만 경계의 역할만 하는 거다. 돌담처럼 막히지 않아야 한다"고 울타리에 비유해 친구를 정의한 아버지는 "울타리는 허술해도 상관없고 없어도 된다"고 단정 지었다.
아버지는 "사귀는 친구 중 보통 5~10명의 친한 친구를 사귄다. 오직 진정한 친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다. 서로 비밀과 약속을 지키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며 "진정한 친구를 직위, 학식, 빈부차를 벗어던진 '벗'이다"고 한정했다. 벗은 '나 아닌 또 다른 나 속에 새로운 나'라고 엄격하게 규정했다.
아버지는 "나는 벗으로 여기지만, 친구는 나를 벗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격이나 기대치, 경험과 가치관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어 "그때 그 아이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거다. 노랑 고무신은 떨어져 나간 울타리에 준 것 쯤으로 여겨라"라고 주문했다.
아버지는 유대인 격언을 인용해 결론지었다. "친구는 세 종류다. 음식 같은 친구에게 매일 빠져서는 안 된다. 약 같은 친구는 이따금 있어야만 한다. 병 같은 친구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강한 시샘이 싹틔워 깊게 사귀는 우정은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줘야 할 소중한 인성이다.
▶️ 松(소나무 송/더벅머리 송, 따를 종)은 형성문자로 鬆(송)의 간자(簡字), 枀(송), 枩(송), 柗(송)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公(공, 송)으로 이루어졌다. 잎의 색깔이 언제나 변치 않는 상록수(常綠樹)의 뜻이다. 소나무를 그 대표적인 것으로 삼았다. 그래서 松(송, 종)은 성(姓)의 하나로 ①소나무 ②더벅머리(더부룩하게 난 머리털) ③성(姓)의 하나 ④느슨하다 ⑤헐겁다 ⑥긴장(緊張)이 풀리다 ⑦기분(氣分)이 가볍다 ⑧여유(餘裕)가 있다 ⑨풀다 ⑩해이(解弛)하다 ⑪게으르다 ⑫거칠다 ⑬놓다 ⑭헝클어지다 그리고 ⓐ따르다(종) ⓑ좇다(종)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송백(松柏), 소나무나 잣나무 따위의 줄기에서 내솟는 끈끈한 액체를 송진(松津), 소나무의 꽃 또는 그 꽃가루를 송화(松花), 소나무와 대나무를 송죽(松竹), 소나무 숲을 송림(松林), 소나무 사이를 송간(松間), 소나무의 잎을 송엽(松葉), 소나무를 켜서 만든 널빤지를 송판(松板), 송충이로 솔나방의 애벌레를 송충(松蟲), 소나무 숲 속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송경(松徑), 큰 소나무를 거송(巨松), 노송나무의 준말로 늙은 소나무를 노송(老松), 오래 된 소나무를 고송(古松), 외따로 서 있는 소나무를 고송(孤松), 키가 작고 가지가 뻗어서 퍼진 소나무를 반송(盤松), 푸른 소나무를 창송(蒼松), 헌출하게 자란 큰 소나무를 장송(長松), 말라죽은 소나무를 고송(枯松), 소나무를 매우 얇게 켜서 만든 널을 박송(薄松), 소나무 베기 금지령을 어김을 범송(犯松),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송무백열(松茂柏悅), 소나무와 잣나무는 서리를 맞고 더욱더 무성해진다는 뜻으로 건강한 체질을 이르는 말을 송백지질(松栢之質), 가지가 아래로 축축 늘어진 키 큰 소나무를 낙락장송(落落長松), 솔을 심어 정자를 삼는다라는 뜻으로 바라는 일이 까마득한 것을 가리킴을 식송망정(植松望亭), 깨끗한 땅에는 소나무를 심고 지저분한 땅에는 대나무를 심음을 정송오죽(淨松汚竹) 등에 쓰인다.
▶️ 茂(무성할 무)는 형성문자로 懋(무)는 고자(古字), 枆(무), 柕(무), 楙(무)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戊(무; 무성하다)로 이루어졌다. 풀이 무성(茂盛)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茂(무)는 ①무성(茂盛)하다, 우거지다 ②넉넉하다, 풍성(豐盛)하다 ③힘쓰다 ④뛰어나다 ⑤빼어나다, 우수(優秀)하다 ⑥융성(隆盛)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우거질 번(蕃), 번성할 번(繁)이다. 용례로는 풀이나 나무 따위가 우거지어 성함을 무성(茂盛), 나무가 우거진 숲을 무림(茂林), 재주와 덕행이 뛰어난 선비를 무사(茂士), 학문에 힘씀을 무학(茂學),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무재(茂才), 많이 일어나 퍼짐을 번무(繁茂), 무성하게 자람을 창무(暢茂), 번화하고 무성함을 영무(榮茂), 몹시 무성함을 자무(滋茂),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송무백열(松茂柏悅), 공을 꾀함에 무성하고 충실하다는 말을 책공무실(策功茂實),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른빛이 변하지 않듯이 오래도록 영화를 누림을 이르는 말을 송백지무(松柏之茂) 등에 쓰인다.
▶ 柏(잣나무 백)은 형성문자로 栢(백)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白(백)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柏(백)은 ①측백, 측백나무 ②측백나무의 잎 ③잣, 잣나무 ④가까워지다, 다가오다 ⑤크다 ⑥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소나무과에 딸린 늘푸른 바늘잎 큰키나무를 백목(柏木), 잣나무의 열매를 백자(柏子), 동백기름을 백유(柏油), 측백나무의 어린 잎을 말려서 달인 차를 백탕(柏湯), 소나무와 잣나무를 송백(松柏), 동백나무의 열매를 동백(冬柏), 노송나무틀 혈백(血柏), 측백나무를 즙백(汁柏), 황벽나무를 황백(黃柏), 동백나무를 총백(叢柏), 봄에 꽃이 피는 동백나무를 춘백(春柏),
원백노송을 달리 이르는 말을 원백(圓柏), 추운 계절에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잎이 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역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은 절개를 의미하는 말을 세한송백(歲寒松柏),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송무백열(松茂柏悅), 눈 속의 송백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와 잣나무는 눈 속에서도 그 색이 변치 않는다 하여 절조가 굳은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설중송백(雪中松柏),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라는 뜻으로 굳은 절개를 이르는 말을 송백지조(松柏之操),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른빛이 변하지 않듯이 오래도록 영화를 누림을 이르는 말을 송백지무(松柏之茂) 등에 쓰인다.
▶️ 悅(기쁠 열)은 ❶형성문자로 恱(열), 悦(열)의 본자(本字)이고 說(열), 兌(열)과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兌(태; 없애다, 열)로 이루어졌다. 마음의 바르지 않음을 없애다의 뜻이 전(轉)하여 기뻐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悅자는 '기쁘다'나 '기뻐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悅자는 心(마음 심)자와 兌(빛날 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兌자는 兄(맏 형)자 위로 八(여덟 팔)자를 그린 것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웃음소리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그린 兌자에 心자가 더해진 悅자는 매우 기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悅(열)은 ①기쁘다 ②기뻐하다 ③심복하다 ④사랑하다 ⑤손쉽다 ⑥기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기쁠 희(僖), 기쁠 희(喜), 즐길 오(娛), 기쁠 이(怡), 즐거울 유(愉), 기쁠 희(憘), 즐길 낙/락(樂), 기쁠 흔(欣), 기쁠 환(歡), 달 감(甘), 즐길 탐(耽)이다. 용례로는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열락(悅樂), 즐거이 사랑함을 열애(悅愛), 기쁘게 여기어 사모함을 열모(悅慕), 음식이 입에 맞음을 열구(悅口), 기쁜 마음으로 순종함을 열복(悅服), 기뻐하는 얼굴빛을 열색(悅色), 어버이를 기쁘게 함을 열친(悅親),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열예(悅豫), 좋아하여 반함을 열미(悅美), 눈을 즐겁게 함을 열안(悅眼), 입에 맞는 음식을 일컫는 말을 열구지물(悅口之物), 이상以上과 같이 마음 편히 즐기고 살면 단란한 가정임을 일컫는 말을 열예차강(悅豫且康), 부근에 있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먼 곳의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든다는 뜻으로 덕이 널리 미침을 이르는 말을 근열원래(近悅遠來),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송무백열(松茂柏悅), 남녀가 좋아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화락함을 이르는 말을 남흔여열(男欣女悅),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일컫는 말을 심열성복(心悅誠服), 각 사람의 마음을 다 기쁘게 함을 이르는 말을 매인열지(每人悅之), 선정으로써 심신을 도우며 침식마저 잊고 즐겁게 생활함을 일컫는 말을 선열위식(禪悅爲食)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