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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共을 조롱하는 교회 내 진골귀족 ‘모태신앙’과 한판 붙다.
-열린 신학관을 천만번 인정해도, 기독교인이 반드시 싸워야 할 악마로서의 의미-
1. 유교제사에 대한 기독교인의 갈등을 해결해 준 대통령-김영삼. (기독교 위했나?)
한국 교회 세속화와 성령물길의 절단을 가져온 대통령-김영삼 (기독교에 독극물 퍼부은 장본인?)
한국 인문학에 엄청난 돈을 퍼부은 대통령-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인문학 위했나?)
인간중심주의를 어디에서도 사라지게 한 대통령-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인문학에 독극물 퍼부은 장본인?)
기독교신자들에겐 이름하여 ‘주일’이다. 한 주 동안 지은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는 자리에서는, 적어도 신학대학 종교 도서관에 그득 그득 한 것의 해변의 먼지부분만큼도 안 읽고서, <김용옥 닮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장경동 목사에 대한 안티 글을 적은 것은 분명히 교만이었음을 알게 한 한 주이다. 인생의 절절한 깨달음을 담은 초감동 설교에서 영락없이 침을 질질 흘리며 조는 ‘자매’에게도 하나님이 응답할 것임을 믿게 되었던 한 주이다. 언젠가 문서화된 채 남아있는 설교가, 연령이 먹어서 다시 올 때 은혜스러울 수 없겠는가?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종교 서적의 다양한 신학적 세계관이 있음을 알 때, 자기 기준의 비평적 글을 자제하는 이유는 성경 기록 대로 라면 그러하다. “비판받고 싶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그러나, 어떠한 관념에 의미가 남아 있으려면 아무리 열려도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 반드시 존재한다. 한국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교회와,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성도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근본적 원천이다. 그러한 단위가 존재하기 위해서 기독교인이 불신자(비기독교인/유물론자)등과 반드시 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명제에 바탕된 세계관이다.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파생 보수 이론 신봉자)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
(불신자, 무신론자, 유물론자)----만물의 주인은 민중.
모태신앙을 주장하면서도 도대체 ‘만물의 주인이 민중’으로 전제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물론, 보수주의를 보수주의이게 하는 의미상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려서, 스스로 생각하여 합리적인가 믿는 3040에 불합격수준인 조,갑,제기자에 비판해왔기에, 그러한 체험 차원으로서 거침없이 한탕 붙었다.
[주석-보충글] 만물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차원이 ‘인본주의’와 ‘휴머니즘’,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란 차원을 ‘神本主義’로 설정할 수 없다. 1950년대에 공산주의자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 등과 국내에도 알려진 에리히 프롬이 맑스주의 휴머니즘을 주장했으나, 그것은 철학사적으로 잠시 일어났다 사라진 찻잔속의 폭풍에 지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과 로마교황(짐승-김일성/김정일/각종 독재자 포함)과 함께 하는 인간의 두 가지가 가능하다. 서구 보수주의는 모두 ‘중세’가 아닌 ‘근대’(modern) 사상이다. 근대사상인즉 곧 인간의 사상이다. 보수 사상인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사상’이다. (다른 답을 말하면, 현대사상사의 계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과,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의 구분.
혹은
자유시장주의를 번화케하는 근대사상과 함께하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과, 지배계급의 기독교를 믿는 한에서 지배계급의 노예가 된다는 인간의 구분이 가능하다.
자유시장경제에 도움주는 게 아니라, 지배계급의 안정화에 도움주는 종교란 생각이다. 맑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는 문구로 유명하다. 근로자들도 머리를 쓰면 지배계급을 붕괴시킬 수 있는 차원을 생각한다하여, 기독교의 말씀을 놓은 헤겔의 정신과 이성 대신에 근로자의 변혁사상이란 ‘철학’을 중심으로 놓은 것이 맑스의 사상이다.
2. 박대통령, 전대통령 시절의 대중성- “***인 것 같아요” (국정원이 무서워요.)
2006년의 대중성-“이거 인 것 같기도 하고 저거 인 것 같기도 하고, 많은 정보 대충은 아는데요, 아무 생각 없거든요. 꼬시든데로 불러갈께요. 솔직히 말하면 짠하니 ‘중도파’라고 해주셔요.
----교회 내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나? ------
예전 국민학교에서 글쓰기를 시키면 대다수가 ‘***인 것 같애요’ 남발이었다. 오늘의 초등학교는 글쓰기를 시키면 ‘이거 인 것 같고 저거 인 것 같고, 에이 싫어요. 결론 안 낼래요’로 쏠릴 것이다.
분명한 세계관을 가진 숫자보다는 아무 생각 없는 이들이 주인으로 대접받는다. 이른바 ‘중원’이란 이름 하에 불려진 실상은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관에서 분명한 선택이 없이 ‘아무 생각 없는 파’이다.
이명박이 한국 현대사 속에서 6.3의 현재적 의미로 좌익이란 분류라는 데에서도, ‘교회 내’ 진골귀족 직분인데 팔이 안으로 굽지 하고 아무 말도 묻지 않는 이들을 통해볼 때, 이러한 공식이 가능하다.
실제로 교회 참석자 중에서 상당수가 명확한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임을 알지 못하고, 좌익 정보와 우익 정보를 대충 버무려 놔서 통계 자료를 볼 때 여론조사관이 ‘야가 생각 있는 놈이노 없는 놈이노’할 만 한 지경과 비슷하게, 이 인간이 크리스챤이노 아니노 하는 분명한 차원이 ‘모태신앙’이란 한국 교회의 ‘진골귀족’의 이름과, ‘모태신앙’이 상징하는 교회 내에 다수 인맥(아버지 인맥) 있으니 까불지 마하는 차원이 존재하고 있다.
애국의 소리를 가장 높여야 할 때에 ‘적당히 잡탕밥 하자’는 입장과 교회내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과 ‘하나님과 절대로 함께 안하는 인간’을 ‘모태신앙’이란 이름의 어설픈 입장은, 결국은 이명박 시장을 생각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탕 뜬 귀족이 했던 말은 명언이다.
“따지면 종교 못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구약 시대에서도 승리를 향한 움직임이 그려지고, 신약성경에서도 성령의 승리를 향한 양보할 수 없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교회 내 진골귀족 신분은 교회 내 인맥 다 가지고 있어 까불지 마 하지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 공관복음 등에 기록된 헤롯 성전 산에서 예수님의 분노처럼, ‘한국 교회사를 집어서 바다에 던져 버려라’고 할만 한 상황이다.
김영삼의 반공교육 중단은 의미가 있다. 김영삼은 기독교신자에 제사에 대한 압박감을 덜어줬지만---김영삼은 한국 페미니즘의 전성기였고 反유교의 선봉장이었다. ---, 결국 한국 기독교인의 ‘성령중심사상’에 대하여 맑스주의적으로 해체되도록 내부를 마멸시켰다.
3. 맑스 없는 철학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은, 모태 신앙 아니라 모모모모모모모태신앙이라도 신앙의 신실함을 믿을 수 없어.
이명박의 신앙성 노출은 이미 노출된 증거만으로도 넉넉히 신앙을 의심하기에 족하다. 왠만한 신학대학 도서관에 가보면 ‘맑스 없는 철학사’가 책으로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거의 정확한 반대로 ‘보수 없는 정보지’가 알게 모르게 많이 있다.
왜 신학대학은 맑스를 배제했을까?
철학사적으로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며 ‘육체’와 ‘재물’은 땅의 것으로서 땅의 것을 천시하는 가닥에서, <성령중심주의>를 분명히 드러나도록 짠 것이다.
기독교는 말씀중심주의이다. 기독교의 말씀중심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시각중심주의이다. 시각중심주의가 곧 우상숭배(출애급기 ‘개구리숭배’에 대한 인상이 워낙 깊어서, 우상숭배라하면 개구리 숭배만 떠오른다)에 연결된다.
기호학은 cat와 tac의 구분을 하는 쓰여진 바로서의 시각을 중시하는 학문이다. 중세의 수도사가 현대의 kkk단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의 금지영화인 [다빈치 코드]란 영화에서, 시각중심주의를 극대화한 기호학이 성령중심주의 반대편에 있는가를 드러낸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 글이 ‘열린 신학관’을 배제하는 게 아니다.
맑스를 숭배한 함석헌,
맑스를 숭배한 안병무,
맑스를 숭배한 문익환,의 성경 해석은 종교해석이 아닌가?
우리는 흔히 ‘기본학습’과 ‘기초학습’을 떼야 ‘심화학습’을 한다. 맑스를 숭배하는 神學이 한국 교회의 역사와 동시성이었다. 그러나, 맑스를 숭배하는 신학은 신학 단계로서는 동시성일 수 없다. 한국 예수교 장로회 중심의 보수교단과 기독교 장로회 중심의 진보교단의 대립에서 한쪽만이 영원히 옳고 한쪽은 씨도 마르게 해야 한다는 시선의 의미가 아니다. 제대로 정상적으로 공부했다면 ‘맑스 없는 철학사’로서의 성령의 강화를 믿었던 한국 교회의 역사를 옹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맑스 없는 철학사로서 ‘반공시대’는 곧 성령중심 시대였다.
한국 교회는 70년대 교회 부흥의 재현을 주장한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철학사로서 맑스 배제의 철학사를 이해하게 해야 한다. 맑스 철학의 봉쇄를 주장하는 선에서 “읽지도 마” “쳐다 보지도 마”에서 나아가서, 이명박이 입에서 맑스주의를 논할 때 ‘모태신앙’ 아니라 ‘모태신앙 할애비’라도 양보 못해 하면서 신앙을 교정해야 마땅하다.
열린 신앙이라 해도 어떠한 금지도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면, 그것은 자체로서 의미가 없다. 어디에든 다 소용 있는 게 사실은 아무 필요 없는 것이란 차원과 동일하다.
4. 선거운동으로서의 교회 내 진골귀족들을 뭉치표로서 생각하는 이명박의 문제,
맑스주의 연구를 허락하고도 권력을 장악한 진골귀족들의 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 ‘따지지도 말라’며 그게 신앙이라는 자에게, 다가오는 신앙성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한국 사회에 ‘중도세력’이란 이름하에 여당쪽인지 야당쪽인지 아무 생각 없는 표심에서 침묵했던 기독교인들에 묻고자 한다.
무신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입장을, 진골 귀족 모태신앙이란 이름으로 차단하는 경우는, 과연 그것에 대해서 반론 조차도 하지 못하게 봉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예수님이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분노한 헤롯성전이 아니겠나이까?
신앙이 출중하다는 것은 하나의 ‘덕담’으로서 그것에 대해서 파헤치는 것은, 절대로 안되며 교회를 휘어잡은 인맥의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차원의 논거는, 철저하게 깨져야 한다.
열린당인지 한나라당인지 한나라당인지 열린당인지 모르는 중도 세력에 침묵하는 세력이, 과연 무신론자인지 아닌지 하면서 그러면서 ‘모태신앙’ 진골귀족 이름을 부여 받고 있는 상황은 인정할 수 있을까?
박대통령 시대에 권위주의에 숨막혀 모두의 글짓기 습작에 ‘**인 것 같애요’를 남발케한 것을 없앤, 탈권위주의의 배경은 결국 교회 내부의 가장 ‘이너서클’조차도 무신론자가 침투되면서도 ‘중도주의’란 이름으로 비판하지 말아유 하는 풍경이다.
두 번 다시 그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5. 신앙에 무신론자인지 아닌지의 비논리적인 이유가 ‘상대’ ‘공대’란 이유만으로 변명이 될까?
역시, 저절로 이명박에게도 해당이 된다. 이명박은 상대 마인드로 인문대 마인드가 아니다.
한국 보수 세력에 거리를 멀게 하려고 노력하더니, 이제는 북한에 각을 약간만 세우고서 지지해달라고 주장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령중심주의”로서의 반 맑스주의적인 한국 보수 교회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그는 공대란 이유로 변명을 하면서 두 번 다시 논쟁하지 말자고 했다. 솔직히 동감이다. 그 진골 귀족의 정치관을 더 듣고 싶지 않다.
한국 교회의 반 맑스주의는 얼마간은 6.25 전쟁 때의 심리전에서 내부에 대한 동질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북괴가 ‘동무’라고 쓰면 그 말을 쓰지 않는 마인드가 반영이 분명히 있었다. 얼마간, 그러한 마인드도 다시 필요할 때가 되었다.
파산 직전의 대우 기업에 중요한 것은 확장 공세가 아니라 ‘자구 노력’이 맞다. 조,갑,제기자는 전쟁을 꿈꿀 수 있는가라는 글을 쓰기보다, 전쟁 대오로 국민 심리전을 할 수 있는가로 답을 했어야 맞다. 난리가 터지고 도망가면 되겠지 하고서 전쟁 대오 국민 심리전도 없이 전쟁을 하자는 주장은, 정말로 화가 났다. 물론, 명분상 전쟁이 필요하면 할 때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지, 전쟁론자적 감정에 동의하는 바가 아니다.
한기총의 반공의 역사와 소설가 김동리의 시대가 겹친다. 보수 문단의 원로 시인 정현종교수가 보수 문인의 참여를 주장했다. 정확히 세계관을 숙지한 자는 너무 적어졌다.
문학이 왜 말랐을까? 간단하다. 김동리의 1952년판 문학개론에서 ‘기계주의’ ‘물질주의’와 대립각을 이룬 ‘문학’의 실체는 무엇일까? ‘성령’의 반영 수준으로 문학을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 서울대 국어교육과는 김동리의 문학관을 이어 ‘문학’과 ‘비문학’을 나눠 설명한다. 그런데, 과연 맑스 배제의 철학사 자체를 한국 교회의 진골귀족인 모태신앙자가 철저하게 짓밟고 조롱하는데, 어떻게 문학이 뜰 수 있을까?
[사반의 십자가]는 빙산의 일각이요, 김동리 주변은 기독교 문학의 대거 인력 풀이 형성되었다고 안다.
한국 교회는 물질 세계의 변화하는 시대를 설명하는 논거 마련에 실패했다. 그만큼, 5060의 느리게 변화하는 세대에만 맞추어서, 교회 젊은 층의 권력층 조차도 골속들이 썩어버린 양상을 만들었다.
그 진골귀족의 발언이 20~30%는 보수 발언. 70~80%는 진보 발언으로, 체계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이유로 빨갱이 교회 침입으로 단정하긴 어렵다. 반복 하지만 정보 홍수 시대에 권력 미디어가 끌어주는 데로 끌리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신실한 신앙’으로 대접을 해줘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큼, 분노를 야기하는 일이 없다.
솔직한 말로, ‘신앙’이 깊다고 자화자찬하는 정치 광고, 한 글자도 믿지 않는다. 믿어서도 안된다. 100이면 99가 거짓말일 것이되 장본인에게만 정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