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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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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토론 스크랩 [자유토론] 이종걸의원
이준용 추천 0 조회 183 09.03.28 01:2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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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토론 [이종걸]묻혀버린 좋은 글에 대한 소회 [112]
  • 나너너나 나너너나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577781 | 2009.03.04 IP 118.36.***.237
  • 조회 9134 주소복사

해방이후 만주 임정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천민 자본주의가 정착해가고 부패가 온연한 이승만 막장 정부(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정통성의 산실로서 건국 60주년의 시작이 되는 정부)하에서 한국사회 질서에 부적응아, 이단아로 취급되었다.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불안해진 반민족행위의 상류계층들은 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국군의 소위로 다시 임관하여 처벌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과거를 날조하고 숨기기 시작한다.(박정희의 무리들)

 결국 각계에 자리잡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은 이승만정부의 반민특위의 해산을 이끌어 내고, 정부 요직에 득권하여 이승만 찬양론자,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에 견제한 열사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이렇게 쌓은 굳건한 기반을 바탕으로 4.19로 이승만이 하야하고도 기득권을 유지하게 된다.

 

 독립군 토벌 특공대 간도특설대, 일본의 대륙침략 훈련소인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4.19혁명의 위대한 유산을 짓밟고 올바른 길로 갈 역사의 물고를 뒤집는 반혁명으로 집권하며 공포정치와 우민화 정치를 감행한다. 일본의 36년 간의 긴 노예생활의 고통에 대해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일본 역시 자신들의 군관학교 수석졸업 출신의 박정희에게 분가한 자식에게 전세금 대주듯 약간의 돈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걸 무마하고, 이러한 전통은 전두환 노태우까지 이어진다. 이때의 군부세력이 지금껏 남아있다.

 

 가장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일은 모든 걸 덮고 군림하기 위해 위기감을 고조하고(이강백 '파수꾼'에서 재밌게 우화적으로 비유함) 4.19혁명 주도세력과 잔존해있던 상해임정과 독립군 출신 인사들과 그들의 2세들을 반공, 용공의 이념으로 배제하였으며(전과자 만들기, 취업 및 공무원 진출제한)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성향(정권에 쓴소리)을 가진 사람은 체포, 고문, 살해했다.

 

 이로 인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지위와 재산을 모두 버리고, 명예롭게 살아갈 수도 있었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우국지사가 된 사람들과 그들의 자제는 빨갱이가 되었고, 이들의 뜻을 따라 이름도 남김없이 만주에서 일본에서 국내에서 죽어간 젊은 청년들은 제대로 된 기록하나도 없이 사라졌다.

 

 이들이 원한 건 "기억해달라"는 것 하나였으나 우린 "기록"조차 하지 못했고 있던 기록도 치밀한 감시와 체포, 고문 앞에 태워야 했다. 이름도 남지 않고 죽어 간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쪽방이나 판잣집에서 극빈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나라를 팔고, 개인의 영달을 추구한 반민족행위자들은 기득권을 누리며 풍요롭게 사는데에 만족하지 않고 뉴라이트와 묻지마 한나라당연합의 카르텔을 만들어 역사를 날조하고 교과서를 수정했다.

 

 친일반민족 행위의 수장들의 동상은 여전히 전국 각 지역에 세워져 있고

독립군들은 초라한 사진 한장만이 남아 국사책과 서대문형무소에 초라하게 걸려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국난이 닥치면 총을 메고 전장으로 가겠는가?라고 물으면 대다수는 후대가 기억조차 해주지 않는  일을 위해 젊은 목숨을 던지기 보다 개인의 영달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역하거나 해외로 도피하는 것이 낫다고 대답한다. '역사경험의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치있다고 믿고 했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이 후세에 이렇게 폄훼되고 왜곡될 줄 알았다면 그들은 똑같이 행동했을까? 헌법에 위배되면서까지 프랑스가 나치에 협력했던 자들을 총살하고 현재까지도 국외추방과 기록수사를 계속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역사의 큰 잘못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아 기득권을 잡으면 반드시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하고 정당한 논리를 만들게 된다.

 

서원(오늘날의 고등학교 수준)을 철폐할 당시의 흥선대원군이 현판을 떼고 가옥을 부수는 임무를 띤 무관에게 자신들의 서원을 철폐하는 데 유생들이 가만히 있더냐고 물었다...........................대답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말했다...."머지않아 이 나라는 망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강제개항, 강화도 조약, 을사늑약, 한일합병, 일제 36년 

 

젊은이가 정의를 말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일에 분노하지 않고 침묵하는 나라는 그 징후가 보이는 순간 얼마 후에 망한다.

역사의 학습효과다............

 

3.1운동이 세계학자들이 꼽는 위대한 사건에 들어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범종교적, 범지역적으로 연합하여 단기간에 전국민이 동시다발적으로 비폭력으로 투쟁한 전 세계에 유래없던 사건이었기도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일본의 조사기록에 남은 사망 7500명, 부상 1만 5천명, 구속 4만 5천명의

인원 중에 27세 미만의 젊고 어린 청소년, 청년들이 50%이상을 차지했다는 데에 있다. 전국을 돌며 3.1운동의 당위를 주장한 유관순의 당시 나이는 17세였다. 그리고 토막살해되어 석유통에 담긴 채로 돌아왔다.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은 정의를 말하는가? 옳은 말을 하고 소신대로 행동한 자신의 스승이 파면되는 상황을 보며 항의하는가? 잘못된 길로 가는 어른들이 계속 잘못된 행동만 하는 것을 보고 옳은 목소리로 저항하는가?

이건 지켜볼일이지만 흥선대원군이 현재 살아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역사의 평가가 온당치 못했다면, 옳은 일에 목숨바친자가 천대받고 그들의 후손들이 고통 속에 살며, 개인의 영달에 민족을 버린 자들이 대대로 잘 살고 기득권을 유지한다면, 우선 이것부터 바꿔놓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부패할 수 밖에 없도록, 양심에 위배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역사의 학습효과로 형성된 매트릭스"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돈 있고 사람있는 거 아냐?" "이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이 나라에 충성해? 군대끌려간 것도 억울한데"

"돈 없이 공부하고, 정치하는 시대는 갔어!" "법은 있는 놈 한테나 유리해"

"국회의원들 그 놈이 그 놈이여 개**들" "언론도 유착이고 경제도 유착이야..돈 있고 빽있어야 돼"

 

 매일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천민들에게 하나 묻는다. 당신이 하는 말의 근본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당신이 하는 말이 옳지 않은 논리임을 알면서도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의 증거들은 뭔가? 그 시작은 어디 인가? 오늘부터 술자리에서는 "우리가 내뱉는 푸념의 시작이 어디인가? 원인이 무엇인가? 고민하라.....그게 절망을 대비하는 지금 할 일이다.

 

 역사의 학습효과로 형성된 부정부패와 부정의함의 매트릭스를 뒤집고 바꾸어내는 것이 한국이라는 한과 슬픔의 국적을 갖고 태어난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주도적인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그 가난과 멸시의 병고 속에서도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인권변호사로 일하고 3선 국회의원이 되어 아고라에 글을 썼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눈을 부비며 다시 확인했다. 이건 기적이다. 내가 만나온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자신의 삶조차 유지하기도 버거운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때는 나도 국난이 오면 강한 나라의 편에 붙어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다시 조사해보고 싶지만 이종걸 의원의 집안내력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건 기적이다. 그리고 비굴하고 수모스러운 역사의 매트릭스를 바꿀 수 있는 첫 단추이자 1%의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당 이회영 딸 이규숙 고모님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며

 

언제나 그랬듯이 당장이라도 반갑게 다가오실 것 같은 고모님이건만,

영정의 사진 앞에서 저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녕 제 곁을 영원히 떠나셨다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제 이름을 부르시며 걸어오실 것 같이

고모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한데,

이렇게 허망하게 고모님을 떠나보내게 되다니.....

고모님의 죽음은 우리집안 항일독립운동 1세대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뜻한다.


1910년 한일강점이 되자 우당 이회영, 이시영 할아버지 6형제는

모든 가산을 팔아 항일독립전쟁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6형제의 망명결행은 만주를 항일독립운동기지로 하는

독립전쟁론에 불을 붙였다.


갓난아이였던 규숙 고모님은

만주로 향한 항일대장정에 참여한 최연소자였다.

또한 1945년 해방이후 귀환한 몇 안되는 생존자중의 하나였다.


고모님은 태어나자마자

격랑의 민족사 한가운데로 던져졌다.

9대째 정승을 배출한 소론의 대표적인 양반가도

그의 안일이 되어 주지 못했다.

 

강보에서 잠시 머물 틈도 없이 차가운 압록강을 넘는

어린 이규숙 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난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조국을 잃은 슬픔은 어느 누구보다 컸을 것이다.

또한 빼앗긴 조국을 찾는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오는 고난을 합한 아픔의 크기는 상상을 넘는 것이다.

 

아무리 규숙 고모님이라도 미리 알았다면

그 운명을 선뜻 선택하였을까?

다양한 한국역사의 장면 중에서도

1910년 식민지 비극이 시작되던 해에 태어남으로써

고모님의 역할은 숙명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응모를 원치 않았을

100년 일생의 비극의 주인공으로 묵묵히, 기꺼이 해 내시고 가셨다.


고모님은 가장 어린 시절부터 중국의 문화를 체득했다.

중국에서 영어 교사까지 할 정도로 언어에 영특했던 고모님은

북경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우월한 중국인으로의 변장이 가능했다.

그의 이런 능력은 철저히 항일 독립운동에 쓰여졌다.

 

조선측 독립운동집단이 러시아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시기에

고모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어린 중국 여아의 앞 뒷몸에

무기가 즐비하게 붙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모님은 항일독립단의 유명한 무기 운반책이었다.


당시 항일운동가의 어린아이도 다물단이 지나가면

울다가 그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다물단은 항일운동을 하다 변절한자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비밀결사인데 다물단을 이끌었던 이는

큰 할아버지 이석영의 큰아들인 이규준이었다.

고모는 이규준 아저씨를 인도하여

당시에 일제 앞잡이로 변절했다고 소문난 김달하를 암살했다고 하여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1년간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마적으로 추정되는 일단으로부터

이회영 할아버지 거처가 습격을 받았을 때이다.

용케 할아버지는 살해위험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할머니가 총상을 당하셨다.

집이 불타올랐을 때 할머니의 외치는 소리에

다락방에 몰래 모아놓았던 할아버지의 편지뭉치를 찾기 위하여

불속으로 뛰어 들어 갔던 사람도 바로 고모님이었다.

고모는 할아버지 이회영이 이상설 등과 교류를 하면서 남겼던

서신의 비밀보관책이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자신의 불찰로 할아버님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저작물을 태워버렸다면서 자책까지 하셨을 정도이다.

 

할아버지 우당이 암살, 테러의 중심에 서면서

사진, 자료 등을 모두 소각해 버려서

할아버지에 관한 자료들이 남겨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자신 스스로 자책을 하는 것이다.


고모가 함께 참여했던 만주 유하현에서의 경학사운영, 신흥무관학교도

일제의 진격, 자금의 소멸 등으로 쇠퇴하였다.

할아버지 가족은 버티다 버티다 거처를 상해로 옮길 때

고모님은 동생 현숙과 천진부녀구제원에 보내졌다.

빈민구제소 생활에서 얻은 결핵으로 다른 고모님 현숙은

결국 죽게 되는 고통을 안게 된다.


고모님은 중국으로 망명, 문한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군 소위로 제11로군에 근무한 바 있는 장해평과 결혼한다.

고모부는 김구 선생 밑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위하여

일본은행 등을 습격, 군자금 모집을 하면서

일본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고모님은 남편의 위험한 행동의 위장책이었다.


규숙고모님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할아버지를

대련감옥에 수차례 면회하였고

이회영 할아버지가 고문으로 순국하시자

시신을 처음 수습하여 찾아온 장본인이었다.

당시는 거물 항일독립운동가의 면회하는 일도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1945년 해방의 그날, 간난신고 끝에 귀국한 고국땅에서도

환영과 영광은 고모님을 비껴갔다.

 

양반집 규수의 우아한 처우는커녕

모든 것을 버리고 항일의 대열에 섰던 젊음,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걸었던 순간들도

그 횟수를 셀 수 없었던 일생이었건만

고모의 영웅적 역할은 여성의 운명으로 표현되었다.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은 몇몇 저명한 남성의 몫이었고

고모님과 같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아버지와 남편들을 뒷바라지 하였던’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뿐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고모 앞에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가난은

3대가 부족하다는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표준 중국어에 능통한 고모의 능력은

공산화된 중국 탓인지 별 쓰임을 발견하지 못했다.

해방된 지 얼마 후 병을 얻은 고모부는

고모님의 정성스런 뒷바라지에도 불구하고 돌아갔다.

 

목숨을 건 연속된 긴장의 생활속에서 건강을 잃고,

다른 메카니즘의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교육과 활동의 기회를

얻지 못한 의지의 젊은 항일운동가 장해평은 울분으로 사망하였다.

고모님은 그 이후 계속되는 가난 속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

정직하게 자식들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셨다. 


고모님은 만주에서, 상하이에서 적군을 호령하면서

군자금을 탈취하던 장수의 기상이 통하지 않는 남한의 현실을

한탄하기까지 했던 남편 장해평을 동정하고 이해했다.

 

그러나 고모님은 고모부 장해평을 사회부적응증으로

자기 몸마저 지키지 못한 사람이라고 호되게 질책했다.

고모님은 해마다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남편을 찾아

풀을 뽑으면서도 절대로 못난 남편 곁으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늦게 천주교에 귀의하시어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면서

거기서 묘원까지 준비하셨으나 돌아가시기 불과 얼마 전부터

하늘나라의 남편과 화해하셨다.

 

고모님의 서사시 같은 일생 100년은

오늘(1.22)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남편곁에 나란히 묻히셨다.

 

규숙 고모님은 한국 근대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여성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장렬한 방법으로 채워나간

자랑스런 주인공이었다.

 

대한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목숨을 바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폄하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뉴라이트들에게

당신들은 국가의 근본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반국기적, 반역사적인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 준 분이었다.


 


2009년 1월 22일 이종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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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로서 그 자식까지 평가해버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오류 중에서도 가장 무식한 발생학적인 오류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하고 있고 "옳은 소리"를 하는 훌륭한 사람임을 먼저 알고, 나중에 그 부모를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그건 그런 사람이 만들어진 객관적인 근거이자
 대다수 군중의 주관적인 판단의 심정적 동의이다.
 
(유교적으로도 입신양명하여 부모이름을 드러내는 건 효도다.
 이걸 "잘못"이나 "오류"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사고의 과정>
 1. 난 부모를 보고 이종걸 의원을 평가함이 아니다. 그건 오류다.
 2. 이종걸 의원의 범상치 않은 행동을 보고 그의 부모가 궁금했을 뿐이다.
   (이명박씨의 범상치 않은 행동을 보고 그의 부모가 궁금했을 때
    알고 나서 아니나 다를까? 했던 심리와 비슷하다.) 
 3. 그리고 대다수의 독립군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과는 너무도 다르게 3선 의원으로서 기득권이 되어있는 그를 보고 놀랐을 뿐이고, 집안배경이 사실일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4. 정말 사실이라면 비굴하고 수모스러운 역사의 매트릭스를 바꿀 수 있는 첫 단추이자 1%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5. 저런 사람 10명만 더 국회에 가 있으면, 천민들의 생존전략을 위해 가난했던 지난 날의 습기찬 기억을 끄집어 내어, 아고라에 기록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잡혀갈까 무서워서 정확한 사실과 근거에 바탕한 예측조차 정부가 듣기 싫은 말 같으면 "공상소설"이라며 자체검열로 스스로 폄하하는 "21세기 인터넷 일제시대"에 살지 않아도 될 것같다.
 6. 정부가 듣기 싫어하는 말 같아서 자체검열한다.
    위 내용은 SF공상과학만화에 기반한 소설이다.
    미디어법 6월에 표결처리 될 거 뻔한데 그 때도 잡아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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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03.28 01:23

    첫댓글 오늘 회식자리에서 이종걸의원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직 훌륭한것 까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정치인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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