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Zwischen>
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쉰일곱 명! 강사 신부님께서 무려 32일 동안 자그마치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오로지 루르 한인 성당의 이 피정 강의를 위해 불철주야 고민해마지 않았던 그 노심초사에 비하면 네, 그 숫자가 듣기엔 무지하게 강의가 아까웠습니다.
좀 더 많은 신자들이 이런 강의를 들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피정이라는 것이 하느님과 관계 맺음을 새로이 하는 일인데, 왜 신자들은 다른 데는 다 쫓아 댕기면서 피정은 안 갈까? 아,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자여러분, 피정은요, 안 가면 손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학교를 안 가면 누가 손햅니까? 학교 안 가는 학생이 손해지요. 피정을 안 가면 누가 손햅니까? 안 가는 신자가 손햅니다. 사실 본당 신부 입장에서 길게 말해봐야 안 가신 분들 많은데 염장만 지를 것 같아 안하려다가도, 그래도 욕심에 강의 내용을 들려드리고 싶은데 재주는 없고, 꼭 그러잖아요?
살과 피가 되는 말씀은 제대로 안 받아 적고 꼭 보면 엉뚱한 농담 한 두 개 한 것, 그건 다음에 써먹을라고 꼭 받아 적는 한국 신부가 있잖아요. 제가 그랬습니다. 강사 신부님의 주옥같은 말씀은 피정 다녀온 신자분들께 들으시고 저는 피정에서 들은 우스개 한 소절 들려 드릴까 합니다.
한국의 어느 부인이 장거리 외출을 하면서 남편 보랍시고 냉장고에 써 붙여 놓은 말이, “까.불.지.마.라.”를 써붙여놨더랍니다. 뭔 말인고 하니, 까, 까스 조심하고. 불, 불 끄고. 지, 지퍼 함부로 내리지 말고. 마, 마누라 언제 오는지 묻지 말고. 라, 라면이나 끓여 먹어라.
참 처량한 신세의 한국 남정네 팔자입니다. 강사신부님은 여기까지 우스개를 하시고 아내의 ‘까불지 마라!’ 종이에 남편도 뭐라고 써놨다는데 그건 기억 안난다고 말씀을 못해주셨습니다. 자, 제가 2탄 들어갑니다. 아내는 <까불지 마라!>하고 출타했는데 그걸 본 남편은 어떻게 댓구했을까요?
남편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웃.기.지. 마.라!” 그 의미가 뭐냐? 운을 띄워주실래요?
우, 웃음이 절로 난다. 기, 기뻐죽겠다. 지, 지퍼는 내 자유다. 마, 마누라 오든지 말든지. 라, 라면은 먹든지 말든지. 이렇게 <웃기지 마라!>를 그 대답으로 써놨더랍니다. 뭐 얼추 콩가루 집안이지요.
나이를 먹으면서 관계가 역전되는 것 같습니다.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고 여자는 되려 회춘하는 여우들이 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젊은 시절 당한 것 나이 먹으면 곶감 빼먹듯 염장을 질러대지요. 그래서 남자들은 나이가 60을 넘기면 꼭 필요한 것들의 순위가 보통은 첫째는 ‘건강’이요, 둘째는 ‘아내’요, 셋째는 ‘재산’이요, 넷째는 ‘취미’요, 다섯째는 ‘친구’라고 대답한답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다르더라는거지요. 여자 나이 60을 넘기면 제일 필요한 것이 ‘재산’이요, 다음이 ‘친구’요, 그 다음이 ‘건강’이 필요하고, 그 다음은 ‘강아지’가 필요하고! 그 다음이 남편이랍니다. 이건 뭐 견공만도 못한 신세 되는 것이지요.
물론 웃자고 한 이야기이겠지만, 꼭 그렇게 들리지 만도 않는 것이 요새 한국 아파트 단지에 햇살이 좋으면 아줌마들이 하나 둘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데 유모차 두껑을 열면 그 안에 아이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개’가 들어 앉아 있다고 하데요! 제가 볼 때 살짝 맛이 간 여자들입니다.
시어머니는 이 아프다 해도 치과 돈 많이 든다고 병원가시라 말도 안하는 여자들이 애완견이 낑낑거리면 119불러대고 난리를 친답니다. 미친게지요. 그러니 동물 병원뿐만 아니고 애견 미용실에 애견 사진관, 예견 호텔을 넘어 요새는 애견 납골당까지! 이거 참 개 팔자가 좋아진 건지 사람 팔자가 사나워진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된 줄 아십니까? 이번 피정을 오셔야 하는데! 이게 이번 피정 주제였거든요. 왜 세상이 생명보다 돈이 판을 치고, 하느님보다 건강이 판을 치고, 사람보다 개새끼가 판을 치는, 경상도 말로 ‘디비쪼는’ 동네가 되었느냐?
바로 ‘Zwischen’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독일말 쓰니까 이상하지요? 피정 강의의 내용입니다. 좀 훔쳐보면,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관계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관계 때문에 오는 것이요, 동시에 인간이 느끼는 기쁨의 대부분도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관계, 사이, 에서의 핵심은 <거리>인데, 어떻게 그 거리를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두어야 할 거리와 대상은 가까이 둘 줄 알아야 하고, 멀리 두어도 좋은 거리와 대상은 멀리 둘 줄을 아는 제대로 된 관계 형성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켜야 하는데 이것을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자, 멀리 두어도 좋은 대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이라고 부르는 대상과 관계들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쓰고 이용할 수 있는 것, 물건, 사물들은 나로부터 멀리 두어도 좋다는 것이지요. 내가 ‘그것’이라고 부르는 사물과의 관계가 나라는 인간성을 형성시키지 않으니까요! 내가 명품이라는 물건을 쓴다고 나라는 인간이 명품이 되는 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중요한 관계, 중요한 Zwischen은 누구냐? 바로 나를 나답게 만들 수 있는 관계와 대상들인데 이는 내가 함부로 이용할 수 있는 ‘사물’, ‘그것’들이 아니라, <너>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들, ‘이용’이 아니라 함께 ‘향유’하고 관계성을 충만하게 누려야만 ‘나’다와 질 수 있는 것들, 아내에겐 남편이요, 남편에겐 부모요, 신부에겐 신자요, 신앙인에겐 하느님이요, 이렇게 나를 나답게 할 수 있는 <너>를 가까이 두고 관계 맺을 때 참되게 행복할 수 있음으로, 사물을 중요시 여길 것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를 더 중요한 Zwischen으로 만들어야 한다! 맞습니까? 피정 강사신부님?
그러니까 세상이 요지경이 된 것은 나를 인간답게 만드는 <너>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과의 관계는 쉽게 무시해버리고, 나라는 존재와 의미를 도대체가 너라고 부를 수 없는, 아니 그렇게 불러서는 안되는 ‘사물’들을 통해서 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경상도 말로 세상이 뭐라고요? ‘디비쪼는’ 세상이 된 것이다.
너 보다는 뭐? 돈이라는 사물, 사람보다는 뭐? 간판이라는 사물, 생명보다는 뭐? 건강이라는 사물, 자연보다는 뭐? 발전이라는 사물, 그리고 남편보다는 뭐? 강아지라는 사물을 더 가까이 놓고 중요시하는, 관계의 매김이 엉망징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어쩌면 갖은 사물들만 잔뜩 쌓아놓고 있으면서 그 사물들이 나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며 <너>가 아니라 <사물>과 더 깊은 대화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자, 사물과 대화하며 사는 여자가 있습니다. 명품 걸치고 “이 명품이 나를 말해줄꺼야!”라고 목을 메는 여자,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던 여자, 누굽니까? 미친 여잡니다. 거울을 보고 물으면서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사니 미친 것입니다.
그 여자뿐만이 아닙니다. 돈이라는 사물에 아이부터 어른까지 죄다 미쳐 있습니다. 사람은 없습니다. <사물>이 판을 칩니다. 생명은 없고 자본이 판을 칩니다. 강 파 엎은 다음에 뭐 하고 있습니까? 계산기 두드리고 있습니다. 물이 더 좋아지고 생명이 더 풍요로와진 것이 아니라 땅값만 올랐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집단적으로 사물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이고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돈은 결코 나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간판은 결코 나의 인격을 말해주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며 비극의 정체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이것은 우리 정체에 대한 선언이며 관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모든 인간들에게, <너>가 아니라 <사물>을 통해 의미를 찾고 존재를 찾고 가치를 구하던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분은 명확한 전환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듣게 되는 모든 성문적 선언가운데에 친밀한 관계의 약속을 이토록 생명력 넘치게 표현한 문장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나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가지입니다.”
어느 정도의 관계입니까? 어느 정도의 Zwischen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곧바로 나무를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의 관계입니다. 가지는 나무에게서 답을 얻고 나무를 통해 정체를 찾습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 거기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답은 분명합니다. 죽을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했지요. 나라는 열매, 나라는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진정으로 여러분, 예수라는 나무를 보십시오. 거기에 나의 정체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예수를 <사물>로 만들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거꾸로 된 세상은 자꾸만 예수를, 하느님을 사물로 대상화시키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사물이어도 좋은 것들을 위해 <너>라고 불러야 할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갖다 붙이고 있습니다.
“돈!”, “돈!”, “돈!”에도 ‘예수’, 성공 출세 합격 부자 대박 승진에도 ‘예수’, 무병장수에 오래오래 사는 일에도 ‘예수’를 붙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이 ‘디비쪼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물로 지내도 좋은 것을 ‘너’로 섬기고, 너로 만나야 할 것들을 하찮은 ‘사물’로 여겨버립니다. 예수, 하느님은 사물이 아니라 ‘Du’, ‘너’, 유일하게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사도행전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사도 4,12)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유일한 너가 될 수 있는 대상은 이 한 분 뿐이십니다.
가까이 두고 많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멀리 놓고 덜 사랑합니다.
멀리 두고 적게 사랑해도 좋은 것은 가까이 놓고 더 사랑해버립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중요한 것을 하찮은 것으로 대합니다. 그러면서 하찮은 것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자랑해야 할 것은 자랑하지 못하고 수치스러워야 할 것들을 도리어 자랑하고 다닙니다. 바보들입니다.
자녀가 자녀답지 못하고,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고, 학생이 학생답지 못하고 선생이 선생답지 못하며, 신앙인이 신앙인답지 못하고 신부가 신부답지 못한 것들 때문에 우리는 바쁘게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분주하면서도 살면서도 허무하다 그러고, 먹으면서도 배고프다 그러며, 사랑한다하면서도 외롭다 그럽니다.
오, 하느님! 이것이 포도나무에 매달린 가지가 정작 그 열매는 맺지 못하는 비극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왜 그 관계를 가장 크고 중요하고 소중한 Zwischen으로 두지 못합니까? 신앙인들이 불행하다면 오로지 그것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따지고보면 사소한 것들 때문입니다! 거창한 이유로 냉담하는 사람 봤습니까? 모두가 사소한 이유로 하느님을 떠납니다. 그리고는 결국 사소하고 하찮은 것만 평생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다 갑니다.
포도나무 가지이면 포도송이 열매가 열리게 하십시오! 이게 정답입니다. 다른 것 하라 소리가 아닙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 나무와의 관계가 가장 우선적인 가지들이 되어야 한다는 소립니다. 그렇지 못한 가지는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신다 하였습니까? “다 쳐내신다!”(요한 15, 2)하였습니다. 뭔 소리입니까? 자기가 정작 누구인지도 모르는 가지들은 내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주일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Zwischen을 가장 우선적으로 두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생명을 가까이 두십시오. 생명력 있는 것들, 긍정과 격려, 희망과 나눔, 사랑과 용서, 화해와 감사, 기쁨과 감동, 연대와 봉사, 이 모든 것들은 생명력 있는 것들입니다.
오늘 어버이 날을 맞아 본당의 청년들이 어제서부터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이 청년들이 왜 그러겠습니까? 1년 내내 얻어먹으니 죄송해서 염치로? 아닙니다. 이마저도 <관계>입니다. 비록 부모님들은 한국에 계시더라도 이곳에 계시는 신앙의 어르신들을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며 살아온 그 관계를 감사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을 최우선의 관계로 놓을 줄 알 때 우리 공동체에도 생명력이 넘치지 않습니까? 하느님 아닌 다른 것 때문에 분주해하지도 마시고 엉뚱한 것으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도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찮은 것을 주시지 않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 잘 받으시고, 또 그 사랑을 잘 나누어주시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열매를 기꺼워하시고 오늘 사랑을 나누는 우리와 반드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자, 그렇다면 중요한 관계, 중요한 Zwischen은 누구냐? 바로 나를 나답게 만들 수 있는 관계와 대상들인데 이는 내가 함부로 이용할 수 있는 ‘사물’, ‘그것’들이 아니라, <너>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들, ‘이용’이 아니라 함께 ‘향유’하고 관계성을 충만하게 누려야만 ‘나’다와 질 수 있는 것들, 아내에겐 남편이요, 남편에겐 부모요, 신부에겐 신자요, 신앙인에겐 하느님이요, 이렇게 나를 나답게 할 수 있는 <너>를 가까이 두고 관계 맺을 때 참되게 행복할 수 있음으로, 사물을 중요시 여길 것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를 더 중요한 Zwischen으로 만들어야 한다!
“돈!”, “돈!”, “돈!”에도 ‘예수’, 성공 출세 합격 부자 대박 승진에도 ‘예수’, 무병장수에 오래오래 사는 일에도 ‘예수’를 붙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이 ‘디비쪼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물로 지내도 좋은 것을 ‘너’로 섬기고, 너로 만나야 할 것들을 하찮은 ‘사물’로 여겨버립니다. 예수, 하느님은 사물이 아니라 ‘Du’, ‘너’, 유일하게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생명의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