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
우리를 더 크게 사랑해야 할 자리로 옮겨 놓는 소설
소설의 제목 ‘내 식탁 위의 개’는 클로디 윈징게르가 정신적 쌍생아로 여기는 호주의 소설가 재닛 프레임의 『내 책상 위의 천사』를 변주한 것으로, 우리 인간이 아닌 다른 종들을, 그리고 우리 인간 중 가장 여린 존재들을 초대하는 환대의 부름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소설은 인간에게 유린당한 개 ‘예스’와 노부부 사이에 싹튼 놀랍고도 감동적인 우정을 통해 종의 경계 너머로 확장되는 사랑을 그리는 한편, 하루하루 급격히 노쇠해지는 80대 작가가 탐사하듯 살아가는 노년이라는 시간과 매해 새로운 충격을 주며 무너져 가는 기후 위기 시대의 세계에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섬세하기 그지없는 시적인 언어로 사유한다.
남성적 권위를 지닌 공쿠르상의 대안으로 여성 작가들에 의해 제정된 페미나상 수상작답게 『내 식탁 위의 개』는 주류에서 잘 다루지 않지만 지금 이곳의 문학이 이야기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을 다룬다. 이 세계에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가. 사람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곳에서 물러나 다른 삶을 살았던 작가가 한 마리 연약한 동물을 만나 또다른 세상을 발견하고 세계의 지평을 넓혀 가는 이야기를 읽고 우리는 지금 발 딛고 선 현실을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물론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계를 새롭게 상상하고, 바라건대 어떤 이들은 조금 다른 삶을 꿈꾸고 어떤 희망까지 발견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것이다.”
소설가인 ‘나’ 소피와 남편 그리그는 ‘추방당한 숲’이라는 뜻을 가진 ‘부아바니’에서 살고 있다. 서른 살이 채 되기 전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삶을 실험하고자 도시를 떠나 알자스 지방의 산속으로 들어온 지도 어느덧 60년이 되어 간다. 여든 줄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걷는 것조차 버거워져 그 좋아하던 하이킹도 호수 수영도 등산도 불가능해진 것은 물론, 얼마 전에는 크게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다. 낮잠과 읽고 쓰는 것 외에는 좋아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 그들 부부 앞에 어느 가을날 저녁, 목줄이 끊어진 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인적 없는 산속이건만, 어디서 온 걸까? 짐승이 낯선 사람에게 제 배를 순순히 보여 주며 누웠을 때, 나의 머릿속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마지막 문장이 번개처럼 지나간다. “그렇다, 나는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것이다.” 동물 학대범에게 유린당한 듯 생식기가 처참하게 찢긴 개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 찬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상처를 돌봐 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지만, 곧 개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튿날 나는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서점 행사를 위해 리옹으로 떠난다. 산속에 묻혀 살지만 이렇게 소설을 발표한 후 독자들과 만나면서 세상과의 연결을 놓지 않는다. 대안을 찾기 위해 산속에서의 삶을 택했지만, 한 해 한 해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오늘 나는 여성이자 자연 속에서 사는 인간, 변방을 대변하는 작가로서 발언하기 위해 도시로 나왔다. 하지만 행사는 영 불만족스럽게 끝나고, 나는 파업 때문에 연착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집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그리그만이 아니다. 이틀 전 사라진 예스가 돌아와 있다. 예스는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친밀감을 나타내고, 예스에게서 우리 인간과 대등한 태도를 발견한 나는 금세 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예스 덕분에 나는 영영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 육체적 능력을 조금씩 되찾고 삶의 경이를 새로이 발견한다. 그리그 역시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예스와 함께 책을 읽고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생의 황혼녘에 나타난 개 한 마리로 인해 단조롭고 무거웠던 노부부의 일상은 조금씩, 그러나 혁명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창밖 먼 산책로에 나타난 낯선 사람들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빠진 예스를 보고, 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예스를 떼어 놓고 홀로, 노인에게는 모험이나 다름없는 탐사를 떠나기로 한다…….
고사리 잎 사이로 기어 오는 그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디기탈리스가 자라난 곳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끊긴 사슬 토막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자. 도망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상대를 알아채기 전 그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챈 것 같았다. 그러는 찰나 그것은 사람 키만 한 고사리 뒤로 사라졌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결국 도망쳐 버렸다. 나는 상대의 움직임을 더 잘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옆길로 빠졌다가 이제 내 쪽으로 곧장 내려오고 있었다. 열 걸음 거리에서 속도를 늦추고 머뭇거리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꼬질꼬질한 회색 털 뭉치는 굶주린 채 기진맥진해 있었다. 커다란 밤색 눈동자가 시선을 피하지 않 고 눈 깊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처럼 지나가는 문장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것이다. 그렇게 개는 '예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는 말했다. 내가 여기 있어, 예스. 나는 쪼그려 앉았고, 개의 목덜미 털에 손가락을 넣어 쓸어 주었다. 기다란 나무딸기 줄기와 자작나무 잎, 그리고 이끼로 범벅된 그 젖은 털을. 도망자는 나보다 앞서 비를 맞은 듯했다. 아까 비가 내린 서쪽에서 왔는지 물에 젖은 개 냄새가 났다.
나는 그날 저녁 왜 그 작은 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등한 태도로 나를 쳐다보았는지에 관해 생각에 잠겼다. 내가 대등함을 발견한 계기도, 그걸 나에게 상기시켜 준 계기도 바로 그 개의 눈이었다. 그런데 왜 그 개는 우리가 준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 바로 떠났을까? 우리와 우정을 나눌 가능성을 허락해 줄 것만 같았는데, 무슨 이유로 거부했을까? 왜 도망쳐야만 했을까?
이틀 전 사라진 예스가 돌아와 있다. 예스는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친밀감을 나타내고, 예스에게서 우리 인간과 대등한 태도를 발견한 나는 금세 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예스 덕분에 나는 영영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 육체적 능력을 조금씩 되찾고 삶의 경이를 새로이 발견한다. 그리그 역시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예스와 함께 책을 읽고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생의 황혼녘에 나타난 개 한 마리로 인해 단조롭고 무거웠던 노부부의 일상은 조금씩, 그러나 혁명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