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과 나훈아는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초반 숙명의 라이벌로서 가요계를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군 인물들이다. 아마도 국내 대중음악 사상 본인들이나 팬들이나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하고 갈등했던 가수로는 이 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에서 행여 둘이 함께 소개되면 두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도 시큰둥한 채 서로 인사를 나눴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당시 야당 정치의 치열한 경쟁자였던 DJ와 YS처럼 목포와 부산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남진과 나훈아의 격전에는 ‘지역성’마저 개입, 한층 팬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고지를 선점한 남진은 가히 1980년대의 조용필이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리사이틀이 열리는 곳은 전지역 주민들이 술렁거렸고, 공연이 끝나면 극장 앞은 물론이고 숙소에서도 그를 만나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연히 남진은 인파를 피해 별도의 여관에 투숙해야 했고 그 덕에 공연단 숙소에서는 엉뚱한 사람들이 ‘포식’을 했다. 여성 팬들이 남진이 머무는 줄 알고 정성 들여 만들어온 음식을 쉴새없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돼버렸지만 1970년대 남진 하면 윤복희와의 열애와 결혼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77년 전남 완도 공연 때 사랑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여관방에서 잠도 자지 않고 미국에 있는 윤복희와 전화통화에 열을 올렸다. 통화가 얼마나 길었냐 하면 그날 공연에서 번 돈을 전화 통화료로 몽땅 날려버렸을 정도였다.
이 공연의 사회자였던 김태랑씨의 회고담. 하루는 미국에 있던 윤복희가 남진 모르게 전남 완도에 잠입했다. 무대에서는 한창 코미디 ‘최진사댁 셋째 딸’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진이 칠복역을, 상대역 셋째 딸은 홍화숙이란 무명가수가 맡아 연기했다. 윤복희는 잽싸게 분장실로 들어가 홍화숙의 의상을 빼앗아 입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남진은 맞절 연기를 하고 신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갑자기 쇼는 3분이나 중단되었다. 진상을 알고 있는 김태랑씨와 분장실 요원들은 낄낄 웃어댔지만, 관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쥐죽은듯 조용했고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신성한 공연까지 그르칠 만큼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나중에 갈라설 때 기자회견에서 했던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훈아의 경우는 영화배우 김지미와의 로맨스가 걸작이다. 두 사람도 역시 공연 중에 그 관계의 실체를 드러냈다. 1974년 박종구씨가 단장이었던 ‘라이온스’ 쇼단 주최로 시민회관에서 나훈아 리사이틀이 열렸을 때였다. 이 무대 사회자였던 최성일씨가 나중에 밝힌 이야기. 1회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와 있는데 갑자기 사과와 배 한 궤짝이 들어왔고 박단장은 나훈아가 사는 것이라며 많이들 먹으라고 했다. 단원들이 나훈아에게 감사표시를 하고 한참 먹고 있는 도중 난데없이 김지미씨가 나타났다.
김지미씨가 “수고들 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자 나훈아는 “뭘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어요? 정말 잘 먹겠습니다” 하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은 바쁘고 위세 높은 대스타가 남의 쇼에 와서 먹을 것까지 사온 것에 의아해했고,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눈빛이 여느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뒤 매스컴에는 ‘나훈아와 김지미의 열애’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마침내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를 목격한 최성일씨의 한마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고, 연기 나는 곳에는 반드시 불이 있다!”
전성기 시절 남진은 특유의 장난기로, 나훈아는 ‘소도둑’이란 별명과는 다르게 스스럼없는 인정으로 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남진은 공연이 끝나면 자가용도 보내버리고 한사코 삐걱거리는 공연단의 전세버스를 탔다. 이유는 사람들과 떠들고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1972년 경북 안동 대한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어렵사리 숙소를 구했는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방이었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남진 특유의 악동기질이 발동했다. 대뜸 ‘물이야!’를 ‘불이야!’로 바꿔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왔다. 정말 화재가 발생한 줄 알았던 단원들은 한바탕 대소동을 벌였다. 구석에서 남진은 신난다며 낄낄거렸다. 그는 “공동체랄까, 너도 나도 웃고 즐겼던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며 상대적으로 낭만이 메마른 지금의 가요 풍토를 꼬집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괴짜’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나훈아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1983년 그가 서울 천호동 은성카바레를 경영했을 때 과거에는 같이 자리하기조차 꺼렸던 남진을 출연가수로 섭외, 함께 무대에서 정답게 노래했다. ‘당사자 해결’ 차원에서 관계개선의 기회를 나훈아가 마련하고 남진이 선뜻 응한 것은 ‘휴머니즘’을 체험한 그 시절 스타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장면인 듯하다.
첫댓글 가요계에는 모두 라이벌이라고 하데요... 태진아 와 송대관은 별개이고.... 예전 나 군있을때 잘나가는 가수 김만수라고 있었고 또 하나는 무명가수가 있었는데 둘이 앙숙지간이더군요 .. 그 넘들 불러다 노래 엄청 시켰는데....ㅋㅋ
아~~~~ 옛날이여!!!! 그날이 다시오면 뭘 할까나~~~~ 곰 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