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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을지로 우리나라 산업 기틀의 원동력인 산업현장 뒷 골목을 구석구석 돌고 나왔다.
난 젊은 시절 종로에 피카드리 극장 을지로에 대한 극장 퇴계로에 명보극장을 자주 가고
또한 고궁을 자주 갔기에 그 주위를 대충알고 있었다
영국님 사진 감사합니다.
꿈을 실현하는 창조도시 중구는 공구 조명 타일 도기 기계 인쇄등 없는 것이 없었으니
6.25이후 무너진 도시의 재건을 위한 집수리에 관한 모든 것 목재 철물 페인트등
전쟁 때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이군수용품
섬유류가 호황일때는 미싱상가가
6.25이후에는 도시 재건을 위한 조명과 타일 도기가 가구가 호황을 누렸다는 흔적을 찾아 다녔다.
영국님 사진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산업발전 원동력의 기틀이 되었던 을지로 뒷골목
지금도 후락한 환경속에서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국님 사진 감사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사람의 얼굴이 얼만큼 변할까를 알기위해 정밀한 등고선을 잴 수 있는 기계인
등고선을 발명하고 이것은 사람의 얼굴을 성형하는데도 이용되는데 이작고 초라한 골목에서
탄생되었다 고 한다, 바로 사진에 있는 신진 사장님의 발명품이다
이 흐진 골목이 얼마나 대단한 가를 보여주는 한 실례다.
사진 감사합니다.
이렇게 좁고 작고 초라한 골목에서 각종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물건이 없는 것이 없고
못 만들어지는 물건이 없다고 한다.
시보리로 엉클톰님 사진 감사합니다.
원형 금속판을 틀에 고정시켜놓고 고속회전을 시켜 직접 일일이 손으로 금속막대를 잡고 눌러
각종 조명 갓 밥그릇 냉면그릇을 만든다고 하니 그 얼마나 공이들고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 화학공업의 산지인 이곳에
우리는 우리가 쓰는 물건들이 어똫게 제작되어 나오는가를 깨달아 물건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런 탐방도 자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가리를 마냥 공짜로 주던 만선호프집 산객님 사진감사합니다.
어떠한 삶의 형태든 사람이 살고 있는 주위엔 으례 먹걸이 가게가 있기 마련이며
이곳도 유명하다는 원조집이 즐비하다.
산객님 사진 감사합니다.
호프집에서 지기님께서 맥주를 사 주셔서 잠깐이나마 우린 멋진 흥에 취할 수 있었다
골목 틈틈이 구석구석 박혀있는 각종 음식점 다 오래된 원조집들이다.
원조골뱅이
중국집
빈대떡집
대통령이 즐겨 드나드셨다는 곱창구이집 ,아바이 순대.
그리고 막걸리술집
OB매주
다방 등등등...
난 이 주위 다방 중 한 곳에서 내 남편이 하도 장난이 심해 다방 마담이 머리에 설탕가루를
함빡 뒤집어 씌웠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그 다방을 올려다 보며 혼자만의 미소를 지었다.
산객님 사진 감사합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김수근이 설계하고
서울시장 김현욱이 세상의 좋은 기운이 다 모인다는 의미로 세운상가로 이름을 지었음
국내 유일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세워진 세운상가는 와글 와글 끓는 것이 사람이요
푹푹 쌓이는 것이 돈이라 우리나라에서 돈의 기운이 가장 쎄다고 하며
해설자께서 기운을 받으라고 하셔서 우린 돈 기운을 실컷 받으며 한 컷.
오늘의 탐방은 이런 것이다
문화유적지로는 고당 조만식 기념관
대한 극장터
그리고 수표교다리 있던곳 3군데라고 ...
우리 60-70대 나이엔 흔히 볼 수 있는 그 어느 곳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환경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더운날 동호회 40 여명이 그 후덕지근하고 좁고 눅눅하고 지저분한 곳
50, 60년대 그대로인 곳을 돌고 나오면서 싫지 않은 기색으로 감회의 눈길을 던지는 것은
오늘 탑방 역시 우리가 살아 온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리라.
지기님 회장님 해설자님 회원여러분
같이 동행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사진 찍어주신 분 또한 감사합니다 올린 사진중 마음에 싫으시면 즉각 내리겠습니다
낭만 올림
난 을지로 뒷골목 탐방을 다녀왔다.
갔다 온 느낌은 수십년 전 세월이 그대로 멈춘 것 같은 옛사람들의 생활 상이 재현된 곳
그 힘들고 고단한 삶속에서 꽃을 피웠던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옛날 내가 살았던
한편의 드라마틱한 왕십리 시장에 한 단면을 올려본다.
난 고향이 대대로 내려오는 서울 토박이로 동대문구에서 태어 났지만
6.25 사변후 서울특별시 중구 황학동 528 번지 상왕십리 중앙시장 곁에서 살았었다.
일반 시장은 어느 곳이나 다 비슷하지만
예전에 중앙시장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시골 먼 곳에서 쌀이 들고 나던 곳
리야카 지게 또는 일일이 가마니를 등에 지고 나르던 어마어마한 싸전들
쇠창살틀에 갇혀 애절한 눈길의 토끼 고양이 개들이 있는 동물 파는 곳
갓 잡은 닭이 필요하면 직접 닭을 잡아주는 곳에서
단 일 분도 안 걸리게 닭을 죽여 요리할 수 있도록 만져 주는 곳
난 이곳에서 아주머니의 푸념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내일이 부처님 오시는데 절에가고 싶어도 생명을 하루에도 수십마리를 죽이니
어찌 부처님께 갈 수 있느냐고 한탄하던 아주머니의 말씀도 뇌리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 중 시장에 내가 정한 명물 두 서너가지를 들면
첫째가 잠실에서 밭농사 지어 받아 팔아주던 야채시장이다.
김장때만 되면 어마어마한 배추를 실은 큰 트럭이 새벽 3-4시에 빵빵거리며 밀고 들어오면
지방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 온 하치장의 젊은청년들이 우루루 몰려들며 쭉 서서
배추를 릴레이 하는 식으로 가게 안에 쌓는다.
하차반 식구는 쭉 나란히 서서 배추 한 포기 두 포기 셀 때마다 "하나요 둘이요" 하는
음률은 왜 그리 첨승맞고 구수했던지...
당시 빈차에서 떨어진 커다란 큰 무나 배추를 아무나 던져주던 인심좋은 시절
공짜로 얻는 무 배추맛은 어찌 그리도 좋았던지 모른다.
김장철이 지나면 하차반 청년들은 벌어 놓은 돈을 쓸 때다.
날은 쓸쓸하나 한가해진 하차반 식구들은 옷 한벌씩 맞춰입고 아가씨 헌팅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즐겁고 환희에 찬 나날을 즐기는 청춘의 휘파람 소리는 주위를 경쾌하고 밝게 만들었다.
심심하면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을 부르며 시장을 휘젓다 오후쯤이면 아가씨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야채장에도 다시 새 봄이 왔다.
시장 하차반 근처에는 안보이든 아가씨들이 나타나 하차반 숙소를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한두해 늘어날 수록 지금 탈렌트 뺨치는 미인과 미남이 식도 안치른 쌍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 꽤나 잘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우리집에 당시 20살 정도에 하차반 한 분 세들어 사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예쁜 아가씨가 아가를 업고 와서우리집에서 이 남자를 찾는다.
데이트하다 아가를 낳아 놓고 이 남자는 여자를 버린 것이고
아가 엄마는 받아주지 않은 남자를 매일 찾아 와 피눈물을 흘리며 머물다 가는 것이다.
어느 하루는 새벽부터 시끄러워 내다 보니 여자의 엄마가 찾아와 내 딸 살려내라고
남자의 멱살을 잡고 이놈 저놈 하다 마당에 뒹글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다.
우리집 식구들과 세든 사람들은 거의 매일 치르는 이 난리에 시끄럽다는 생각도 못하고
우는 아가와 아가엄마를 돌보며 일을 친 남자를 달래나
이 남자는 오히려 아가엄마가 싫어졌다 하며 죽어도 그여자와 못 산다하고
남자는 딴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를 단속하던 아버지도 가셨고 그 젊은 엄마가 가엾어 같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도 가셨고 무상한 세월 앞에 나도 그 남녀도 나이 70살이 넘었을 물론
그 가엾은 여자 등에 업혔던 아가도 나이 50살이 지났을 것이고.
청춘이라 즐겁고
청춘이라 아프고
젊음 혈기로 일을 친 그 절절하고도 아픈 사랑의 상처도 세월을 무심하게 흘러 지금은
이른 봄에 매화 향기를 실은 한자락의 스치는 마파람이리라.
두번째 명물은 해장국집이다.
새벽장을 보러오는 야채장의 큰손들의 해장술을 위한 해장국이다
차가 빠지고 나면 수북히 쌓아 놓은 배추 무우 쓰레게 더미에는 까맣게 몰려드는 아주머니들
줏은 무우잎 배추잎은 해장국집에 팔고
해장국집은 밤새 소뼈와 시래기를 를 푹고 고운 국물에 선지를 넣은 해장국이다.
선지를 한입 물면 입안에 확퍼져 혀 끝에 감돌던 달콤한 소고기 특유의 맛있는 국물
아침에 국이 시원치 않으면 우리 어머니는 나에게 들통을 들고 해장국을 사오게 하셨다.
난 다른집도 잇었지만 꼭 박대포라고 불리었던 아저씨네 집으로 갔다.
그 곳에는 나의 로망이었던 환상 어린 아주머니가 직접 국을 퍼 주셨기 때문이다.
6 25사변이 지난후 나의 아버지는 능력이 있으셔서 금방 가게를 사 사업을 하셨다.
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가게에 가면
저녁 해질녁에는 집에만 있어 답답함을 풀려고 젊은 여인이 주위를 돌때
우리 가게 앞을 지나는데
모시를 정갈하게 입고 쪽찐 머리에 옥비녀를 꽂은 반듯하고 좁은 어깨의
단아한 뒷모습이 어찌 그리 고울수가 있을까
난 그 여인을 보러 저녁때만 되면 일부러 아버지 보러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가게를 자주 들린 것이다.
전쟁을 겪은 사회는 우선 당장 먹고 살아야하는 한다는 현실앞에서는 별 수 없는지
모든 것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그 여인이 야채장 근처에 집을 사 직접 해장국집을 운영하는 것이다.
내가 가면 어서 오라고 고기 너덜너덜 달린 뼈를 뜸뿍 넣어주던 그 여인은 그 어두운
부엌에서도 어찌 그리 피부가 곱고 환하던지...
그렇다
당시 서울 여인들은 밖에 나가는 것이 큰 흉이라 이웃집도 모르고 오직 정갈하고 답백한 음식
만드는 일과 한달에 한번 이부자리 만지느라 수시로 두드리는 다듬이와 홍두깨 멕이는 소리로
세월을 다 보낸 질레꽃 향기를 담은 여인들이었던 것이다.
옛 서을여인의 대표적인 특색이 맵씨 솜씨 말씨라는 단어를 지금도 사랑하는 난
당연히 그 여인이 끓여주는 국을 영원히 못잊을 수 밖에...
다음 풍경은 김장철이 끝나면 시장은 한산하다.
조금 늙수레한 노인들이 리어커에 몇 포기 안되는 배추와 무우를 팔고 있는데
오후 쯤이면 무료해 막걸리 파티가 열린다.
물론 막걸리 한잔에 안주는 손가락
옆에 있는 여자 노인과 남자 노인이 남도창을 한가락씩 뽑아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노란 일그러진 작은 양재기에 술잔씩을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타령하는 모습은
장구도 없고 추임새가 없어도
흥겨운 멋과 낭만이 녹아있어 가난한 가운데 그들의 고단하고 서룬 한을 달래주는
생활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마지막에 주위 모든 장사들이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하는 진도 아리랑으로 끝을 맺지만...
추석과 설날은 지방사람들이 댜 내려가 허허벌판이 된 시장엔 그 하지장 잚은이들의 모습도
해장국집 아주머니의 고운 미소도 그리고 남도창들을 부르며 주위 모든 고단함을 싸안은
애환들이 서리 서리 서려있었던 50년전 중앙시장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난 오늘 역사탐방과는 상관이 없으나 웬지 50 년 전 생활상이 너무 비슷한 중앙시장이
생각나 이곳에 올려본다. 참 오래전 삶이야기가 향긋한 향내를 풍기네요
아들과 아버지가 바둑을 두는 흐믓한 정경을 보면서 난 글을 올리네요
이 모든 홍복은 아름다운 동행 5670덕분이죠
2016년 6월 12일 낭만씀
첫댓글 아름다운 선배님 덕분에
을지로 탐방 복습하고 갑니다
오늘도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정겹게 쓰신글 읽다보니..저는 화양리에 살았지만..예전의 중앙시장과 동대문에서 광나루로 다니던..기동차길 주변
청계천의 판자집들과..왕십리변에 있었던..대장간들 등등 어린시절의 희미한 잔영들이..주마등처럼 떠오르네요
그땐..제가살던곳은 건대,수도여사대의 대학이있어도 변두리라 어른들은 '시내 다니러 간다는'표현을 '문안 간다'라고 했지요
그리고 화양리나 왕십리쪽들 사람과 마포쪽 사람들은..얼굴에 확연히 표가난다고 하셨어요_ 왕십리쪽 사람들은 목덜미가 거무스럼하고..
마포쪽 사람들은 이마가 검다나요ㅎㅎ 지금생각해보면..왕십리쪽 사람들은 해를등지고..마포쪽 사람들은 해를마주보고 문안까지..
내다팔을 물건들을 이고지고 다니다보니..그리되었던것 같습니다..
왕십리부터 살곶이다리/상원/빼다리고개/능말=능동/가운데골=중곡동/안창말,뱀장아골 등등 정겨운 지명이름과..
명절때 세배돈으로 뚝도극장,광무극장,천호극장 다니던..시절이 그리워지네요~~ㅎㅎ
추억할수있는 글속에 머물다갑니다 감사합니다~ 내내 행복하세요~~
아! 견우님
광무극장에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아시겠는지요 줄을 쭉서고 기다려 최무령 김지미주연의 영화죠
왕십리에 살다 면목동 나중에 중곡동 그리고 지금은 하남시에 살고 있죠
하왕십리에 기동차길 검정다리 엿공장
그런데 안창말뱀장아골이 어딘지는 모르껬지만 정말 그리운 이름들입니다. 고향 분을 만나 졍겹네요 감사합니다.
@낭만 반갑습니다^^ 서울 토박이분들..지금은 지방분들한테 밀려서 좀체로 보기 힘들어졌는데요..ㅎㅎ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관람못하고요..저는 지금 안산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검정다리 기억 당연히나구요
그때,돌아오지않는해병인가.오인의해병인가를 중곡동 용마산쪽에서 촬영하던것도 기억합니다요
그리고 안창말은 '안말'이라고 지금 군자동에 웃말,아랫말, 사태말,건너말,양마동과 함께 형성되어 있었지요
재미있는 뱀장어골은..지금의 화양시장 뒤편으로 세종대 남쪽담과 인접했는데요
들어가는길이 꼬블꼬블하여 붙여진듯합니다 군자동쪽 보다는 화양리에 가까웠습니다.
모쪼록..즐겁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후기글 감사 합니다
어렸을때 신당동살며, 중앙시장 다니던 기억납니다.
시장후면 청계천쪽 도로에 김장재료 실은 차가 다녔던 기억도 납니다. 50년도 더 된 추억이네요,,,
낭만님 덕분에 옛날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ㅎㅎㅎ
선배님 후기 글로 역사탐방을 복습합니다
서울서 나서 자라셨으니 추억거리가 얼마나 많겠어요 ?
읽는 우리도 덩달아 추억으로 내달립니다 ㅎㅎㅎ
낭만선배님 더위에 건강하세요 ^^ 사랑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