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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 ~ 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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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은 재위 기간 동안 수나라의 침략을 네 차례나 받았지만, 모두 물리친 임금이었다. 하지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공은 모두 을지문덕(乙支文德, ?~?)에게로 돌아가, 정작 당시 임금이었던 영양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양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영양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장남으로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임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그는 566년 태자로 책봉되어 25년 동안을 태자로 생활하다가, 590년 왕위에 올라 618년까지 29년간 재위하였다. 고구려인의 평균 수명을 고려해 보았을 때, 영양왕은 매우 어린 나이에 태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는 평원왕이 즉위한 559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평원왕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유목 제국인 돌궐(突厥), 북중국의 강자인 북주(北周) 등과 전쟁을 하였고, 안으로는 강력한 귀족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을지문덕, 온달, 연태조 등 신흥 무장 세력이 새롭게 부상하는 정치적 격변기를 치렀다. 또 586년 수도를 평양 장안성으로 옮기는 등 고구려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영양왕은 어린 시절부터 당시 고구려가 겪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왕이 될 자질을 키워갔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였을 때,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문제였다.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중원의 남조(南朝, 송, 제, 양, 진)와 북조(北朝, 북위, 동위와 서위, 북주와 북제), 그리고 북방의 유목 제국(유연, 돌궐) 등이 4강 내지는 5강을 이루며 서로를 견제하던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같이 다원화된 국제 질서 속에서 상대적인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하지만 589년 양자강 유역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등장은 고구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수나라는 583년 이간정책을 펼쳐 북방의 강자인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시킨 뒤 585년에는 동돌궐을 굴복시키고, 서돌궐마저 약화시켰다.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문제(文帝, 재위: 581〜604)는 이른바 ‘개황의 치’라 불리는 뛰어난 정치를 펼쳐 수나라를 초강대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수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질서를 재편하면서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결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양왕은 이때 수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다. 고구려는 당시 말갈, 거란 등 주변의 여러 세력들 위에 군림하던 강대국이었다.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기존의 약소국은 신흥 강대국에게 붙어 기존 강대국을 견제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기존의 강대국은 신흥 강대국과 대결을 통해 힘의 우위를 확인해야만 한다. 싸우지도 않고 굴복할 경우에는 강대국의 지위를 순식간에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영양왕은 진나라가 멸망한 직후부터 수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대비책을 세웠다.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에게 성의와 예절을 다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영양왕은 선제공격에 나서 적의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전략을 택했다. 성과 무기를 보수하는 방어 전략이 아니라, 선제공격으로 적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공세 전략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4,600만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고의 대국이었으며, 군사력 또한 최강이었다. 하지만 영양왕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598년 2월, 그는 궁성을 나와 요동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말갈인으로 구성된 1만 기병과 만났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수나라의 전진기지와 보급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수나라 영주총관 위충이 나와서 막았지만, 영양왕은 기습에 성공한 후 서둘러 퇴각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수 문제는 즉시 자신의 4남 양량과 고경, 왕세적, 주라후 등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양량의 군대는 북경을 출발해 요서 지방으로 진군했지만, 군량 수송이 원활하지 못해 군사들은 굶주렸고 역병에 걸려 요하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장마까지 만나 퇴각하고 말았다. 왕세적의 군대는 영주에서 퇴각했고, 주라후가 이끄는 해군은 폭풍을 만나 병선 대부분이 파괴되어 열의 여덟이나 아홉이 죽었다.
수나라의 패배는 질병과 홍수, 폭풍 등 자연재해가 주된 원인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나라 측의 기록에 원정군 참모인 고경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지략이 부족한 것을 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돌렸다는 사실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자연재해 때문에 수나라 원정군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군량 수송에 문제가 생겼고, 기록되지 않은 고구려군의 활약으로 패배한 것이 분명하다. 수 문제는 전쟁에서 패하자, 고구려를 굴복시키겠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영양왕의 과감한 선택이 고구려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서기 600년 태학(太學) 박사 이문진(李文眞, ?~?)은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역사서 [유기(遺記)] 100권을 다듬어 [신집(新集)] 5권을 완성했다. 고대국가에서 역사서는 개인이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자료를 독점하고 있어, 왕의 허락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집 5권 편찬은 이문진이 실무를 담당했지만, 이 책을 만들도록 명령한 영양왕의 업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완성된 연대로 볼 때 고-수(고구려-수나라) 전쟁의 승리로 인한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해 이 작업이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따르면 온달(溫達, ?~590) 장군은 영양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가 지배했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出戰)했다가 아차성 아래에서 죽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온달이 신라의 영토를 공격한 것은 대체로 590년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온달은 실패하였지만, 영양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라 진평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섬에 따라 북한산성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왕왕은 포기하지 않고 608년 다시금 신라의 북쪽을 공격해 우명산성을 빼앗고 8천 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다. 다급해진 신라는 608년과 611년 두 차례에 걸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400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를 공격해온 왜군을 격퇴한 이래로, 고구려와 왜국의 관계는 소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영양왕은 왜국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595년 영양왕은 혜자(慧慈, ? ~ 622) 스님을 왜국에 파견했고, 혜자는 615년까지 20년간 왜국에 머물면서 왜국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영양왕은 605년, 왜국에서 호류사(法隆寺)에 장육불상(丈六佛像)을 만든다고 하자 황금 300량을 보내고, 담징(曇徵, 579~ 631) 등의 승려와 기술자, 화가 등을 파견하기도 했다.
영양왕이 왜국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은 것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왜국으로 하여금 신라를 견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지 않아야 수나라와의 전쟁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기 때문에, 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고구려에게 큰 실익이 될 수 있었다.
신라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591년 남산성 축성, 593년 명활산성 증축, 서형산성 축성 등 왕경 주변에 요새를 건설하기에 나섰다. 고구려와 왜국, 백제의 신라 견제가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602년 왜국은 래목황자를 신라 정벌 장군으로 임명하고, 2만 5천의 군사를 준비시켰다. 602년 8월 백제군은 남원에 집결하여,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왜국도 이에 맞춰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왜국의 총사령관 래목황자가 병이 드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했다. 왜국이 참전하지 못함에 따라 고구려군도 출격을 미루고 있었다. 이에 백제군이 홀로 신라군과 싸우다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비록 고구려-왜-백제의 신라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왜를 끌어들임으로써, 고구려로서는 신라를 견제하는 것에 성공하고 있었다.
604년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고구려와 전쟁을 포기한 수 문제 대신, 그의 욕심 많은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와 형인 양용을 죽이고 수 양제(隋煬帝, 재위: 604〜618)가 된 것이었다. 수 양제는 토욕혼, 고창국, 돌궐 등을 정복한 후, 고구려마저 굴복시키려고 준비했다. 다시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영양왕은 수 양제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사신을 돌궐에 보냈다. 당시 돌궐에는 수 양제가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啓民可汗, ?〜609)을 만나러 왔었다. 돌궐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난 수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했다.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는 것은 수나라가 몹시 두려워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영양왕은 왜국, 돌궐 등과의 외교 교섭,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 강화, 신라에 대한 견제 등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이 전쟁은 요동성 방어 전투, 영양왕의 이복동생인 건무 장군의 평양성 전투,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등으로 인해 고구려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쟁 영웅은 을지문덕, 건무 등이지만, 여기에는 영양왕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외교와 내치였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거두기 위해 청야전술(淸野戰術: 적이 이용할 식량과 물자를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식량을 적에게 주지 않기 위해 모두 들판을 비우고 성에 피신하는 단결력을 보여주었던 덕분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왕의 내치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13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다시금 적을 물리쳤다. 하지만 영양왕은 수나라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614년 수나라가 또 다시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자 이미 항복해온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싸우지 않고 적을 퇴각시켰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쏟았음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흔들려 618년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영양왕은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하지만 요동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된 탓에 고구려의 패해도 컸다. 영양왕은 전쟁에서 잡은 수나라 포로들을 적극 수용해 이들을 고구려에서 정착하게 살도록 하여, 이들과 함께 전후 복구 사업을 전개했다.
1456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세조에게 전대의 임금과 재상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상소하였다. 이로 인해 단군을 비롯해 삼국과 고려의 시조 등 12명의 역대 임금과 을지문덕 등 16명의 역대 신하들이 사당에 배향(配享) 되었는데, 여기에는 영양왕도 포함되었다. 그가 수나라 대군을 대파하고 고구려를 지킨 공을 후손들도 인정한 것이었다.
당나라의 역사가 두우(杜佑)가 766년부터 30년에 걸쳐 편찬한 중국의 제도사 [통전(通典)]의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땅이 후한 시기(1~2세기)에는 사방 2천리였고, 위나라 시기(3세기)에는 남북이 점점 좁혀져 겨우 1천여 리였으나, 수나라 시기(581~618)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 동서 6천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커졌던 것이다. 즉, 영양왕은 고-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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