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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파 박찬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봅시다^^ --------------------------------------------------------- 200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더불어 플로리다의 우승으로 막이 내린 메이저리그도 새로운 우승팀을 찾기 위해 새롭게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소식은 박찬호의 부활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병현이나 최희섭 등 다른 메이저리거들이 각자 열심히 활약하는 게 사실이지만, 누가 뭐래도 박찬호의 상징성은 그런 단순함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할 것이냐,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박찬호...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해서 한번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 이름 : 박찬호 영문이름 : Chanho, Park 생년월일 : 1973년 6월 29일(음력) 출생지 : 충남 공주 거주지 : Arlington, Texas 신장 : 185cm (6' 2") 몸무게 : 95kg 포지션 : 투수 별명 : 볼파크(Ball Park), 코리안특급, 순둥이 1. Chanho in Korea 박찬호가 야구팬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당시 그가 속한 공주고는 천안 북일고와 함께 충남지역 라이벌을 형성하고는 있었으나 휘문고나 경남고, 신일고 등은 물론이고, 천안 북일고 보다도 한 수쯤 뒤처지는 사실상 2류급 학교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또한 당시 박찬호와 같은 나이에 활동했던 동기들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투수들이 무척이나 많았는데, 그들은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정민철 등이었습니다. 특히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는 당시 '서울의 빅 쓰리'로 불리며 당장 프로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평가를 들었던 반면, 박찬호와 정민철은 이들에 비해서는 실력이 딸리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2학년 때 박찬호의 공주고는 전국체전 우승, 청룡기 준우승 등을 하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냈지만, 여전히 박찬호는 '빅 쓰리'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공만 빠른 준척급 선수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진 못합니다. 그런 평가가 슬슬 뒤집혀 지는 것은 박찬호가 한양대에 입학한 후 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버팔로 유니버시아드 대회 이후입니다. 이 대회에서 박찬호는 임선동과 조성민을 제치고 첫 경기 선발투수로 출전, 승리를 낚아챕니다. 이후의 경기에서도 박찬호는 임선동과 조성민을 능가하는 활약을 펼치고, 당시 신인선수를 발굴하기 위해 나와있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지요. ![]() 찬호의 아마시절 하이킥킹 이 어린 강속구 투수를 노린 팀은 애틀란타, 양키스, 다저스 등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다저스에 의해 박찬호는 드디어 메이저 리거가 됩니다. 이제 그의 라이벌은 더 이상 임선동이나 조성민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메이저 리그 투수들이 된 것이지요. 2. Chanho in LA Dodgers Year Team W L ERA G GS CG SHO SV SVO IP H R ER HR HBP BB SO 1994 LA 0 0 11.25 2 0 0 0 0 -- 4.0 5 5 5 1 1 5 6 1995 LA 0 0 4.50 2 1 0 0 0 -- 4.0 2 2 2 1 0 2 7 1996 LA 5 5 3.64 48 10 0 0 0 -- 108.2 82 48 44 7 4 71 119 1997 LA 14 8 3.38 32 29 2 0 0 -- 192.0 149 80 72 24 8 70 166 1998 LA 15 9 3.71 34 34 2 0 0 -- 220.2 199 101 91 16 11 97 191 1999 LA 13 11 5.23 33 33 0 0 0 -- 194.1 208 120 113 31 14 100 174 2000 LA 18 10 3.27 34 34 3 1 0 -- 226.0 173 92 82 21 12 124 217 2001 LA 15 11 3.50 36 35 2 1 0 -- 234.0 183 98 91 23 20 91 218 80승 54패, 다저스에 있는 동안 박찬호가 거둔 성적입니다. 지금 이름을 떨친다는 오클랜드의 영건 3인방이나 컵스의 케리 우드, 토론토의 사이영 위너 할라데이 등과 비교해 봤을 때 오히려 나았으면 나았지 뒤떨이지지 않는 성적이지요. 하지만 단순히 이런 수치 나열만으로 다저스에서의 박찬호를 설명할 수는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차근차근 한번 살펴 봅시다. 첫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96년부터 얘기를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94년 메이저리그 진출 후 눈물 젖은 마이너 생활을 견뎌내고, 드디어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는 그 해 선발과 중간 계투를 오가며 만족할만한 성적을 냅니다. 메이저 첫승은 한국 시간으로 4월 7일 새벽, 리글리 필드에서의 컵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기록합니다. 당시 선발투수는 다저스의 제 1선발 라몬 마르티네즈(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친형) 였는데 1회 타석에서 부상을 당합니다. 감독인 라소다는 마르티네즈를 대신해 박찬호를 투입하게 되고, 박찬호는 6회초 타석에서 대타와 교체될 때까지 4이닝 동안 삼진 7개를 잡으며 무실점 호투를 합니다. 결국 경기는 3대1 다저스 승리로 끝이났고, 박찬호는 고대하던 메이저 첫승을 기록하게 된 것이죠. ![]() 풀타임 2년차인 97년, 박찬호는 이제 풀타임 선발에 진입합니다. 라몬 마르티네스, 노모등에 이어 당당히 제 5선발이 된 것이지요. 당시 박찬호가 풀타임 선발이 되면서 국내의 팬들도 좋은게 한가지 생겼었습니다. 바로 정기적으로 찬호가 나오기 때문에 생중계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은 MBC가 중계를 하지만, 당시의 중계는 KBS가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일성 씨가 해설을 하셨는데 어땠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어쨋든 5일마다 박찬호 나오는 재미로 사신 분들이 무척이나 많았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당시 IMF로 온 국민이 어려웠는데 박찬호의 1승1승은 국민들에게 많은 희망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국민들의 바램을 아마 박찬호도 알았나 봅니다. 찬호는 14승을 기록하며 제 5선발의 역활을 200%이상 수행하게 되고, 가장 주목받는 신인 투수 중 한명이 됩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돈트렐 윌리스등이 받는 이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박찬호 삼진으로 간단하게 소사처리 98년 박찬호는 드디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맘껏 펼치게 됩니다. A급 투수의 척도인 15승을 거두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슬슬 미래의 사이영 위너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실제로도 박찬호는 커브를 장착하며 슬라이더 일변도이던 변화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구질이 다양해 졌다는 얘기이고, 이는 95마일 이상의 직구 위력에 더해져 투수로서 완성되기 시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박찬호의 커브는 후에 대릴 카일, 케리 우드에 이어 메이저 리그 전체 3위로 평가 받기도 하지요. 한편 이해의 박찬호는 한가지 골치아픈 일을 해결합니다. 그것은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함으로써 군대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뒤 무리한 일정소화로 내년의 부진을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 방콕 아시안 게임 우승 직후 조인성과 포옹 99년은 한 마디로 찬호에겐 최악의 해 였습니다. 당장 수치로 드러난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죠. 13승 11패에 방어율 5.23.. 풀타임 선발이 된 후 승승장구하던 지난 해의 방콕 아시안 게임 차출로 인한 체력저하가 원인이 된 박찬호는 고질적인 제구력 난조와 피홈런의 증가로 힘든 시즌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 해에는 성적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찬호 개인에게 우여곡절이 많은 한 해 였습니다. 우선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 유명한 '발차기 사건'입니다. 사건은 6월 6일 애너하임 전에서 터집니다. 5회 만루홈런을 맞은 뒤 6회에 타석에 들어선 박찬호는 땅볼을 친 뒤 1루수 팀 벨처에게 태그아웃을 당하죠. 그 과정에서 팀 벨처는 박찬호에게 욕설을 하고, 안그래도 만루홈런 맞아 성질 난 찬호는 화려한 이단 옆차기를 선보입니다. 당시에 이 사건은 꽤나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 오르락거리며 박찬호가 전국적으로 지명도를 높히는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합니다. ![]() 박찬호 이단 옆차기!! 두번째로 기억나는 것은 한이닝 만루홈런 2개이네요. 세인트루이스와의 경기에서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 2개의 만루홈런을 기록한 것이지요.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그런 상황에서도 투수교체를 왜 안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굵직한 사건도 여러개 터뜨리고, 성적도 안 좋았지만 박찬호는 후반기에는 7연승을 달리며 부활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 우려반, 기대반으로 맞이한 2000년 찬호는 언제 부진했었냐는 듯이 다시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갑니다. 더구나 에이스인 케빈 브라운이 중간에 부상으로 나가떨어지는 상태였기 때문에 찬호의 부활은 다저스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웠을 것입니다. ![]() 사이영 후보에도 오르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친 찬호는 226이닝 동안 18승에 3.27의 방어율, 21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대부분의 스탯에서 5위권 이내를 마크합니다. 바야흐로 사이영상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찬호에게는 일말의 불안감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눈에 띄게 직구 구속이 저하가 된 것입니다. 97~8마일을 넘나들던 찬호의 광속구는 94마일대로 떨어졌고, 대신에 찬호는 커브를 주무기로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잘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래부터 찬호는 제구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기에 위력이 떨어진 직구는 실제로도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고, 이는 후에 실제로 그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쨋든 화려한 성적에 묻혀 그런 불안감은 감춰지고 찬호의 2000년은 끝이납니다. 다저스에서의 마지막 해인 2001년 찬호의 출발은 괜찮았습니다. FA를 앞둔 해여서인지 전반기에 찬호는 2000년을 능가하는 성적을 올리며 처음으로 올스타전에도 진출하게 됩니다. 비록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패전투수가 되긴 하지만요. ![]() 올스타전 경기에서의 찬호 어쨋든 전반기의 찬호가 얼마나 대단했느냐를 바로 알 수 있을만한 자료가 있는데, 그것은 당시 FA선수 랭킹입니다. 그것에 의하면 찬호는 배리 본즈, 제이슨 지암비등을 제치고 FA랭킹 1위를 차지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투수 연봉 1위는 확실하다라는 말까지 나오며 박찬호는 계속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화려한 성적에 가려져 있던 찬호에 대한 불안감이 후반기에 이르러 조금씩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직구는 이제 94마일을 넘기지 못하게 되었고, 찬호의 변화구를 조금씩 파악하기 시작한 타자들은 변화구는 기다리면서 볼로 거르고, 위력이 감소한 직구를 노려치며 찬호를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시즌이 종료된 후 2점대를 유지하던 방어율은 3.5로 뛰게 되었고, FA랭킹에서도 본즈와 지암비에 밀려 3위로 추락합니다. 물론 투수 중에서는 1위였으나 후반기의 모습에서 찬호에게 불안감을 느낀 여러 구단들은 섣부른 투자를 하지 않으려 했고, 에이스 투수가 절실한 텍사스만이 찬호에게 관심을 보이며 결국 기대보다 훨씬 작은 5년간 6500만달러에 다저스에서 텍사스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3. Chanho in Texas Rangers & in Future Year Team W L ERA G GS CG SHO SV SVO IP H R ER HR HBP BB SO 2002 TEX 9 8 5.75 25 25 0 0 0 -- 145.2 154 95 93 20 17 78 121 2003 TEX 1 3 7.58 7 7 0 0 0 -- 29.2 34 26 25 5 6 25 16 2004 TEX ??? 많은 기대를 받으며 텍사스의 에이스가 된 박찬호, 하지만 박찬호는 오랜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텍사스에서의 2년간 박찬호는 에이스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커녕 최악의 먹튀라는소리까지 들으며 고난의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텍사스의 언론은 레인저스가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지구 꼴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박찬호의 영입이라는 표현까지 해가며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 하지만 2004년, 올해는 정말로 다를 겁니다. 1년간의 재활치료... 의료진은 물론 박찬호 스스로 역시 이제 몸은 완벽하다고 호언장담 하고 있습니다. 노력하는 선수 찬호는 지금도 부활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올해 다시 95마일의 강속구를 뿌리며 마운드 위에 당당히 서 있을 겁니다. 찬호는 이미 한 야구 선수일 뿐이 아니라 어려운 시절 우리의 꿈을 대신해 주었던 상징이었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박찬호는 우리의 희망을 지켜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찬호는 그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그때나 지금이나 박찬호의 1구1구에 환호하는 우리 국민이 많다는 것을 찬호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달립시다. Go Chanho Park61!! Go Rangers!! ![]() 올 시즌 이 사진처럼 활짝 웃는 찬호의 모습을 보길 기대합니다 |
첫댓글 찬호형 화이팅입니다~!
오늘넘 잘던졋어요..퓨.ㅠ 쭉 ~~` 오늘처럼만 유지하길....^.~
오늘 뛰었나요? 어케 됐나요
박찬호 오늘 승리했어요 깔끔하게 2실점밖에 하지 않았고요
진짜 박찬호야말로 진정한 코리안특급1호신데 꼭 다시 힘내셧으면 좋겟어여~
찬호띠 .. 달러 국내에 가지고 와야지... 미국에다 호텔사면 어떻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