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419.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금요일. - 먹으니 먹히다 . 등 )
*** 06:56. 김찬선 신부님 강론 글 추가. *** 07:00. 김명겸 신부님 묵상글 추가.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먹으니 먹히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밥을 먹으니
밥이 되어
밥으로 먹히다
영을 먹으니
영이 되어
영으로 먹히다
빛을 먹으니
빛이 되어
빛으로 먹히다
선을 먹으니
선이 되어
선으로 먹히다
믿음을 먹으니
믿음이 되어
믿음으로 먹히다
희망을 먹으니
희망이 되어
희망으로 먹히다
사랑을 먹으니
사랑이 되어
사랑으로 먹히다
정의를 먹으니
정의가 되어
정의로 먹히다
진리를 먹으니
진리가 되어
진리로 먹히다
자유를 먹으니
자유가 되어
자유로 먹히다
생명을 먹으니
생명이 되어
생명으로 먹히다
영원을 먹으니
영원이 되어
영원으로 먹히다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4.19 05:43
- 은총주의자
저는 가끔 언론의 허풍스러운 표현들에 불쾌할 때가 꽤 있습니다.
왜냐면 ‘세기적인 결혼’이니 ‘세기적인 사건’이니 하는데
별것 아닌 것에 엄청난 의미를 갖다 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전도(轉倒)야말로 이런 표현이 어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한 사건일 겁니다.
세기적 사건 정도를 넘어 ‘전 세기적 사건’ 또는 ‘인류사적 사건’이라고.
그러나 제 생각에 이 표현도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전도, 이 사건은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고 구세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불교적으로 바꿔 얘기하면 돈오(頓悟)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점수(漸修)와 비교되는 것으로서 점수가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비해 단박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사울의 전도 사건은 이런 돈오 사건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사울이 고꾸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고꾸라트리신 것이기 때문이고,
사울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회개를 이야기하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회개에 있어서 주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회개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사실 스스로 변하는 것은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이 떨어지면 그 동력도 떨어지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힘에 의한 변화는 그렇지 않지요.
그 동력이 계속 유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울이 박해자에서 주님의 그릇이 되고 사도가 된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으로 된 것이기에
바오로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강력한 은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주님께서 선택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선택받았을 뿐 아니라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릇이 크다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 이상이지요.
인간적으로 그릇이 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품이 크다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다시 말해서 꿈과 비전이 크다는 뜻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경우는 은총의 그릇이 큰 것이고 고난의 잔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결국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하기에 은총도 많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고난이 많다는 것은 은총도 많이 주신 것이 되는 걸까요?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전자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고 후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제 차에는 스마트폰 자동 충전 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연결 잭을 꽂지 않아도 충전할 수 있는 위치에 놓아두면 자동으로 충전이 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지방에 갈 일이 있었고, 습관적으로 자동 충전 장치에 스마트폰을 위치시켜서 운전 중에 충전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고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충전이 하나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의 방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왜 충전이 안 되었나를 살펴보니, 자동 충전 장치에 이물질이 들어 있었고 이로 인해 접속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충전 장치의 충전이 시작되면 노란 불이 표시됩니다. 그러나 운전에만 신경 쓰다 보니 이 표시를 확인하지 않았고 또 당연히 충전되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전원과 연결되어야 충전되듯, 우리 역시 주님과 연결되어야 삶 안에서 힘차게 살 수 있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연결을 제대로 하지 않고, 또 막연하게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 빠지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 자기만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 실천에는 인색한 사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
신앙인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입으로만 연결되었다고 말하고 또 막연하게 연결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마트폰도 전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방전되어서 사용할 수 없듯이, 자기의 영적인 힘이 모두 빠져나가서 결국 주저앉고 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번 주 복음은 계속해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스스로 빵이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방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충전된 삶을 살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이셨습니다. 문제는 주님과의 연결을 피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누릴 것에만 신경 쓰면서, 정작 주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라면서 치워달라고 요청해서는 결코 주님과 연결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이런 메시지가 나오지 않을까요?
‘연결 불량.’
주님과의 정확한 연결을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사랑의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연결 불량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
오늘의 명언: 삶에서처럼 예술에서도 사랑에 뿌리를 두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마르크 샤갈).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살은 참되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5)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다툼이 벌어진 유다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 것이다.
내 살은 참되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4-5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 6,56)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건네시는 이 크신 사랑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가 참되 양식이요 참된 음료’(요한 6,55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불사불멸의 명약이요 죽음에 대한 해독제다.”
오늘도 우리는 이 미사 중에,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 제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양가 있는 음식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정성이 담긴 음식을 사랑으로 먹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 ‘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으니 우리는 감사히 잘 받아먹음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과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는 하나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보다 영양가 있는 영원한 생명이신 성체를 모시길 갈망합니다.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그러므로 더 자주 미사참례를 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않고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책 중에 ‘빙하’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구에 있는 물을 양의 순서로 보았을 때, 가장 양이 적은 곳은 ‘강’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곳은 ‘호수’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곳은 ‘지하수’라고 합니다. 가장 많은 양의 물이 있는 곳은 ‘빙하’라고 합니다. 빙하에 있는 물은 지구 전체에 있는 물의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유고슬라비아의 과학자 밀란코비치는 천체의 관측을 통해서 빙하기를 예측했다고 합니다. 빙하의 원인은 3가지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궤도가 타원형이라고 합니다. 타원형의 궤도에는 가장 가까운 점과 가장 먼 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심률이라고 하는데 그 주기가 10만년 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서 태양을 공전한다고 합니다. 지구가 기울어져있지 않고 똑바로 태양을 공전한다면 계절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23.5도로 기울어져있는 지구 자체가 팽이가 회전을 하듯이 자전을 하는데 그 기울기가 4만년을 주기로 1도씩 바뀐다고 합니다. 22도의 기울기가 되었다가, 24.5도의 기울기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세차운동이라고 합니다. 타원형의 궤도, 23.5도 기울어진 지구, 기울어진 지구의 세차운동이 10만년을 주기로 빙하기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지구가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지구는 태양이 없으면 아름다운 별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사악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는데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요?’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도, 살아있는 이도 모두 보살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시편에서 말한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이렇게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생물학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물리학적인 시간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라는 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있기 때문이듯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3걸음 만에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첫 걸음은 좋은 생각, 두 번째 걸음은 좋은 말, 세 번째 걸음은 좋은 행동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생각’입니다. 백인대장은 좋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오지 않으셔도, 그저 한 말씀만 하면 부하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좋은 생각을 칭찬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좋은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좋은 행동’입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여라.’ 율법학자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할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참으로 달달합니다. 저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살게 된다고 말씀하신 이 대목이 참으로 달달하게 느껴집니다.
예전에 ‘다모’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를 다 보지는 못했지만, 유명한 대사는 알고 있습니다. 시대를 달달하게 만들었던 그 대사가 아직도 떠오릅니다. 여러분도 아시나요? 이런 대사였습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표현을 이렇게 짧고 강렬하게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아팠을 때 우리의 마음이 아프다면 우리는 그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주님께서도 아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기쁠 때 주님께서도 기쁘십니다. 우리가 죄 중에 있을 때 주님을 슬퍼하시고 선행을 할 때 기뻐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하루가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행실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의 연결 끝이 더욱 단단해지기를 희망합니다.
--------------
코다리찜의 가르침
얼마 전 동생과 코다리찜을 먹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고기보다는 생선 쪽으로 메뉴를 정합니다.
훨씬 속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코다리찜을 선택했습니다.
가볍게 먹기 위해서, 속 편하려고 선택했는데
결과는 또 과식입니다.
너무 맛있지, 뭡니까. ㅜ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어떻게 걷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기도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도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어떻게 깊게 이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자격증 취득하듯 맛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 안에서 기쁨의 샘이 솟아오르기를 기도합니다.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 은총 뿐이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매일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사제생활 초기 40대 강론이 격식을 갖춘 비교적 짧은 간결하고 강렬한 강론이었다면 지금은 이런저런 이야기와 시의 인용으로 자유로워진 강론이니 나이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회개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저는 언제나 밤 12-01사이에 기상하면, 만세칠창후 01-04시까지는 맑은 정신으로 그날의 강론을 씁니다. 죽으면 영원한 잠인데 때로는 잠시간이 아깝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제64주년 4.19 혁명 기념일입니다. 1960년 당시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다음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군사혁명으로 일컬어졌고 군사정변으로 옳게 바로잡혀 있음을 봅니다. 혁명중의 혁명이 무혈혁명인 선거혁명이요 가장 좋은 최고의 혁명이 끊임없는 영적혁명, 내적혁명이 회개일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할 영적혁명, 회개의 여정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질병인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도 회개의 은총,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회개의 은총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됩니다. ‘즐거운 아웃사이더’이자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였고 대표적 진보운동인,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홍세화씨가 1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향년77세로 별세했으니 이런 죽음 또한 우리에게는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어제 친애하는 사제로부터 ‘잠자는 성 요셉’ 상을 선물받았으니 이 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꿈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상위에는 잠자는 성요셉상이 있어, 교황님은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종이에 써서 성요셉상 밑에 넣어두면 꿈중에 해결해 주신다 합니다. 저는 어제 잠잘 때 이불 속에 넣고 단잠을 잤고 매일 그러하려 합니다.
어제 교황님은 갈멜회 수녀님들을 알현하면서, “관상의 길은 원래 사랑의 길이다. 그길은 우리가 받은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만든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에 사로잡혀 살도록 하자.” 이 또한 우리의 사랑에 신선한 도전이자 회개의 표징이 되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이 말씀도 회개와 더불어 우리를 참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부귀해서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만족하기에 부귀해 질 수 있는 것이다.”-다산
“현명한 사람은 재산이 많으면 그 뜻을 상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이 많으면 허물만 더하게 된다.”-한서
새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한 겸손과 지혜의 열매가 무지에 대한 최선의 처방임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의 참삶이 실현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사울의 회심을 전해 줍니다. 늘 읽어도 처음 읽는 듯 사울의 신선한 충격의 회심 은총 사건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후 결정적 순간을 기다려온 주님께서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무지하고 용감하면, 눈먼 열심에는 답이 없으니 신자들을 박해하던 무지몽매하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원대한 꿈에는 사도 바오로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음을 봅니다. 바오로의 회심이 참으로 극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극적 회심 은총의 장면을 사울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새삼 회개는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은총이자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이들 안에 늘 현존하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가까이 만나는 형제자매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회개로 맑아진 영혼들에게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자 얼굴로 보일 것입니다. 사울 역시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임이 드러납니다.
여기 어제 필리포스처럼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니아스라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니아스에게 안수를 받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다시 보게 되었고 이어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자 곧장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니 회개의 완성과 더불어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회개로 끝난 사울의 삶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었을 회개의 여정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울처럼 전격적이고 극적인 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의 소소한 회개도 있고 이런 회개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나날의 일과표가 정말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바로 날마다 참여하는 성체성사와 시편성무일도가 회개의 일상화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회개 역시 “회개-훈련-습관”의 도식이 성립됩니다.
자비송의 회개로 시작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과 동시 이뤄지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에 대한 기막힌 절정의 강론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성체성사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회개는 물론이요,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이니 회개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에,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영혼의 궁극의 배고픔고 목마름도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뿐이요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체성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듯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니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요 이의 결정적 빛나는 본보기가 오늘 사도행전의 회심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야 말로 회개의 달인, 회개의 대가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줍니다. 사도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0-21ㄱ). 아멘.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생명이신 분을 먹고 마시다
오, 숭고한 겸손이여! 창조주께서 당신 피조물들을 기쁘게 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주시도다! 죽을 운명의 존재들에게 생명께서 당신을 먹고 마실 것으로 주시도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와서 내 몸을 먹어라. 너를 위해 내가 섞은 포도주를 마셔라. 나 자신을 음식으로 준비했다. 나를 소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섞었다. 나의 의지로 나는 육이 되어 너희의 살과 피를 나누는 이가 되었다. .. 나는 생명이니 나를 먹고 살아라.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 내 빵을 먹어라. 나는 생명을 지닌 밀알이며 생명의 빵이기 때문이다. 너희를 위해 내가 섞은 포도주를 마셔라. 나는 불사의 잔이기 때문이다 ... ‘나는 참포도나무’(요한 15,1)니, 나의 기쁨, 곧 너희를 위해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잠언 9,5).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아를 예로 들기는 하지만 마리아 숭배나 지주(支柱) 공경은 의식적으로 피한다. 그는 우리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을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준 첫 모범, 곧 하느님의 피조물 가운데 첫 모범으로서 마리아를 등재할 따름이다.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고 해도 내가 은총을 가득히 받지 못했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을 종교적 귀감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을 뿌리친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을 흠모하지 말고, 그대가 직접 하느님의 총애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버림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 속으로 깊이 가라앉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만물이 평등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대야말로 온통 천사이며, 온통 천사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156)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셰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활 자세를 취해야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제복에 황제의 문양을 달고 다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황제의 문양을 한 제복의 명예를 더럽힐 수 있는 일들은 자제하거나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들이 그러한 일을 행하려는 시도를 한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못하게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들에게 나쁜 일을 저지르려고 해도 이들이 입고 있는 제복이 그것으로부터 보호하여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외적인 옷에 그리스도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그리스도와 아버지 그리고 성령께서 사시도록 하는 사람은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전의 낡은 생활 태도를 버리고 좋은 생활 태도를 가져서 매일 전개되는 일상생활을 성실히 수행해 나감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이들의 영혼속에 황제의 문양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게 합니다
공직을 수행한 사람들이 제복에 황제의 문양을 지님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예로운지위를 보여주듯이, 그리스도를 입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아 그를 영원히 입게 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놓여 있는 위치를 보여주고자 원하기만 하면, 많은 말을 동원할 필요 없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성실한 삶을 통해서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분의 권세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번쩍이는 흰옷이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듯이, 여러분이 열성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임금의 옷이 지닌 밝은 빛을 지켜 나간다면 사람들도 여러분과 같이 열성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려 할 것입니다.(197)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어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내용이 제시되었다면 오늘은 성찬 전례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두 가지 방식, 곧 말씀과 성체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복음)와 함께 ‘바오로의 회심’(독서)이 함께 연계됨으로써 ‘만남’에 대한 내용이 부각됩니다.
바오로가 “살기를 내뿜으며” 다마스쿠스에 이르렀을 때 ‘빛 속에서 땅에 엎어진 상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살과 피’라는 표현이 절마다 되풀이되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독서에서는 하나니아스가 바오로에 대한 부정적 평판을 언급하며 그를 도와주기를 주저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이 불편해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성체를 모시면서 그것이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과 피임을 냄새나 촉감으로 느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러 오시고 그 만남으로 새로운 힘을 얻으며, 그 동행을 우리 일상의 견고한 본질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을 만나는 자세입니다.
----------------------------------------------------
240419.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것은
그 안에 머무르고
그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살과 피를 통해
서로 일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과의 일치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일치의 조건은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 살과 피를 내어줌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지만
예수님께서 살을 취하신 육화의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내어주셨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서가 옵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그 말씀을 듣고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살을 먹으라는 표현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말다툼은
6장의 다른 곳에서
수군거림, 투덜거림으로 표현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했던
불만과도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하기도 하고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탈출기와 요한 6장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런 모습이 인간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에 앞서
그 불만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을 원한다면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머무르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아무런 조건 없이
항상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