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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 宮女(궁녀)& 프랑스(France) 外交官(외교관) 러브스토리(Love story)를 찾아서...........
팩션(faction=fact+fiction)을 빚는 作家(작가)의 靈魂(영혼)은 바위 같고 바람 같다. 古書(고서)를 쌓아 놓고 무거운 엉덩이를 무기 삼아 精讀(정독)의 밤을 보낸 後(후) 登場(등장)人物(인물)의 삶을 좇아 視空間(시공간)을 헤매기 때문이다.
梨心(리심:(Risim)은 初代(초대) 프랑스(France) 公使(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s de Flancy)와 사랑(love)에 빠진 19世紀(세기) 末(말) 宮中(궁중) 舞姬(무희)다.
1893年(년) 5월 빅토르 콜랭(Victor Colin)과 함께 파리(Paris)에 到着(도착)했고 1894年(년) 10月(월)에는 朝鮮(조선) 女人(여인) 最初(최초)로 아프리카(Africa) 大陸(대륙) 모로코(Morocco)의 탕헤르(Tangier)로 건너갔다. 리심(Risim)을 直接(직접) 만났던 2代(대) 프랑스(France) 公使(공사)
프랑뎅(Franden)의 回顧錄(회고록) '韓國(한국)에서(En Cor'e:다시:Again)' 를 살피다가 "리심(Risim)은 自身(자신)이 觀察(관찰)한 놀라운 西洋(서양) 文物(문물)을 여러 페이지(Page)에 걸쳐 記錄(기록)해 두었다.
韓國(한국)敎會史(교회사)硏究所(연구소)/'韓末(한말) 日帝(일제)時代(시대) 宣敎會(선교회)의 韓國(한국) 進出(진출)과 天主敎(천주교)' 심포지엄(symposium) "
外國(외국) 宣敎會(선교회), 初期(초기) 韓國(한국)敎會(교회)의 磐石(반석)
韓國(한국)敎會(교회) 發展(발전)에 獻身(헌신)해온 宣敎會(선교회)의 活動(활동)을 綜合的(종합적)으로 考察(고찰)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韓國(한국)敎會史(교회사)硏究所(연구소)所長(소장) 김성태 神父(신부)는 20일 서울 明洞(명동) 가톨릭(Catholic)會館(회관) 7層(층) 大講堂(대강당)에서 '韓末(한말)ㆍ日帝(일제)時代(시대) 宣敎會(선교회)의 韓國(한국) 進出(진출)과 天主敎(천주교)'라는 主題(주제)로 2007년도심포지엄(symposium)을 열어 그동안 相對的(상대적)으로 疏忽(소홀)하게 다뤄졌던 宣敎會(선교회)들의 業績(업적)을 살펴보고, 이들이 韓國(한국)敎會史(교회사)에서 지니는 意義(의의)를 살펴보는 時間(시간)을 가졌다.
염수정(廉洙政:서울 大敎區(대교구) 總代理(총대리), 硏究所(연구소) 財團(재단)理事長(이사장) 主敎(주교)는 基調(기조) 講演(강연)에서 韓末(한말)ㆍ日帝(일제)時代(시대) 韓國(한국)敎會(교회) 司牧(사목)을 도맡다시피 한 宣敎會(선교회)들의 獻身的(헌신적) 努力(노력)을 높이 評價(평가)하고 感謝(감사)의 마음을 傳(전)했다. 또 4個(개) 宣敎會(선교회) 活動(활동)을 宣敎會別(선교회별)로 發表(발표)한 發題者(발제자)들은 "宣敎會(선교회)마다 立場(입장)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宣敎(선교) 活動(활동)과 本堂(본당) 設立(설립), 敎育(교육)과 社會(사회) 事業(사업) 等(등)을 通(통)해 韓國(한국)敎會(교회) 基礎(기초)를 다지는 데 最先(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基調(기조) 講演(강연)(廉洙政(염수정) 主敎(주교), 韓國(한국)敎會史(교회사) 硏究所(연구소) 財團(재단) 理事長(이사장)▨
廉洙政(염수정) 主敎(주교)는 韓末(한말)에 이어 日帝(일제)時代(시대)에도 韓國(한국)敎會(교회)가 成長(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이 時期(시기) 韓國(한국)에 進出(진출)한 宣敎會(선교회)의 影響力(영향력)이 크게 作用(작용)했다고 評價(평가)했다. 파리(Paris) 外邦(외방)傳敎會(전교회)가 單獨(단독)으로 맡았던 朝鮮(조선) 宣敎(선교)를 파리(Paris) 外邦(외방)傳敎會(전교회)에 이어 進出(진출)한 뻬네딕도회(Société Penedikdo:Penedikdo Society)(1909년)ㆍ메리놀(Merinol) 外邦(외방)傳敎會(전교회)(1923년)ㆍ골롬반(Pelvic:Pelvien) 外邦(외방)宣敎會(선교회)(1933년)와 나눠 맡음으로써 韓國敎會(한국교회) 發展(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파리(Paris)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가 서울(Seoul)ㆍ京畿(경기)ㆍ忠淸道(충청도)ㆍ大丘(대구)ㆍ慶尙道(경상도) 地域(지역)을 △베네딕도회(영어:Benedic Town)가 咸鏡道(함경도) 地域(지역)을 △메리놀회(영어:
Merino ash:프랑스어:Merino frêne)가 平安道(평안도) 地域(지역)을 △골롬반회(프랑서어:Société colombienne:영어:Columban Society)가 全羅南道(전라남도)ㆍ濟州道(제주도)ㆍ江原道(강원도) 地域(지역)을 各各(각각) 맡아 司牧(사목)하는 等(등) 日帝時代(일제시대) 韓國敎會(한국교회) 司牧(사목)은 一部(일부) 地域(지역)을 除外(제외)하고는 大體(대체)로 外國(외국) 宣敎會(선교회)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 廉洙政(염수정) 主敎(주교)의 說明(설명).
廉洙政(염수정) 主敎(주교)는 "이들 活動(활동)에 아쉬움과 限界(한계)점도 있지만 200여 年(년) 한국 敎會史(교회사)에서 韓國敎會(한국교회)를 떠받친 하나의 축이었던 이들의 勞苦(노고)와 犧牲(희생)을 記憶(기억)하며 感謝(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强調(강조)했다.
★파리(Paris)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 全景(전경)★
▨파리(Paris)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와 朝鮮(조선)代牧區(대목구)의 分割(분할)(조현범 박사, 韓國敎會史硏究所(한국교회사연구소)
朝鮮代牧區(조선대목구)는 1911年(년) 6月(월) 서울(Seoul) 代牧區(대목구)와 大丘代牧區(대구대목구)로 分割(분할)됐다. 嚴密(엄밀)하게 말하자면 朝鮮代牧區(조선대목구)가 管轄(관할)하던 傳敎地(전교지) 一部(일부) 地域(지역)이 分離(분리)돼 大丘代牧區(대구대목구)로 新設(신설)된 것이며, 이에 따라 朝鮮代牧區(조선대목구)는 서울(Seoul)代牧區(대목구)로 改稱(개칭)된 것이었다.
趙(조) 博士(박사)는 "이는 단 한 名(명)의 主敎(주교)가 朝鮮(조선) 全域(전역)을 管轄(관할)하던 時代(시대)가 끝났음을 意味(의미)한다"고 指摘(지적)하고, 以後(이후) 새롭게 進出(진출)한 宣敎會(선교회)들에게 朝鮮(조선) 傳敎地(전교지)의 一部(일부)를 分割(분할)할 때 어떻게 處理(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先例(선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分割(분할)의 意義(의의)를 찾았다.
趙(조) 博士(박사)는 "兩(양) 代牧區(대목구)로 나뉜 朝鮮敎會(조선교회)는 애초 期待(기대)와 달리 低調(저조)한 成長勢(성장세)를 보이는 아쉬움을 남겼다"면서 "하지만 1920년까지 邦人(방인) 司祭(사제) 數(수)가 두 배로 늘어난 것은 파리(Paris)外邦宣敎會(외방선교회) 宣敎師(선교사)들이 거둔 刮目(괄목)할 만한 成果(성과)"라고 밝혔다.
▨宣敎(선교) 베네딕도회(영어:Benedic Town)의 韓國(한국) 進出(진출)과 宣敎(선교) 活動(활동)(선:프랑스어:ligne) 지훈神父(신부), 聖(성) 베네딕도회(영어:Benedic Town) 倭館(왜관)修道院(수도원)▨
선(프랑스어:ligne) 神父(신부)는 1909年(년)에서 1949年(년)까지 韓國(한국)과 滿洲(만주)에서 活動(활동)했던 베네딕도(영어:Benedic Town) 會員(회원)들의 宣敎(선교) 方法(방법)과 特性(특성)을 修道(수도) 生活(생활)과 敎育(교육) 活動(활동), 그리고 典禮(전례) 活動(활동)이라는 세가지 營域(영역)으로 나눠 考察(고찰)했다.
선(프랑스어:ligne) 神父(신부)는 "邦人(방인) 後進(후진) 養成(양성)을 위한 베네딕도회(영어:Benedic Town)의 活動(활동)은 修道者(수도자) 養成(양성)과 職業(직업)學校(학교)와 小神學校(소신학교), 그리고 大神學校(대신학교)를 通(통)해 現實化(현실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와 같은 修道院的(수도원적)이고 베네딕도회(영어:Benedic Town)적인 敎育(교육)은 住民(주민)들을 發展(발전)시키는 데도 寄與(기여)했다"고 말했다.
선(프랑스어:ligne) 神父(신부)는 이어 "베네딕도회(영어:Benedic Town)의 莊嚴(장엄)한 典禮(전례)는 宣敎(선교) 活動(활동)에서 큰 役割(역할)을 했다"며 "베네딕도회(영어:Benedic Town)의 韓國語(한국어) 미사(Missa)와 그레고리안(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는 그레고리우스(Gregory) 一世(일세)가 制定(제정)한 가톨릭(Catholic)의 聖歌(성가). 本來(본래)는 伴奏(반주) 없는 單純(단순)한 旋律(선율)의 莊嚴(장엄)한 노래(Song)였으나, 오늘날에는 伴奏(반주)를 넣기도 한다
聖歌(성가) 미사(Missa) 등은 오늘날 韓國敎會(한국교회) 典禮(전례) 發展(발전)에 礎石(초석)을 마련한 것"이라고 意味(의미)를 附與(부여)했다.
▨1930년대 메리놀(영어:Merino ash:프랑스어:Merino frêne) 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의 宣敎(선교) 活動(활동)(김수태 敎授(교수), 忠南大(충남대)
金(김) 敎授(교수)는 "1930年代(년대) 메리놀 (영어:Merino ash:프랑스어:Merino frêne)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의 宣敎(선교) 活動(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注目(주목)할 것은 '平信徒(평신도) 刷新(쇄신) 運動(운동)'이었다"고 指摘(지적)했다. 金(김) 敎授(교수)는 當時(당시) 메리놀(영어:Merino ash:프랑스어:Merino frêne) 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에서 管轄(관할)한 平壤敎區(평양교구)가 3年(년) 가까이 展開(전개)한 가톨릭(Catholic)
運動(운동)을 韓國敎會史(한국교회사)에 커다란 劃(획)을 그은 事件(사건)으로 評價(평가)했다. 平信徒(평신도)의 位置(위치)와 役割(역할)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自覺(자각)할 수 있는 端初(단초)를 提供(제공)했기 때문이다.
金(김) 敎授(교수)는 두 번째로 注目(주목)해야할 事實(사실)로 文書(문서) 宣敎(선교) 活性化(활성화)를 꼽았다. 平壤敎區(평양교구)는 定期(정기) 刊行物(간행물) 出版(출판)을 通(통)한 文書(문서) 宣敎(선교)에 깊은 關心(관심)을 갖고 集中(집중) 推進(추진)했는데, 이는 文書(문서) 宣敎(선교)를 通(통)해 平信徒(평신도)를 刷新(쇄신)시키는 한편 韓國人(한국인)들에게 天主敎(천주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 金(김) 敎授(교수)의 說明(설명)이다.
金(김) 敎授(교수)는 아울러 神社(신사) 參拜(참배)를 拒否(거부)한 것 亦是(역시) 빼놓을 수 없는 歷史(역사)의 한 場(장)이었음을 周知(주지)시켰다. 金(김) 敎授(교수)는 메리놀회(영어:Merino ash:프랑스어:Merino frêne) 와 달리 뮈텔(영어:Dali Multel:프랑스어:Dali Multel) 파리(Paris)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 主敎(주교)가 서울(Seoul) 敎區(교구)에서 神社(신사) 參拜(참배)를 許容(허용)한 것은 各(각) 敎區(교구)가 속한 傳敎會(전교회)의 入場(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고 풀이했다.
▨머나먼 東(동)쪽을 찾아온 宣敎師(선교사)들-1945년 解放(해방)까지 光州敎區(광주교구)의 골롬반(영어:Pelvic:프랑스어:Pelvien) 修道會(수도회)(옥현진 神父(신부), 光州(광주)가톨릭대(Catholic University)
玉(옥) 神父(신부)는 當時(당시) 골롬반(영어:Pelvic:프랑스어:Pelvien) 外邦宣敎會(외방선교회) 宣敎師(선교사)들의 가장 큰 特徵(특징)으로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性向(성향)을 들었다. 卽(즉) 파리(Paris)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를 中心(중심)으로 한 韓國敎會(한국교회)가 大體(대체)로 朝鮮(조선) 民衆(민중)의 소리보다는 旣得權(기득권) 勢力(세력)인 日本(일본) 軍部(군부)의 소리를 듣고 그들 入場(입장)에서 宣敎(선교)를 해왔다는 批判(비판)이 받았는데 반해 光州(광주)에 들어와 活動(활동)하던 골롬반(영어:Pelvic:프랑스어:Pelvien) 宣敎師(선교사)들은 民衆(민중)과 함께 苦難(고난)당하고 迫害(박해)받으며 하느님(God)의 福音(복음)을 傳(전)하고자 努力(노력)해왔다는 것이다.
玉(옥) 神父(신부)는 "大多數(대다수)가 아일랜드(Ireland)와 美國(미국) 出身(출신)인 골롬반(영어:Pelvic:프랑스어:Pelvien) 宣敎師(선교사)들은 活動(활동)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을 굳게 믿고 信者(신자)들에게 獨立(독립) 精神(정신)을 일깨워 주는 데 努力(노력)했다"면서 "골롬반(영어:Pelvic:프랑스어:Pelvien) 宣敎師(선교사)들은 歷史(역사)의 桎梏(질곡) 속에서 自身(자신)들이 할 수 있는 最先(최선)을 다했을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時代的(시대적) 適應(적응)을 위해 새로운 變化(변화)를 試圖(시도)하고 있다"고 評價(평가)했다. 廉洙政(염수정) 主敎(주교)가 20일 韓國敎會史硏究所(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심포지엄(symposium)에서 기조 강연 [基調講演]을 하였다.
미로 [迷路]:어지럽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섞갈리기 쉬운 길)에 갇힌 ‘外奎章閣(외규장각) 圖書(도서)
’프랑스(France)戰略(전략)에 말려 返還(반환) 協商(협상) 제자리… 丙寅洋擾(병인양요) 再照明(재조명)은 또다른 늪 될 수도(寫眞(사진)/프랑스군
(French army)은 '江華島(강화도) 宮殿(궁전)'을 占領(점령)해 古文書(고문서)를 掠奪(약탈)한 뒤 外奎章閣(외규장각)을 불질렀다.
外奎章閣(외규장각) 復元圖(복원도)
韓國(한국)과 프랑스(France) 사이의 外奎章閣(외규장각) 古文書(고문서) 返還(반환) 協商(협상)에서 韓國(한국)쪽이 프랑스(France)의 노회(鹵獲)한 協商(협상)戰略(전략)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
지난 4월29∼30일 이틀 동안 이 問題(문제)를 두고 韓國(한국)쪽 代表(대표)인 한상진 韓國精神文化硏究院(한국정신문화연구원) 院長(원장)과 프랑스(France)쪽 代表(대표)인 자크 살루아(Jacques Salua) 프랑스(France) 監査院(감사원) 最古(최고)委員(위원)의 代表會談(대표회담)이 열렸으나, 古文書(고문서) 返還(반환)과 關聯(관련)한 實質的(실질적)인 進展(진전)은 없었다. 唯一(유일)하게 合議(합의)한 內容(내용)은 이 問題(문제)를 낳은 1866년의 丙寅洋擾(병인양요)를 再照明(재조명)하기 위해 “두 나라 歷史學者(역사학자)와 宗敎人(종교인)들이 參加(참가)하는 共同(공동)硏究(연구)팀을 오는 5월 말까지 構成(구성)한다”는 것이다. 共同(공동)硏究(연구)팀은 두 나라를 오가며 學術(학술) 세미나(seminar) 等(등)의 形態(형태)로 丙寅洋擾(병인양요)에 관한 硏究論文(연구논문)을 發表(발표)할 計劃(계획)이다.
뚜렷한 成果(성과) 없이 共同硏究(공동연구)팀 構成(구성)만 合議(합의)
(寫眞(사진)/返還(반환)의 始作(시작)은 이루어졌지만…. 미테랑(Mitterang) 前(전) 프랑스(France) 大統領(대통령)이 93년 9월 掠奪(약탈) 古文書(고문서) 가운데 하나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1863년 양주(楊州) 순강원(順康園) 우강(右岡)에 있던 현목수빈묘(顯穆綏嬪墓)인 휘경원(徽慶園)을 양주(楊州) 달마동(達摩洞)으로 하기 옮기기(遷奉:천봉) 위해 묘자리(園所:원소)를 준비한 過程(과정)을 記錄(기록)한 冊(책)으로, 丙寅洋擾(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 군(French army)에 의해 掠奪(약탈)되어 프랑스(France) 國立圖書館(국립도서관)에 所藏(소장)되어 오다가 1993년 9월 14일 프랑수아 미테랑(프랑스어:François Mitterrand) 프랑스(France) 大統領(대통령)의 訪韓(방한) 과 같은 날 實施(실시)된 頂上會談(정상회담) 및 9월 16일 出國(출국) 時點(시점)에 맞춰 9월 15일 저녁 靑瓦臺(청와대)에서 김영삼(金泳三 )前(전) 大統領(대통령)에게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1822년(순조 22) 12월부터 1823년 2월까지 정조(正祖)의 嬪(빈)인 수빈(綵嬪) 朴氏(박씨)=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년 음력 5월 8일 ~ 1823년 2월 5일(1822년 陰曆(음력) 12월 26일)는 朝鮮(조선)의 第(제)22代(대) 王(왕) 正祖(정조)의 네 번째 後宮(후궁)이자 마지막 揀擇(간택)後宮(후궁)이고, 第(제)23代(대) 王(왕) 純祖(순조)의 生母(생모)이다. 三揀擇(삼간택)을 거쳐 入宮(입궁)하고 嬪(빈)으로 冊封(책봉)된 뒤에 嘉禮(가례)를 行(행)하였다. 元子(원자)(純祖(순조))를 낳은 後(후)에도 王妃(왕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愼重(신중)히 섬기고 같은 班列(반열)을 더욱 溫化(온화)하게 대하니, 宮中(궁중)에서 모두 어질다고 稱頌(칭송)하였다. 正祖(정조) 死後(사후)에 宮中(궁중) 어른인 大王大妃(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金氏(김씨)와 惠慶宮(혜경궁) 洪氏(홍씨)와 王大妃(왕대비) 효의왕후(孝懿王后) 金氏(김씨)에게 하루 세 차례 問安(문안) 드렸고, 아랫사람을 仁慈(인자)하면서도 威嚴(위엄) 있게 이끌었고, 服飾(복식)과 기용(器用, 그릇)은 珍貴(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平常時(평상시)에 말이 적었다고 한다. 本貫(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770~1822)의 묘소인 휘경원(徽慶園)을 造成(조성)한 事實(사실)에 관해 記錄(기록)한 冊(책)이다. 綏嬪(수빈) 朴氏(박씨)의 本貫(본관)은 潘南(반남)이고, 박준원(朴準源)의 딸이며, 순조(純祖)의 親母(친모)이다. 1787년(正祖(정조) 11년)에 正祖(정조)의 嬪(빈)이 되어 純祖(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시호(諡號)는 현목(顯穆), 원호(園號)는 휘경(徽慶),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이다. 朝鮮時代(조선시대) 예장(禮狀)의 節次(절차)는 상당히 복잡하고 多樣(다양)한 儀禮(의례)가 있었기 때문에, 장례도감(葬禮都監)과 함께 빈궁혼궁도감(殯宮魂宮都監), 원소도감(園所都監) 等(등)을 設置(설치)하여 關聯(관련) 節次(절차)를 擔當(담당)하고 서로 協助(협조)하도록 하였다. 本(본) 儀軌(의궤)는 1822年(년)綏嬪(수빈)의 원소(園所) 造成(조성)을 擔當(담당)한 원소도감(園所都監)에서 編纂(편찬)하였다. 園所(원소) 造成(조성)의 節次(절차) 및 工役(공역)에 대해서 상세히 記錄(기록)하여 그 課程(과정)을 자세히 把握(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費用(비용)의 調達(조달) 方法(방법) 및 使用(사용) 內譯(내역), 圖鑑(도감) 內(내) 各(각) 房(방)의 擔當(담당) 業務(업무), 各(각) 官廳(관청) 間(간)의 協助(협조) 課程(과정), 使用(사용)된 物品(물품)의 種類(종류) 및 數量(수량), 製作(제작)을 擔當(담당)한 匠人(장인)들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整理(정리)되어 있어 當時(당시)의 社會相(사회상)을 把握(파악)하기 위해 必要(필요)한 많은 情報(정보)를 얻을 수 있다.
(1863년 양주(楊州) 순강원(順康園) 우강(右岡)에 있던 현목수빈묘(顯穆綏嬪墓)인 휘경원(徽慶園)을 양주(楊州) 달마동(達摩洞)으로 하기 옮기기(遷奉:천봉) 위해 墓(묘)자리(園所:원소)를 準備(준비)한 過程(과정)을 記錄(기록)한 冊(책)으로, 丙寅洋擾(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 군(French army)에 의해 掠奪(약탈)되어 프랑스(France) 國立圖書館(국립도서관)에 所藏(소장)되어 오다가 1993년 9월 14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어:François Mitterrand)프랑스(France) 大統領(대통령)의 訪韓(방한)과 같은 날 實施(실시)된 頂上會談(정상회담) 및 9월 16일 出國(출국) 時點(시점)에 맞춰 9월 15일 저녁 靑瓦臺(청와대)에서 金泳三(김영삼) 前(전) 大統領(대통령)에게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상권(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上卷」을 直接(직접) 傳達(전달)되었다. 이로 인해 現在(현재) 大韓民國(대한민국) 高速鐵道(고속철도)에서 運行(운행)되고 있는 列車(열차)가 프랑스(France)에서 製作(제작)한 TGV로 결정되었다.)-上卷(상권)」을 直接(직접) 傳達(전달)되었다. 이로 因(인)해 現在(현재) 大韓民國(대한민국) 高速鐵道(고속철도)에서 運行(운행)되고 있는 列車(열차)가 프랑스(France)에서 製作(제작)한 TGV로 決定(결정)되었다. > 상책 1券(권)을 金泳三(김영삼) 前(전) 大統領(대통령)에게 넘겼다.)
한 院長(원장)은 “프랑스(France)에서 一般(일반) 國民(국민)은 勿論(물론) 圖書館(도서관)·博物館(박물관)의 큐레이터(Curator:관리자) 等(등) 文化財(문화재) 關聯(관련) 專門家(전문가)들조차 ‘丙寅洋擾(병인양요)’와 ‘外奎章閣(외규장각) 古文書(고문서)’의 性格(성격)을 잘 모르고 있으므로 共同(공동)硏究(연구)팀의 活動(활동)을 通(통)해 兩國(양국) 國民(국민)과 文化財(문화재) 專門家(전문가)들 사이에 意見(의견)의 接近(접근)을 보는 일이 必要(필요)하다”는 論理(논리)로 共同硏究(공동연구)팀 構成(구성) 合議(합의)의 背景(배경)을 說明(설명)했다.
지난 93년 미테랑(Mitterang)前(전) 프랑스(France) 大統領(대통령)이 金泳三(김영삼) 前(전) 大統領(대통령)에게 外奎章閣(외규장각) 古文書(고문서)의 返還(반환)을 約束(약속)했을 때, 가장 크게 反撥(반발)한 것은 프랑스(France) 圖書館(도서관)·博物館(박물관)의 큐레이터(영어:Curator:프랑스어:Conservateur:管理者(관리자)들이었다.
이들의 論理(논리)는 “어떤 理由(이유)로든 文化財(문화재)의 運命(운명)에 관한 決定(결정)이 政治的(정치적) 動機(동기)에서 내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 院長(원장)은 “共同(공동)硏究(연구)팀의 活動(활동)을 通(통)해 두 나라의 國民(국민)과 文化財(문화재) 專門家(전문가)들에게 丙寅洋擾(병인양요) 當時(당시)의 古文書(고문서) 掠奪(약탈)行爲(행위)가 不當(부당)한 것이었음을 注視(주시)시킴으로써 古文書(고문서) 返還(반환)에 有利(유리)한 條件(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期待感(기대감)을 표했다.
그러나 많은 韓國(한국)쪽 專門家(전문가)들은 韓國(한국)쪽이 매우 순진한 姿勢(자세)로 協商(협상)에 任(임)함으로써 노회한(Presbytery:長老會(장로회) 프랑스(France)의 協商(협상)戰略(전략)에 말려들고 있다는 診斷(진단)을 내놓고 있다.
먼저 古文書(고문서) 返還(반환) 協商(협상)에 임하는 프랑스(France)의 基本(기본) 態度(태도)는 △過去(과거) 프랑스(France)의 帝國主義的(제국주의적) 掠奪(약탈)行爲(행위)를 否認(부인)하는 것과 △掠奪(약탈) 文化財(문화재) 返還(반환)의 前例(전례)를 남기지 않는 것 두 가지다. 두 原則(원칙)은 서로 맞물려 있다.
最近(최근) 유네스코(UNESCO)를 中心(중심)으로 戰爭(전쟁)과 侵掠(침략)을 通(통)해 掠奪(약탈)한 文化財(문화재)를 本國(본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으므로, 프랑스(France)로서는 우선 1866년 朝鮮(조선) 江華島(강화도)에서 벌어진 일이 帝國主義的(제국주의적) 掠奪(약탈)行爲(행위)임을 내놓고 認定(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韓國(한국)에 外奎章閣(외규장각) 古文書(고문서)를 되돌려줄 境遇(경우), 帝國主義(제국주의) 時節(시절) 차곡차곡 모아둔 프랑스(France) 各級(각급) 博物館(박물관)의 遺物(유물) 收納(수납)倉庫(창고)가 텅 비어버릴 憂慮(우려)도 있다.
國家間(국가간) 文化財(문화재) 返還(반환) 問題(문제)는 前例(전례)가 매우 重要(중요)하므로 返還(반환)의 前例(전례)를 남길 境遇(경우) 프랑스(France)에 文化財(문화재)를 掠奪(약탈)당한 많은 나라에서 返還(반환) 要求(요구)가 밀물처럼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France) 博物館(박물관) 全景(전경)
"프랑스(France) 博物館(박물관)이 텅 빌 수 있다"
이런 基本(기본) 態度(태도)를 바탕으로 프랑스(France)의 協商(협상)戰略(전략)을 再檢討(재검토)할 必要(필요)가 있다. 國內(국내)의 文化財(문화재) 專門家(전문가)들은 프랑스(France)쪽의 意圖(의도)가 果然(과연) “丙寅洋擾(병인양요)의 再檢討(재검토)를 通(통)해 프랑스
(France) 國民(국민)들과 專門家(전문가)들에게 프랑스(France)의 帝國主義的(제국주의적) 侵略(침략)과 文化財(문화재) 掠奪(약탈)의 不當(부당)함을 說得(설득)하고, 이런 整地作業(정지작업)을 거쳐 古文書(고문서)를 返還(반환)하려는 것이겠느냐”고 反問(반문)한다. 모래에 싹이 트기 前(전)에는 그럴 리가 없다는 게 이들의 觀測(관측)이다.
그렇다면 프랑스(France)의 協商(협상)戰略(전략)은 어떤 것일까?
專門家(전문가)들은 프랑스(France)가 丙寅洋擾(병인양요)의 再照明(재조명)을 通(통)해, “1866년 當時(당시) 프랑스군(French army)
의 江華島(강화도) 上陸(상륙)이 프랑스(France)의 責任(책임)만은 아니다”라는 主張(주장)을 펴려는 것이라고 指摘(지적)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丙寅洋擾(병인양요)는 1839년과 1866년 두 次例(차례)에 걸쳐 프랑스(France) 神父(신부) 12名(명)이 朝鮮(조선)에서 國法(국법)에 따라 處刑(처형)당한 結果(결과) 벌어진 衝突(충돌)이다.
프랑스(France) 파리(Paris) 外邦宣敎會(외방선교회) 所屬 (소속) 神父(신부)들이던 이들은 當時(당시) 朝鮮(조선)의 國法(국법)을 어기고 朝鮮(조선)에 潛入(잠입)해 活動(활동)한 結果(결과) 處刑(처형)당했지만, 프랑스쪽(France)은 朝鮮(조선)의 非友好的(비우호적) 行動(행동)이 結局(결국) 丙寅洋擾(병인양요)를 낳은 것이라는 論理(논리)를 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프랑스(France)쪽에 따르면 韓國(한국)은 이미 이들 파리(Paris)外邦宣敎會(외방선교회) 所屬(소속) 神父(신부)들의 行動(행동)이 正當(정당)하며, 이들에 대한 處刑(처형)은 不當(부당)한 것이었음을 認定(인정)한 셈이다.
丙寅洋擾(병인양요)를 觸發(촉발)시킨 프랑스(France) 神父(신부)들의 直系(직계) 後輩(후배)인 파리(Paris)外邦宣敎會(외방선교회) 韓國(한국)支部(지부) 드봉(Debon) 主敎(주교)(70·幸州(행주)聖堂(성당)의 말을 잘 吟味(음미)해보자.
“當時(당시) 處刑(처형)당한 12名(명)의 프랑스(France) 神父(신부) 가운데 10名(명)이 지난 84년 韓國(한국)에서 推戴(추대)된 가톨릭(Catholic)의 聖人(성인) 103人(인) 가운데 包含(포함)됐습니다. 이들이 聖人(성인)에 包含(포함)됐다는 것은 韓國(한국)의 가톨릭 (Catholic)信徒(신도)들이 이들을 推仰(추앙)한다는 뜻이겠지요.”
드봉(Debon) 主敎(주교)는 外奎章閣(외규장각) 古文書(고문서)의 韓國(한국) 返還(반환)을 主張(주장)하고 있는 고마운 프랑스(France) 人(인)이다. 그의 論理(논리)는 純粹(순수)한 宗敎的(종교적) 論理(논리)이므로 그를 非難(비난)할 必要(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의 論理(논리)를 擴大解釋(확대해석)하면 問題(문제)는 單純(단순)하지 않게 변한다.
1866년 當時(당시) 處斷(처단)당한 프랑스(France) 神父(신부)를 韓國(한국) 敎區(교구)가 聖人(성인)으로 推戴(추대)했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朝鮮(조선)의 國法(국법)을 어겼을지라도 宣敎(선교)를 위한 行動(행동)이었으므로 正當化(정당화)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의 處刑(처형)은 宗敎(종교)의 自由(자유)를 侵害(침해)한 行動(행동)으로 不當(부당)한 일이라는 論理(논리)가 成立(성립)한다.
丙寅洋擾(병인양요)
丙寅洋擾(병인양요)는 1866년(高宗(고종) 3年(년)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의 天主敎(천주교) 彈壓(탄압)에 대한 報復(보복)으로 프랑스군(영어:French army)이 江華島(강화도)에 侵入(침입)한 事件(사건).
“丙寅洋擾(병인양요)를 再照明(재조명)하겠다”는 프랑스(France)의 意圖(의도)는 여기서 看破(간파)할 수 있다. 共同硏究(공동연구)팀에 歷史學者(역사학자)와 더불어 宗敎人(종교인)들을 包含(포함)시킨 意圖(의도)도 여기 있다.
프랑스(France)쪽은 두 나라 同數(동수)의 學者(학자)·宗敎人(종교인)으로 構成(구성)된 共同硏究(공동연구)팀에서, 宣敎師(선교사) 處刑(처형)이라는 朝鮮(조선)의 非友好的(비우호적) 行爲(행위)로 因(인)해 丙寅洋擾(병인양요)가 일어났음을 强調(강조)함으로써 韓國(한국)쪽의 古文書(고문서) 返還(반환) 主張(주장)의 正當性(정당성)을 稀釋(희석) 削減(삭감)하려는 戰略(전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쪽 協商(협상)戰略(전략)은 도대체 뭔가 ?
따라서 專門家(전문가)들은 韓國(한국)쪽이 ‘丙寅洋擾(병인양요)에 대한 歷史的(역사적) 照明(조명)’과 같은, 結論(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늪으로 빨려들어가지 말고, 現在(현재) 問題(문제)가 되고 있는 外奎章閣(외규장각) 古文書(고문서)가 어떤 涇渭(경위)로 朝鮮(조선)의 江華島(강화도)에서 프랑스(France) 파리(Paris) 國立圖書館(국립도서관)으로 移動(이동)했는지에 明快(명쾌)하게 포커스(focus)를 맞춰야 한다고 指摘(지적)한다.
더 根本的(근본적)으로는, “지난 93년 미테랑(Mitterang) 當時(당시) 프랑스(France) 大統領(대통령)이 테제베(Thezebe)高速電鐵(고속전철) 契約(계약)을 앞두고 外奎章閣(외규장각) 古文書(고문서)의 返還(반환)을 約束(약속)했음에도 이를 어겼으므로 그 後屬(후속)조처를 要求(요구)하는 데서 論議(논의)를 出發(출발)해야 한다”는 指摘(지적)도 나오고 있다.
프랑스(France)쪽은 自國(자국)의 文化財(문화재) 關聯(관련)法上(법상) 所藏(소장) 文化財(문화재)의 返還(반환)이 法的(법적)으로 不可能(불가능)하며, 미테랑(Mitterang[프랑수아 모리스 아드리앵 마리 미테랑(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文化語: 프랑쑤아 미떼랑, 1916년 10월 26일 ~ 1996년 1월 8일)는 프랑스 공화국의 제21대 大統領(대통령)이다. 프랑스 大統領(대통령)들 중 제일 오래 집권하였다. 前後(전후)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France) 社會黨(사회당)(제2대 당의장, 재임 1971년 ~ 1981년)과 범진보주의진영을 이끈 지도자이자, 자당 소속의 첫 번째 프랑스(France) 大統領(대통령)이다.
外交的(외교적)으로는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와 헬무트 콜(Helmut Cole) 獨逸(독일) 總理(총리)들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통해 兩國間(양국간) 和解(화해)와 繁榮(번영), 그리고 유럽통합의 초석을 닦았다.] 當時(당시) 大統領(대통령)이 이를 모르고 한 約束(약속)이라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버무려 버렸다.
그러나 自他(자타)가 公認(공인)하는 文化(문화) 先進國(선진국)인 프랑스(France)가 自國(자국)의 國家(국가) 元首(원수)가 行(행)한 約束(약속)을 어기면서 鄭重(정중)한 謝過(사과)나 適切(적절)한 後屬(후속)조처 없이 얼버무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指摘(지적)이 높다.
이에 대한 適切(적절)한 對應(대응)없이 焦點(초점)을 흐리게 하기 위한 共同(공동)硏究(연구)팀 構成(구성)에 同意(동의)한 韓國(한국)쪽의 協商(협상)戰略(전략)은 대체 뭐냐는 批判(비판)도 나오고 있다.
(李寶娥 /Lee Boa)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 Kyung Hee University)李寶娥(이보아:/Lee Boa) 慶熙大學校(경희대학교:Kyung Hee University) 敎授(교수)(36·藝術行政學(예술행정학)는 “프랑스(France)와의 古文書(고문서) 返還(반환) 協商(협상)은 앞으로 海外(해외)에 散在(산재)해 있는 우리 文化財(문화재)의 返還(반환) 協商(협상)에 重大(중대)한 影響(영향)을 미칠 先例(선례)가 된다는 點(점)에서 愼重(신중)해야 한다”며, “프랑스(France)쪽의 國家的(국가적) 威信(위신) 損傷(손상)을 피하면서 專門家(전문가)들 사이에서 非政治的(비정치적)으로 合議(합의)에 이르는 方式(방식)이 現實的(현실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라고 指摘(지적)했다.
[修道院(수도원) 片紙(편지)] 敎皇(교황)과 韓國(한국) 敎會(교회)
金(김)안나(Anna) 修女(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韓國殉敎福者修女會)Los Angeles
韓國殉敎者靈性(韓國(한국)殉敎者(순교자)영성(靈性, Spirituality)센터(center) 요한 바오로(John Paul) 2世(세) 敎皇(교황)님께서 逝去(서거)하신지도 벌써 2年(년)이 흘렀다. 그러나 2005년 4월 8일 새벽1시부터 3시간에 걸쳐 莊嚴(장엄)하게 擧行(거행)됐던 그 분의 葬禮(장례)미사(mass)를 잊을 수가 없다.
聖(성) 베드로(Peter)廣場(광장)에서 擧行(거행)되는 葬禮(장례) 미사(mass)에 TV를 通(통)해 同參(동참)하면서 그 분의 주검을 모신 棺(관)을 中心(중심)으로 全(전) 世界(세계) 信者(신자)들을 하나로 모인 것을 보며 죽음 앞의 슬픔과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하느님(God) 안에 온 世上(세상)이 하나된 것 같은 歡喜(환희)를 맛보았었다.
敎皇(교황) 요한 바오(John Paul)로 2世(세)의 죽음은 聖人(성인)의 죽음 즉 하느님(God)과 매순간 완전한 一致(일치)를 이루며 自身(자신)의 부르심에 忠實(충실)히 應答(응답)하며 산 사람으로서의 祝福(축복)된 마지막 生(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느님(God)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느끼도록 하셨다.
生前(생전)에도 世界(세계) 곳곳을 몸소 찾아다니시면서 平和(평화)의 使徒(사도)로서 모든 이들의 親近(친근)한 벗이 되어 주셨던 그 분.
特別(특별)히 우리에게는 1984년 汝矣島(여의도)에서 韓國(한국)의 殉敎(순교) 聖人(성인)들의 諡聖式(시성식)을 擧行(거행)하시며 韓國(한국) 敎會(교회)가 宣敎師(선교사)의 도움 없이 學者(학자)들을 通(통)하여 特別(특별)한 方法(방법)으로 福音(복음)이 傳(전)해진 事實(사실) 殉敎者(순교자)들이 北京(북경)에 있는 主敎(주교)님과 로마(Rome)의 敎皇(교황)님과의 緊密(긴밀)한 一致(일치)를 찾았으며 司祭(사제)들을 보내 달라고 懇請(간청)함으로써 宣敎師(선교사)들을 맞이했다는 事實(사실)들을 想起(상기)시켜 주신 분이다.
200년 全(전) 韓國(한국)의 天主敎(천주교) 信者(신자)들은 敎皇(교황)님의 姓銜(성함)이 무엇인지도 몰랐었지만 그 분이 聖敎會(성교회)의 으뜸이시며 全(전) 敎會(교회)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고 그분께서 自身(자신)들이 當(당)하고 있는 불쌍한 處地(처지)를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 믿었다. 그랬기에 敎皇(교황)님께 自身(자신)들의 懇切(간절)한 所望(소망)을 片紙(편지)에 담아 삼엄한 國境(국경) 守備隊(수비대)를 뚫고 傳達(전달)하고자 온 힘을 다해 努力(노력)했다.
그 첫번째 편지는 1811년 이여진 요한(John)이 密使(밀사)로 派遣(파견)돼 北京(북경)의 主敎(주교)님과 로마(Rome)의 敎皇(교황)님께 드렸던 것으로 그간 朝鮮(조선) 敎會(교회)의 商況(상황)과 殉敎者(순교자)들의 行蹟(행적) 朝鮮(조선) 敎會(교회)에 聖職者(성직자)들을 보내 주십사하는 懇請(간청)이 들어있다.
1801年(년) 辛酉(신유)迫害(박해)로 因(인)해 周文謨(주문모) 신부님[중국어 간체자: 周文谟, 정체자: 周文謨, 병음: Zhōu Wénmó 저우원모, 1752년 ~ 1801년 5월 31일)司祭(사제)는 朝鮮(조선)에서 殉敎(순교)한 中國(중국)인 로마(Rome) 가톨릭교회(Catholic) 司祭(사제)이다. 韓國(한국) 敎會(교회) 歷史(역사)에서 朝鮮(조선)에 入國(입국)한 最初(최초)의 外國人(외국인) 基督敎(기독교) 宣敎師(선교사)이자, 로마(Rome) 가톨릭교회(Cathol 司祭(사제)이다. 洗禮名(세례명)은 야고보(James), 포르투갈어(Portuguese) 이름은 벨로조(Vellozo)이다.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는 朝鮮(조선)에서 6年間(년간) 活動(활동)했다.]과 敎友(교우)들이 殉敎(순교)하거나 流配(유배)를 당하고 살아남은 敎友(교우)들을 山間僻地(산간벽지)로 흩어진 後(후) 몇몇 敎友(교우)들이 흩어진 敎友(교우)들을 다시 모아 敎會(교회)의 再建(재건)을 위하여 10年間(년간)이나 피땀흘리며 努力(노력)하던 時期(시기)였다.
1825년 두 번째 편지는 암브로시오(Ambrosio)와 同僚(동료) 敎友(교우)들의 이름으로 정하상(丁夏祥) (Paul)와 劉進吉(유진길) 아우구스티노(Augustino) 等(등)이 北京(북경)을 通(통)하여 傳達(전달)한 것이다.
이 편지 亦是(역시) 敎皇(교황)님께 朝鮮(조선) 敎友(교우)들의 딱한 事情(사정)을 버려두지 마시고 하루 빨리 미사(mass)聖祭(성제)와 聖事(성사)生活(생활)을 할 수 있도록 司祭(사제)들을 보내주실 것과 宗敎(종교)의 自由(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敎皇(교황)님께서 힘써 주실 것을 懇曲(간곡)히 付託(부탁)하는 內容(내용)이었다.
이들 두 편지는 모두 포르투칼어(Portuguese)나 라틴어(Latin)로 飜譯(번역)되어 敎皇廳(교황청)에 보내졌고 지금도 敎皇廳(교황청) 古文書庫(고문서고)에 保管(보관)되어 있어 初期(초기) 韓國(한국) 天主敎會(천주교회)의 貴中(귀중)한 資料(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두 번째 편지는 朝鮮敎區(조선교구) 設定(설정)에 決定的(결정적) 役割(역할)을 했는데 이를 받아 보신 當時(당시)의 그레고리오(Gregorio) 16世(세) 敎皇(교황)님께서는 朝鮮(조선) 敎會(교회)의 敎友(교우)들을 돌보도록 파리(Paris)外邦(외방) 宣敎會(선교회)에 要請(요청)하였고,宣敎師(선교사)부뤼기에르(프랑스어:Bruegyer) 神父(신부)를 朝鮮(조선)의 初代(초대) 敎區長(교구장)으로 任命(임명)하셨다.
只今(지금)도 하늘에서 하느님(God)께 우리를 위하여 轉求(전구)를 청해주시는 요한 바오로(John Paul) 2世(세)의 聖德(성덕)을 기리며 그 분의 諡聖(시성)을 기다려 본다. 그 분 께서는 우리를 향해 '先祖(선조)들의 殉敎(순교)精神(정신)을 본받아 試鍊(시련)의 克服(극복)과 끊임없는 祈禱(기도)와 努力(노력)을 바치라'며 당신의 마지막 모습처럼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과 讚歎(찬탄)을 膳賜(선사)하는 죽음을 準備(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聖人名(성인명) : 金大建(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祝日(축일) : 7月(월) 5日(일)
聖人(성인) 區分(구분) : 聖人(성인)
身分(신분) : 神父(신부), 殉敎者(순교자)
活動(활동)地域(지역) : 韓國(한국:Korea)
活動(활동)年度(연도) : 1821-1846년
같은 이름 : 김 안드레아(Andrea Kim), 김안드레아(Andrea Kim), 안드레아(Andrea), 안드레아스(Andreas), 앙드레(Andre), 앤드루(Andrew), 앤드류(Andrew) 聖(성) 金大
建(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忠南(충남) 唐津郡(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당진 솔뫼마을 金大建(김대건)神父(신부) 유적(唐津 솔뫼마을 金大建神父 遺蹟)은 忠淸南道(충청남도) 唐津市(당진시)에 있는 韓國(한국) 最初(최초)의 司祭(사제)인 金
大建(김대건)神父(신부)1821~1846년)를 비롯하여 金大建(김대건)神父(신부)의 曾祖(증조)할아버지(김진후(金震厚), 작은할아버지(김종한
(金宗漢:Andrew), 아버지(김제준(金濟俊) 等(등) 4代(대)에 걸친 殉敎者(순교자)가 살았던 곳이다.
1998년 7월 28일 忠淸南道(충청남도)의 記念物(기념물) 第(제)146號(호) 金大建(김대건)神父(신부)生家地(址)로 指定(지정)되었다가, 2014년 9월 26일 大韓民國(대한민국)의 事跡(사적) 第(제)529號(호)로 昇格(승격)되었다.]에서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Inyashio)와 어머니 高(고) 우르술라사(Ursula)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舊敎(구교) 집안이다. 金大建(김대건)의 曾祖父(증조부) 김진후(金震厚) 비오(Pius)와 아버지는 殉敎(순교)로써 信仰(신앙)을 證據(증거)한 殉敎者(순교자)다.
信仰(신앙) 깊은 殉敎者(순교자)의 집안에서 成長(성장)한 金大建(김대건)은 굳센 氣質(기질)과 열심한 信德(신덕)으로 忠實(충실)히 生活(생활)하던 中(중), 16歲(세) 때인 1836年(년)에 모방:프랑스어:copie) 神父(신부)에 의해 최양업(崔良業) 토마스(Thomas)와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와 함께 마카오(Macau:간체:澳门:번체:澳門)로 留學(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不幸(불행)하게도 崔(최) 프란치스코(Francis)는 病死(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神學生(신학생)만이 훌륭히 學業(학업)과 聖德(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歲(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Paris) 外邦宣敎會(외방선교회)가 朝鮮(조선) 敎區(교구)를 擔當(담당)하여 主敎(주교)와 神父(신부)를 朝鮮(조선)에 入國(입국)시켜 傳敎(전교)하고 있는 中(중)이었으나, 朝鮮(조선)이 外國(외국)과 修好條約(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宗敎自由(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France) 루이 필립 (프랑스어:Louis Phillip)王(왕)이 派遣(파견)한 艦隊(함대)의 세실(프랑스어:Cecil)提督(제독)이 그 計劃(계획)을 實行(실행)하겠다고 나섰다.
金大建(김대건)은 세실(프랑스어:Cecil)提督(제독)의 通譯官(통역관)이 되어 朝鮮(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프랑스어:Mestre Lee) 神父(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프랑스어:Lac Erigon)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프랑스어:Cecil) 提督(제독)이 갑자기 朝鮮(조선) 航海(항해)를 中止(중지)하게 되어 金大建(김대건)은 혼자 陸路(육로)로 本國(본국)에 들어갈 計劃(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朝鮮(조선) 使節團(사절단)의 一員(일원)인 金(김) 프란치스코(Francis)를 만나 本國(본국) 消息(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聖職者(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殉敎(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入國(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義州(의주) 변문을 거쳐 入國(입국)하였으나 中途(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危險(위험)이 생겨 다시 國境(국경)을 넘어 中國(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後(후) 金大建(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프랑스어:Mestre) 神父(신부)로부터 神學(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프랑스어:Ferréol) 高(고) 主敎(주교)로부터 副祭品(부제품)을 받고, 다시 入國(입국)을 試圖(시도)하여 高(고) 主敎(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金(김) 副祭(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Seoul:漢陽(한양)에 到着(도착)하였다.
1845년 4월 主敎(주교)와 神父(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上海(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上海(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프랑스어:Ferréol) 高(고) 主敎(주교) 執典(집전)으로 神品(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小神學校(소신학교)에서 첫 미사(mass)를 드림으로써 朝鮮敎會(조선교회)의 첫 司祭(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페레올(프랑스어:Ferréol)高(고) 主敎(주교)와 다블뤼(프랑스어:Dablo) 安(안) 神父(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프랑스어:Raphael Hora) 명명한 작은 木船(목선)을 타고 上海(상해)를 出發(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忠淸道(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敎友村(교우촌)에 上陸(상륙)하였다.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는 宣敎(선교)活動(활동)에 힘쓰는 한편 滿洲(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이(프랑스어:Mestrei) 神父(신부)를 入國(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義州(의주) 方面(방면)의 警備(경비)가 嚴(엄)해서 페레올(프랑스어:Ferréol)高(고) 主敎(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指示(지시)함으로, 白翎島(백령도) 附近(부근)으로 갔다가 巡威島(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逮捕(체포)되었다.
逮捕(체포)된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가 黃海(황해) 監司(감사) 김정집(金鼎集)의 審問(심문)에서 自身(자신)은 朝鮮(조선)에서 出生(출생)하여 마카오(Macau)에서 工夫(공부)했음을 토로하자 黃海道(황해도) 監司(감사)는 王(왕)에게 이 事實(사실)을 報告(보고)하였다.
그리하여 朝廷(조정)에서는 이 事件(사건)의 重大性(중대성)을 認識(인식)하여 衆臣(중신)會議(회의)를 열고 서울(Seoul:漢陽(한양) 捕廳(포청)으로 押送(압송)케 하였다. 一部(일부) 大臣(대신)들은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의 博學(박학)한 知識(지식)과 外國語(외국어) 實力(실력)에 歎服(탄복)하여 背敎(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意見(의견)도 있고 해서 背敎(배교)를 强要(강요)했으나, 金(김) 神父(신부)는 도리어 官吏(관리)들을 敎化(교화)시키려고 하자 邪學(사학)의 魁首(괴수)라는 罪目(죄목)을 붙여 死刑(사형)을 宣告(선고)하였다.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는 司祭(사제)生活(생활) 1년 1個月(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軍門梟首刑(군문효수형)을 받고 殉敎(순교)하였다. 이때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의 나이는 26歲(세)였다.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
서학(西學)·서교(西敎)·천주학(天主學) 등으로 불리다가 天主敎(천주교) 또는 가톨릭(Catholic)으로 定着(정착)되었다.
創設背景(창설배경)
韓國(한국)에 天主敎(천주교)가 創設(창설)된 背景(배경)으로 對外的(대외적)인 것과 對內的(대내적)인 것 2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對外的(대외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結果(결과) 宣敎師(선교사)들이 中國(중국)에 들어온 것을 契機(계기)로 朝鮮(조선)의 學者(학자)들이 天主敎(천주교)를 西學(서학)의 一部(일부)로서 접하게 되었다.
北京(북경)에 往來(왕래)하는 朝鮮(조선) 使臣(사신)들은 西洋(서양)文物(문물)에 대한 關心(관심)을 갖고 知識(지식)을 얻는 한편,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朝鮮(조선)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設〉에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h)의 〈천주실의 天主實義〉에 대해 紹介(소개)하고 있다.
1631년 진주사(陳奏使)로 베이징[北京]에 갔던 정두원(鄭斗源)과 1644년 소현세자(昭縣世子) 一行(일행)은 歸國(귀국)하면서 西洋(서양)의 科學(과학)기구와 書籍(서적)을 가져왔고, 이익(李瀷)과 그의 弟子(제자)인 안정복(安鼎福) 等(등)은 天主敎(천주교)에 대한 好意的(호의적) 態度(태도)를 갖고 學問的(학문적) 次元(차원)에서 硏究(연구)를 했다.
이리하여 이미 17世紀(세기) 初葉(초엽)부터 朝鮮(조선)의 知識人(지식인)들 특히 남인(南人) 學者(학자)들을 中心(중심)으로 天主敎(천주교)를 知識(지식)의 次元(차원)에서 探究(탐구)하게 되었다. 둘째, 對內的(대내적)으로 볼 때 朝鮮(조선) 後期(후기)에 社會(사회)變動(변동)과 文化(문화)變動(변동)이 크게 일어남으로 因(인)해 傳統的(전통적) 價値觀(가치관)에 대한 反撥(반발)과 아울러 새로운 社會(사회)를 摸索(모색)하는 雰圍氣(분위기)가 造成(조성)되고 있었다.
계속되는 飢饉(기근)과 傳染病(전염병) 등 自然(자연)災害(재해)와 勢道(세도)政治(정치)의 腐敗(부패)로 百姓(백성)들의 生活(생활)이 극히 어려워졌다. 이에 旣存(기존)의 性理學的(성리학적) 思想體系(사상체계)에 대한 反撥(반발)이 本格的(본격적)으로 提起(제기)되고 天主敎(천주교) 書籍(서적)에 대한 探究(탐구)가 活潑(활발)해져 實學(실학)運動(운동)에 刺戟(자극)을 주는 同時(동시)에 '西學(서학)'이라는 새로운 學風(학풍)을 낳게 되었다. 그結果(결과) 朝鮮(조선) 後期(후기) 社會(사회)는 自發的(자발적)으로 天主敎(천주교) 信仰(신앙)을 受容(수용)할 基盤(기반)을 마련하였다.
天主敎(천주교)에 대한 關心(관심)은 西學(서학)에 대한 關心(관심)과 硏究(연구)의 일환으로 始作(시작)되었으나, 次次(차차) 知識(지식)의 次元(차원)을 넘어 實踐(실천)의 次元(차원)으로 發展(발전)하였다. 西學(서학)을 信仰(신앙)運動(운동)으로 發展(발전)시킨 사람들은 권철신(權哲身)·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전(丁若銓) 等(등)으로 京畿道(경기도) 廣州郡(광주군)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서 敎理硏究會(교리연구회)를 갖는 等(등) 天主敎(천주교) 敎理(교리)를 硏究(연구)·實踐(실천)했다.
李檗(이벽)은 北京(북경)에 가게 된 李承薰(이승훈)에게 敎理(교리)를 배우고 洗禮(세례)를 받으라고 勸告(권고)했고, 이에 李承薰(이승훈)은 1784년 봄 韓國人(한국인) 最初(최초)로 洗禮(세례)를 받고 歸國(귀국)하여 福音(복음)을 傳播(전파)하며 李檗(이벽)·권일신(權日身)· 김범우(金範禹) 등 自身(자신)의 同僚(동료)들에게 洗禮(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함께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明洞(명동)聖堂(성당) 附近(부근)에서 宗敎(종교)集會(집회)를 열어 最初(최초)의 天主敎(천주교) 信仰(신앙)共同體(공동체)가 誕生(탄생)했으며 이것이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 敎會(교회)의 創設(창설)이다.
所聞(소문)을 듣고 走魚寺(주어사)를 거쳐서 子正(자정)넘어 뒤늦게 到着(도착)한 李檗(이벽) 聖祖(성조)님께서 儒佛仙(유불선) 講學會(강학회)에서 天學(천학)을 論證(논증)하는 想像畵(상상화)
1777년 正祖(정조) 1년 丁酉年(정유년)에 博士(박사) 權哲身(권철신)이 丁若銓(정약전)과 그 외 여러 다른 兩班[(양반-학문 硏究(연구)를 渴望(갈망)하는]들을 同伴(동반)하여 妨害(방해)를 받지 않는 고요한 山寺(산사)에서 모임을 開催(개최)하며 硏究(연구)에 沒頭(몰두) 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消息(소식)을 듣고 李檗(이벽)은 기쁨에 充滿(충만)하여 그들과 合勢(합세)할 것을 決心(결심)했다. 한 겨울 山寺(산사)는 100여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어떠한 困難(곤란)도 李檗(이벽)의 熱性(열성)을 막을수는 없었다.
그는 곧 出發(출발)하여 險路(험로)를 不辭(불사)하고 나아갔다. 얼마가지 않아서 밤이 깊었고, 더 이상 나아갈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길을 계속하여 드디어 어느 절간에 到着(도착)했다. 그러나 그 절간은 李檗(이벽)이 찾는 山寺(산사)가 아니였다.
그는 길을 잃었던 것이며 그가 찾는 山寺(산사)는 반대편에 위치한 山中(산중)에 있었고, 이 山(산)은 무척 높은 山(산)이었으며, 白雪(백설)이 뒤덮혀 있고, 수 많은 호랑이(Tiger) 들이 들끓는 山(산)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檗(이벽)은 僧(승)들을 깨워 同伴(동반)하고 猛獸(맹수)들의 攻擊(공격)에 對備(대비)하여 쇠지팡이(Iron cane)를 짚고 漆黑(칠흑)의 길을 재촉하여 마침내 그가 찾는 山寺(산사)에 到着(도착)하였다. 李檗(이벽)은 同僚(동료)들의 놀라움 속에서 즐거운 邂逅(해후)를 하였다.
광암(曠菴). 李檗公(이벽공)이 參與(참여)한 天主敎(천주교) 敎理(교리) 論證(논증)과 關聯(관련)된 天眞庵(천진암) 講學會(강학회)에 관한 記錄(기록)은 資料(자료)마다 약간의 差異(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다블뤼(Dablo)主敎(주교)의 「朝鮮(조선) 殉敎者(순교자) 備忘記(비망기)」에는 1777년 丁酉年(정유년)에 講學(강학)이 있었다고 記錄(기록)하고 있고, 丁學術(정학술)의 李檗傳(이벽전)에는 1778년 戊戌年(무술년)과 1779년 己亥年(기해년)에 講學(강학)이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丁若鏞(정약용)은 1779년 己亥年(기해년) 겨울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分明(분명)한 것은 1779년을 前後(전후)하여 曠菴(광암) 李檗(이벽)의 天主敎(천주교) 敎理(교리) 論證(논증) 講學(강학)이 眞正(진정)한 意味(의미)의 朝鮮(조선)天主敎會(천주교회) 歷史(역사)의 始作(시작)이라는 事實(사실)이니, 이는 第(제)5代(대) 朝鮮(조선)敎區長(교구장)이던 다블뤼(Dablo) 主敎(주교)가 그의 著書(저서)에서 眞率(진솔)하게 論破(논파)하였고,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도 「朝鮮(조선)天主敎會(천주교회) 略史(약사)」에서 李檗(이벽)博士(박사)의 偉大(위대)한 講學(강학)을 韓國(한국) 天主敎會(천주교회)의 自發的(자발적)인 敎會(교회)創立(창립)의 出發(출발)로 적고 있다.
天眞庵(천진암) 講學會(강학회)를 通(통)하여 鹿庵(녹암)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께서 李檗(이벽) 聖祖(성조)로부터 天主敎(천주교)에 관한 論證(논증)을 듣고 알고 믿음을 가졌다하더라도 그것과, 이를 즉시 實踐(실천)하는 問題(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講學會(강학회) 當時(당시) 年齡(연령)을 보면 鹿庵(녹암) 權哲身(권철신) 43歲(세), 曠菴(광암) 李檗(이벽) 25歲(세), 李承薰(이승훈) 23歲(세), 丁若銓(정약전) 21歲(세), 丁若鍾(정약종) 19歲(세), 丁若鏞(정약용) 17歲(세), 等(등)이었는데,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께서는 이들 젊은이들과 달리 그리 自由(자유)로운 處地(처지)가 아니었으니, 이미 저명한 大學者(대학자)의 位置(위치)에 있는 兩班(양반)大家(대가)의 맏아들이었으므로 儒敎(유교)의 관례상 祖上(조상) 祭祀(제사)를 비롯한 각가지 문제 때문에 天主敎(천주교) 信仰(신앙)을 實踐(실천)하는 것은, 躊躇(주저)했다기보다도, 現實的(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784년 가을, 曠菴(광암) 李檗(이벽)聖祖(성조)께서 말을 타고 楊根(양근)에 와서 鹿庵(녹암) 公(공)을 入敎(입교)시키고자 10여일간을 머물면서 討論(토론)을 겸한 傳道(전도)活動(활동)을 하였을 때 마침내 同生(동생) 權日身(권일신) 聖賢(성현)의 뒤를 따라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도 天主敎(천주교)에 入敎(입교)하게 되었다.
入敎(입교)하기 前(전)에는 망설였지만, 入敎(입교)한 後(후)부터는 온 家族(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入敎(입교)시키기 위하여 努力(노력)하였고, 그가 이미 누리고 있던 信望(신망)은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鹿庵(녹암) 先生(선생)님 兄弟(형제)분들이 믿는 宗敎(종교)라면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할 宗敎(종교)"로 確信(확신)하게 함으로써 曠菴(광암) 李檗(이벽)聖祖(성조)의 選擇(선택)과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은 직접 나서서 傳道(전도)活動(활동)을 하지는 않았고, 天主敎會(천주교회)의 運營(운영)에도 결코 直接(직접) 關與(관여)하지 않으면서, 道(도)를 닦는 高僧(고승)들처럼 초연하게 祈禱(기도)와 참선을 즐기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親切(친절)하고 寬待(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나 1785년 乙巳迫害(을사박해)를 始作(시작)으로 權氏(권씨) 家門(가문)은 迫害(박해) 勢力(세력)의 猜忌(시기)와 嫉妬(질투)와 憎惡(증오)의 對象(대상)이 되었다. 本來(본래)가 이름있는 집안이 天主敎(천주교)를 믿자, 남들의 非難(비난)과 迫害(박해)도 亦是(역시) 대단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1791년 辛亥年(신해년)의 珍山(진산) 事件(사건)을 契機(계기)로 일어난 辛亥迫害(신해박해)로 同生(동생) 직암 權日身(권일신) 聖賢(성현)이 모진 刑罰(형벌)과 慘酷(참혹)한 拷問(고문) 끝에 귀양 길 첫 주막 밤에 뒤따라간 刺客(자객)에 의해서 거룩히 殉敎(순교)하게 되자, 이 迫害(박해)로 全羅道(전라도)의 여러 有力(유력)한 敎友(교우)들도 殉敎(순교)하여, 天主敎會(천주교회) 指導階級(지도계급)의 損失(손실)이 컸다.
따라서 아직 남아있던 丁氏(정씨) 집안과 權哲身(권철신) 암브로시(Ambrosio) 聖賢(성현)만이 天主敎(천주교) 信仰人(신앙인)으로 存在(존재)하는 듯했었다. 이런 位置(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聖賢(성현)은 直接的(직접적)인 布敎(포교)에는 關與(관여)하지 않았고, 學問(학문)과 祈禱(기도)를 通(통)하여 天主敎(천주교)의 信仰生活(신앙생활)을 열심히 實踐(실천)하였다. 迫害者(박해자)들은 그런 鹿庵(녹암) 公(공)을 怨讐(원수)같이 여기고 猜忌(시기)하는 者(자)들의 미움과 怨望(원망)은 점점 더 심해갔다.
己未年(기미년)(1799), 迫害者(박해자)들은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謀陷(모함)하는 告發(고발)을 하였다. 權氏(권씨) 집안의 子弟(자제)들도 亦是(역시) 이에 맞서 對抗(대항)하여, 일이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地方郡守(지방군수)가 賢明(현명)하게 調整(조정)하고 正當(정당)하게 밝혀내어, 迫害者(박해자)들의 謀陷(모함)은 成功(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迫害者(박해자)들의 奸巧(간교)한 計劃(계획)은 서울(서울:漢陽(한양)에 있는 反對勢力(반대세력)과 結託(결탁)하여 더욱 祕密(비밀)리에 進行(진행)되었다. 그해 여름, 大司諫(대사간) 申獻朝(신헌조)가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과 丁若鍾(정약종) 聖賢(성현)을 天主敎人(천주교인)들의 頭目(두목)이라 하여 正祖王(정조왕)에게 上疏(상소)하였다.
그러나 王(왕)은 上疏(상소)를 올린 申獻朝(신헌조)의 品階(품계)를 剝奪(박탈)하고, 天學事件(천학사건)을 擧論(거론)하는 것조차 禁(금)하였다. 迫害者(박해자)들은 다시 庚申年(경신년)(1800) 5월에 다시 王(왕)에게 上疏(상소)를 올렸는데, "楊根(양근) 고을에 邪學(사학)이 아주 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는데, 郡守(군수)는 太平(태평)으로 들어앉아 조금도 査察(사찰)하지 아니하니, 그 郡守(군수)를 懲戒(징계)해야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官(관)에서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므로 楊根(양근) 郡守(군수)를 引責(인책) 辭退(사퇴)시켰다. 새로 赴任(부임)한 郡守(군수)는 過去之事(과거지사)를 들춰내어 많은 사람들을 逮捕(체포)하였으므로, 鹿庵(녹암)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은 서울(Seoul:漢陽(한양)로 올라가, 잠시 몸을 避(피)하였다.
그러자, 官家(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代身(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罰(벌)을 自己(자기)가 代身(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請(청)했으나, 郡守(군수)는 許諾(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鹿庵公(녹암공)을 불러 가려고 하였으므로, 事件(사건)은 오래도록 結末(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다.
또한 正祖(정조)는 天主敎(천주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疑心(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그는 本來(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擴大(확대)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예컨대 中國人(중국인)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의 事件(사건)도 두 나라 사이에 關聯(관련)되었기 때문에, 萬若(만약) 일이 드러나면, 그 處理(처리)가 매우 難處(난처)하겠으므로, 1795년 乙卯年(을묘년)에 있었던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의 入國(입국)으로 因(인)해 일어났던 迫害(박해)以後(이후), 大臣(대신)들이 天主敎(천주교)를 엄중히 禁(금)하기를 많이 請(청)하였어도, 一切(일체)를 擔當(담당) 官吏(관리)에게 내맡기고 干涉(간섭)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辛亥迫害(신해박해) 等(등), 여러 迫害(박해)가 모두 隱密(은밀)한 正祖(정조)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說(설)도 없지 않으니, 짐짓 모르는 체함으로써 敎友(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몰래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를 찾아 暗暗裡(암암리)에 結末(결말)을 지어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正祖王(정조왕)은 그 計劃(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世上(세상)을 떠나 버렸다.
天主敎(천주교)를 믿던 南人(남인)學者(학자)들에게 寬厚(관후)하여, 一抹(일말)의 光明(광명)을 주었던 正祖(정조) 임금(王(왕)이 1800년에 昇遐(승하)하자, 正祖王(정조왕)에게 怨恨(원한)을 품었던 金(김) 大王大妃(대왕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와 機會(기회)를 만난 老論(노론) 僻派(벽파)의 迫害者(박해자)들은 辛酉迫害(신유박해)를 일으켜서, 암브로시오(Ambrosio) 鹿庵(녹암)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과 아우구스띠노(Augustine) 選庵(선암) 丁若鍾(정약종), 베드로(Peter) 만천(蔓川)李承薰(이승훈) 聖賢(성현) 等(등), 南人(남인) 學派(학파) 兩班(양반)들을 全部(전부) 掃蕩(소탕)하기로 作定(작정)하였다.
恒常(항상) 집에서 學問(학문)硏究(연구)와 信仰生活(신앙생활)에 全心(전심)하며, 通文(통문)과 公文(공문)으로 自己(자기)를 몹시 욕하는 것도 도무지 相關(상관)하지 않고, 의연히 祈禱(기도)生活(생활)을 하던 鹿庵(녹암) 公(공)은, 王(왕)에게 自身(자신)을 謀陷(모함)하는 나쁜 告發書(고발서)나 陳情書(진정서)가 올라가도 조금도 介意(개의)치 않았고, 迫害(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敎友(교우)들이 刑罰(형벌)에 이기지 못해 背敎(배교)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가련한 사람들, 참 哀惜(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半生(반생)의 業績(업적)을 無益(무익)하게 만들고, 苦痛(고통)으로 宜當(의당) 받게 될 榮光(영광)을 잃는도다."하면서 歎息(탄식)하였었다.
마침내 聖賢(성현)도 1801년 陰曆(음력) 2월 11일 경에 逮捕(체포)되시니, 裁判官(재판관)들 앞에 끌려나가서도 天主敎(천주교)와 그 信仰(신앙) 實踐(실천)에 관해 용감하게 辯護(변호)하였다. 刑罰(형벌)을 당하면서도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職務(직무)상 그 審問(심문)을 參觀(참관)해야 하였던, 가장 철저한 怨讐(원수) 中(중)의 한사람이 法廷(법정)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刑罰(형벌)과 審問(심문)을 당할 때에 다른 罪人(죄인)들은 몹시 唐慌(당황)하는데, 權哲身(권철신) 公(공)만은 마치 잔칫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소."
迫害者(박해자)들은 65歲(세)의 神仙(신선)과 같은 大學者(대학자)를 刑曹(형조)에서 刑罰(형벌)하면서 無慈悲(무자비)하고 殘忍(잔인)하게 慘酷(참혹)히 때려 마침내 陰曆(음력) 2월 25일 耗盡(모진) 매질아래 殉敎(순교)하시게 하니, 聖賢(성현)과 天主敎會(천주교회)에 대한 그들의 憎惡(증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權哲身(권철신) 聖賢(성현)께서는 曠菴(광암) 李檗(이벽)聖祖(성조)의 夫人(부인)이었던 柳閑堂權氏(유한당권씨) 言行實錄(언행실록)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迫害(박해)時代(시대)
1785년 봄 明禮坊(명례방) 金範禹(김범우) 집에서 가진 集會(집회)가 發覺(발각)되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다. 兩班(양반)들은 釋放(석방)되고, 中人(중인) 出身人(출신인) 金範禹(김범우)는 棍杖(곤장)을 쳐 귀양 보내졌고 귀양지에서 죽음으로써 韓國(한국) 天主敎會史(천주교회사)에 나타나는 첫 殉敎者(순교자)가 되었다.
풀려난 兩班(양반)들은 信仰生活(신앙생활)을 繼續(계속)하여 1786년에는 神父(신부)들을 選任(선임)해서 告解聖事(고해성사)도 듣고 미사(mass)도 執典(집전)하는 등 가성직(假聖職)制度(제도)를 實踐(실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敎理書(교리서)를 工夫(공부)하는 課程(과정)에서 祖上(조상)祭祀(제사)도 敎理(교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發見(발견)하고, 1789년에 北京(북경)의 主敎(주교)에게 편지로 問議(문의)한 結果(결과) 天主敎人(천주교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司祭(사제)가 없었던 初期(초기)의 우리나라 가톨릭(Catholic)敎會(교회)에서 平信徒(평신도)들이 神父(신부)를 自稱(자칭)하여 司祭(사제)의 業務(업무)를 執行(집행)하던 制度(제도)]와 祖上(조상)祭祀(제사)를 廢止(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祖上(조상)祭祀(제사)의 拒否(거부)는 傳統的(전통적) 儒敎(유교)社會(사회)에 대한 拒逆(거역)으로 認定(인정)되어 1791년 권상연(權商然)과 윤지충(尹持忠)의 殉敎(순교)를 招來(초래)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을 일으켰다(辛亥迫害(신해박해).
1794년 中國人(중국인) 주문모(周文謨) 神父(신부)가 첫 宣敎師(선교사)로 韓國(한국)에 派遣(파견)되었다. 1795년 逮捕令(체포령)이 내린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를 保護(보호)하기 위해 윤유일(尹有一)·최인길(崔仁吉)·지황(池潢) 等(등)이 殉敎(순교)했다(乙卯迫害(을묘박해).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의 入國(입국) 當時(당시) 약 4,000명에 불과하던 入敎者(입교자) 數(수)가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와 信者(신자)들의 努力(노력)으로 1800년에는 1만 名(명)으로 늘었고, 정약종(丁若鍾)은 우리말로 된 敎理書(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펴내기도 했다.
祖上(조상)祭祀(제사)를 拒否(거부)하고 旣存(기존)의 身分制(신분제)에 挑戰(도전)을 加(가)하는 天主敎(천주교)의 飛躍的(비약적) 發展(발전)은 執權(집권)兩班層(양반층)을 刺戟(자극)하여 1801년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實施(실시)되고,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敎會(교회)는 거의 廢墟化(폐허화)되었고 周文謨(주문모) 神父(신부)를 비롯한 敎會(교회) 指導者(지도자) 大部分(대부분)이 殉敎(순교)하였다.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事件(사건)도 이때 일어난 일이다. 죽음을 면한 信者(신자)들은 北京(북경) 主敎(주교)와 로마(Rome) 敎皇(교황)에게 宣敎師(선교사)의 持續的(지속적) 派遣(파견)을 呼訴(호소)하면서 敎會(교회) 再建(재건)에 힘썼다.
그結果(결과) 1831년에는 朝鮮敎區(조선교구)가 設定(설정)되었고, 朝鮮敎區(조선교구)를 委任(위임)받은 파리(Paris)
外邦(외방) 宣敎會(선교회) 所屬(소속) 宣敎師(선교사)들이 1836년부터는 朝鮮(조선)에 入國(입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39년 다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 當時(당시) 宣敎師(선교사)인 모방(프랑스어:copie)·샤스땅(프랑스어:Shastang) ·앵베르(프랑스어:Inver) 神父(신부)님 모두 犧牲(희생)되었고 敎會(교회) 指導者(지도자)들도 相當數(상당수) 殉敎(순교)했다.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韓國(한국) 最初(최초)의 神父(신부)님인 김대건(金大建) 神父(신부)와 信徒(신도) 9名(명)이 殉敎(순교)했다. 1860년에 일어난 경신박해(庚申迫害)에도 불구하고 다시 天主敎(천주교)가 盛行(성행)하자 1866년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은 大規模(대규모)의 迫害(박해)를 斷行(단행)하였고, 이 병인박해(丙寅迫害)에서 宣敎師(선교사) 9名(명)을 비롯하여 모두 8,000여 名(명)의 信者(신자)들이 殉敎(순교)하기에 이른다.
天主敎(천주교)의 成長(성장)
開港(개항) 以後(이후) 朝鮮(조선)은 歐美(구미) 列强(열강)들과의 條約(조약)을 締結(체결)하면서 激動期(격동기)를 맞이한다. 天主敎(천주교)는 이러한 激動期(격동기) 속에서 信仰(신앙)의 慈幼(자유)를 얻는다. 첫 段階(단계)는 信仰(신앙)의 自由(자유)가 묵인된 段階(단계)로서 大略(대략) 1882년부터로 推定(추정)된다.
1882년 서울(Seoul:漢陽(한양)에 한한(漢韓)學校(학교)를 세운데 이어 1885년에는 地方(지방)에도 學校(학교)를 세우고 孤兒院(고아원)·養老院(양로원)·시약소(施藥所) 等(등) 社會福祉施設(사회복지시설)도 設置(설치)하였다.
또한 이때를 前後(전후)하여 서울((Seoul:漢陽(한양)의 鍾峴(종현)(只今(지금)의 明洞(명동) 本堂(본당)을 비롯해서 여러 地域(지역)에 本堂(본당)이 建設(건설)되었다.
1886년 韓佛修好通商條約(한불수호통상조약)을 通(통)해서 宣敎師(선교사)들의 活動(활동)의 自由(자유)가 保障(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두번째 段階(단계)는 信仰(신앙)의 自由(자유)가 公認(공인)된 段階(단계)로서 1895년부터로 推定(추정)할 수 있다.
1895년 高宗(고종)은 朝鮮(조선) 敎區長(교구장) 뮈텔(프랑스어:Multel) (韓國(한국) 이름은 閔德孝(민덕효), 1854~1933) 主敎(주교)에게 丙寅迫害(병인박해) 이래 많은 天主敎人(천주교인)들이 犧牲(희생)된 일에 대한 遺憾(유감)을 表明(표명)하면서, 앞으로 敎會(교회)와 國家(국가)가 圓滿(원만)한 關係(관계)를 維持(유지)할 것을 提議(제의)했다.
같은 해 大規模(대규모)의 赦免令(사면령)을 通(통)해 1866년에 殉敎(순교)한 兩班(양반)들의 復權(복권)도 이루어졌다. 그後(후) 1899년 뮈텔(프랑스어:Multel) 主敎(주교)와 내부(內部) 地方局(지방국) 사이에 締結(체결)한 교민조약(敎民條約)은 韓國人(한국인)의 信仰(신앙)의 自由(자유)를 法律的(법률적)으로 保障(보장)했으며, 1904년 프랑스(France) 公使(공사)와 外部大臣(외부대신) 사이에 締結(체결)한 宣敎(선교)條約(조약)은 僑民(교민)條約(조약)의 內容(내용)을 더욱 補强(보강)했다.
開化期(개화기)의 天主敎(천주교)는 敎育(교육)과 言論(언론)을 通(통)해 愛國(애국)啓蒙運動(계몽운동)을 展開(전개)했다. 이러한 運動(운동)의 一環(일환)으로 1906년 京鄕新聞(경향신문)의 發刊(발간)을 들 수 있다. 敎育(교육)運動(운동)에 있어서는 初期(초기)에 初等敎育(초등교육) 分野(분야)에 置重(치중)하다가 日帝時代(일제시대)에 들어와서 中等敎育機關(중등교육기관)도 運營(운영)했다. 日帝(일제)의 侵略(침략)에 反對(반대)하며 獨立運動(독립운동)에도 參與(참여)했으나 宣敎師(선교사)들의 消極的(소극적)인 態度(태도)로 因(인)해 범교회적이지는 못했다.
日帝(일제)의 宗敎(종교) 彈壓(탄압)은 갈수록 심해져서 京鄕新聞(경향신문)이 廢刊(폐간)되고 師範敎育機關(사범교육기관)인 숭신(崇信)學校(학교)도 廢校(폐교)되었다.
그後(후) 所謂(소위) '布敎規則(포교규칙)'은 敎會(교회)가 運營(운영)하는 學校(학교)의 宗敎敎育(종교교육)까지 禁止(금지)시켰고, 1920년대에 와서는 神社參拜(신사참배)를 强要(강요)했다.
이러한 日帝(일제)의 彈壓(탄압) 아래서도 敎會(교회)는 發展(발전)을 繼續(계속)하여 敎區(교구)의 數(수)가 9改(개)로 增加(증가)했고 새로운 宣敎團體(선교단체)가 들어오기도 했다.
1942년에는 노기남(盧基南) 主敎(주교)가 서울(Seoul) 敎區長(교구장)을 맡게 되어(1902~84) 韓國人(한국인)으로는 첫 敎區長(교구장)이 되었다.
解放(해방) 後(후)의 天主敎(천주교)
8·15解放(해방)은 天主敎(천주교)의 發展(발전)에도 밝은 展望(전망)을 가져다 주었으나, 南北(남북) 分斷(분단)은 北韓(북한) 敎會(교회)의 全滅(전멸)을 招來(초래)했다.
南韓(남한)에서는 日帝時代(일제시대)에 廢刊(폐간)되었던 〈京鄕新聞(경향신문)〉·〈가톨릭Catholic靑年(청년)〉·〈京鄕雜誌(경향잡지)〉 等(등)이 續刊(속간)되고, 여러 天主敎(천주교) 敎育機關(교육기관)이 改編(개편)되고 活性化(활성화)되었다.
分斷(분단) 以後(이후) 南韓(남한)의 天主敎(천주교)는 飛躍的(비약적)인 發展(발전)을 보여 信者(신자) 數(수)가 1962년에는 약 53萬(만) 名(명)으로 增加(증가)했다.
1962년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는 敎階制度(교계제도) 면에서 宣敎(선교)地域(지역)의 敎區(교구)였던 것이 獨立(독립)된 正式(정식)敎區(교구)로 昇格(승격)되었고, 1968년에 서울(Seoul) 大敎區(대교구)의 김수환(金壽煥) 大主敎(대주교)가 樞機卿(추기경)으로 敍任(서임)됨으로써(1922~)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는 制度的(제도적)인 發展(발전)을 해나갔다.
樞機卿(추기경)의 敍任(서임)으로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는 全世界(전세계) 天主敎(천주교)의 主要(주요)問題(문제)를 決定(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 參與(참여)의 폭이 넓어졌다.
第(제)2次(차) 바티칸(Vatican) 公議會(공의회)(1962~65) 以後(이후)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는 高潮(고조)된 社會(사회)參與(참여) 意識(의식) 속에서 敎會(교회) 刷新(쇄신)運動(운동)에 힘써 1970년대에 시작된 正義具現運動(정의구현운동)이 일기도 했다.
1980年代(년대) 以後(이후)부터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의 刷新(쇄신)과 發展(발전)을 위한 努力(노력)을 繼續(계속)해왔으며, 1984년 5월에는 韓國(한국)의 殉敎者(순교자) 103人(인)이 敎皇(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Johannes Paulus)(요한 바오로John Paul) 2世(세)에 依(의)해 聖人(성인)에 오르게 되고, 1988년에는 世界聖體大會(세계성체대회)를 開催(개최)하기도 했다.
1991년 12월 31일 現在(현재) 韓國(한국) 天主敎(천주교)는 292萬(만) 名(명)의 信徒(신도)가 있고, 敎區(교구) 數(수)는 15個(개)이며, 이 中(중) 서울(Seoul)·大丘(대구)·光州(광주)는 大敎區(대교구)로 設定(설정)되어 있다.
파리(Paris)外邦宣敎會(외방선교회)
1658년에 프랑스(France) 파리(Paris)에서 敎區(교구) 司祭(사제)들이 自發的(자발적)으로 아시아(Asia)에 宣敎師(선교사)들을 派遣(파견)할 目的(목적)으로 設立(설립)한 敎會(교회) 最初(최초)의 外邦(외방) 宣敎會(선교회). 敎會廳(교회청) 布敎聖省(포교성성)에서는 파리(Paris) 外邦(외방) 宣敎會(선교회) 司祭(사제)들을 敎皇(교황) 代理(대리) 監牧(감목)들과 敎皇(교황) 派遣(파견) 宣敎師(선교사)들로 任命(임명)하여 아시아(Asia)의 布敎(포교) 活動(활동)을 맡겼다.
이에 파리(Paris) 外邦(외방) 宣敎會(선교회)는 마카오(Macau)에 極東(극동) 代表部(대표부)를 設置(설치)하여 인도[인도 공화국(힌디어: भारत गणराज्य 바라트 가느라지야, 영어: Republic of India 리퍼블릭 오브 인디아), 泰國(태국), 베트남(Vietnam), 미얀마(Myanmar), 말레이시아(Malaysia), 대만(Taiwan:台灣) 中國(중국), 滿洲(만주), 티벳(Tibet), 韓國(한국), 日本(일본) 等(등)에서 宣敎(선교) 活動(활동)을 하였다.
1978년 梨泰院 聖堂에서 司牧하던 廉洙政(염수정)神父와
廉洙政(염수정)-樞機卿(추기경)1968년_25師團(사단)_飛龍部隊(비룡부대)_勤務時(근무시)_休暇次(휴가차)_厚岩洞(후암동)聖堂(성당)에서_廉洙政(염수정)_樞機卿(추기경) 後輩(후배)와 _함께.....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 프로빈스(Province) 타우야(Taoya) 마을(Town) 酋長(추장:chief)에게 金一封(금일봉)을 傳達(전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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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수 2021-01-13 오전 2:03
좋은 자료 잘 봤습니다. 1970연대 말쯤인가 거제도 옥포에 교황님이 다녀 간 적이 있습니다.
순교자 윤봉문의 손자 윤의도가 모시고 와서, 옥포에서 많은 사람 모아 놓고 선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